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 - 이철수 판화산문집
이철수 글, 그림 / 문학동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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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씨나 김지하씨 등 사상적 변화가 있었던 사람을 보면 감성적인 씁쓸함은 잠시일 뿐이고, 경외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그 변화가 안일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철수 씨 또한 그렇다. 80년대 오윤씨와 함께 시대의 고민을 표출하는 대표적인 민중판화가에서 90년대에는 선(禪)을 추구하는 판화가로 변모했다. 간결한 묘사 때문에 많은 여백을 가지는 판화이지만, 그 많은 여백은 단지 선(禪)의 세계를 담은 싯귀 한 토막으로 인해 가득 채워지다 못해 넘쳐 버린다.

나뭇잎, 바람, 소나무, 좌탈, 대나무, 달, 폭포 등 자연과 산사의 세계가 이철수 씨의 성찰의 대상이다. 한갓 나뭇잎에서도 심오한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 이철수 씨의 판화 산문집의 매력이다.

작품 하나를 여기에 옮겨보자. 나뭇잎 세 장이 떨어지는 판화를 그려 놓고는 그 많은 여백에 이철수 씨는 달랑 '길이 멀다'고만 적어 놓는다. 그 낙엽을 녹음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는 이철수 씨는 분명 불교의 윤회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단지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지게 된다.

단순히 떨어지는 세 장의 낙엽은 '천천히 썩고 흙에 스며들어서 다 사라졌다가 다시 녹음으로 꽃으로 가을 열매로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에 오른 낙엽으로 변모하며, 애상의 대상이 대상이 아니라 숭고의 대상으로, 쇠락의 대상이 아니라 번성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이철수씨가 판화에 새겨 놓은 문구들이 이철수씨의 창작인 줄 알았으나 책 뒤의 법정 스님의 글을 보니 몇몇 글은 조주선사(9세기, 중국)나 다른 몇 분의 글이었다. 출전을 옆에 토 달아놓은 산문 속에서나마 밝혀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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