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화> 전 2권 로저 에버트 지음/ 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4년 전 번역 출간된 로저 에버트의 영화평론집 <위대한 영화>의 2권이 나왔다. “위대한 영화 베스트 100”이 아니라 “위대한 영화 중 100편”에 관한 글이라는, 머리말의 세심한 일러두기를 독자가 유념한다면 저자는 더욱 기뻐할 것이다. 엄지손가락과 별점의 ‘대마왕’처럼 간주되는 평론가지만 에버트는 랭킹과 리스트 작성을 “멍청한 짓”이라고 일축한다. 그럼 왜 하냐고? 글쎄. 어물전 주인이 비늘 다듬기 싫다고 안 할 수야 있나, 정도가 에버트의 입장이다. 이 책에 실린 100편의 영화 중 99편은 이른바 ‘데렉 말콤 테스트’를 거쳤다. 데렉 말콤은 <가디언>에 오랫동안 기고한 평론가인데 “이 영화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상상을 견딜 수 있을까, 없을까?”를 자문하며 영화를 분류했다고 한다. 테스트를 통과 못하고도 수록된 영화는 20세기 초 미국의 인종주의가 반점처럼 박혀 있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다. 2권의 번역은 1권보다 매끈하고 정확하다. 이번 기회에 1권의 거친 번역을 꼼꼼히 바로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로저 에버트가 <시카고 선 타임스>에 영화평을 기고한 지 올해로 무려 40년이다. 이 성실한 평론가는 “강한 자가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오래 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 간혹 궤변에 인용되는 구절이긴 하지만- 을 증명한다. 그의 관록 덕에 <위대한 영화>의 독자는 <스카페이스>가 <소프라노스> 같은 후예들에 섬광이 가려졌으나 본디 얼마나 충격적인 영화였는지 등등의 통시적 고찰을 즐길 수 있다. 일간지 평론가, 그것도 매체에 따라 독자층이 구별되는 유럽과 달리 10대에서 할아버지까지 보편적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 미국 일간지의 평자로 단련된 그의 글은 쉽고 유머러스하며 적당히 허풍스럽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이 영화는 감상을 금지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되풀이해 감상하며 매혹될 것이다.” 또한 그의 글은 아이디어가 선명하다(그래서 마케터가 인용하기도 그만이다). 덤으로, 에버트의 평에는 풍부하고 오랜 취재 경험만이 얹어줄 수 있는 흥미로운 팁이 있다. 초라한 단역으로 커리어를 마감해가던 버스터 키튼이 1965년 베니스영화제 회고전에서 갈채를 받으며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박수소리는 근사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화답한 사실을 에버트가 회고할 때 우리는 솔깃해진다. 무엇보다 로저 에버트는, 빠른 대신 얄팍해도 좋은 것이 저널리즘 비평이라고 내심 믿는 게으른 글쟁이들에게 만만히 인용될 평론가가 결코 아니다. 이 책의 독자는 그의 통찰력을 이를테면 <당나귀 발타자르>의 시점 묘사에서, 에릭 로메르 영화의 풍미 분석에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 연기 품평에서 확인할 것이다.

글 : 김혜리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1-14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비평에도 관심 많으세요? 저는 어떻게 하면 비평의 세계에 들어갈수 있을까 기웃거리는 단계입니다. 서재에 종종 오곤 했어요. 또 오겠습니다.

Mephistopheles 2007-01-1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할놈의 택배회사 때문에 어제 올 책이 월요일날 온다더군요..^^
그 중에 저 두권도 포함되었습니다..^^

키노 2007-01-16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님/안녕하세요. 그래요.저두 기웃거리다 말았는데 ㅎㅎㅎㅎ 라라님에게 한수 배워야 겠는데요^^
메피스토님/역시 신청하셨군요. 저는 지금 재는 중입니다. 신청할지 말지^^
 

