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치혀
홍경호 지음 / 흥부네박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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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의 이야기 춘추라는 부제가 달린 <세치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에 얽힌 13편의 얘기를 담고 있다.

'천하를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세 치 혀에서 비롯된다'고 이 책은 자신을 선전하고 있지만, '세치혀'에 관한 얘기들만 담겨 있지는 않다. 춘추전국시대의 흥미진진한 얘기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고사성어 얘기도 있고, 삼국지에 버금가는 책략에 관한 얘기도 있고, 제갈공명이 흠모했다는 안영의 '세치혀'에 관한 얘기도 있다.

만약 흥미 위주로 이 책을 선택한다면 만족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선전대로 고대의 지혜와 책략을 통해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조금은 후회할 수 있겠다.

다만 삼국지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재미있게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삼국지가 굳이 어느 누구의 글재주 때문에 빛나기 보다는 중국의 역사, 문화적 토양 때문에 빛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삼국지의 이야기 전개 방법은 이미 춘추전국시대의 풍미했던 이야기에서도 그 단초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흥미진진함 외에도 춘추전국시대를 느끼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중국은 오히려 백가쟁명시기에 흥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점을 느낄 수 있다. 공자가 10여개의 나라를 돌면서 자신의 명망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춘추전국시대의 인재 중용 분위기가 작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으리라.

백가쟁명시대에 우리를 의아스럽게 만드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선악의 구분의 모호함이고, 또 하나는 지역색의 비존재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중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나라라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백가쟁명시기에 여러 사상이 발달할 수 있는 토양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가 무엇인지, 또 전제주의가 이러한 토양을 발달시키는 한편 썩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아심을 준다.

기원전 4-6세기. 동양의 춘추전국시대와 서양의 아테네, 로마이즘의 차이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어 느껴진다.

<세치혀>에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연대 표시나 이야기를 도울 수 있는 글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연대표 하나라도 사족으로 달아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들었다. 결국은 고등학교 사회과부도 뒷 편의 연대기를 참조하면서 읽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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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 지음,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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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강인하고 영향력이 있을까. 세계를 움직인 여러 위인들을 얘기할 때 보면 세계를 움직이는 중추적인 힘이 있을 듯 하고, 세계사에 묻힌 수많은 범부를 보면 미약할 듯도 하다. 그러나 전자의 위인일지라도 그 혼자만의 힘은 아닐 것이다. 그 당시의 민중들과 수많은 교감을 하면서 때로는 그들의 어깨 위에, 때로는 민중이 미처 보지 못한 곳에 눈을 두면서 그들보다 한 발 앞서나가면서 길을 개척하기도 할 것이다. 어떤 형태든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힘과 합쳐져서 큰 힘을 낼 것이다.

그러한 영웅들 말고 순수하게 개인의 힘은 얼마나 강인할 수 있을 것인가. 보통은 조직이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좌절하거나 그 흐름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기 일수 아니겠는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우(愚)를 '우직하다'보다는 '어리석다'로 해석하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 아니겠는가.

<나무를 심은 사람>은 중국식 우공이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울림을 주는 프랑스식 우공이산이다. 중국식 우공이산에는 교훈만이 뼈대로 남아있는 반면, <나무를 심은 사람>에는 인류의 가치, 환경, 생명 사랑, 개인에게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있다는 등의 많은 얘기를 육중하게 담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가 1953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발표한 이 소설은 주인공이 1910년대 우연히 남프랑스 고원지대를 도보로 여행하다 만난 '나무를 심는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에 관한 얘기다. 지오노는 부피에에 대한 기록을 1950년대까지 담담하게 40여년간 기록해간다. 부피에의 삶이 땅에 대해, 생명에 대해 경건하듯이, 지오노의 필체 역시 아무 가식 없이, 미사여구 없이, 순수의 땅에 대한 순수의 경배의식처럼 담담하다. 그러나 순수의 힘은 대단한지 그 요란하지 않는 삶의 기록에 뭉클한 메시지를 전달되어진다.

단지 이 책에 대해 한 사람의 꾸준한 노력으로 프로방스의 황무지가 거대한 숲으로 바뀐 기적이 실현되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얘기할 수 없다. 흔히 얘기하는 환경이나 생명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도 좀 협소하다는 생각도 든다. 부피에가 심은 것은 단지 나무가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변화시킨 것은 생태계가 아니라 인간사였다.

