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선

나는 무신론자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종교는 존중하려고 노력하는데,
내가 무신론을 믿을 자유가 있듯 다른 사람은 신을 믿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자들이 들으면 불경하다 펄쩍 뛸 일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 종교 의식은 아름답고 경건하여 매혹적인 경우가 많으니 관심이 가는 편인데,
특히 매력적으로 여기는 종교 의식 중 하나로 고해성사가 있다.

처음부터 고해성사에 호감을 가졌던 건 아니다.
중세 시대의 면죄부가 연상되어 오히려 못마땅하게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말이다. 지나고 돌이켜 보니 그때 내가 잘못했구나 후회막급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
나 혼자 반성하고 앞으로 잘해야지 다짐하면 되는 일이야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는데,
그때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겠다 뒤늦게 깨닫는 문제라면 아주 골치 아프다.
이제 와 새삼 사과하기 머쓱한 게 아니라, 아예 그 사람과 연이 끊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과를 한다고 나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어 가슴 한구석을 짖누르는 기억이 사무칠 때면,
더럭 고해성사가 하고 싶어진다.
신이라는 존재가 나의 죄를 대신 사하여 주길 원하는 게 아니다.
어떤 무한한 존재가 있어 내 마음을 그에게 직접 전해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그리하여 뜬금없이 드는 생각.
애시당초 먼훗날에라도 후회할 글을 안 쓰는 게 최고겠지만 그 당시엔 모를 수도 있으니까
서재에도 고해성사 기능 같은 게 있으면 정말 기막히게 좋겠다.
언젠가 먼훗날 내가 올렸던 글이 잘못 된 것이어서 이를 수정하고 싶을 때 고해성사를 선택하면,
원래 올렸던 글을 본 모든 사람에게 수정된 글과 사과의 글을 메일로 보내주는 거다.
진짜 근사한 기능이겠다고 맞장구치는 사람이 백 명쯤 있다면,
서재 3.0에 반영해 달라고 지기님에게 떼쓸 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10-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아이디어네요. ^^

저는 그때그때의 생각을 바로바로 표현하는 편인데, 이후 생각이 변화할 순 있겠지만, 그건 당시의 자신에게 충실했다고 생각해요. 글을 쓸 땐 물론 조심해서 써야겠지요. 표현이나 문맥이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조심스러워지고 있습니다.

2007-10-10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0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7-10-1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전 생각 나는대로 말하는 편이라, 글이라도 고르려고 노력중입니다. 잘 안되지만요.
속닥님, 님의 백옥같은 피부의 증거사진을 제출해주시면 저의 시기심을 인정하겠나이다. 캬캬
속닥님, 발다닥은 뭐에요?

엔리꼬 2007-10-1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유아세례를 받은 가톨릭이라 고해성사를 많이 해봤습니다.
요즘은 제가 성당에 잘 나가지는 않지만 고해성사의 의미는 존중합니다.
사실 요즘의 저는 고해성사하기가 꺼려집니다. 왜냐면 눈으로 보이는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제 죄를 제 입으로 까발린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신앙은 있으나 교회에서 만든 제도는 따르지 않는다는 괘변으로 이를 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해의 의미가 조금은 잘못 쓰이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사실 고해는 정말 자신을 뉘우치고 이를 다시는 행하지 않기 위한 자기 반성적 측면이 강한데 말이죠. 저한테 있어서 그 죄가 사하여지는가 사하여지지 않는가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특히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는 내가 무슨 죄를 지어도 교회 나가서 열심히 기도만 잘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스스로 자신에 대한 면죄부를 주기 위해 교회를 나가는 것이죠.. 물론 자신의 행동은 반복되고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의 이런 가르침을 이용한다고나 할까요? 그런 분들에게서 고해의 의미, 회개의 의미는 멀리 안드로메다로 갔다고 봐도 좋겠습니다.


hanalei 2007-10-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도 모르겠네요.
상대는 이제 다 정리하고 잊을라 하는데 와서 빡빡...

조선인 2007-10-10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님, 하긴 CSI에서도 고해성사를 악용하는 사례가 나오긴 합디다. 현실이라면 더 끔찍한 얘기겠지요.
더스님, 특정상대가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오해는 마시길. 오히려 예전에 쓴 '유혹의 선'이라는 페이퍼의 연장선상으로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