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제전 5 - 개정판
김원일 지음 / 강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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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에서 문학평론가 김현은 <태백산맥>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을 했다고 한다.

"
소설 속에서 제일 극적인 것은 고모/조카간인 정하섭과 소화의 사랑이며, 그 외의 것은 눈에 익은 정황이다. 살아 생동하는 부분은 염상진의 부인이 취조받는 장면이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하섭이 소화에게 비파 두 개를 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정치 의식의 깊이에선 김원일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며, 스케일의 크기에선 박경리를 따르지 못하고, 낭만적 사랑의 울림에선 김주영을 못 따른다. (외서댁-염상구의 사랑 놀이에서도 김원일의 <바람과 강>만 못하다) 더구나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너무 비범하게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거의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읽힌다."

김원일의 정치 의식이 얼마나 깊기에 김원일 보다 못하다 했을까 싶어 김원일의 <불의 제전>을 읽었다. 1950 1월부터 10월까지 경남 김해시 진영읍과 서울을 무대로 하여 쓴 역사소설이다.

우리 역사라는 수없이 너른 들 한 곳에서 뗏장 하나 그대로 떼어내서 묘사해낸 듯한 소설이다. 우리 역사는,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가슴 속에 소설 하나씩 안고 산 셈이다.

더도 덜도 없이 겪어왔던 역동의 세월, 풍파와 인고의 세월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자연재료 맛을 그대로 살린 것이 최고의 음식이듯, 우리 삶을 그대로 투영시킨 소설이 최고의 소설이라면 단연 <불의 제전>을 꼽고 싶다.

때로는 소설적 구성으로 시원하게 그려주길 바라는 마음도 중간에 생기기도 했지만 김원일은 너무나도 냉철하게 우리 삶을, 역사를 소설 속에서 흔들림없이 재현해낸다. 좌와 우의 갈등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묘사해낸 작가가 있을까.

김현의 평에서정치 의식이 깊이라 표현한 부분은 동의하면서도 동의하지 못하겠다. 좌와 우가 어떻게 그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묘사한 측면은 단연 압도적이다. 좌와 우가 범했던 우를 소설 속에서 아프게도 사실적으로 재현해놓았다. 그러나 이를깊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정치적 통찰력을 소설 속에서 잘 버무린 것이라 여겨진다.

소설책을 덮으면 1950 10월이다. 새삼 소설 속에서 전개되었던 1월의 에피소드들이 아스라이 기억난다. 불과 10개월도 되지 않았던 기억이 머나먼 옛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1950
1월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 내게는 이미 선택지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1945년 이후 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시대가 선택을 강요했거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뗏장을 떼어내 구성한 소설이기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김현이 <불의 제전>을 평했다면 또 여러 가지 평을 했을 지 모른다. 무엇에서는 <태백산맥>이나 <토지> 보다 못하지만 무엇에서는 뛰어나다는 식으로. 나는 어느 책이 우위에 있다고 논하기 어렵겠다. 그저 이 모든 책들을 기억하면 먹먹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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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 스토리 - 착한 아이디어가 이루어낸 특별한 성공 이야기
블레이크 마이코스키 지음, 노진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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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마이코스키가 2006년에 한 일은 놀랍다. 그가 휴가를 내고 아르헨티나 여행을 떠난 것은 29살 때인 2006 1월이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갈 무렵 카페에서 신발을 무료로 기부하는 봉사활동을 하는 어느 여성을 만났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바로 아르헨티나 친구랑 Toms 신발 Biz Model을 완성하고 헛간에서 신발 250켤레를 완성한 후 LA로 복귀한다. 휴가를 가기 전과 돌아온 그의 모습이 완전 달라진 것이다. 물론 그 때만 해도 휴가가 끝났으니 프로젝트를 끝내고 원래 하던 사업인 운전교육사업에 복귀하려 했다.

 

블레이크 마이코스키가 250컬레를 팔려고 친구들이 적어준 가게 목록을 보고 찾아다니며 소매점 고객을 찾기 시작할 때가 5월이다.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에 기사가 나간 후 하루에만 2,200개의 주문이 들어오고, 그는 뜻 하지 않게 밀린 주문을 소화하려 하루만에 인턴을 세 명이나 뽑고 생산체계를 갖추려 다시 아르헨티나를 방문해야만 했다. 그 해 여름에만 신발을 총 1만 켤레를 팔고, 그해 10월 대형 버스를 빌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동쪽으로 18시간을 달려 신발 1만 켤레 기부 여행을 다녀왔다.

