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 핸드북 - 2009년도 교회력에 따른
정장복 외 지음 / 예배와설교아카데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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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꽂혀있는 예배와 설교 핸드북(이하 핸드북)이 14권인 것을 보니 제가 담임 목회를 한지 어언 14년째가 된 모양입니다. 저는 핸드북을 손이 가장 편안하게 닿는 위치에 꽂아놓고 주일 예배를 준비할 때마다 참고합니다. 핸드북은 한두 해를 풍미하는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되었습니다. 올해 핸드북은 제4부 주일 낮 예배 설교지침에서 설교를 위한 조명 부분이 강화되었네요. 설교 요약이 아니라 아예 설교 문이네요. 하지만 설교학자가 쓴 설교다 보니 저의 예배 현장과는 거리가 느껴지네요. 설교는 본문은 똑같더라도 상황은 달라야 하니 당연한 거겠죠. 제3부 예배의 실제에서 세례 언약 재확인 예식이 눈에 띄네요. 로버트 웨버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한 번 시도해 봤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는데 핸드북에 예식 순서가 수록되어 있어 지난 주 주님의 수세 주일을 맞아 설교를 마치고 재확인하는 예식을 진행해 보았습니다. 성찬식만큼 친근하면서도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기억도 흐릿한 세례를 회상하고 재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귀로 들리는 설교도 발전시켜야 하지만 눈으로 보는 설교도 계발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회를 처음 시작하는 후배에게 핸드북을 추천합니다. 여러분도 핸드북을 참고하여 예배를 집례해 보세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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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이끄는 설교
그렉 하이슬러 지음, 홍성철.오태용 옮김 / 베다니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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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성령님으로 이끌림을 받으라.”이다. 나는 매사에 성령님에 붙잡혀 살고 싶었다. 그러나 본서를 읽고 나의 설교를 되돌아보니 나는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모든 과정에서 성령님을 ‘어렴풋이’ 의지하였지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 나는 훌륭한 주석을 골라 본문을 충실히 해석하고 신선한 예화를 찾아 적절하게 적용하는데 관심을 가졌지 성령님이 나를 조명해 주셔서 본문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성령님이 나에게 불을 붙여서 설교를 능력 있게 전달하게 해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의 설교에서 사람의 지식은 묻어났으나 성령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교의 기술은 난무했으나 성령님의 역사는 자취를 감췄다. 저자는 성령님이 빠지면 설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울어졌던 설교의 추를 설교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으로 균형을 맞추려 시도한다. 저자는 설교에서 본문만큼 성령님이 중요하다고 호소한다. 설교는 성령님의 역동적인 역사가 있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클라크 켄트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슈퍼맨이 될 수 있다. 성령님이 사로잡힌 설교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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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살리는 설교
유진 피터슨.마르바 던 외 지음, 이승진 옮김 / 좋은씨앗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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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상 수상작을 즐겨 읽는다. 심사평을 읽다보면 ‘이전 작품에 비해 그다지 수준이 높지 못하다.’는 평도 실린다. 이런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이승진 교수가 번역한 책은 대부분 읽었다. 이번 책은 이전에 번역한 작품에 비해 개성이 없다. 다른 책에서 빌려온 글이 많아 아쉽고, 영혼을 살리기에는 힘과 기술이 약하다. 이 정도의 책을 이승진 교수가 번역했다니 조금 의아하다.

이 책은, 예수님이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는 찍어 내버리라.(마5:29-30)’고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처럼, 부제는 ‘본질과 현장을 모두 만족시키는 설교준비를 위하여’ 이고, 뒤표지에는 ‘이 책은 설교학 서적 12권 이상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과장 광고를 한다. 내가 보기에 다른 설교학 서적 한 권보다 넓이가 좁고(다양하게 다루지 못하고), 깊이다 얕다(심오하지 못하다).

