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9 - 현제賢帝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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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를 모두 15권으로 기획하고 있다. 방송대본처럼 인기있다 해서 방송횟수를 늘리지는 않겠지만 자료량이 점차 늘고 있어 이 15권 약속이 지켜질지는 혹 모르겠다.

9권은 98년부터 161년까지 60여년을 다루고 있다. 15권으로 쓰겠다고 하니 이제 반환점을 돌아선 지 꽤 된 셈이다. 9권의 부제는 '현제(賢帝)의 세기'다. 부제가 말하듯이 9권은 로마의 5현제 중 3명의 황제를 다루고 있다. 5현제의 스타트인 네르바는 8권 말미에 나오고 9권에 나오는 인물은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안토니누스다. 로마사를 起承轉結로 나누면 9권에 와서 로마사는 '轉'을 한참 전개시키고 있다. '承'의 정점에 카이사르가 있었다면 '轉'의 정점에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있지 않나 싶다.

시오노 나나미는 9권을 시작하면서 타키투스라는 모범생이 없어졌다는 것부터 한탄한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동시대인인 트라야누스에 대해서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이 역사를 복원하는데 상당한 애로가 있다는 넋두리다. 그렇게 넋두리를 해놓고도 시오노 나나미는 트라야누스에 대해서 무려 190쪽에 걸쳐 써놓고 있다. 타키투스라는 모범생이 있었다면 9권의 진도는 트라야누스에서 그쳤을 지도 모른다.

그 후대의 역사를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듣지 못해 속단하지 못하겠으나 로마사에서 차지하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투라야누스를 한 권으로 다룬다 해서 그리 무리있는 비중은 아닐 것이다.

다키아를 정복하여 도나우강 방위선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트라야누스, 그리고 제국 전역을 순시하여 제국의 통치체제와 방위체제를 재구축한 하드리아누스, 이 둘의 황제가 이룩한 것은 로마의 '개혁'이다. 요즘말로 하면 Restructuring이다. 트라야누스가 불도저로 땅을 밀었다면 하드리아누스는 공사가 끝난 뒷마무리를 이곳 저곳 다니며 꼼꼼하게 정비하는 일을 했다. 이 둘은 물론 시차를 두고 서로의 할 일을 나누어 맡은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이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의 책무는 '개혁'이 아니라 개혁을 '정착'시키는 일이었다.

<로마인 이야기> 9권은 이들 세 명의 황제가 각각 어떠한 장점을 가지고 제국 번영의 기틀을 마련해가는지 지도자상을 생각하며 쫓아가는 재미도 솔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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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거인 - 문화마당 4-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최윤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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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씨가 쓴 <슬픈 거인>은 '어른들을 위한 어린이 책 길잡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단순히 좋은 책을 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들 책을 바라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 주제를 통하여 전달해주고 있다. 특히 [아기 돼지 삼형제]나 [피오키오의 모험]에 대한 그녀의 시선은 인상적이다.

원래 [아기 돼지 삼형제]는 영국의 민담으로 제이콥스에 의해 문자화된 이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제이콥스의 책은 그림을 빼고 글만 전체가 18쪽이 되는 동화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내에 유입될 때는 그림만 가득하고 글은 듬성듬성 있는 '애니메이션 세계 명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른바 요약이 된 것이다.

저자는 그 요약 과정에서 글의 깊이와 맛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마저도 각색되어버렸다고 한다. 예컨대 원본에는 아기 돼지 삼형제의 성격을 상황 묘사를 통해서 드러내주고 있으나, 애니메이션'에서는 각각 게으른 돼지, 생각이 깊지 못한 돼지, 부지런하고 생각이 깊은 돼지로 단언적으로 묘사하고 얘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즉 아이들이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그만큼 줄여버린다는 것이다. 아기 돼지 삼형제가 길 떠나는 이유도 생략해버리고, 첫째와 둘째 돼지가 늑대에게 잡혀먹히는 내용도 수정해버리고, 마지막 셋째 돼지가 늑대와 숨막히는 줄다리기하는 과정도 생략하면서, 글의 깊은 맛을 없애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그 글을 통해 자아발달 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다고 얘기하고 있다.