 

가히 ‘빅뱅’이 벌어진 것이다. 어떻게 이를 설명할까.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입이 벌어질 뿐이다. 블레이크 마이코스키는 그렇게 새로운 장 하나를 열었다.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는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오기 위해 노력해왔다. 아르헨티나 방문 당시 이미 그는 세 번째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두번째로는 그가 책에서 들고 있는 스토리텔링을 역시 꼽고 싶다. 스토리 하나로 그는 보그 잡지에 10배나 비싼 신발과 나란히 게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번째 꼽고 싶은 것은 메모를 통한 간단하고 신속한 문제정리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메모를 생활화했는데 그것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노트이자,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확인하는 풍향계이자, 빠른 판단/결단을 돕는 상황판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고, 어떤 결정을 할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저울질 할 수 있었다. 가장 최악의 결과라 해봐야 서른살에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라는 접근이 있었기에 그는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탐스슈즈만이 아니라 그의 도전 자체가 귀감이 된다. 3~4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훌륭한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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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감옥 - 시대와 사람, 삶에 대한 우리의 기록
이건범 지음 / 상상너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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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오랜 기간 심혈을 다해 쓴 책을 하룻밤 만에 읽어버릴 때 간혹 저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더군다나 몇 년간 감옥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담아낸 책일 때 더욱 그러할 수 있다. 미안스럽게도 <내 청춘의 감옥> 역시 단숨에 소설처럼 읽어버렸다.
나는 1990년대말에 PC통신 나우누리 글마당에 감옥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글마당 제목은 <마른 잎 다시 살아나>였고 부제가 <감옥 안으로의 사색>이었다. 이 연재를 할 때 주변의 주문이 그 글을 읽으면 “나도 감옥에 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쓰라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볍게 쓰려 했긴 했지만 ‘진지함 속의 가벼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청춘의 감옥>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1990년대말 주변의 주문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마저도 감옥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이 책은 진지함을 가벼움 속에 담았던 것이다.
이 책은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징역을 다루면서도 가볍고, 사상범 징역이기에 단순히 가벼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가벼움이 일부러 희화시킨 가벼움이 아니다. 그 자체에 철학이 있다. 1980년대 저자는 사람들이 격정적으로 운동가를 부를 때 화음을 넣었다고 한 학번 선배인 김민석씨로부터 점잖은 질타를 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딱 저자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감옥을 가볍게 묘사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감옥을 그렇게 느낀 것이고 느낀 대로 글을 쓴 것이다. 저자는 존 롤스의 사회적 자유주의에 감명을 받았다고 쓰고 있는데, 저자에게 꼬리표를 붙인다면 저자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이념의 철창을 벗어 던지니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사회주의 격자틀로부터 유연해지자 저자의 자유스런 영혼이 드러난 셈이다.
저자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싶다. 하나는 낙관과 긍정의 힘의 소유자이고, 다른 하나는 낭만과 자유를 잃지 않는 사회참여자이다. 저자는 징역을 미화시키거나 가볍게 희화시키지 않았다. 그의 철학과 특성을 가지고 징역 이야기를 버무려낸 것이다. 저자가 아닌 어느 누구도 징역을 이렇게 풀어내지 못할 것이다.
시대의 아픔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걸어오면서도 저자는 낙관과 긍정, 낭만과 자유라는 주머니를 흘리지 않았다. 저자는 이 주머니 속에 세상의 어려운 문제, 심오한 문제를 넣고 소화시킨다. 그 주머니를 통해 걸러지면 복잡한 것도 간단하게, 괴로운 것도 즐거운 방법으로 쉽게 쉽게 전환된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주머니 이름은 바로 ‘유쾌’다. 이 주머니를 거쳐 나온다해서 방향이나 색깔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수많은 문제 풀어나가는 방식이 유쾌해진다. 맨 끝에 다시 징역을 간 윤뭐씨를 함께 면회간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껏 웃을 준비를 하고” 면회 준비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복합하고 괴로운 징역도 웃음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저자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또 다음은 어떤 유쾌한 판을 벌일지 저자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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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살리는 환경지식사전
자연과 인간을 위한 니콜라 윌로 재단 지음, 이효숙 옮김, 고상미 그림, 윤순진.이상훈 감 / 초록개구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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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말하고 있는데 인간은 듣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저자의 서문을 읽다 보면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이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인류에게 환경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경고하고 있으면서도,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는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더할나위 없이 자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저자는 "자연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는 것이 자연을 존중하는 첫걸음이라면, 둘째 걸음은 자연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환경지식'사전'을 쓰면서 '아는 것' 보다는 '경이로움을 갖는 것'을 앞에 둔 저자의 생각은 레이첼 카슨의 생각과 닿아 있다. 이 저자는 '자연과 인간을 위한 니콜라 윌로 재단'의 대표 니콜라 윌로다.

