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 나라는 자라고 있다(막4:26-29).
씨앗을 뿌려본 적이 있는가? 땅에 심기고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멈추어 있는 것 같지만, 자라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 없지만, 자고 일어나면 자라 있다. 스스로,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막4:26-29.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자라고 있고, 전진하고 있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고 완성될 것이다. 비가시적이고 직접 인지하지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계속 전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현실이 암울하고 답답하더라도 낙담할 이유가 없다. 낙담과 섣부른 판단으로 인한 비관과 실망은 사탄의 선물이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정진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나가떨어지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정도를 걸을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가져야 한다. 믿음이 필요하다.
2. 아직도(막4:40-41)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생생한 치유의 현장과 교육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가르침은 모두 처음 경험하는 신비였다.
그러나 믿음은 보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가르침을 보고 듣고 느끼고 감탄했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믿음이 발휘되지 않았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자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깨웠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고함을 질렀다. 그 때 예수님은 바다를 고요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이 내게는 탄식으로 들린다. 아직도, 아직도......
믿음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선택의 순간에,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는 순간에,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한 그 순간에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누구인지 모르기에 당연히 믿을 수도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행동하고 선택하고 살아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험한다. 보고 듣고 느낀 예수님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한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더 쉽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 수 있다.
이 아침 주님의 음성이 귓가에 남아 맴돈다.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아직도 나를 못 믿느냐? 아직도 나를 찾지 않느냐?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3. 영적 지도력(스7-10장).
영적 인도자의 가르침.
에스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에 통달한 학자였다.(7:11-12, 21).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율법 지식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확고한 원칙과 기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율법은 깊이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연구하고 지킨 율법은 헌신적으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연구해서 지키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때 그의 영향력은 힘을 발휘했다. 연구와 깨달음과 실천이 합쳐진 가르침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하다(마:5-19; 행1:1; 딛1:16).
영적 인도자의 리더십.
에스라는 귀환자들을 이끌고 온갖 위험을 견뎌낸 후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충격적인 보고를 받는다(9:1-2).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이방인의 역겨운 일을 따라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에스라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주저앉고 말았다(9:3). 그는 백성들의 타락을 보고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9:5).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죄로 인해 몹시 슬퍼했다. 결국 그는 백성들의 죄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자기가 인도하는 이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 인도자이다(마5:4).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자기 죄로 여기고 자기와 일체화시켜 책임있는 기도를 드렸다. 자신은 무고했지만 백성들의 죄가 곧 자기 죄이고 우리 모두의 죄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영적 인도자는 책임지는 기도를 한다(느1장, 단9장). 에스라도, 다니엘도, 느헤미야도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
에스라의 슬픔과 금식(10:6)은 영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10:1). 이것은 백성들에게 영적인 희망을 주었고(10:2), 자발적 회개와 헌신을 불러왔고, 영적 지도력에 대한 지지와 순종을 이끌어냈다(10:3-4). 영적 인도자는 영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분위기는 모범으로 조성할 수 있다. 먼저 기도하고 금식하고 애통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에스라의 지도력은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쳤고, 이들 모두로 하여금 영적 갱신의 결정을 하게 하였다.
4.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롬4:17-22)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롬4:17.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는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대단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순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머리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일상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축소되어 있는가. 죽음에서 생명을 뽑아내시는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 내 삶에도 계신가. 믿음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그는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고 믿었다. 빈약한 현실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비하면 내 믿음의 질은 어떠한가. 쉽게 굴복하고, 판단하고, 약해지고, 흔들리고, 흐려지지 않았는가? 믿음의 질을 바꾸어야 한다. 약해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