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계의 상황에서(막5장)

마가복음 5장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치유사건이 기술되어 있다. 가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 야이로의 딸 등이다.

이 세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귀신들린 남자는 아무도 쇠사슬로 묶어 놓을 수 없었고,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3-4). 게다가 무덤 사이에 살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었다(5). 도저히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병을 고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한듯하다. 그러나 돈만 다 없애고 상태만 더 악화되었다(26).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었고, 돈으로도 감당이 안 되었다.

야이로의 딸은 죽었다. 사람들은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하였다(35). 소녀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당연히 사람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이 세 가지 경우의 세 사람은 이미 인간의 범위와 한계를 벗어난 고통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경제력(여인)과 지위(회당장)와 힘(귀신들린 자)으로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이 때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이 세 사건을 해결하시고, 세 사람을 구원해주셨다. 이 기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일까?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주를 다스리는 전능을 소유하신 분임을 믿으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한계에 부딪히는가? 그 한계를 만날 때마다 예수님을 초청해야 한다. 예수님을 그 한계의 현장으로 모셔오고 현실을 보여드리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그 한계를 넘어보아야 한다. 그 경험이 쌓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계를 만날 때마다 힘을 찾고, 돈을 찾고, 지위를 찾는 우를 범한다. 예수님을 모셔올 생각보다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해결될 길도 없지만, 해결된다 해도 내가 해결했으니 믿음이 자랄 리 만무하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한계의 자리로 내모신다. 아브라함처럼, 한나처럼, 히스기야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순종과 기도로 반응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시고 신성과 능력을 보여주셨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이 자기네 지역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15-17).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돼지를 보호하는 일이 더 중요하였다. 혹시 자기들의 돼지도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고도 말이다. 그들은 영적 관심과 열망이 없었던 것이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무리들 틈 속에 있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개인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두려웠지만 예수님께 나가기로 결정했고,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33-34)

회당장은 비관적인 보고를 받았으나 예수님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두려움 없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36-38).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나가는 사람,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2. 고통이 연달아 밀려올 때(욥1:13-22)

어느 날 일꾼 하나가 욥을 찾아와 가축과 종을 약탈당했다는 비관적인 소식을 전한다(14-15). 이 일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일꾼이 찾아와서 양 떼와 목동을 모두 잃게 되었다고 보고한다(16). 이 사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일꾼이 낙타를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17). 이 사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자식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청천 벽력같은 비보를 전한다. 욥이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폭포수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참으로 감당키 어려웠다.

이상하게도 어려움은 연달아 일어난다. 한 고통을 감당할 힘도 없는데, 또 다른 고통이 엄습해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데, 그리스도의 제자인데 왜 이렇게 고통이 연달아 일어난단 말인가?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이 고통스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에 빠진다. 어려움을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 대한 원망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려움을 죄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욥의 반응을 보라.


이때에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1:20-22.


연속된 고통을 맞이하는 여러 자세가 있다. 원망, 죄, 도피......

그러나 욥은 이 현실을 하나님께 가져가기로 결정한다. 오히려 신앙을 고백하고 원망하지도 않고 죄도 짓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연속된 고통이 올 때 원망하거나 죄 짓지 않고 하나님께 그 고통을 들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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