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선집 1
김종철 엮음 / 녹색평론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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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은 잘 알려진대로 한 문학평론가가 주관하는 생태학 교양잡지다. 발행인이 김종철 영남대 교수다. 91년부터 지금까지 격월간지로 8년째 발행하고 있다. 얼마전 <인물과 사상> 8권에서 김종철 교수를 다루었는데 이 글을 읽어보면 <녹색평론>과 김종철 교수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준만 교수가 <인물과 사상>으로 화려하게 스폿라이트를 받고 있다면, 김종철교수는 <녹색평론>으로 거북이 걸음을 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두 잡지 모두 1인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는 잡지이지만 그 방식이나 분야나 독자층은 판이하게 다르다.

<녹색평론>이 다루는 주제는 제호에서 느껴지는 환경 관련 부분만은 아니다. 교육, 문화, 과학 등의 문제 역시 주요한 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글들은 하나의 흐름으로 묶여지고 있다.

여기에 있는 글들은 사실 '소수의 아름다운 외침'이다. 사회의 본류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소수'이고, 그렇지만 우리 미래를 담고 있기에 '아름답고', 이러한 내용을 계속하여 알려나가고자 운동하기에 '외침'이다.

<녹색평론>이 추구하는 세상은 '작은 세상'이지 않을까 싶다. 이는 인류가 '진보, 발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질풍노도처럼 달려나가는 세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 질풍노도에서 거리낌 없이, 아니 아예 논의하지 않고 지나치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보다 거대한 발전으로 보다 거대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결국은 우리 미래의 불투명성을 가져다 줄 수 있기에 오히려 보다 작은 걸음으로 만드는 작은 세상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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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
윤구병 지음 / 보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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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는 전 충북대 철학과 윤구병 교수가 일구고 있는 '변산 공동체'에 관한 윤 교수의 글이다. 변산공동체는 현재 10여가구가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생산은 유기농법으로 이루어진다.

<잡초는 없다>라는 문구는 윤 교수가 '잡초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깨달은 화두다. 기르려 하는 곡식과 기르려 하지 않는 잡초 사이에서 지긋지긋한 전쟁을 치르다가 자신이 제거한 잡초가 사실은 잡초가 아니라 모두 귀중한 약초이자 식용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윤 교수는 이런 잡초까지 유용한 약초/식용으로 보듬어 안는다. 그러면서 '잡초는 없다'라고 말한다. 이쯤되면 이제 우리는 호칭을 바꿔야 한다. 윤 교수가 아니라 농사꾼 윤씨다.
그들의 작업은 '고행' 그 자체였다. 우리 땅을 살리는 일은 분명하지만 우리 농법을 30년 뒤로 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농법이 현실문제의 대안이 될 수 없듯이, 변산공동체의 농법 역시 대안으로 자리 잡기에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생각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산공동체는 하나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는 마음 깊이 공감한다. 현재 우리는 패러다임이 상당히 변화했다는 것을 절감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는 것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변산공동체는 또 하나의 축의 한 꼭지점을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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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와의 대화
송두율 지음 / 한겨레출판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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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와의 대화>는 '발상의 전환을 위한 20가지 테마'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진보,지구화,정보사회, 여성론, 대학, 인문학, 통일 등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주제가 망라되어 있다.이런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었는데 한 사람이 썼다고는 잘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주제들이 깊이가 있다.

이 여러글에서 하나의 화두를 굳이 꼽으라면 '지구화'라는 단어를 꼽고 싶다. 굳이 하나 더 꼽으라면 '통일'을 들고 싶다. 송두율 교수는 20가지 테마를 통해 새로운 전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을 강론하고 있다. 물론 이 패러다임은 송두율 교수만이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이러한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전체적으로 조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실 첫 테마인 '우리 시대의 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부터 좀 당혹스러웠다. 역사를 보는 유형 중에 이제는 나선형이 퇴출되고 미로형이 대세를 이룬다는 것을 읽으면서 '아, 나의 관심이 이다지도 정지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다른 주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났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여성론이든, '남한 모델'이든, 민주주의든 예전에 이미 사고를 정지시켜왔던 주제들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할 수 있게 되었다.

