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3
구춘권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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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또는 세계화)라는 말이 이제는 그다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는 지구화에 대한 논의가 거세다. 특히 IMF와 한미FTA를 거치면서 여론이 양분될 정도로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지은이는 이러한 지구화를 모든 국가를 관통하는 강제적·현실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견해와 지구화를 내용 없는 일종의 정치적 신화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있다고 지적하며, 지구화 자체가 한 두 문장으로는 도저히 정의될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한 과정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를 20세기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지구화의 특징


지은이는 지구화의 특징으로 국제적 경제 관계의 연결이 심화되는 과정,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형성된 기술적 패러다임이 확산되는 과정, 국제금융시장의 팽창, 지역화, 다국적 또는 초국적 기업들의 부상, 전 세계적 규모에서 국민경제의 위계화 등을 들고 있다.


지은이는 이러한 지구화의 특징은 자본측에 유리한 경제정책을 일상화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하면서, 20세기의 자본주의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며 지구화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흐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74-95년 세계 경제위기까지의 25-30년간의 짧은시기를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라 하는데, 이는 냉전체제, 미국이라는 강력한 헤게모니 국가의 존재, 기술적 패러다임으로서의 포드주의, 케인즈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생산성의 하락, 임금상승, 자본수익성의 하락, 원자재가격의 상승(유가 파동)이 이어지면서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는 붕괴되고, 신자유주의와 포스트포드주의적 축적체제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의 핵심은 다양한 형태의 공급친화적 요소들을 정착시켜 포드주의적 위기를 통해 드러난 자본수익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 임금비용의 삭감, 새로운 생산품 및 생산기술의 도입, 노동관계의 유연화, 자본집약적 설비의 가동시간 연장과 사용강도 강화, 기업에 대한 세제혜택, 공급측에 유리한 사회하부 구조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국제금융시장이 팽창화를 가져와 국제금융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가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흐름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형성배경를 설명하는 지은이의 생각은 여태 피부로 느끼기는 했으나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던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며, 빠르게 돌아가는 지구화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있다.


대안적 지구화


위와 같은 일련의 논의를 통해 지은이는 지구화는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지난 20여년 동안 진행된 결과로서 현실이지 숙명이 아니므로,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는 제3의 길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지은이는 대안적 지구화는 신자유주의와의 근본적인 결별을 전제로 해야한다고 하며, 국제금융시장의 규제, 지구적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노력, 환경에 대한 관심, 전지구적 지역적 국제협력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은이가 주장하고 있는 제3의 길은 현재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한미FTA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물론 오늘날 지구화의 현실을 직시할 때, 대안적 지구화가 결코 쉬운 작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은이는 '지식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면서 낙관주의를 고수해야 한다며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고 미리 포기할 것이 아니라, 지은이의 주장처럼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 우리만 아니라 전세계가 공존·번영할 수 있는 세계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지구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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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 되풀이되는 연구 부정과 '자기검증'이라는 환상
니콜라스 웨이드.윌리엄 브로드 지음, 김동광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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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태가 몰고 온 우리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다. 어떻게 해서 과학자가 거짓 발표를 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우리는 과학이라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무엇보다 객관적 지식을 추구한다는 과학 자체가 가지는 특성상 기만 행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는 정신적 공황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과학에서마저 이러한 일이 일어나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우리 사회에서는 여태껏 논의되지 않았던 과학 사기, 과학과 윤리 등 과학의 이면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황우석 사태는 잃은 것도 많았지만, 반면에 얻은 것도 많았던 사건이었다. 많은 논의들이 있었지만 정작 과학에 왜 기만행위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접근이 미흡하여 못내 아쉬웠는데, 이 책은 그러한 과학 기만행위에 대해 '뉴욕 타임스' 과학기자로 활동했던 지은이들이 다양한 사례와 과학 기만행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전통적인 과학관


전통적인 과학관에 따르면 과학은 엄격하게 논리적인 과정이고 객관성이야말로 과학 연구의 기본적인 태도이며, 과학자의 주장은 "자기규찰 시스템" 즉, 동료들의 엄격한 검증과 실험의 재연을 통해 점검된다. 그리고 자기 검증 체계를 통해 모든 오류는 신속하게 그리고 가차없이 추방된다(본서 제9쪽 참조).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과학관으로는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최근까지 발생한 많은 과학 기만행위를 통하여 더 이상 적합하지도 유효하지도 않게 되었다고 하겠다.