인디아나 존스, 18년 만의 귀환

희대의 모험가 인디아나 존스가 18년 만에 팬들을 찾는다. 2일 미국의 주요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사실이다. 조지 루카스 감독은 “오랫동안 기다린 새 <인디아나 존스>가 올해 시작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4편이 될 이번 신작을 제작하기까지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 작업이었다. 유명 시나리오 작가들이 10여 년간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모두 콧대 높은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음에 들지 못해 반복해서 창고로 직행했다고 한다. 둘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것은 최근의 일. 시나리오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후부터 영화 제작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최종 각본은 <쥬라기 공원> <우주전쟁> 등의 영화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작업한 데이비드 콥이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결정으로 가장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은 해리슨 포드의 출연 여부. 지난 세 편의 시리즈에 모두 출연한 해리슨 포드가 다시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를 맡는 게 확실시된 상태다. 그러나 그의 상대역을 맡을 배우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발표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조지 루카스와 해리슨 포드의 말을 빌리면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배>에 출연한 인디아나 존스의 아버지 헨리 존스 교수 역에는 숀 코네리를 캐스팅할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도 조지 루카스는 영화 제작을 발표하며, 영화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작은 최근 액션영화들의 경향처럼 ‘캐릭터 중심’으로 가되, 굉장히 흥미로운 미스터리를 포함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한다. 특수효과와 기존 <인디아나 존스> 캐릭터의 시너지를 고려한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한편 스티븐 스필버그는 인터뷰에서 “조지, 해리슨, 나 모두 굉장히 흥분했다. 우리는 최종 각본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 가치가 있다고 느끼며, 아마도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한 역사와 더불어 관객들이 고대하던 모든 것을 충족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제작 발표의 기쁨을 표시했다.
64세의 해리슨 포드 또한 루카스, 스필버그와 다시 인디아나 존스의 네 번째 이야기를 하게 된 것에 반가움을 표시하며 “나이와 상관없이 주연을 해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1981년 <레이더스>에 처음 인디아나 존스로 출연한 이후, 1984년 <인디아나 존스>, 1989년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배>까지 전편에 모두 출연했다. 조지 루카스는 “영화의 대부분은 해리슨 포드의 매력에서 비롯된 것과 다를 바 없다”며 해리슨 포드를 칭찬했다.
영화는 루카스필름에서 제작을 맡고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배급을 담당한다. 2008년 5월 개봉을 목표로 한다. 제작발표를 마무리하며 조지 루카스는 자신의 다른 신작들도 소개했다. 그는 최근 배우 리암 니슨이 출연하는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전기물을 비롯한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수연 LA 통신원 2007.01.0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매지 2007-01-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악~~!!!!! 드디어 나오는군요! 빨리 보고 싶어요 ㅠ_ㅠ

키노 2007-01-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년이라는 세월이 만든 시간적 간극이 인디애나가 가진 특유의 액션씬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궁금하네요^^
 

주소만큼 훌륭한 호러문화 블로그
www.thehorrorblog.com

호러문화에 관한 한 영화부터 서적, 인물 동정, 관련 뉴스 등 광범위한 주제가 거론되는 ‘The Horror Blog'다.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도메인 주소를 꿰차고 있어도 배 아프지 않은 것은 기예에 가까울 만큼 성실한 블로그 운영자의 업데이트 빈도와 가독성 높은 디자인 덕분이다. 이 바닥에 관심 있다면 꼭 한 번 들려볼 만한 웹사이트다. 허지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초의 브릿팝 앨범'이라 하면 통상 스톤 로지스(Stone Roses)의 89년작 가 꼽히는데 90년대를 대표하는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Oasis)의 노앨 갤러거(Noel Gallagher / 기타, 보컬)는 라스(The La's)의 셀프 타이틀 데뷔작 (90)와 스웨이드(Suede)의 (93), 그리고 자신들의 데뷔작 (94)를 브릿팝의 시작이라고 '뻔뻔하게' 밝힌 바 있다. 반면 저널리스트 존 해리스(John Harris)는 블러(Blur)의 싱글 'Popscene'과 스웨이드의 싱글 'The Drowners'가 발매되었던 92년을 브릿팝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누구 말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브릿팝의 시작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사이라는 결론은 확실해 보인다. 물론 이후 브릿팝의 발전 과정은 2000년을 6년 보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며 그 아성은(국내에서만 보더라도) 90년대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브릿팝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된 시점이지만, 그것이 메이저 음악계에서 시장성을 띤 개념으로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90년대 초반, 미국 얼터너티브 음악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국의 음악씬이 장르적으로 보다 분명해지는 과정을 밟으면서부터다.

이 시기 영국에는 대중적인 인기를 빠른 속도로 취합해가던 두 세력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블러, 나머지 하나는 오아시스였다. 이들은 당시 신세대 밴드로서 각각 독자적인 팬덤을 형성해가고 있었는데, 얼터너티브의 공격 앞에 절치부심하던 영국언론이 이들에게 라이벌 구도를 적용, 이슈화시킴으로써 '브릿팝'의 이름이 갖가지 논쟁과 함께 세계 음악 팬들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심지가 촉발되면서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생소하다 싶을 정도의 '브릿팝' 뮤지션들도 어느 새 지구 반대편 한국 오프라인 잡지의 커버를 장식할 정도가 되었고, 블러와 오아시스의 선후배들이 그렇게 속속들이 소개되면서 브릿팝은 마침내 오늘의 위치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브릿팝 하면 흔히 '맨체스터 씬'이 빠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오아시스의 연고지가 그곳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 앞서 스미스(The Smiths)와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라는 거물 밴드가 음악적으로 먼저 큰 족적을 찍어두었기 때문이었다.