요컨대 세계 명작을 단시간에 주입시키려는 교육과 출판 풍토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되지 못한 책에 무방비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두 권으로 된 [피노키오의 모험]이 '애니메이션'으로 줄어들 때는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완역본을 읽어보면 피노키오가 선과 악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면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그것을 뉘우치기도 하는,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어린아이이고, 그 과정을 거쳐 성숙해진다는 것인데 '애니메이션'은 이를 기계적으로 축약하는데만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이 두 글만 읽어도 아이들의 독서 지도가 얼마나 그릇된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피부로 다가온다. <슬픈 거인>에는 이러한 부분 외에 어린이 책에 나타나있는 페미니즘이나 흑과 백의 편 가리기 문제 등을 주제로 어린이 책을 분석하고 많은 책을 추천해주고 있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사주기 이전에 부모들이 아이들 책을 보는 시각을 먼저 얻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이 주는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제목 <슬픈 거인>은 몸집이 큰 거인이 주인공 꼬마들이 사는 '집나무'에 들어갈 수 없어 슬픈 것처럼 어른들이 아이들 세계로 편입되지 못하는 것은 슬픈 것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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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이윤기 지음 / 동아일보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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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씨의 책에서는 항상 '서권기 문자향'(書卷氣文字香 - 책을 좀 읽은 듯한 분위기와 문자를 좀 아는 사람의 향내)이 난다. 최근 나온 산문집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는 책 역시 그러하다.

이윤기씨는 책에서 자신은 불교도에게는 예수쟁이로 몰리고, 기독교도들로부터는 절집 처사로 몰린다고 얘기한다. 경상도 사람인데도 전라도 정서를 좋아해 고향 친구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전라도 친구들로부터는 경상도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억울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한글 순혈주의자로부터는 미국에 경도되었다고 지탄받고 영어공용론자로부터는 그들의 손을 만천하에 들어주지 않는다해서 언어 국수주의자로 몰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회색분자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중용의 도를 지키려하는 글이라고 예단해서는 큰 코 다친다. 그의 글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1977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에 문단에서 도망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운이 좋아서 단 한 차례 케이오 펀치를 날릴 수 있었던 권투 선수가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 참가하라는 제의를 받은 격이어서 두려웠다고 한다. 그뒤 50살은 넘어야 글을 쓰겠다고 했다고 한다. 50이 넘자 무서운 속도로 토해내기 시작하는 그의 글에는 이른바 연륜이 있다.

그는 회색분자라 하지만 명확한 관점에서 사회 현상을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드는 힘이 있다. 영어나 선진국의 앞선 부분에 대해 그대로 인정하고 설파하는 부분 역시 비난을 감수한 단도직입적 논지의 한 파편이다. 반면 우리의 말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오랜 인생을 살아온 그의 균형이다.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에서 느껴지는 그의 꼬장꼬장한 논지와 품위있는 글귀를 보다 보면 왜 그가 <장미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번역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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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수수께끼
게르하르트 슈타군 지음, 이민용 옮김 / 이끌리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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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신비롭다고 한다. 그 정교한 자연 질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얼마나 신비롭고 얼마나 정교한지 이런 비유를 들면 어떨까. 태양을 오렌지 크기라고 가정하면, 지구는 1mm짜리 모래알이고, 이 모래알이 오렌지 주위를 10m 떨어진 위치에서 1년에 한 번 회전하는 셈이다. 해왕성은 1/6mm 크기이며 오렌지에서 400m 떨어져서 250년에 한 번 회전한다. 얼마나 신비롭고 정교한가. 오렌지에서 400m나 떨어진 먼지 같은 존재를 중력으로 끌어 당기면서 조금씩(실제로는 엄청난 속도이지만) 움직이면서 250년에 자신 주위를 한바퀴 돌게 하는 것이다.