지은이들은 히파르코스의 연구를 차용한 프톨레마이오스, 실험을 했는지 자체가 의심스러운 갈릴레오, 데이터를 조작한 뉴턴,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통계수치가 너무나 정확한 멘델 등 역사 속에 나타난 과학자들의 기만행위와, 과학자적인 양심보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다른 사람의 논문을 도용한 알사브티 사건, 연구 재연이 어려운 점을 이용한 키나제 캐스케이드와 관련한 실험을 조작한 스펙터 사건, 데이터를 조작하고 연구 경력도 조작하였지만 저명한 연구자 아래 있다는 이유로, 즉 엘리트 파워로 인해 동료평가과정을 면제받은 존 롱 사건, 펄서를 처음 발견하고 천체로서 펄서의 성질을 처음 인식한 사람은 대학원생 조셀린 벨이었지만 지도교수와 제자의 관계상 교수인 휴이시가 그 모든 공을 안은 휴이시 사건 등 최근에 일어난 과학 기만행위 등을 들면서 위와 같은 전통적인 과학관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과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비합리적 요소의 존재를 인정할 때만이 비로소 과학의 기만행위라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구조적인 문제


위와 같은 역사적 과학 기만행위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과학이 가지는 특성과 과학 내부에 잠재해 있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과학에서의 인정은 그 연구가 얼마나 독창적인지, 그리고 특정 사실을 누가 먼저 발견하였는지(先取權)에 따라 주어진다. 2등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정을 받고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얻으려는 열망과 함께 과학자들은 데이터를 조금 더 '다듬으려는' 유혹, 심지어는 이를 넘어서 날조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과학자들이 있는 것이다.


진리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실험실 내부에서는 오히려 가장 비민주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교수와 학생들 간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로 인하여 교수에 의한 학생들 또는 연구자들에 대한 노력의 착취가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그로 인해 착취를 당한 학생은 자신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고, 악순환은 계속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의 기저에는 과학의 외형주의, 성과주의, 출세주의가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당장 어떠한 결과물을 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일정한 결과물에 대해서만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 하에서는 기만행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규찰 시스템의 오작동


과학의 자기규찰 시스템을 구성하는 세 가지 메커니즘은 동료 평가, 심사위원 제도, 재연이다. 하지만 이는 현재까지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동료 평가 제도'나 '심사위원 제도'는 같은 집단 또는 엘리트 집단 내에 속해 있다는 점으로 인해 이를 면제받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미국 애리조나 주 전(前) 하원의원인 존 콘랜은 "참신한 아이디어나 중요한 과락적 발견을 질식시키는 근친상간적인 패거리 체계"라고까지 혹평을 하기도 한다.


'재연'은 논문에 실린 실험 방법의 불완전한 기술, 실험 장비와 재료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 재연에 대한 동기의 결여로 인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기만행위가 일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밝혀 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외부 기관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과학 기관들은 하나의 썩은 사과가 한 상자의 사과를 상하게 한다는 '썩은 사과' 이론을 내세워 이는 기만행위를 한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역설하고 자기규찰 시스템을 통하여 이 썩은 사과는 골라 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규찰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썩은 사과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는 사과가 든 통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즉 느슨하게 작동하는 자기규찰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건강한 과학을 위하여


과학은 종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논리나 객관성의 인도만 받는 것이 아니라 수사(修辭), 선전, 그리고 개인적 편견 같은 비합리적인 요인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즉 과학은 비합리성의 지배를 받으며, 과학 기술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적 제도이자 문화적 표현의 중요한 형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지은이들은 과학이라는 사회 조직은 출세주의를 조장하고 거기서 보상을 얻는데, 그런 조직의 특징들이 기만행위의 원인이 된다고 하며, 일련의 과학 기만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세가지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었다.


첫째, 과학자들은 엘리트주의에 대해 좀 더 의심해 보아야 하며, 특히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것을 하는 엘리트 연구기관의 젊은 슈퍼스타들에 대해서는 더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논문과 관련하여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모든 사람은 연구에 구체적으로 주요한 공헌을 했어야 하고, 공헌도가 낮은 사람에 대해서는 논문 본문에서 분명하게 사의를 표시해야 하며, 논문의 모든 저자는 공적을 취한 만큼 그 내용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너무 많은 논문은 검증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기만행위를 양산하는 계기가 된다며, 게재료 관행은 줄이고,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 기능이 논문 발간 영역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한다.


셋째, 좀 더 현실적인 태도가 대중과 과학자 모두에게 바람직하나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과학자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며 지적 창조에서 과학과 기타 활동이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결과물이 주어지지 않았다. 과학계나 정부에서는 다시는 황우석 사태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 개발과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했어야 하지만, 진지한 논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고 하겠다.


이미 10년 전에 국내에서 출간된 책이었다는 점에서 지은이들의 탁견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과학 기만행위에 대해서 이처럼 명확하고 속시원하게 이야기한 책은 없지 않나 한다.