모리세이(Morrissey)와 자니 마(Johnny Marr)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스미스는 음악적인 영향력에 있어서만큼은 가히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밴드로, 섬세하면서도 음울한 음악, 낭만적이면서도 충동적인 가사로 8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군림하였다.

한편 같은 맨체스터 출신의 스톤 로지스는 1989년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매하며 순식간에 전 영국을 경악케 했는데, '맨체스터 사운드'의 양식을 확립했다는 극찬을 받은 이 앨범은 그러나 비틀즈의 환영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음으로서 향후 브릿팝의 장르적 도그마가 어떤 식으로 불거질 것인가를 의미심장하게 가르쳐주었다.

블러 및 오아시스와 동세대로 분류되는 브릿팝 뮤지션 집단으로는 스웨이드(Suede), 매닉 스트릿 프리쳐스(Manic Street Preachers), 라디오헤드(Radiohead), 펄프(Pulp) 등이 대표급으로 거론된다. 스웨이드는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글램락적 전통 위에 관능적인 퇴폐미를 덧씌워 브릿팝의 범위를 넓혔고, 매닉 스트릿 프리쳐스는 영국 밴드답지 않은 직선적이고 현란란 연주력, 그리고 '골수 사회주의 사상 피력'으로 팬과 미디어의 관심을 끌었다.

데뷔시절 평범한 모던록 밴드로만 그칠 것으로 예상되었던 라디오헤드는 어느 순간 블러와 오아시는 물론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까지 능가하는 압도적인 음악세계를 선보였고 펄프는 팝과 그루브, 슈게이징을 효과적으로 짜 맞추는 방법론으로 현재까지도 후배 밴드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 2000년대 중반으로 이르면서 브릿팝의 패권은 콜드플레이(Coldplay)와 뮤즈(Muse)를 중심으로 한 신세대 밴드들에게 이양되었다. 피아노 사운드를 적극 수용, 브릿팝의 이름에 기품과 절제미를 더했던 콜드플레이는 밴드의 프론트맨이 헐리웃의 여왕을 아내로 맞을 만큼 그 명성을 천하에 떨쳤고 '음악의 요정(Muse)'은 내부로 침잠하는 비감의 극치를 선보이며 순식간에 라디오헤드의 아성을 위협해갔다.

이 외에도 2000년대의 브릿팝 씬은 카이저 칩스(Kaiser Chiefs), 악틱 멍키스(Arctic Monkeys) 등 젊음과 음악성을 두루 갖춘 뮤지션들을 연이어 배출해 해당 장르가 생겨난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 음악 포털 사이트 도시락(www.dosirak.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글 / 브릿팝 애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국의 벽촌이라고 할 미주리에서 태어난 팻 매스니는 마이애미 대학에 기타 연주 전공으로 입학하여 1학기를 마치자 마자 강사로 초빙될 정도로 어려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21세이던 1975년에 게리 버튼의 밴드 멤버로 재즈 씬에 발을 들여 놓았고 곧 이어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와 함께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Bright Size Life]를 발표하게 된다. 이후 현재까지 30여 년간 수십 장의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담은 앨범을 발표하며 재즈 아티스트로는 유례 없는 히트와 대중적 지지를 얻어 왔다. 그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어디에서든 수천 석 규모의 공연장을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즈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그가 이처럼 큰 성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유분방한 그의 음악적 행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분명 재즈 전통에 입각하여 공부하고 연주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그가 거쳐온 길은 언제나 정통 재즈에서는 조금씩 벗어나 있었다. 세월이 변하면서 새로운 앨범을 내 놓을 때 마다 과거와는 다른 음악을 끊임없이 선보여 온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나온 그가 발표한 앨범들에는 시대에 따라 포크에 가까운 어쿠스틱 재즈에서부터 뉴 에이지와 록, 또 팝적인 가벼움은 물론 매우 실험적인 프리 재즈, 정통 스탠다드 재즈 연주 등 온갖 음악 스타일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스타일의 다양함만으로 그처럼 큰 성공을 이끌거나 대중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유사한 활동을 해 온 퓨전 재즈 계열의 연주자들이 많이 있음에도 팻 매스니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보적인 멜로디와 감성이다.

