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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저녁이었습니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요즈음 해가 길어졌습니다. 퇴근 시간 지하철을 견디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날이 밝습니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흔한 말이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별이 떠 있었습니다. 스케치북에 별을 그리면 왜 항상 노란색으로 칠했을까요? 별은 노랗다, 는 불변의 공식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본 별은 하얬습니다. 파르스름한 배경에 콕 박힌 흰 점, 수명이 다 한 형광등 불빛처럼 때로 흔들리는 불빛이, 별이었습니다. 어, 그런데…… 저건 별이 아닙니다. 초저녁 동쪽 하늘에, 이런 밝기를 유지할 수 있는 별은 없습니다. 맞아요. 금성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그것보다는 작고 희미하지만 역시 밝은 흰 점이 놓여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건 목성이었습니다. 지구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멀리 떨어진 두 개의 행성이 별자리처럼 나란히 빛났습니다. 신기하네. 신기한데 이상했습니다. 저토록 조그마한 흰 점이, 실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물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반대로, 어마어마한 원주를 가진 두 행성이 한낱 먼지처럼, 스케치북에 그려진 노란색의 별보다 작은 크기로 보인다는 게, 그것을 한눈에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이쯤에서 리처드 파인만의, 그 유명한 문장을 빌리겠습니다. 창백한 푸른 점. 지구입니다. 먼 우주에 나가 뒤돌아보자,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주광선 위에 놓여, 신호가 없었더라면 발견할 수도 없었을 만큼 작은 점이었습니다. 우주는 얼마나 광활한가요. 창백한 푸른 점 위에 서 있는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요. 김수영의 시를 빌리겠습니다.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수차례의 전쟁과 막대한 부, 권력, 그리고 명예. 얼마나 부질없고 하찮은 것이었나요. 우리의 일생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징병되어 잃은 목숨, 권력에 휘둘리고 명예에 짓눌리는, 그 어떤 것도 이뤄내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무가치한가요. 금성과 화성조차 한낱 먼지로 보이는 이 우주에서, 한 사람의 육체는 무엇으로 보일까요. 신은 우리를, 너무 작은 탓에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성공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기술을 연마하고, 학문을 닦고, 이곳저곳 발품을 팔고, 여차하면 밤을 새기도 합니다. 지난한 노력을 겪은 끝에 그들은 무엇이 되나요. 인간은 특별해지길 소망합니다. 큰 부자가 되길,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길, 추종자를 거느리는 미남자가 되길, 새해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기도합니다. 굳이 긴 문장들을 끌어오지 않아도, 우리의 삶이, 일생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가 우러르는 부와 명예와 권력의 소유자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황정은은 소라나나나기,의 세 표본을 통해 이를 증명합니다. 아니, 표본은 더 많습니다. 애자, 순자, 너, 소라와 나나의 할머니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는 아픔을 가졌습니다. 겉보기에 그들은 순탄하고, 어쩌면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행패를 부리고, 소위 막 나가는 삶을 저 또한 꿈꾼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대신 도시락을 싸주는 이웃이 있고, 일본 유학을 다녀와 본인만의 가게를 차려 소소하게 꾸려가는 삶, 따뜻하고 소박합니다. 한강의 소설을 빌리겠습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우린 절반의 진실밖에 보지 못하는 건가요? 아빠가 보는 건 내가 못 보고, 내가 보는 건 아빠가 못 보잖아요.
인간은 자신의 뒷모습은 보지 못합니다.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황정은은 이들의 뒷모습을 담담히 묘사합니다. 이를 보지 못하는 한, 피 흘리는 달의 뒷면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보잘것없고, 하찮지 않겠느냐고, 아프게 질문합니다.
인간은 외롭습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하나뿐인 부족으로 멸종해갈 뿐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혼자, 죽는 것도 혼자입니다. 죽으면 그뿐인 인생이므로 허망합니다. 죽음마저도 보잘것없고, 하찮은, 그것이 인간입니다. 아,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요? 속절없이 무너지고, 가라앉고, 보잘것없고 하찮은 죽음을 맞이할 바에야,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요?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너에게 입을 맞춰 보지도 못했을 거니까요.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요. 매일 아침 조달한 고등어로 만든 초절임을 맛있게 먹고, 한자리에 모여 만두를 빚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종이로라도 꽃을 접어 벽을 꾸밀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가요.
황정은은 끝끝내 고백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것을 이뤄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혼자여도 괜찮습니다. 사랑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아파도 괜찮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사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제 옆에는, 그렇게 사는, 함께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피 흘리는 뒷면을 가진, 하나뿐인 부족으로 사라져가는, 누군가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럼에도, 계속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