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은 누구인가
김진애 지음 / 한길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이 집은 누구인가'라는 책 제목부터 의인화되어 있다. 그 제목을 찬찬히 들여다본 독자라면 이 저자가 집을 사람과의 다면적인 관계를 통해서 보려 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포럼의 대표이자 건축가인 김진애씨다. 이미 익히 알려진 건축가다. 건축가가 쓴 집에 대한 책이라고 하면, 건축 디자인을 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기능적인 측면에 대한 얘기가 곳곳에 나올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감성이 있는 집'이다. 저자는 집이란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일상생활에서 사람의 감성이 담겨지고, 표현되고, 어필하기도 하면서도 사람의 무한하고 오묘한 감성을 계발하고 승화시키는 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집의 감성적인 면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도 말한다.

저자는 창에 대해 얘기할 때 그 미학이나 창을 디자인 하는 기법에 관해서는 최소한 이 책에서 관심이 없다. 창을 통해서 골목과 연계되는 삶, 창을 통해서 밖의 기가 안으로 쓸려들 수 있는 것 등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창을 건축물의 일부로 얘기한다기 보다는,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람 사는 맛을 날 수 있도록 하는 관점에서 창을 바라다봐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녀의 철학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동선에 대한 얘기만 봐도 그렇다. 보통은 동선이 짧은 건축 설계를 높이 친다. 그러나 저자는 그에 반기를 든다. 사람 사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동선을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옥의 동선과 아파트의 동선을 비교하면서 전자의 동선이 시각동선, 청각동선, 심리동선 면에서 뛰어남을 얘기하고 있다. 이에 그치는 것이 아파트에서 이러한 장점을 살리는 것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구석에 관한 철학은 또 어떤가. 저자가 구석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구석이 가지고 있는 '감성' 때문이다.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마음 등을 구석이라는 주제를 실타래 삼아 저자는 흥미있는 얘기를 전개할 뿐만 아니라 구석의 미학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이쯤되면 이 책은 건축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 '집'을 주제로 한 감수성 있는 책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모름지기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면 이를 통해 풀어낼 수 있는 감성이 넘치는 법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연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인연'이라는 책 제목 옆에 '피천득 수필집'이라는 글씨가 같은 크기로 쓰여 있다. 무릇 피천득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큰 것이다. 책을 여니 첫 글이 '수필'이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로 시작하는 문귀가 고교 시절 우리를 무게로 눌렸던 예의 그 글이다. 그의 무게와 교과서의 권위가 누르는 식으로 시작된 독서이지만, 조금만 더 가다보면 무게와 권위는 곧 녹아버린다. 그 무게가 고산준령의 준엄함으로 다가오는 무게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 권위가 입시에 가위눌려 다가온 호가호위의 권위였기 때문이다.

피천득, 그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그의 글은 참으로 따뜻하다. 그리고 진솔하다. 딸 서영이에 대해 표현하는 글을 읽다 보면 어찌 이 보다도 부성애를 표현하는 글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그저 펜 가는 대로 쓴 글을 보면 참으로 진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무릇 대가란 평범 속에서 진리를 길어올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이 좋았던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여기에 실린 그의 글은 참으로 짧다. 원고지 2매 정도의 짧은 글도 있고, 보통은 5매 전후다. 단순히 짧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짧음에 남을 의식하지 않음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저 느낀대로, 원고 마감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썼다는 것이 글의 길이에서만이 아니라 글의 내용에서도 은연중 드러난다. 그런 글은 독자를 참으로 편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내 속살 하나. 평범했기 때문에 그의 글이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했기 때문에 실망도 했다. 그러기에 글로 사람을 쫓아야지, 사람으로 글을 쫓으면 안되는 것인데...

또 사족 하나. 평소에 하드커버 책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하드커버 느낌이 참으로 좋았고 어울린다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삶은 돈이 만들어놓은 미로를 따라 끊임없이 회항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요즘 이 미로에 대한 두 가지 방법론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배적인 방법론은 부자 아빠 신드롬이고, 그 그늘진 곳에서 쉼 쉬고 있는 또 하나의 방법론은 느림, 또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철학이다.

