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VS 사람 - 정혜신의 심리평전 2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정혜신은 처음 읽었는데 깜짝 놀랐다. 지금 심정으로는 그녀의 남은 책을 다 읽고싶다. 강준만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부드럽고 섬세한 터치가 있다. 시원하고 후련하면서도 무언가 여운이 남는다. 때로는 "이건 아니잖아"하면서도 책장은 정신없이 넘어간다. 단언컨데, 정혜신은 전업작가로 나서도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정혜신의 글빨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이 책을 탐닉하다보니 어느새 마지막장이 되어 있었다. 어찌나 글을 맛있게, 멋있게 쓰는지 푹 빠져들고 말았다.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투자는 본전을 건지고도 남는다. 거기다가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저자에게 심리분석 지식과 방법론을 맛배기로나마 주워들을 수 있으니 만족도는 배가되고도 남는다.  놀라운 것은 저자의 엄청난 사회과학적 지식과 정보량이다. 필시 소시적부터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진보적이긴 하지만 문제의식도 한 두해에 걸쳐 생성된 것은 아닌듯하다.  편견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지나친 주장도 적지 않지만 그녀의 전방위적인 지식과 글쓰기는 독자의 지적 욕구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남자 독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십번을 멈추어서야 했다. 저자가 수십번 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정혜신이 남자보다 남자를 더 잘 아는 여자라는데, 그 말이 실감이 났다. 귀에 거슬리는 말도 적지 않았지만,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지적 만족과 책 읽는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한계의 상황에서(막5장)

마가복음 5장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치유사건이 기술되어 있다. 가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 야이로의 딸 등이다.

이 세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귀신들린 남자는 아무도 쇠사슬로 묶어 놓을 수 없었고,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3-4). 게다가 무덤 사이에 살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었다(5). 도저히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병을 고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한듯하다. 그러나 돈만 다 없애고 상태만 더 악화되었다(26).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었고, 돈으로도 감당이 안 되었다.

야이로의 딸은 죽었다. 사람들은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하였다(35). 소녀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당연히 사람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이 세 가지 경우의 세 사람은 이미 인간의 범위와 한계를 벗어난 고통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경제력(여인)과 지위(회당장)와 힘(귀신들린 자)으로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이 때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이 세 사건을 해결하시고, 세 사람을 구원해주셨다. 이 기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일까?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주를 다스리는 전능을 소유하신 분임을 믿으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한계에 부딪히는가? 그 한계를 만날 때마다 예수님을 초청해야 한다. 예수님을 그 한계의 현장으로 모셔오고 현실을 보여드리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그 한계를 넘어보아야 한다. 그 경험이 쌓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계를 만날 때마다 힘을 찾고, 돈을 찾고, 지위를 찾는 우를 범한다. 예수님을 모셔올 생각보다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해결될 길도 없지만, 해결된다 해도 내가 해결했으니 믿음이 자랄 리 만무하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한계의 자리로 내모신다. 아브라함처럼, 한나처럼, 히스기야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순종과 기도로 반응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시고 신성과 능력을 보여주셨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이 자기네 지역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15-17).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돼지를 보호하는 일이 더 중요하였다. 혹시 자기들의 돼지도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고도 말이다. 그들은 영적 관심과 열망이 없었던 것이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무리들 틈 속에 있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개인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두려웠지만 예수님께 나가기로 결정했고,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33-34)

회당장은 비관적인 보고를 받았으나 예수님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두려움 없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36-38).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나가는 사람,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2. 고통이 연달아 밀려올 때(욥1:13-22)

어느 날 일꾼 하나가 욥을 찾아와 가축과 종을 약탈당했다는 비관적인 소식을 전한다(14-15). 이 일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일꾼이 찾아와서 양 떼와 목동을 모두 잃게 되었다고 보고한다(16). 이 사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일꾼이 낙타를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17). 이 사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자식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청천 벽력같은 비보를 전한다. 욥이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폭포수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참으로 감당키 어려웠다.

이상하게도 어려움은 연달아 일어난다. 한 고통을 감당할 힘도 없는데, 또 다른 고통이 엄습해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데, 그리스도의 제자인데 왜 이렇게 고통이 연달아 일어난단 말인가?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이 고통스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에 빠진다. 어려움을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 대한 원망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려움을 죄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욥의 반응을 보라.


이때에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1:20-22.


연속된 고통을 맞이하는 여러 자세가 있다. 원망, 죄, 도피......