이 책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사전'이 아니다. 최근의 환경문제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함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은 단지 보존/보호가 필요한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어지고, 그렇기에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필요함을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환경은 그렇기에 생태계, 온실 효과, 화석 연료, 유전자변형물질 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약 130개 주제에 포함되어 있는 정원, 전쟁, 소음, 흙, 애완동물, 홍수 등과 같은 주제 역시 환경의 범주 안에 들어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저자의 생각일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간혹 난처한 질문을 받게 된다. "아빠, 산성비가 왜 나빠요?", "온실 효과가 뭐예요?" 한 두 문장 정도로는 얘기해줄 수 있지만 정확한 얘기인지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그렇게 아이가 호기심을 가지며 질문해오는 경우가 또 온다는 보장이 없기에 좀 더 자세하게 들려주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줄 수는 없는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이들 입장에서 그림, 도표, 수치, 사례를 깔끔한 편집과 함께 전달해주고 있어 책을 같이 읽으면서 설명해줄 수도 있고, 아이가 직접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전'을 보면서도 '지식'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감성'까지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좋은 책과 함께 부모의 역할 또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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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살림지식총서 207
박명덕 지음 / 살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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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군 외암리 민속마을. 냇가가 흐르고 그 건너편에 약 80채의 한옥과 초가로 이루어진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다른 민속마을과 다른 점은 관광을 위해 일부러 조성한 마을이 아니라 500년 전부터 예안 이씨 집성마을로 형성된 부락을 그대로 보존해오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가옥의 배치나 돌담길, 가구 내 살림살이 이 모든 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 선조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정겹다. 복원한 가옥을 둘러보거나 옛날 충청도 양반가옥을 담 너머로 구경하다 보면 한옥의 멋과 과학,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제 한옥이 ‘삶’에서 한켠 물러나 ‘보존’의 대열에 들어서버린 것이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한옥은 자연과 어울리게 지었다.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 자연을 닮은 형태로 지었다. 집을 짓기 위해 터를 그리 파헤치지도 않는다. 약간 땅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바로 올린다. 그렇기에 마루나 방이 높이 올라가는데, 대신 자연을 해치지 않게 된다. 또 차경(借景)의 정신은 얼마나 자연친화적인가. 선조들은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 들여 요란하게 조경을 하기 보다는 외부 자연의 수려한 풍경을 정원의 일부로 생각했다. 마루에 앉아 보면 곧 산야가 정원이었던 셈이다. 자연친화적인 요소는 그 외에도 곳곳에 배어 있다. 창이나 문에 바른 한지만 해도 그렇다. 한지는 함습기능이 있어 여름철 습기를 차단할 뿐 아니라 문을 닫아도 집 밖의 풀벌레소리,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도 하다.

한옥에는 우리 선조들의 멋과 과학 역시 서려 있다. 한옥 하면 우선 온돌과 대청이 생각난다. 온돌은 겨울용 시설이고 대청은 여름용 공간이다. 온돌은 적은 연료로 효과적으로 방을 따뜻하게 하고 있어 서양에도 그 가치가 알려지고 있으며, 대청은 앞뒤가 일직선으로 트여 있어 바람이 이 통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여름에 시원하다. 좀 더 세밀히 관찰해보면 더 재미있다. 양옥집과는 달리 한옥은 안방과 대청의 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방은 주로 앉아서 생활하는데다 따뜻한 난방을 하려다보니 천장이 낮고, 대청은 서서 다니는 공간인데다 시원한 느낌을 주려다보니 천장이 높아진 것이다. 참으로 과학적인 구조인 셈이다.

이런 대청마루에 누워 바람을 은은하게 맞으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여유로움과 시원함이 느껴진다. 누워서 서까래와 대청 옆 벽면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한옥 구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처마 역시 보면 볼수록 즐거움을 준다. 처마를 앞에서 보면 양쪽 끝이 조금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앞쪽으로도 좀 더 튀어나오면서 부드러운 곡선미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마 끝의 높이가 올라간 것은 ‘귀솟음’, 끝이 앞으로 튀어나온 것은 ‘안쏠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처마를 일직선으로 할 경우 양쪽이 쳐져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기 위한 의도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한옥 역시 알면 알수록 즐거움이 눈으로 익혀지는 법이다. 

한옥에는 또 ‘비어있음’의 철학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공간의 경우 중국은 화려하고 일본은 인공적으로 꾸미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마당을 비어있는 공간으로 생각하여 나무 심는 것을 피했다. 마당에서 다양한 일과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루 역시 여러 기능을 할 수 있는 다목적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비어있음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 법이다.

또 한옥은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의 집들은 옥외공간과 옥내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내부공간도 벽과 문으로 철저하게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 한옥은 열려 있다. 각 마당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문은 떼어내거나 완전히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되어 있기도 하다. 서양 집 현관에 들어서면 집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으나, 한옥의 대문에 들어서면 가옥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가족끼리 만나 어울리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안방 창호문에 달린 조그만 유리 역시 안과 밖이 소통하는 재미있는 소도구이다.

『한옥』을 읽다 보면 고즈넉한 고가에서 하룻밤 묵고 싶어진다. 그런 고가의 툇마루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느낌이 들 것이며, 밤에는 창호문을 열어놓고 밤하늘 별을 감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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