또 이 얼마나 실사적인 묘사인가. <우주의 수수께끼>를 쓴 게르하르트 슈타군은 과학자가 아니다. 문학과 종교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인문학적 시각으로 그려내었기에 위와 같은 비유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은 특별한 단락 구분 없이 70여개의 글이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70여개 주제를 단편적으로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설처럼 물 흐르듯 줄거리를 가지고 이어져 있다. 가장 먼저 우주라는 것을 읽기 위해서 기본 개념 정립이 필요한 지 저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의 접착제라 할 수 있는 빛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얘기하고 있다. 다소는 어렵기도 한 이 부분을 지나면 빙뱅, 우주의 팽창, 별의 탄생과 죽음, 블랙 홀 부분에 이르면서 다소 책 속으로 좀 더 흡착하게 된다. 그러다가 은하에 생명체가 있는가, 외계인을 찾을 수 있는가, 우주 식민지 건설은 가능한가 하는 부분에 이르면 책 읽는 가속도가 정신없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읽는 속도가 빨라지는 첫 번째 이유는 우주가 너무나도 정교하고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자연의 모습에 경탄하면서, 연구 과정을 곧 초월적인 탁월한 이성을 밝히는 과정이자 조물주의 영역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우주를 보면 도대체 일반적인 시공간 개념으로는 상상이 안된다. 외계의 생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1974년에 처음으로 우주를 향하여 광속으로 전파를 쏘아보냈다고 한다. 이 전파는 2만 4천 광년 떨어진 구상 성단을 향해 쏜 것으로 이 구상 성단에 외계인이 있어 이에 반응한다 하더라도 지금으로부터 4만 8천년 뒤에나 수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26년 전이면 상당히 오래 전인데 그 동안 그 전파는 자신이 가야할 거리를 불과 1천분의 1밖에 가지 못한 것 아닌가.

이러한 얘기들을 읽으면 자신의 상상력이 팽창하는 우주만큼은 못될지언정 상당히 팽창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떨 때는 팽창하는 상상력이 너무나도 상상이 가지 않아 그 사고가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좀 더 나이 들지 않았을 때 읽었다면 상상의 팽창력이 더욱 힘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아닐 수도 있다. 나이 들어서 읽어도 얻기는 나름일 것이다. 우주의 무한함과 신비로움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인생 철학을 끄집어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했든 우주의 진리는 언제 읽어도 읽는 자의 시각과 마음 만큼 각각의 몫으로 전달될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 읽는 우주의 신비는 그렇기에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구본철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가 감수를 하면서 몇몇 부분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거나 변화된 부분을 보정하고 있어 인문학자가 쓴 과학서라 해서 오류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일반 독자가 보기에는 저자의 내용이나 보정한 내용간의 차이가 크게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 정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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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탐험가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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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 하나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을 읽다 보면 한 인간의 삶이 홀로그램처럼 생동감 있게 다가오곤 한다. 발자크도, 프로이트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날카로운 분석과 살아 꿈틀거리는 언어의 마술 앞에서 그들의 가슴과 머리를 송두리째 열어줘 버린 느낌이다. 일단 그들의 가슴과 머리 안에 들어앉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거칠 것 없는 수려한 필치로 독자들의 숨을 사로잡아버린다.

<정신의 탐험가들>은 메스머, 에디, 프로이트라는 세 명의 현대 심리학 개척자를 그리고 있다. 그들 이전의 심리학은 탐구되지 않은 대륙이자 '알 수 없는 땅'이었다. 인간 의식 내부는 너무나도 막연하고 어두워 그 깊이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끝 모르는 심연의 어둠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세 명의 심리학자는 세상의 소수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풍파를 자신의 믿음에만 의지하며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프로이트에 이르러서는 침묵하고 있던 무의식이 살아나 말을 하기 시작하고, 꿈의 카타르시스와 상징이 드러나고, 性의식의 시원이 열리게 되었다.

모 광고에서 인간은 1등만을 기억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1등조차도 일부만이 기억될 뿐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라는 그 거대한 대륙은 프로이트 혼자 개척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츠바이크가 이 책을 통해 살려낸 '메스머'와 '에디'는 값진 복원이다.

그들은 심리학이라는 신대륙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비밀의 문에 우연하게 다가갔으나,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인도라도 믿었듯 그들이 찾아낸 신대륙이 무엇인지 몰랐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비밀을 완전히 벗겨낼 수 없었기에 사기꾼 대열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방향만을 짐작했을 뿐이다.

최면요법의 메스머는 후일 현대 심리학의 개척자라는 평가로 이어졌지만, 아직도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선구자라는 에디에게는 여러 평이 오버랩되어 있는 편이다. 츠바이크 역시 하나의 평에 의지하고 있다.

한 인물의 평전이나 역사를 쓰는 과정은 조사 분석의 건조한 과정이라기보다, 그 인물이나 시대상에 대한 동화(同化)와 분리(分離)간의 무단한 긴장의 과정이자, 애정의 마취약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가는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츠바이크 역시 애정이라는 마취약이 없었더라면 이들 세 명의 신념과 열정을 복원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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