그러나 욥은 이 현실을 하나님께 가져가기로 결정한다. 오히려 신앙을 고백하고 원망하지도 않고 죄도 짓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연속된 고통이 올 때 원망하거나 죄 짓지 않고 하나님께 그 고통을 들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석제만한 이야기꾼이 또 있을까. 바로 내 옆에 앉아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그는 아주 황당하지만 갖은 양념을 섞고 버무려 귀가 솔깃할만한 이야기로 빚어내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숨도 고르지 못하고 이야기에 빨려들만큼 재미가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참으로 남루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친근하다. 마냥 동정하고 싶다.  김화영의 말처럼 속수무책으로 엉뚱하고 정다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편으론 허무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다. 웃다가 울다가, 엉뚱하다가 진지하다가, 황당하다가 리얼하다가......성석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생 뭐 있어" 하는 말이 나올법 하다. 그래도 여러 사람 만나고 얻는 정서적 만족은 예사롭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워 전도서
전병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참으로 탁월한 책이다. 아니 참으로 탁월한 설교이다. 설교자의 깊은 묵상과 연구, 도저한 삶의 성찰이 어우러져 청중(독자)의 영혼을 자극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를 보게 되고, 사람에 대한 선입관이 조정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저자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최근에 저자의 책을 여러 권 읽으며, 그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본서는 가장 영향력이 큰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매일 한 장씩 읽으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저자의 큰 힘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가르침에 있다. 자연스레 따라가다보면 엄청난 감동과 능력에 부딪히게 된다.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움직인다. 달변이 달변에 그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달변과 영성을 동시에 소유했다.

저자의 설교는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깊은 연구에 바탕한 탄탄한 해석의 기초 위에서 다양한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도서의 메시지를 현대인의 삶에 적실하게 옮겨주었다. 전도서의 깊이와 능력이 삶의 다양한 영역에 고루 고루 뿌려졌다. 내 삶에 연결되지 않는 가르침은 얼마나 공허한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가르침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본서의 생동감은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새벽 2시 50분에 일어나서 독서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 때문일까. 그의 깊은 인간이해와 독서의 경험은 매우 적합하고 사실적인 적용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시간의 독서와 기도와 관찰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그의 설교를 듣는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사실 나는 저자의 모든 가르침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나름의 신학과 신앙이 있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다른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깊이와 열정과 지혜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설교자로서 그의 진지한 자세와 성실성은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하나님 나라는 자라고 있다(막4:26-29).

씨앗을 뿌려본 적이 있는가? 땅에 심기고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멈추어 있는 것 같지만, 자라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 없지만, 자고 일어나면 자라 있다. 스스로,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막4:26-29.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자라고 있고, 전진하고 있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고 완성될 것이다. 비가시적이고 직접 인지하지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계속 전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현실이 암울하고 답답하더라도 낙담할 이유가 없다. 낙담과 섣부른 판단으로 인한 비관과 실망은 사탄의 선물이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정진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나가떨어지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정도를 걸을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가져야 한다. 믿음이 필요하다.


2. 아직도(막4:40-41)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생생한 치유의 현장과 교육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가르침은 모두 처음 경험하는 신비였다.

  그러나 믿음은 보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가르침을 보고 듣고 느끼고 감탄했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믿음이 발휘되지 않았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자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깨웠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고함을 질렀다. 그 때 예수님은 바다를 고요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이 내게는 탄식으로 들린다. 아직도, 아직도......

믿음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선택의 순간에,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는 순간에,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한 그 순간에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누구인지 모르기에 당연히 믿을 수도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행동하고 선택하고 살아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험한다. 보고 듣고 느낀 예수님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한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더 쉽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 수 있다.

이 아침 주님의 음성이 귓가에 남아 맴돈다.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아직도 나를 못 믿느냐? 아직도 나를 찾지 않느냐?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3. 영적 지도력(스7-10장).

영적 인도자의 가르침.

에스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에 통달한 학자였다.(7:11-12, 21).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율법 지식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확고한 원칙과 기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율법은 깊이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연구하고 지킨 율법은 헌신적으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연구해서 지키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때 그의 영향력은 힘을 발휘했다. 연구와 깨달음과 실천이 합쳐진 가르침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하다(마:5-19; 행1:1; 딛1:16).

영적 인도자의 리더십.

에스라는 귀환자들을 이끌고 온갖 위험을 견뎌낸 후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충격적인 보고를 받는다(9:1-2).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이방인의 역겨운 일을 따라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에스라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주저앉고 말았다(9:3). 그는 백성들의 타락을 보고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9:5).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죄로 인해 몹시 슬퍼했다. 결국 그는 백성들의 죄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자기가 인도하는 이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 인도자이다(마5:4).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자기 죄로 여기고 자기와 일체화시켜 책임있는 기도를 드렸다. 자신은 무고했지만 백성들의 죄가 곧 자기 죄이고 우리 모두의 죄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영적 인도자는 책임지는 기도를 한다(느1장, 단9장). 에스라도, 다니엘도, 느헤미야도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

에스라의 슬픔과 금식(10:6)은 영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10:1). 이것은 백성들에게 영적인 희망을 주었고(10:2), 자발적 회개와 헌신을 불러왔고, 영적 지도력에 대한 지지와 순종을 이끌어냈다(10:3-4). 영적 인도자는 영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분위기는 모범으로 조성할 수 있다. 먼저 기도하고 금식하고 애통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에스라의 지도력은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쳤고, 이들 모두로 하여금 영적 갱신의 결정을 하게 하였다.


4.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롬4:17-22)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롬4:17.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는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대단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순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머리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일상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축소되어 있는가. 죽음에서 생명을 뽑아내시는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 내 삶에도 계신가. 믿음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그는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고 믿었다. 빈약한 현실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비하면 내 믿음의 질은 어떠한가. 쉽게 굴복하고, 판단하고, 약해지고, 흔들리고, 흐려지지 않았는가? 믿음의 질을 바꾸어야 한다. 약해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