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즘은 죽음까지도 파고드는 삶이다.
Written by Georges Bataille
새벽 4시, 알콜 그리고 구토
토사물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그렇게 난 4시의 밤을 삼켰다.
침대에 누워 한 얼굴을 떠올린다. 처음엔 웃음,, 때로는 분노... 하지만 결국엔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은 훼스탈 2정과 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바타이유가 말했던 서로 교통하려 애쓰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원래의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마치 거대한 심연과도 같은...
침대에 똑바로 누워 Baruzi의 글귀를 떠올렸다.
밤은 어두웠으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모든 종류의 위로받을 수 없는 비탄도 시간과 더불어 스러져 가는 법이라지만, 때론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버거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럴 땐 한 모금의 담배와, 방안에 조용히 울려퍼지는 음악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새벽 4시에 Mahler를 들었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교향곡 5번의 Adagietto는 그렇게 조용히 내 방안의 밤을 밝혀주고 있었다.
말러의 아다지에토를 듣노라면 언제나 루키노 비스콘티의 <Death in Venice>가 떠오른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탐미적이고, 에로틱한 영상과 더불어 처절하리만치 비극적인 정서가 말러의 선율로 완벽히 장식되어 있는, 정말 치명적인 작품이다.(아마도 여성분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일 미소년 비요른 안데르센과 함께)
소설과 영화는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비스콘티는 토마스 만이 말러의 죽음을 계기로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을 떠올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 라는 인물을 작가에서 작곡가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는 철저히 말러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에로티즘은 오로지 응시라는 수단만으로 표현되어지는데,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사랑의 열정이 시작되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라는 것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바라보게 된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고독하다. 태어나는 순간에도 혼자이며, 모든 사건들을 혼자 감당해야 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철저히 혼자일 수 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각자 자신만을 가리킬 수 밖에 없다.”라는 말은 분명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바라보게 되고 또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 순간만큼은 바타이유가 말했던 그 거대한 심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매혹의 과실이 그만큼 달콤했기에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사랑하는 소년 Tazio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치욕적인 삶 대신 의연한 죽음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 누워있는 이 순간 난 영원을 떠올리고, 다시한번 그리움을 떠올린다.
영원(아르뛰르 랭보)
되찾았도다!
뭐가? 영원성이
태양과 함께
바다는 떠나가고
영혼, 나의 파수꾼이여
그토록 무가치한 밤과
불타는 낮의
고백을 속삭이도록 합시다.
인간적인 간구와
평범한 충동,
거기서 벗어나 그대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사탄의 잉걸불이여
그대에게서만
[결국]이라는 말도 없이
의무가 터져버린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