7시 45분...
칼퇴근을 했는데도 놀이방에 도착해보면 벌써 이 시간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 가고, 마로 외에는 거의 없다. 가슴이 뭉클해져 와락 딸을 껴안는다. 더 자겠다는 애를 강제로 깨운 일, 기웃기웃 마냥 샛길로만 빠지려는 딸을 독하게 혼내며 잡아끌고 놀이방에 간 일 등 아침의 소동이 미안해, 마로가 하자는대로 느긋이 걷는다.
딸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이뻐라 이뻐라 쓰다듬어준다. "개미다 개미" 손뼉치며, 그 집까지 따라가 보기도 하고, "해바라기 꽃 있어요" 두 손 모아 감탄한다.
나는 자동차마다 멈춰서서 번호판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는 딸아이를 칭찬해주기도 하고, 떡집, 책방, 수퍼, 인테리어 가게 모두 들러보는 아이따라 덩달아 인사드린다. 그렇게 나는 딸아이로부터 느림의 덕을 배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처음 읽었을 때는 정치적 주장으로만 받아들였다. 하루 4시간 노동이 과연 쟁취가능한 목표인가, 공동체적 건축이 실현되려면 사회제도가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 강력한 달러를 비판하며 차라리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지금의 통화제도 비판에 비해, 당시 러셀의 금본위제 비판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가.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단정한 표지가 마음에 들어 조심스레 다뤘던 책인데, 아끼는 만큼 여러 차례 손이 가니 어느새 손때와 구김으로 초라해져버렸다. 낡아가는 책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나는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 키우고 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책에서 읽어지는 것은 삶을 보는 시각이다. 러셀은 남보다 걸음마가 느렸던 아이의 보폭을 따라 걸어보라며 권유한다. 아이의 속도,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은 내게 더 많은 속내를 보여준다. 나는 이것이 키다리아저씨의 쥬디 애보트가 말했던 인생의 행복이 아닌가 새삼 감탄한다.
때로는 단지 나의 예각이 무뎌진 것은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숨돌리는 시간이야말로 만인의 여가를 위해 싸우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휴식의 맛을 모르면, 휴식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게으름을 찬양하기 위해 바지런해야 하는 오늘은 역설일 수도 있겠지만, 책 속에 꽂아둔 딸아이와 내 얼굴이 담긴 책갈피는 러셀의 지혜만큼이나 내게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