스콧 니어링은 후자의 버팀목 중 하나다. 부자 아빠가 돈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입에 의해 살지 말고 자산에 기반하여 살라고 조언하는 반면, 스콧 니어링은 돈을 쌓는 행위를 일절 배격한다. 오히려 그는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독일이 전후 재건사업을 위해 판매했던 공채 가격이 폭등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남기게 되었을 때 고민 끝에 공채증서를 난로 속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스콧 니어링을 수도자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젊었을 때는 소득의 공정한 재분배를 주장하는 급진적 좌파 교수였으며, 미국 사회의 모순을 질타하다 결국 그 교수직을 잃기도 했다. 그 후 그는 1932년 그의 동반자인 헬렌 니어링과 단 둘이서 뉴욕 생활을 버리고 버몬트 시골로 들어가 자영농 운동을 벌이게 된다. 모순된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후 그는 50년 동안 자영농 운동을 실험하고 전파했다.

그들은 하루에 노동을 반나절만 하였다. 노동의 목적을 자신이 살아갈 재화를 버는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그들 자신을 위해 썼다. 한 해의 양식이 마련되면 더 이상 일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모든 먹을거리를 자급 자족하며, 농사지을 수 없는 생필품은 농작물과 맞바꿨다. 삶의 문제가 해결되면 먹고 남는 채소나 과일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들은 주변의 삶의 방식도 그들의 철학에 의거하여 바꾸어나가고자 하였다. 주변 이웃과의 관계를 자본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노동에 기초한 협력 관계로 바꾸고자 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협력 생산과 노동의 등가 계산 및 사용가치에 의거한 교환을 주변 이웃들과 실천해갔다.

결국 그의 20년에 걸친 버몬트 시골의 실험은 하나의 전형을 남겼다는 일말의 희망의 씨앗만 남긴 채 문을 닫고 말았다. 넘쳐나는 방문객과 개발로 그들의 생활 방식이 침해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인으로 옮겨 그들의 실험을, 아니 이미 정착된 그들의 삶의 방식을 계속해나갔다. 스콧 니어링은 이러한 생활을 50여년 한 끝에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100세였다.

스콧 니어링의 삶의 방식과 그의 철학을 접하다보면 너무나도 낯설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그의 방식과 철학이 단지 버몬트의 고립된 실험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의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 주변에서도 익히 들을 수 있는 방식과 철학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민들레 꽃씨는 지배종이 되어서 초원을 뒤덮지는 못했지만, 그의 꽃씨는 넓은 곳에까지 바람에 이끌려 퍼져나간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몇몇 공동체의 실험, 유기농 재배 및 바른 먹거리에 대한 관심 등 이러한 운동 모두가 사실은 스콧 니어링의 삶에 어느 정도는 빚지고 있거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과 철학이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으로까지 성공하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공의 의미를 지배적이 되는 것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자본주의란 유기체는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늘 역시 더욱 강하게 생성해낸다. 자본주의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질주해왔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본주의란 유기체는 그런 점에서 브레이크라는 반작용 속에서만 자신의 생명력을 더욱 발휘하는 유기체이지 않을까 싶다. 자본주의의 그늘이 존재하는 한 스콧 니어링식의 삶과 철학은 끊임없이 확대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경건한 작은 불빛에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불빛이 설사 요원을 불태우지는 못하더라도, 결코 사그러들지는 않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 리스의 인터넷 브랜딩 11가지 불변의 법칙
알 리스 외 지음, 오성호 옮김 / 김영사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알 리스는 <인터넷 브랜딩 11가지 불변의 법칙>을 그의 딸과 함께 썼다. 그는 6년 전인 1994년, 잭 트라우트와 함께 <마케팅 불변의 법칙>을 쓴 적이 있다. 그 이후 딸과 함께 <브랜딩 22가지 불변의 법칙>을 쓰기도 했다.