과학 기만행위는 좁게 보면 과학에 국한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넓게 보면 이는 우리 사회 전반에 노정되고 있는 문제들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이 책을 통하여 과학에 실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여태까지 제대로 몰랐던 과학의 실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그래서 우리 과학에 희망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 과학의 건강을 위하여 과학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과학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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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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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과연 선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답게”라는 전제가 깔리면 그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 어법상 맞다. 그렇다면 선비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세워진 다음에 그 삶에 대해 논해 보아야 하는 것이 이야기의 순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비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비”라고 하면 의리와 예절을 숭상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재물과 관직을 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선비”는 신분계급상 무위도식하며 글이나 읽고 형식에 얽매여 사화나 당쟁을 일삼는 등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언급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아마 지은이는 선비를 전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지은이는 자신을 호고벽(好古癖)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우면서도 현재에 큰 의미를 던져주는 글과 삶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지은이는 선비들의 내면의 모습과 취미, 글, 그리고 공부와 책에 대한 주제로 선비들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로움

지은이는 선비들이 살아 생전 자기 묘지명을 직접 쓴 점이라든지, 일기를 13년간이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쓰며 자신의 생활을 정리한 생활자세와 절식문화를 강조한 성호 이익의 철학 등을 통해 선비들이 내면의 성찰을 중요시하고 마음을 비우는 관조적인 삶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물론 묘지명을 먼저 쓴다거나 아니면 일기를 13년 쓴 것으로 그러한 삶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역사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지은이가 언급한 것처럼 ‘쿨’하지 않은 다음에는 실천으로 옮기기 쉽지만은 않다고 하겠다.

취미를 넘어서는 매니아적 생활

벼슬길을 마다하고 오랜된 서화나 청동기 같은 골동품을 수집한 김광수의 수집벽은 18세기의 시대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였을런지도 모르지만, 그의 수집열은 단순한 취미생활을 넘어서서 광적인 수준이었다고 하겠다.

여기에 수집한 서화에 대해 자신의 감상을 기록한 제발이나 시를 쓰거나 편지를 쓰기 위한 시전지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서평군은 유럽 귀족 사회의 살롱문화에 비견될 정도로 예술가들에 대한 열렬한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앗다고 한다. 이는 생활과 삶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물론 타고난 재력을 바탕으로 할 일이 없으니 문화생활이니 취미생활이니 하면서 즐긴 것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예술가들을 모으고 그 후원자가 되기를 청했다는 것은 그러한 비난과는 상관없이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글에 죽고 글에 사는

선비들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나 친구나 지인들에 대한 애뜻한 감정을 시로 쓰거나 아니면 간단한 편지로 마음을 전하였는데, 요즘과 같은 편리한 세상과 달리 당시의 통신수단은 편지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으므로 편지나 시 등과 같이 사람의 사상과 담긴 글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보였다. 이는 개인적인 글 뿐만 아니라 나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는 ‘종계변무宗系辨誣’사건, 인조반정을 찬역으로 간주한 <명사明史>의 오류를 바로잡은 ‘명사변무明史辨誣’사건, 김택영의 역사뒤집어 보기 등은 글을 한 나라와 한 시대의 영혼이라고 생각한 선비들의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특히 종계변무 사건이나 명사변무 사건이 그 자체로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중국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망언과 관련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여유 있는 시간을 기다려 책을 읽고자 하면 한 해를 마칠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없다. 여유가 있을 때를 기다려 남을 구제하려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남을 구제할 시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여유가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옛사람은 “한가로울 때도 바쁜 한 순간이 있듯이 바쁠 때도 한가로운 한 순간이 있다”라고 하였다. 어찌 독서만이 그러랴? 무릇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자신을 반성하는 도구로 삼아야 하리라. 이 이야기를 적어두어 옛일을 본받고자 한다.“(본서 제244쪽 참조)라고 한 박규수나 <사기史記>의 <백이전伯夷傳>을 1억 1만 3,000번을 읽은 김득신의  이야기는 이들이 얼마나 글을 숭상하였는지를 알게 한다. 그야말로 글에 살고 글에 죽은 삶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보다는 '선비들의 삶과 인생'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비사회의 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지은이가 보여주는 선비들의 삶은 그야말로 펄펄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기존에 알고 있었던 선비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는 점에서 무척 뜻깊었으며, 오늘날 이러한 선비정신을 디지털 시대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우리들만의 고유문화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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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이력서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양영란 옮김, 오영욱 그림 / 예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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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만들고, 땅도 만들고, 짐승도 만들고, 마침내 인간을 만들어 천지창조의 위대한 과업을 마치신 하느님,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은 무력감에 어느 날 갑자기 깊은 우수에 빠져 들었다. 하느님은 새로운 일거리를 ?아보기로 결심하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준비하여, 일반인들처럼 대기업 인사부에 접수하였고, 대기업 인사부장으로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지상으로 내려 온다.

