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인연'이라는 책 제목 옆에 '피천득 수필집'이라는 글씨가 같은 크기로 쓰여 있다. 무릇 피천득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큰 것이다. 책을 여니 첫 글이 '수필'이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로 시작하는 문귀가 고교 시절 우리를 무게로 눌렸던 예의 그 글이다. 그의 무게와 교과서의 권위가 누르는 식으로 시작된 독서이지만, 조금만 더 가다보면 무게와 권위는 곧 녹아버린다. 그 무게가 고산준령의 준엄함으로 다가오는 무게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 권위가 입시에 가위눌려 다가온 호가호위의 권위였기 때문이다.

피천득, 그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그의 글은 참으로 따뜻하다. 그리고 진솔하다. 딸 서영이에 대해 표현하는 글을 읽다 보면 어찌 이 보다도 부성애를 표현하는 글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그저 펜 가는 대로 쓴 글을 보면 참으로 진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무릇 대가란 평범 속에서 진리를 길어올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이 좋았던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여기에 실린 그의 글은 참으로 짧다. 원고지 2매 정도의 짧은 글도 있고, 보통은 5매 전후다. 단순히 짧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짧음에 남을 의식하지 않음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저 느낀대로, 원고 마감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썼다는 것이 글의 길이에서만이 아니라 글의 내용에서도 은연중 드러난다. 그런 글은 독자를 참으로 편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내 속살 하나. 평범했기 때문에 그의 글이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했기 때문에 실망도 했다. 그러기에 글로 사람을 쫓아야지, 사람으로 글을 쫓으면 안되는 것인데...

또 사족 하나. 평소에 하드커버 책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하드커버 느낌이 참으로 좋았고 어울린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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