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였나 낮에 낮잠을 조금 잔 관계로 밤에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난 이럴 경우 2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책을 꺼내 읽는 경우이고 또 하나의 경우는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는 것이다.

특히나 유난히 잠이 오지 않을때 읽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은 나에게 있어선 최고의 수면 치료제이다. 읽는 도중 몇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느샌가 보면 난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하나의 해결책은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는 경우인데 이럴 경우는 책을 읽는 것 보다는 조금 귀찮아진다.

우선 음악을 듣는 경우는 CD를 꺼내기 위해 침대에서 어쩔수 없이 일어나야만 하고 한동안 뭘 들을까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기 때문에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해야 한다. 또한 밤인 관계로 어쩔수 없이 헤드폰을 껴야 하는데 이 헤드폰이 문제다. 헤드폰을 끼게되면 몸을 뒤척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자면서 자주 몸을 뒤척이는 사람일 경우에는 절대 해서는 안될 행위이기도 하다(특히나 내 여자친구처럼 옆으로 누워자는 사람은 하고 싶어도 절대 못한다.또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는 나는 헤드폰을 자주 끼면 난청이 될 수 있다는 경고기사를 읽은 후로는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헤드폰을 피하기도 한다.)

 

맨눈으로 밤을 지새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때 나의 Best Choice는 언제나 푸르니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prelude를 감동에 떨며 듣다가도 3번의 sarabande 쯤 가면 난 어느새 잠들어 있다.(대체 난 언제쯤이나 가야 맨정신으로 무반주 첼로조곡 전부를 들을 수 있을 건지 원! )

 

잠이 오지 않아 TV를 어쩔수 없이 봐야할 경우 난 주로 홈쇼핑을 주로 본다. 난 원래가 홈쇼핑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여자친구가 홈쇼핑을 즐기는 관계로 자연히 그쪽 세계(?)를 알게 되었고 또 그게 은근히 감칠 맛을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 후론 심심할때면 홈쇼핑을 본다. 물건 팔아볼려고 온갖 미사여구로 무장된 호스트들을 지켜보는건 웃찼사나 개콘을 보는것 보다 나한텐 더 큰 재미를 가져다 준다.

 

홈쇼핑을 보다가 지겨워져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나에게 충격적인 영화로 다가온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허공에의 질주>였다. 볼려고 하던 영화가 아닌지라 극 초중반부터 보게 되었는데 보는 도중 "아 물건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왜 이걸 이렇게 늦게 봤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예전에 리버 피닉스가 약물중독으로 요절했을때 그저 아이다호의 그 압도적으로 잘생긴 배우 정도로만 여겼는데 이 영화를 본 후 새삼 리버 피닉스의 영화들을 찾아 보게 될 정도로 강력한 영화로 다가왔다. 영화 자체로도 뛰어났지만 음악은 더 훌룡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특히나 리버가 줄리어드 오디션에서 친 모차르트의 Fantasy는 그가 그저 그런 배우라고 기억되기엔 너무 뛰어난 것이었다. 게다가 영화 전반에 흐르는 James Tylor의 의 멋진 가사와 함께 감동적인 엔딩은 영화의 주제를 실로 멋드러지게 압축해 보여주었다.

 

극 도중 리버(대니)가 음악 선생님인 필립스의 집에서 실내악 연주회가 열려 찾아가 볼려고 하자 리버의 아버지는 부르주아지의 속물근성이 판치는 곳이라며 가지말라고 강압적으로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1988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서도 이른바 Classics이 어느새 부르주아지의 음악으로 대변되어버린 현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다. 20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고전음악(당시에는 아니었겠지만)을 듣는 청중은 자유로웠다. 음악을 듣는 내내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먹을 것을 파는 사람도 있었고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례해보이고 난잡해보인다.(아마 오늘날의 가수 콘서트장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진정한 음악의 역할이 아닐까한다.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 청중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음악을 이해시키는데는 그들이 그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가 하는데 있지 않을까?

 

토스카니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연주회에서 무례하게 떠들거나 야유를 보내는 청중을 쫓아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게 관행이 되어버려서 고전음악을 들으러 갈때는 격식을 차려야만 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모든 사람의 음악을 소수의 사람의 음악으로 스스로 한정짓기 시작한  Classics은 정말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듣는 음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영화에서 리버는 줄리어드의 오디션에 평범한 캐주얼 복장으로 참여한다. 다른 연주자들은 모두 격식을 차린 정장차림이지만 그는 그냥 면 Shirts에 청바지,겨우 보잘것 없는 작은 넥타이만 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터지는 음악은 절대 Casual 하지 않았다. 오디션이 끝난 후에 심사위원이 말한다. "당신의 재능은 정말 뛰어난데 도대체 누구에게 사사받았냐고?"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사사받지 않았다. 그냥 그의 어머니에게 배웠을 뿐이고 스스로 재능을 닦아왔다. 그는 말한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여러사람에게 배웠다고...하지만 당신이 아는 유명한 누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없다고."

 

얼마전 고클에서 양성식이라는 연주자가 이준호라는 청중이 올린 공연후기담으로 발끈해 한 적이 있다. 물론 연주자도 사람이기에 발끈해 하는건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또한 이준호라는 군인이 올린 글 또한 다소 무례한 언사로 쓰여져 있는데다 오해의 소지도 충분히 줄 수 있는 글이었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의 글이 아닌 그 두 사람의 글 뒤에 올려져 있는 리플을 읽다 깜짝 놀랐다.

 

자신도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한 여성분이 올린 글에는 <청중의 횡포>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언제부터 클래식이 아니 음악이 일방적으로 청중에게 주어지는 하사품이 되어 온 것인지.. 음악은 창조자와 청중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작가였던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증이 가장 심각해졌을 시기는 자신의 작품이 발표되고 독자의 반응을 기다린 때가 아니었던가?

 

요즘처럼 이렇게 청중이 철저히 무시되고 간과되어 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문 평론가의 한 줄 기사에는 촉각을 곧두세우면서 가장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어야 할 청중의 의견이나 반응은 마치 음악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한 자들의 헛 메아리처럼 치부해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아닌 우려가 내마음을 사로 잡았다. 양성식과 이준호의 논쟁의 핵심은 음악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연주자는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몇년에 걸쳐 스코어를 공부하고 연주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더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하다는 것이고, 청중은 이런저런 cd나 매체를 통해 다년간 그 음악을 들어왔기 때문에 청중들도 작곡가의 의도 쯤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두 사람 모두 틀렸다. 멘델스존의 의도는 그 자신 밖에 알지 못한다. 음악이든 책이든 일단 창작되어 공개되면 그것은 모두의 것이다. 실제로는 10정도의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가치관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창작을 무한대로 확대 재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핵심이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에서는 네루다가 자신의 시를 연애편지에 무단 도용해 문제가 생기자 마리오에게 그 시는 내 것이니 함부로 여기 저기 쓰지 말라고 하자 마리오는 "아니오 선생님! 그 시는 그 시를 읽는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한다.)

 

그리고 연주자는 청중에게 존중받아야 할 존재지 존경받아야 할 존재는 아니다. 연주자로써의 존경은 청중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모든 연주자들이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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