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
지난 일요일 마트에서 녹두빈대떡 반죽을 사왔다.
손이 워낙 많이 가는 음식이라 나로선 엄두가 안 나지만 옆지기가 워낙 좋아하는 터라.

전개.
오늘에서야 녹두빈대떡을 지졌다.
나야 썩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지라 다 지진 다음에서야 하나 맛을 봤는데, 음, 정말 맛이 없었다.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었다.
역시 어머님이 부쳐주셔야 맛있나봐요. 어쩌구저쩌구. 근데 전 사실 맛난 줄 모르겠는 음식인데. 어려서부터 안 먹어봐서 그런가? 하긴 친정어머니는 장사 하시느라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전혀 안 하셨...(갑자기 말문이 콱 막힘)

절정.
생각나버렸다.
오그락지만큼이나 오래 손이 필요한 음식이 있을까.
가을이면 실한 무를 서너 대야나 사들여 중지만하게 써는데만 이틀 꼬박.
늦가을 햇살에 이리 저리 뒤집어가며 말리는데 한달 꼬박.
찹쌀 쑤어 양념 만드는데 하루 꼬박.
무치는데 또 하루 꼬박.
막내딸이 좋아하는 오그락지 겨울 내내 실컷 먹으라고 어머니는 그 수고를 하셨더랬다.
다시는 먹을 수 없는 그 맛. 그 정성.

결론.
다음달이면 어머니 기일이 돌아오는구나.
벌써 또 한 해가 지났구나.
무심한, 못되처먹은 딸년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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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투리의 힘
    from 조선인과 마로, 그리고 해람 2007-09-13 23:40 
    노상 우려먹는 소재지만 사투리가 아니면 그 뜻이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무우말랭이는 오그락지라고 해야 그 꼬들꼬들한 맛이 살아나고, 부모님을 부를 땐 아무리 표준말을 쓰려고 해도 어무니, 아부지가 고작이다. 저 있던 자리를 안 치우고 가는 화상을 보면 어무니 식으로 "손모가지가 똥구녕에 가붙었나"라고 해야 핀잔하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이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이고 디라'라는 말이 새어나온다. '힘들다
 
 
Mephistopheles 2007-03-2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개도 무심하지 않고 못되처먹지도 않으시다는 걸 페이퍼 보면 알게 된다죠..^^

무스탕 2007-03-2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저 울뻔했어요... 조선인님은 하나도 안 나빠요.
마로랑 해람이한테 그렇게 해주고 계시니까요..

바람돌이 2007-03-2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은듯 기억하고 살아야 산 사람이 살아지지요. 늘 맘에 두고있으면 어찌 산대요. 어머님도 그걸 바라시지는 않으시겠죠. 나중에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걸 바라지 않을것처럼요...

하늘바람 2007-03-28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반전의 미학^^ 조선인님
마음이 쓸쓸하시죠.

BRINY 2007-03-28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오그락지가 뭔가요??)

paviana 2007-03-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도 녹대빈대떡 남동생이 좋아해서 녹두 사다 하루정도 불리고, 껍질까서 몇번씩 조리로 씻고 믹서에 갈고, 고기랑 숙주 양념한거 넣어서 휘젓고, 부치면서 위에다 파 올려요...모 문제는 고기랑 숙주 양념빼놓고는 다 제가 해야되는 노동이지요.-_-녹두빈대떡 가루만 부치면 맛이 별로일테니 고기 갈은것을 조금 양념해서 같이 넣거나 김치를 송송 쓸어서 넣어보세요. 한꺼번에 많이 한담에 3-4개씩 냉동실에 넣었다가 반찬 없을때 내려서 먹는것도 좋아요.저희 주로 명절에 한 30-40개정도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놓거든요.

조선인 2007-03-2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고맙습니다.
무스탕님, 고맙습니다.
바람돌이님, 그런 걸까요? 님 말이 정답이겠지요.
하늘바람님, 을시년스럽다는 말이 가끔 사무칩니다.
속닥님, 네, 부탁 드립니다.
브리니님, 경상도 사투리에요. 무말랭이랍니다.
파비아나님, 옆지기야 녹두빈대떡에 환장하지만, 전 삼삼한 배추전이 훨씬 좋아요.

홍수맘 2007-03-2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동 먹고 갑니다. 갑자기 울 아빠 산소를 찾아가 보고 싶어졌어요. 저보다 훨씬 나아요. 님이...(ㅜ.ㅜ)

마노아 2007-03-2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이 울컥했어요. 그런 것들이 있나봐요. 무심히 지나치다가도 딱 한 부분에서 왈칵 생각이 쏟아지는 것들... 전 팥빙수를 보면 돌아가신 아부지 생각나거든요. ㅠ.ㅠ

조선인 2007-03-2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막상 이리 말해도 어머니 묘지에 자주 못 가요. ㅠ.ㅠ
마노아님, 팥빙수에 얽힌 추억이라니 참 고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