<인터넷 브랜딩 11가지 불변의 법칙>은 <마케팅 불변의 법칙>을 먼저 읽고 보면 더욱 좋다.(<브랜딩 22가지 불변의 법칙>은 <마케팅 불변의 법칙>의 아류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두 책의 간극에는 6년이란 세월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6년 사이에 가장 큰 변화는 인터넷이다. 인터넷이란 방해꾼이 나타나기 전에 <마케팅 불변의 법칙>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이란 게 그동안의 원리를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는 부분이 많다. 아니, 인터넷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 책이 놓여져 있는 지점은 여전히 읽힐 유용성이 많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저자가 <마케팅 불변의 법칙>에서 다소 수정한 법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원성의 법칙'이다. 저자는 6년 전에 시장에서는 두 마리의 말이 경주한다고 얘기했지만, 인터넷시대인 현재에서는 빌 게이츠의 말을 빌어 '인터넷은 마찰없는 자본주의'라며 '일원성의 법칙'을 얘기하고 있다.

그 외에 나머지 10가지 법칙은 추가되었거나 보완된 법칙이다. 음미할만한 법칙이 많다. 그 중 하나가 '고유명사의 법칙'이다. URL을 등록할 때 우리는 그동안 보통명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 알 리스 부녀는 인터넷 초기에서나 그것이 통용될 뿐 인터넷 승자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라는 것을 설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전거 여행> 책을 읽다 보면 도대체 김훈이라는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이길래 그의 가슴에는 저리도 풍부한 감성이 숨쉬고 있는 것인가, 이미 50줄이 넘어섰는데도 어찌 이리도 감수성이 풍부할 수 있는가 너무나도 궁금해진다. 이 궁금증을 해소해주기 위해서 저자의 얼굴 사진 한 장이라도 소개해줄만 하지만 저자도 출판사도 이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어쩌면 저자가 사진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간혹 멀리서 그를 찍은 사진에서 그는 하나같이 카메라를 외면하고 서 있다.

그의 표현은 너무나도 시적이고, 생생하고, 새롭다. 언 땅이 녹는 과정에 대해 그가 표현하고 있는 내용을 보다 보면 나는 책으로부터 멀어져버린다. 그 표현이 거부감이 있거나 너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너무나도 내밀하여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의 표현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언 땅이 녹는 것을 보고서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저자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하나 하나 쓰다듬고 있다. 이름을 얻거나 의미를 얻지 못했던 언 땅 녹는 과정이 김훈씨의 표현을 맞아 생명력을 얻고 부활하는 느낌이다.

주마간산이라고 했다. 우리는 속도를 얻으면 주변을 잃는다. 말을 타고 그러할진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더 무어라 말할 게 없을 게다. <자전거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속도를 잃은 대신 주변 사물을 얻는 여행처럼 들린다. 아니 그저 낭만적으로만 들렸으나 책을 읽고 손을 놓는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힘들게 여행한 게 아니었다. 그는 속도와 시간을 내준 대신 풍류와 인생의 깊이를 음미했다. 그렇기에 그는 고갯마루에 숨이 턱턱 막힐 때도 '자전거는 힘을 집중시켜서 힘든 고개를 넘어가지 않고, 힘을 쪼개가면서 힘든 고개를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힘을 쪼개서 간다, 분산된 힘을 겨우 겨우 잇대어가면서 간다 라는 그의 표현에는 힘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얘기하는 듯 하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 자연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글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산하에 그의 글 같은 것이 한번쯤 쓸고지나간다면 사람들도 산하를 바라보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자연만 노래하지 않았다. 시사저널 편집국장이라는 언론인의 본분이 항상 자리잡고 있는지 산골짜기에서 묻혀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삶을 담느라 자전거 페달을 며칠 밟지 않곤 하는 듯 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삶에 대한 시적인 미문(美文)이라고 단언해서는 안된다. 충무공이나 퇴계, 의상과 원효 등을 다루는 부분을 보면 그의 글이 발로만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나 깊은 소양에서 쓰여지고 있다는 생각 또한 든다.

최근 이윤기씨의 책이나 김훈씨의 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 한가지가 있다. 글이란 인생의 무게가 체로 걸러졌을 때 쓰는 것이 은은하게 묵은 글이 나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