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존 쉘비 스퐁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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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화하지 않고, 합리화하지 않고, 모든 의문과 현상과 현장에 정직하게 맞서 나가는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의 모든 문제의식과 진단과 분석에 공감한다. 그가 학자만이 아닌 현장의 목회자이기 때문에 그의 문제의식은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시대와 교회와 사람을 끌어안고자하는 목회적 양심, 지성을 얼버무린 맹목적 신앙에 대한 회의, 신학과 신앙과 현장을 조화시키고자하는 열정. 이 모든 것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여전히 공허하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양심이 예배할 수 없다"는 그의 공언은 지성의 메아리는 깊이 울릴지라도, 삶의 모든 면을 다 어우를 수는 없는 것이다. 더 깊이 아파보고, 더 깊이 부딪혀보고, 더 깊은 절망의 나락을 경험한 사람들은 신앙을 머리로만 영위하지 못한다.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그의 개혁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나, 내가 경험한 타인들은 저자처럼 강하지도, 의롭지도, 영특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혼란은 인간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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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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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자 그저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내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토록 긴 울림을 남기는 이야기는 흔치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아프리카에서 유괴당한 한 흑인 소녀가 아랍지역을 거쳐 프랑스와 미국을 떠돌다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소녀는 긴 여정 속에서 사람들(좋은 혹은 나쁜)을 만나고, 위험을 만나고, 사랑과 우정을 만나고, 고독과 죽음을 만난다. 이 긴 여정에서 소녀는 실로 연약한 물고기이다. 탁류에 휘말리고 올가미에 걸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유롭고 순수한 영혼은 잔인한 세파를 뚫고 유영한다. 근원을 향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그녀는 황금물고기였기 때문이다.

  소녀의 여정을 따라가며 소녀가 겪어야했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내내 불편했다. 그러나 그녀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따라가는 것은 몽환적이었다. 오랜만에 정서적인 해방감을 맛보기도했다. 사람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나도 덩달아 자유로와지고 순수해지는듯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내 르 클레지오가 남자가 맞나 하는 의문을 던지곤했다. 심지어 동성애자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그 어떤 작가도 르 클레지오보다 더 섬세하게 여성을 묘사하긴 힘들거라 생각한다. 그 섬세한 감수성을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의 문장은 하나 하나가 팔딱 팔딱 살아 숨쉬는 황금물고기같다. 그의 문장은 때로 섬광같은 속도로 치고나가다도 촉촉하게 독자를 적신다. 실로 그는 남자가 아니라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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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r paralytic, "Son, your sins are forgiven" 막2:5

네 명의 남자가 자기들의 친구를 예수 앞으로 데리고 가길 원했다. 군중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에 친구를 데려다 놓을 수 없자, 지붕에 구멍을 뚫고 예수님 앞에 친구를 내려놓는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친구를 고쳐주신다.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신다. 대체 예수님은 친구들의 어떤 믿음을 보신 것일까?

  그 친구들은 예수님이라면 자기들의 친구를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믿음은 그 친구를 고쳐주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친구를 사랑하는 그들의 우정이 있었기에 지붕이라도 뚫어서 예수님께 데리고오고자 했을 것이다.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예수 의존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인정하고 그 친구를 고쳐주신 것이 아닐까? 실제로 예수님의 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종교적 전통이나 형식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누누히 강조하셨다. 세리와 어부를 제자로 부르시고,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시고(16),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시지 않았는가(27)! 예수님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며 형식보다 사람사랑이 중요하다고 복음서 곳곳에서 밝히셨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로서 사람 사랑의 본질을 먼저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새 바른 그리스도인이란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교회의 전통을 잘 따르고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고 조직의 논리에 충실한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다. 예수님이 깨뜨린 바로 그 모습을 회복(?)하고 있다. 자기들과 다르면 틀린 것이고, 자기들의 정한 규칙과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 매도하기 일쑤이다. 예수님이 보시면 얼마나 한탄하실까?

  사람들을 끌어안자. 세리와 죄인들과 기꺼이 친구가 되신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자. 형식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본질을 추구하자. 예수님처럼 사람사랑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무너뜨리자. 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돕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자. 예수님처럼 만인의 친구가 되자.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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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2010 부산시 원북원 후보도서
김곰치 지음 / 산지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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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평론가들의 평이 어떻든 간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몹시 분노했고 슬펐다. 엉뚱하게도 나는 작가의 한 인용구를 마주친 후 충격, 분노, 슬픔에 빠져버렸다.

"이 세상 어떤 숭고한 혁명도 일주일이면 타락한다."

버틀란드 러셀의 말이다. 어딘가에 깊이 헌신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갖는 적실성과 파괴력에 몸부림 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작가의 인간애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기에 사람에 대한 종교의 억압에 대해 작가는 분노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없게 하는 종교의 치졸한 굴레를 작가는 혐오하고 저주한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리하여 신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외면할 수 없는 작가는 슬퍼한다. 깊이 공감하기에 나 역시 분노하고 슬퍼할 수 밖에 없다.

신은 존재할 수 있다. 신은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여리고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한 신과 나약한 인간 사이에 조직화된 종교가 등장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전능한 신을 무기로 삼아 종교는 나약한 인간을 협박하고 억압하고 지배한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가 으뜸이다. 자기들이 정해 놓은 방식으로 믿고 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협박한다. 한 편으로 자기들이 정해 놓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살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전한다. 여기에 포섭된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즐길 여유와 감성을 상실하게 된다. 깊이 헌신한 사람일수록 배타적이 되고 외곬수가 되기 마련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반쪽자리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전능한 신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세상과 아름다운 사람들. 마음껏 즐기며 살아도 인생은 짧다. 그 어떤 혁명도, 가치도, 이데올로기도 인간의 전생애와 전인격을 다 바칠만한 숭고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 신의 피조세계를 누리고 즐기고 살아가야 한다. 충분히 즐기고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느끼며 살아가도록,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종교여 이제 그만 이 길에서 물러나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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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with leprosy came to him and begged on his knees,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Fill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I am wiliing," he said. "Be clean!"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ured. 막1:40-42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앞에 무릎꿇은 한 문둥병자, 지극한 마음으로(Filled with compassion) 손을 뻗어 만져주시며(touched) 고쳐주시는 예수 .

수십번을 읽었지만 그야말로 명장면이 아닌가. 만일 내가 화가라면 꼭 그려보고 싶은 장면이다. 이 장면이야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대변해주고 있는듯하다.

살아갈수록 결핍을 느낀다. 감정, 정서, 돈, 사람, 관계, 꿈, 심지어 가족까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은 나를 죄 속으로 밀어넣는다. 결핍을 메우기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한 결핍이 채워지면 또 다른 더 큰 결핍이 생성되어 나를 옭죈다. 결국 결핍은 채워지지 않고 더 많은 결핍을 안은채, 설상가상으로 더러워지고 난잡해진 나를 발견케된다. 이 모습이야말로 정확히 문둥병자가 아닌가. 더 이상 스스로는 결핍을 메울 수 없어 위험을 무릎쓰고 예수 앞으로 달려나온 그 문둥병자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 아니던가.

생각할수록 명장면이다.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명장면이다. 그 어떤 예술도, 장관도 감당해낼 수 없는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장면이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글로써 만나 머리로만 그려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나는 오늘 아침 이 장면을 그려보며 감동에 못이겨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광경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는 예수, 그는 문둥병자, 그리고 문둥병자는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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