19번째 테마에 등장한 윤이상 선생님의 얘기는 감동스러웠다. 윤이상 선생님의 명복과 송두율 교수의 빠른 시일 내의 귀국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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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7 -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
강준만 외 지음 / 개마고원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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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잡지 저널리즘을 개척했다. 거대 조선일보나 사회의 저명 인사에 대해 일 개인의 잡지가 맞서 이제 사회 일부에서 반향을 얻어가고 있다. 일 개인이 이러한 목소리를 꾸준히 내면서 세력을 얻어가는 것은 신선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80년대의 '조직 대 조직'의 문화 대신 개인이 주창하며 세를 만들어갈 수 있는 문화의 또 하나의 흐름이 보여지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사실 강준만 교수의 글에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가 이룬 하나의 형태에 많은 박수를 보내긴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 내용에는 힘찬 박수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런 용어가 도대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강준만 교수가 이렇게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독설 상업주의'다. 흔히들 강준만 교수는 어느 단체,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도마 위에 올려놓아 마음대로 요리한다는 것을 얘기한다.

여기에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 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자유로운 반면 또 그렇기 때문에 사실 책임은 지지 않는다. 혹자는 럭비공 튀듯이 비판한다며 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바로 이게 문제다. 방향 없는 독설, 그게 바로 독설 상업주의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가 독설가인지에 대해서도 고개가 갸우뚱한다. 독설은 모름지기 '독'을 품고 있어야 하는데 별로 '독'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의 글은 심하게 얘기하면 독이 없는 독설이다.

비판하는 내용도 사실 실감나지 않는다. 수많은 자료 조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느낌도 덜하다. 그러다 보니 타인이나 타단체에 대해 비판을 가할 때 정면전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측면전을 치르는 듯 하고, 귀납법에 의한 단정 대신 연역법에 의한 단죄도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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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 - 이철수 판화산문집
이철수 글, 그림 / 문학동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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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씨나 김지하씨 등 사상적 변화가 있었던 사람을 보면 감성적인 씁쓸함은 잠시일 뿐이고, 경외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그 변화가 안일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철수 씨 또한 그렇다. 80년대 오윤씨와 함께 시대의 고민을 표출하는 대표적인 민중판화가에서 90년대에는 선(禪)을 추구하는 판화가로 변모했다. 간결한 묘사 때문에 많은 여백을 가지는 판화이지만, 그 많은 여백은 단지 선(禪)의 세계를 담은 싯귀 한 토막으로 인해 가득 채워지다 못해 넘쳐 버린다.

나뭇잎, 바람, 소나무, 좌탈, 대나무, 달, 폭포 등 자연과 산사의 세계가 이철수 씨의 성찰의 대상이다. 한갓 나뭇잎에서도 심오한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 이철수 씨의 판화 산문집의 매력이다.

작품 하나를 여기에 옮겨보자. 나뭇잎 세 장이 떨어지는 판화를 그려 놓고는 그 많은 여백에 이철수 씨는 달랑 '길이 멀다'고만 적어 놓는다. 그 낙엽을 녹음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는 이철수 씨는 분명 불교의 윤회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단지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지게 된다.

단순히 떨어지는 세 장의 낙엽은 '천천히 썩고 흙에 스며들어서 다 사라졌다가 다시 녹음으로 꽃으로 가을 열매로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에 오른 낙엽으로 변모하며, 애상의 대상이 대상이 아니라 숭고의 대상으로, 쇠락의 대상이 아니라 번성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이철수씨가 판화에 새겨 놓은 문구들이 이철수씨의 창작인 줄 알았으나 책 뒤의 법정 스님의 글을 보니 몇몇 글은 조주선사(9세기, 중국)나 다른 몇 분의 글이었다. 출전을 옆에 토 달아놓은 산문 속에서나마 밝혀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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