 
시전통적으로 재즈는 지적인 음악에 속한다. 빌리 할리데이나 쳇 베이커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한다면 재즈의 역사는 진하고 격렬한 감성의 표출보다는 화음과 리듬의 복잡성을 추구하는 쪽에 맞춰져 있었다. 재즈에 감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미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재즈의 중요한 특성이지만, 한편 재즈가 발전하면 할 수록 대중성이 떨어지는 요인으로도 작용해 왔다. 재즈를 듣고 이해하거나 즐기기 위해서는 다소나마 훈련된 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팻 매스니는 이탈리아계 특유의 속칭 '귀에 감기는' 멜로디를 무기로 일반적인 재즈에 비해 훨씬 감성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퓨전 재즈 아티스트들은 많지만 그들이 정통 재즈보다 더 복잡하거나 혹은 단순하더라도 차갑고 도시적인 음악을 추구할 때 팻 매스니는 세련되면서도 좀 더 인간 본연의 감정에 호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런 점은 작곡과 연주 스타일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팻 매스니의 작품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곡 중 하나인 'Are You Going with Me'에서 그는 기존 재즈곡에 비해 단순화된 멜로디와 함께, 감정을 고조시켜 폭발하도록 하는 전형적인 록 기타의 어법을 따르고 있다. 한편 'Letter from Home'이나 'James' 등에서는 도시적 세련미와 목가적인 단순성이 교묘하게 결합된 조용하고도 차분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전혀 다른 형식의 곡들이라도 재즈적 지성보다 촉촉한 감성에 호소하는 음악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 셈이다.

결국 팻 매스니의 인기와 성공은 재즈를 위해 훈련되지 않은 귀로도 듣고 느낄 수 있는 음악의 보편성을 추구한 데에 그 비결이 있다. 그래서 그의 팬 층 역시 재즈 애호가들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양한 직업과 성향을 가진 성인 층에 골고루 퍼져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다.

 
그러나 이런 그의 스타일에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자신의 재능을 보다 정통적인 재즈 어법의 발전에 쏟지 않고 상업적인 방향만 추구한다는 것인데, 주로 골수 재즈 팬들이나 평론가 쪽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팻 매스니는 진지한 아티스트라기 보다는 거의 팝 스타에 가까운 존재다.

비슷한 맥락에서 일부 재즈 아티스트들은 팻 매스니의 연주에 재즈적 실험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때로 테크닉에 너무 의존한다는 지적을 내 놓기도 한다. 실제로 곡 자체는 감성적이고 쉬운 편이라고 해도 솔로 연주에 있어서의 빠르고 복잡한 기교적인 면모를 그가 자주 드러내온 것은 사실이며 이는 특히 라이브에서 확연하다. 동료 연주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그의 모습은 일종의 과시욕으로 비치기도 하고, 또 알고 보면 단순한 연주를 패턴과 기교로 눈속임한다는 식의 신랄한 비난도 있다.

그러나, 팻 매스니의 음악이 대중적이긴 하지만 그 대중성은 오직 히트만이 목적인 천박한 수준으로까지 떨어진 적은 없다는 점에서 상업성에 대한 비판은 때로 지나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히려 팻 매스니를 통해 재즈가 더 널리 알려지고 그 결과 보다 정통적인 재즈 아티스트에게까지 관심이 돌려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테크닉에 대한 비난은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한들 전문가들 수준에서의 논의에 가깝고, 일반 음악 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듣고 즐기는 입장에서는 지나친 분석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고, 더욱이 팻 매스니의 테크니컬한 연주 특성이 지금까지 팬들에게 천박한 과시욕으로까지 느껴진 경우는 별로 없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이를 크게 문제 삼는 것은 별로 공정하지 못한 일 같다.

이렇게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 영웅이자 이단아로서의 두 얼굴을 가진 팻 매스니. 어쩌면 지난 30년간 그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논쟁의 주제인 예술성과 대중성의 경계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의 줄타기는, 비슷한 시도를 하면서도 사실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둘 다 잃고 마는 다른 많은 경우들에 비해 훨씬 훌륭하게 이루어져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팻 매스니는 분명 뛰어난 아티스트이고 또 성공한 전략가인 셈이다. 누가 뭐래도 예술가에게 있어서 자기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는 것 이상의 보람과 기쁨은 없고, 그는 지난 30년간 그 일을 너무도 훌륭하게 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웅이던 이단아건 간에,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따듯함의 인간미는 세상에 음악이 존재해 온 이유 그 자체와 관련되는 보편적 감성이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바로 그 힘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앞으로도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을 것이다.
※ 음악 포털 사이트 도시락(www.dosirak.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글/ 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