하느님이 입사면접을 본다는 독특한 설정으로부터 파생되는 각종 유머와 위트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 대한 통렬한 일침을 가하려는 것이 지은이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하느님은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 낸 별이 빛나는 밤대신 인간들은 텔레비전이나 바라볼 뿐이고, 인간들을 위해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었지만 자동차라는 것을 만들어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고 불평을 하며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 낸 피조물 중에서 가장 큰 실패작이라고 하소연 한다.

하느님을 입을 통하여 인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책은 종교서적은 아니다. 단지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인간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아니, 무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구의 법정 용익권을 인간들에게 넘깁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비용으로 지구를 관리하고 고장 난 곳은 고쳐야 합니다. 허유권은 내 아들에게로 갑니다(나는 내 아들로부터 상속권을 박탈하고 싶지만, 현행법으로는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들로 인해 상아가 잘린 모든 코끼리들과 뿔이 잘린 모든 코뿔소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또한 이 지구를 자기들이 처음 물려받았을 때처럼 늘 깨끗하고 청결하게 유지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본서 164쪽 참조)“라는 하느님의 유언을 남겼다.

인사부장과의 면접을 볼 때 인간이 자기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실패작이라고 이야기 하였던 하느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며 인간들에게 위와 같은 당부를 하며, 여전히 인간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하느님의 모습은 이 책에서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주 설득력있게 전해 주고 있다. 다만 프랑스식 위트와 유머는 문화권이 다른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작은 문고본인데다 그림도 많고 여백도 많아 읽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사족으로 하느님은 대기업 면접시험에 불합격 했답니다. 인사부장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과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여 경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며 불합격결정하기로 하였다고 통보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 대해 보이는 애정에 비해 인간은 하느님에게 너무 박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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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 브루노 발터가 만난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지음, 김병화 옮김 / 마티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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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한 사람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평생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당대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여기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인 부르노 발터가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라 칭송받는 구스타브 말러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보이는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말러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에 버금갈 정도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그는 9개의 교향곡과 ‘대지의 노래’를 포함한 7개의 가곡을 완성했다. 그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에 비해 모든 음악적 기법을 사용하였고 풍부한 감정의 묘사에 주력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찬반의 극단적인 견해들이 많이 눈에 띈다. 광신도적인 열정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기존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18세 때 말러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음악적 동료로 지내오면서 ‘인간 말러’를 바라보고 있다. 1부 ‘회상’에서는 말러와의 첫만남을 시작으로 함부르크, 슈타인바흐, 빈 등지에서의 말러의 삶을 그리고 있고, 2부 ‘성찰’에서는 오페라 감독, 지휘자, 작곡가로서의 말러와 그의 인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2부에서는 말러의 작품에 대한 발터 자신의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말러를 이해하는데 있어 더없이 좋은 것 같다.

“폴리니와의 첫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거기, 극장의 사무실에 그가 있었어요. 몸집이 작고 창백하며 여윈 사람이었습니다. 길쭉한 얼굴에 고상한 이마를 칠흑 같은 머리칼이 에워쌌고, 안경 뒤의 눈은 아름다웠습니다. 얼굴에는 슬픔과 유머가 감도는 주름살이 져 있었고, 입을 열어 주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시작하자 놀랄 만큼 다양한 표정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크라이슬러의 화신, 호프만 환상 소설의 젊은 독자가 상상한 것처럼 인상적이고 악마적이며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지휘자였습니다.”(본서 제25쪽 참조) 라고 지은이가 말러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만큼 말러에 대한 애정이 넘쳐 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시종일관 지은이의 말러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존경이 넘쳐 흐른다. 심지어는 그의 괴팍한 성질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이처럼 지은이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정도로 말러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자체가 지은이가 바라본 말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위와 같은 지은이의 시선은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은이인 발터의 음악적 견해를 이해하는데 일조하고 있어 두 거장들의 숨결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발터가 지휘하는 말러의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음미해보는 것도 이 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지은이가 “여러 해 뒤, 내 영혼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거치면서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던 시기가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말합니다. 그때 존재 깊숙한 곳에서 느꼈던 그대로 그의 영향은 나의 전 생애에 내린 축복이었다고.”(본서 제34쪽 참조) 라고 말한 것처럼, 말러가 지은이의 음악에 있어서 뿐 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하고, 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진정한 친구가 한 사람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는데, 갑자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런 친구가 떠오른다. 많은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인생의 친구로서 말러를 바라본 지은이의 애정어린 시선이 부럽기만 하다. 그런 든든한 인생의 후원자가 있어서 말러의 작품이 더 아름답고 훌륭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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