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좀 된 얘기다. 지난 봄에 아이들이과 함께 상추랑 토마토랑 묘종을 사서 길다란 화분에 심고는 그 화분을 베란다 바깥으로 걸린 철제선반 위에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 그 후 어느 정도 컸는데, 이상하게 잘 자라던 토마토 꼭지가 똑 떨어진데다 상추 하나도 완전히 거의 뽑힐 정도로 뜯어져 없어져 버린 거다. 화분 전체적으로 훼손된 것이 아니라 아파트 베란다쪽으로 길게 훼손된 것이다.

큰애(윤호)가 식물을 그렇게 대할 아이도 아닌데, 작은애(윤하)는 키가 닿지 않아 그럴리 없고. 누가 도둑이 들리도 없고. 그래서 윤호를 불러 넌지시 물어봤다.

"혹시 윤호 너 이거 뜯었니?"

아이를 의심한거다. 윤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했다고 간단히 대답하고 만다. 그래도 내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하가 의자를 놓고 올라가 위험스런 장난을 했을까. 아냐.. 아냐.. 하여간 아이들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한 채 그냥 덮어두었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의혹을 완전히 풀린 것이다. 범인은 바로 비였다. 비가 며칠 계속 왔는데 비가 오면 비가 어디를 타고 흐르다가 떨어지는지 위에서 똑 똑 똑 낙수물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낙수물이 상추를 완전히 쪼아서 파버리고, 토마토 윗 부분을 꺾어버린 것이다.

범인은 비였는데, 아이를 의심하다니. 내 스스로 백지에서 사물을 바라봐야 한다고 했는데 나 자신이 그렇지 못했다니. 더군다나 아이를 상대로 말이다. 참, 내 자신이 우습고 부끄러워서 잠시동안이나마 윤호를 제대로 못봤던 기억이 있다.

# 2

그런데 이런 반성은 오래가지 않나 보다. 아니, 어른들은 좀체 버릇을 고치기 힘든 존재라서 잠깐 반성했다가 다시 잊어버리나보다. 어제 일이다. 밖에 나갔다 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욕조목욕을 시켰다. 녹물을 다 쏟아내고 물을 받아 놓으니 아이들이 안에서 신나게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한 10여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작은애가 와락 울며 목욕탕에서 뛰쳐나오는 것이다. 또 둘이 싸웠으려니 했다. 그런데 작은애 왼쪽 눈에서 피가 물에 번져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래?"
"내가..(울먹울먹) 요.. 물총.. 피하... 숙였는데..요.. 갑자기..(울먹울먹) 눈에서.. 피.. (울먹울먹) 났어요.."

도대체 작은애 설명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큰애가 물총을 가지고 작은애에게 장난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큰애에 대한 야단에 걱정까지 겹쳐 목소리가 대뜸 커졌다.

"윤호야! 어떻게 한 거야! 네가 설명해 봐!"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게 아니라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음은 한참 뒤에서나 깨달은 것일뿐 이미 큰애가 어떻게 한 것이라고 짐작을 한 것이다.

"내가요. 마요네즈통에 물을 담아 윤하에게 뿌렸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주저앉더니 울었어요."

큰애는 겁에 잔뜩 질려 얘기를 한다. 내가 마요네즈통 끝이 윤하 눈에 닿은 것인가 하여 마요네즈통 구멍을 살피는데, 아내는 이미 범인은 큰애라 단정하고 큰애를 다그치며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은애가 말린다.

"형이 그런 게 아녀요.(울먹울먹) 그냥 내가 피하려고 앉았는데 피가 났어요."

형이 야단맞지 않도록 두둔하는 정도려니 했다. 아직도 윤하 눈에서 피는 좀 진정되긴 했지만 눈물과 섞여 약간씩 흐르고 아랫 눈썹 안에 생채기도 선연해 다소 걱정이 되었다. 아내는 화장지로 피눈물을 한번 찍어낼 때마다 큰애를 몰아붙였고, 큰애는 죄인마냥 목욕탕 문턱에서 꿇어앉은채 머리를 숙이고 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어떻게 된거냐고 재연해보라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상황이 짐작되었다. 욕조 안에는 아이들 장난감과 함께 물에 뜨는 돌이 떠 있었고, 욕조 바닥에는 돌가루와 미세한 녹물가루 약간이 침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큰애가 물을 뿌리자 작은애는 주저 앉았고, 그러면서 물이 눈에 들어갔는데, 그 물과 함께 미세한 돌가루가 갔을 터이고, 눈이 불편하니 작은애가 눈을 비볐을 것이고, 그래서 눈 안쪽 약간이 살짝 찢어져 피가 났을 게다.

확실한 원인 규명 없이 엄마, 아빠 둘이서 아이를 밀어붙였다는 게 여간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녹물가루 탓이라면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일단 상황을 설명하고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러자 큰애가 조그만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잘못한 거예요?"
"아니, 네 잘못은 없지만, 네 책임은 약간 있다."
"동생 보살피지 못해서요?"
"그래."

이 기회에 동생과 같이 있을 때는 네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인데, 말을 해놓고도 가슴 한 구석이 찔렸다. 아마 내 잘못이 더 컸을 텐데도 그것을 아이에게 고백하지 않고서 큰애에게 책임을 느끼도록 했으니...

우리는 보통 아이의 비논리적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럴 경우 아이 말보다는 부모의 직관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하곤 한다. 아이의 상황판단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간혹의 경우는 아이를 의심까지 하곤 한다.

이 땅에 아이들은 억울한 경우를 많이 당할 것이다. 제대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오해받는 경우가 모르긴 몰라도 의외로 많을 것이다.

아이가 했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경우, 확인되지 않았다면 일단 물러서는 게 옳지 않을까? 설사 아이가 했을 확률이 높을지라도 그냥 넘어갔을 때의 문제점보다도 억울하게 아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문제점이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큰 게 분명하므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드무비 2004-08-09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모든 부모들의 딜레마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