몇십년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을 만나면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러한 인생의 무게를 묵중하게 느껴보길 원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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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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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최근 나온 박완서씨의 산문집이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글은 최신작은 아니다. 그동안 박완서씨가 출간한 책이 수십 권에 이르렀는데, 그 중 다섯 권 정도가 절판되었다고 한다. 이 다섯 권에 실린 글 중을 추스려서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의 출판사는 '박완서 문학 30주면 기념!'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으나, 여기에는 동의 못해도 의미 있는 작업이자 다행스런 산문집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동안 박완서씨의 책을 많이 읽어왔다고 생각했기에 그래도 몇 편의 글은 예전에 읽지 않았을까 하는 했으나, 모든 글이 새롭게만 느껴진다.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그 이상으로 박완서씨가 다작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박완서씨의 시선은 거창한 주제나 범인이 쉽게 보지 못하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쉽게 눈에 뜨이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주제를 잡아 얘기의 실타래를 끌어낸다. 그 얘기는 생활의 향기가 묻어난 얘기이기도 하고, 고향의 향기가 묻어난 얘기이기도 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단상이기도 한다. 이러한 얘기를 요술 항아리에서 쌀 퍼내듯 술술 끌어낸다. 이게 박완서씨 글의 최대의 매력이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는 이 매력 외에 또 하나의 즐거움을 건질 수 있다. 바로 박완서씨의 70년대, 80년대, 90년대 글을 한꺼번에 섭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래 전 얘기라 할지라도 생동감이 떨어진 점은 거의 없다. 간혹 7,80년대의 옛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글이 있으나,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는 것은 7,80년대의 사실이 아니라 박완서씨의 남다른 시각, 감칠 맛 나는 글 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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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디언의 숲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두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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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대한 회귀본능이 있듯이, 인류의 저 오랜 고향인 자연에 대한 회귀본능이 있을 지도 모른다. 봄날 꼬물꼬물 올라오는 새싹을 보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 숨결을 언뜻 느끼면서,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을 느끼면서, 숲에서 안온함을 느끼면서, 그러할 때 자신의 내부 깊숙이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느낄 수 있다면, 이는 어쩌면 인류의 태생적 숨결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레출판사에서 나온 <작은 인디언의 숲>을 읽다 보면 그 태생적 숨결을 감지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충만한 기쁨이겠는가 하는 느낌이 절로 든다.

<작은 인디언의 숲>은 <동물기>를 쓴 시튼이 1903년에 쓴 자전적 소설이다. 14살난 얀이 건강 때문에 학교를 1년 쉬면서 캐나다 시골로 내려가 생활하면서 느낀 자연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자, 자연 속에서 삶을 배워가는 성장의 기록이기도 하다. 얀과 그의 친구 샘의 2주에 걸친 야생생활은 자연이 주는 생명력과 이 속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시튼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이러한 야생생활을 그리고 있기에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생동감있다. 자신이 직접 그린 천여장의 그림이 이를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다. 시튼은 보이스카웃 창설자이기도 한다는데, 그의 보이스카웃 정신이 바로 이러한 야생생활의 경험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얀이 6살 어린 시절부터 자연의 부름을 느껴가는 과정 역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는데, 이 역시 시튼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에 기반하여 쓰여졌을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한번이라도 흥분해본 적이 없었거나 그 변화의 민감한 기운을 느껴보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얀과 시튼은 행복한 사람이다. 자녀들에게 이러한 행복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도록 노력해보려는 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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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꽃핀다
박노해 지음 / 해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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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씨가 최근 세번째 시집 <겨울이 꽃 핀다>를 내었다. 여기에 실려 있는 시 중 박노해씨의 시 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시를 먼저 인용해본다.

큰 산불이 나고
검은 바람이 불고
푸르던 나무들 불타버린
참혹한 빈 산에
검은 산에

아 그래도 풀씨는 살아
불탄 몸 쓰러져도 뿌리는 살아
여린 싹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중략)

그랬습니다.
일어서 고개 들어보면 절망이지만
허리 숙여 들여다보면 희망입니다.

- '검은 산에'

혁명가 박노해는 참혹한 빈 산, 검은 산의 황폐함과 모순됨을 강한 어투로 질타하였겠지만, 구도자 박노해는 '잊혀진 땅 속의 씨알 뿌리'의 희망과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

박노해씨의 시 세계는 혁명의 대립은 사라졌지만, 진보를 위한 대립은 아직 강한 생명으로 살아있다. 이를 위해 나아갈 길과 버려야 할 길이 '푸른 싹'과 '검은 산'처럼 선명히 대조되고 있다.

그리고 대조되는 이 양자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는 일은 뼈를 깎는 구도이자, 지난한 자기 성찰이다. '절망'과 '희망'의 절대적 간극을 박노해씨는 고통스런 자기강제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그 절망에는 현실 직시라는 냉철함이 있고, 희망에는 구도자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박노해씨의 메시지는 여전히 강렬하다. 전진을 위한 펄펄 뛰는 생동감은 사라졌지만, '함께'를 위한 조용하고 은은한 울림은 오히려 여전히 생동감 있다. 허리 숙여 '겨울이 꽃 핀다'를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은은한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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