그나마, 빌리 그래함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순회전도자들을 위한 세계대회(1983년)에서 강연한 “복음전도자와 설교”에서 복음전파에 관한 8가지 원칙은 따분한 나를 깨우는 천둥소리였고, 맥시 더남이 [목회에서의 위기 극복(2002)]이란 책에 “당신의 목숨을 잃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기”라고 기고한 글에서 목회 사역에 활력을 유지하고 성공적으로 마감할 수 있는 비결은 자주 들으면서도 잊고 지낸 내용을 상기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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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처럼 설교하라
제임스 W. 톰슨 지음, 이우제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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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관광도시 바르셀로나에는 프랑스의 건축가 쟝 누벨이 설계한 지상 34층, 지하 4층, 높이 144.4미터의 타워가 있다. 이 건물은 4만 개의 붉은 색과 푸른색과 오렌지 색  유리로 만들어져 보는 각도와 거리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 건물이 카멜레온처럼 색깔이 달라지듯이 사도 바울도 보는 각도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그가 3차례나 세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여 선교사라고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로마서와 같은 신학적인 주제를 담은 책을 저술했다고 하여 신학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편지는 그의 입으로 선포됐던 설교였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울의 설교는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전도 설교였으며,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파라클레시스(권면)를 통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목회 설교였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설교에는 케리그마(Kerygma)와 디다케(didache)가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는 사도 바울은 이교 문화에 점령당했던 전 기독교 사회(pre-Christian society)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여 개종을 촉구했듯이, 다원주의에 물들어 버린 후 기독교 사회(post-Christian society)에 사는 설교자들도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다시 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전통적인 설교학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 설교학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무능하고 목회적인 돌봄을 제공하는데 미약하지만 바울은 전도와 양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신약신학 교수답게 본문을 세밀히 연구하여, 바울 설교의 3가지 특징을 논한다. 그의 설교는 고대 수사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재판관의 모임이나 자유시민의 모임이 아닌 기독교 공동체에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교회 수사학(church rhetoric)이라고 인용한다. 그의 설교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사로잡혀 선포하기 때문에 구약시대 예언자와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프레드 크레독은 설교자는 권위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였고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설교는 순간적으로 감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공동체에게 행동의 변화를 호소한다. 그는 믿음의 응답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요구한다.

저자는 바울의 설교가 언제나 교회론 적이었다고 논증한다. 그의 복음전도 설교가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의 목회 설교가 교회의 변화를 추구했듯이 설교의 목적은 개인의 변화와 아울러 공동체의 변화에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시대는 어떤가? 기독교의 침체와 맞물려 복음전도를 하는 야전사령관은 감소하고 신앙성장을 가르치는 교육사령관은 증가하는 추세다. 저자는 복음전도 설교는 목회 설교로 귀결돼야 하듯이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비교인들에게 전하여 회심하게 하고 또한 교인들에게도 십자가와 부활을 상기시켜 신앙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아버지였고(살전2:11-12) 어머니였으며(갈4:19), 농부였고(고전3:5-9a) 건축가였다(고전3:9b-15). 바울을 통해 당신도 두 날개로 힘차게 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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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전 -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선물
제임스 화이트 지음, 김운용 옮김 / 예배와설교아카데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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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주시는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주심(God's self-giving)의 표현이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최초의 성례전이시다.(에드워드 쉴레벡)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두 가지 수단을 통해서 표출된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기 주심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성례전을 통해 자기 주심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언어적 차원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말하고 행동적 차원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어루만진다. 성례전은 말씀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개신교는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세례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이나 부모가 적절한 면담과 교육을 받은 후에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초대교회는 세례준비 기간이 3년 이상이었다고 한다. 유아세례는 부모의 신실성이 요구된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세례는 일회적은 사건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갱신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강단에 세례반이나 세례조를 비치하여 기억을 회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세례는 언제나 예배 공동체 가운데서 공적인 사건으로 주어져야 한다. 세례는 특별한 절기에 주어져야 효과적이다. 초대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세례 교육을 시켜 부활 주일에 세례를 주었다.[예배의 역사] 세례의 상징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작은 세례기보다 직경 60cm 이상 되는 세례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약식 세례보다는 침례가 상징 가치가 높다.

저자는 성만찬이 너무 간헐적으로 시행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성만찬이 매주 중심적인 예식으로 시행되는 것이 예배 개혁의 우선순위라고 말한다. 성만찬은 말씀 봉독과 설교와 함께 주어져야 한다. 말씀과 성만찬이 결합해야 분명한 효과가 발생한다. 성만찬은 최고의 상징가치를 갖도록 집례 해야 한다. 성만찬 기도는 정해진 사람에 의해 드려져야 한다. 성만찬은 세례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베풀어져야 한다. 세례를 받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갖는 것보다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성만찬 상은 회중들이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야 한다. 떡과 포도주는 위조품이 아니라 실제 성물이어야 한다. 성만찬은 공동의 잔과 한 덩어리의 빵을 사용해야 의미가 있다. 공동의 잔을 돌려고 마시고 그 부분을 씻고 한 덩어리 빵을 떼는 의식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성만찬은 회중들이 성만찬 상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헨리 나우웬은 성체 성사가 예수님의 삶을 예시 한다고 말한다.[헨리 나우웬, 그의 살 그의 꿈] 내가 보기에 성만찬의 4중 행동은 예수님의 삶과 일치한다. 성만찬에서 떡을 취하듯이(taking)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으로 오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축사하듯이(blessing)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시는 예수님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듯이(breaking)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나누어 주듯이(giving)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셨다. 벤허를 보면 예수님의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셨을 때 나병이 낫던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의 신분을 마귀의 도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었다. 저자의 바람처럼 설교와 성만찬이 매주 시행되어 하나님의 자기 주심을 귀로도 듣고 눈으로 보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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