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다, 철학을 - 김성환의 영화철학에세이 동녘선서 76
김성환 지음 / 동녘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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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대중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영화를 끌어들인 책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영화 따로 철학 따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개의 글의 전반부는 영화의 줄거리를 나름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의 모티브를 잡아 후반부에서 '철학'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 부분으로 가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봉합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영화는 철학의 어느 단초를 끌어내기 위한 모티브일 뿐이기에 이 봉합은 어설프고 끝내 실패로 끝나곤 한다. 이 봉합은 영화와 철학을 하나의 용광로에 모아 녹이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 잡아내는 모티브가 그 영화의 핵심이 아닌 경우가 많고, 철학이 그 영화의 본질을 지적하지 못할 때가 많다. 결국 영화를 보는 것도, 철학을 읽는 것도 실패한 느낌이다.

영화와 철학을 결합시키려 한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한 권을 추천하라면 이진경씨의 <필로시네마,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를 들고 싶다. 이진경 씨 역시 사회학 강의를 하면서 사회학을 손쉽게 전달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영화와 철학을 결합시켰다.

이 책에서 영화는 낱낱이 해제되는 듯하지만 결국은 하나의 늠름한 자태로 완성되어 독자에게 주어진다. 복잡한 듯 하지만 결국 독자는 그 영화를 비로소 온전히 읽게 된다. 그러면서 시야가 확 트이기도 한다.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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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지문 -상 신의 지문 1
그레이엄 핸콕 / 까치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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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지문>의 부제는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이다. 이 사라진 문명의 첫 그림자를 고대의 신비한 남극 지도에서 찾고 있다. 그레이엄 핸콕은 2세기부터 여러 지도에 1만년 전의 남극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4대 문명 이전의 사라진 문명이 있었다는 화두를 꺼낸다.

이렇게 감질 나게 화두를 던져놓고 핸콕은 남미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런 후 페루의 잉카문명과 멕시코의 마야 문명에서 사라진 신의 지문의 여러 증거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잉카의 아스카 유적, 놀라운 거석문화, 그리고 멕시코의 피라미드들…. 세계의 여러 불가사의의 궤를 쫓기 시작한다. 고대 문명이 쌓은 문명은 자신의 문명이 아니라 그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았을 거라는 물증들을 들이댄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압권은 하권의 이집트문명 편이다. 핸콕이 피라미드의 과학을 하나 하나 거론할 때마다 당혹스럽고 어떤 의문이 간다. 이집트문명 이전에 어떤 다른 고도의 문명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점점 더해간다.

핸콕의 <신의 지문>은 마치 복잡한 추리소설 같다. 핸콕은 책 막바지로 가면서 앞에서 자신이 하나 하나 분해해 놓았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어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주 논리적으로 짜맞추어진다. 단편적이었던 조각이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그림은 선명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라진 문명이 있다면 이 문명은 어디로 갔을까?

이 책을 덮고 나면 지구상 어딘가에 고대문명이 (특히 핸콕이 말한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모를 일이다. 현재의 정설을 과단할 바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불가지론.회의론도 재해석해볼 필요 있다. 본질적으로 칸트의 입장은 지혜로운 경고였다. 많은 것을 알고 할 수 있는 인간, 너는 그럼에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너는 지와 무지의 경계 속에서 살고 행동하도록 항상 운명 지워져 있다. 부디 조심하거라! 유식한 것 같은 기분의 위험성에 대한 칸트의 이 경고는 오늘날 대단히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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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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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를 배제하고 로마제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원전의 역사를 만든 인물 중 다섯 명을 꼽으라면 아마 앞쪽의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에 요절한 것은 알지만 카이사르가 언제 어떤 연유로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는 떨어지는 편이다.

카이사르에 대한 일반적인 연상은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 인생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 그만큼 우리는 카이사르에 대한 인지로부터 멀어져 있는 셈이다.

카이사르 전기를 시오노 나나미에게서 빌려 읽어 본 어느 사람은 단 한마디로 '카이사르 밑에서 백인대장을 하고 싶다'고 감상을 얘기했다고 한다. '복종심이란 능력있는 상관에게 보내는 부하의 선물이다'라고 할 때 카이사르는 이 사람으로부터 복종을 받을 만한 느낌을 충분히 준 것이다.

동방에 삼국지가 있다면 서방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개척시대'를 능가하는, 한니발에서 카이사르에서 이어지는 흥미진진한 '무협지'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만으로 카이사르를 축소해서 본다 해도 이 책을 볼 만한 가치와 재미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카이사르가 왜 확전을 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왜 제정이라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해석은 너무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런 원인에는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좀 우습게 얘기하면 카이사르는 당시대의 뭇 여성들을 사로잡은 게 아니라, 2천년 후의 한 여성, 시오노 나나미마저 사로잡은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그래도 만인은 재밌게 가정을 즐기고 있다. 대표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이라고 호사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코가 낮았더라도 카이사르는 영향받을 인물이 아닌 듯 보이며, 그랬더라도 안토니우스는 패배자의 대열에서 못 벗어났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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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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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대립물 간의 투쟁에 의해서 발전을 거듭한다. 미국의 케인즈학파와 비케인즈학파 간의 대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시장경제를 이룰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대립물이 없다는 것은 불행의 시작일 것이다.

고대 로마의 대립물은 어떤 계급이었을까? 흔히 계급투쟁을 얘기할 때 귀족과 노예를 대립물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이 로마를 움직이는 중심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나나미의 책에서 노예는 역사의 주인이 아니다. 이제 노예에 대해서 새롭게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대 로마의 두 대립항은, 계급투쟁의 선두에 있었던 것은 귀족과 평민이라고 봐야만 할 것이다. 이들간의 투쟁이 로마를 살찌웠으며, 로마의 앞날을 결정했다. 왕정의 공화정으로의 변혁, 호민관제도,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 등 일련의 과정 한가운데 바로 귀족과 평민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간의 투쟁 하나하나가 로마의 앞날을 결정했다.

<로마인 이야기 3권>은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기간(BC 2세기초∼BC 1세기 중반)을 다루고 있다. 3권의 부제를 왜'로마의 혼미'로 붙였는지 모르겠다. 영웅(카이사르)이 나타나기 전의 시대는 그냥 혼미라 해도 좋은지…. 이 시기는 귀족과 평민이 진정한 대립을 거듭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며, 따라서 내성을 키우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덧붙여 나나미의 책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3권 말미에 로마를 끝까지 괴롭힌 폰토스의 왕의 편지가 소개되고 있다. '로마제국주의'에 대한 훌륭한 반론의 글이다. 나나미는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나나미는 로마의 확장주의가 사실은 속주의 보호 차원이고, 또 침입자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로마가 제국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해 부(富)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아닌가. 이런 부분에서는 나나미의 소설적 상상력도, 예리한 분석력도 좀 무뎌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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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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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해 간단하게는 두 개의 평이 있다. 하나는 재미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자유롭게 역사 서술을 할 수 있었기에 그러한 평이 나왔을 것이다. 역사를 다룰 때 그 역사를 살아간 사람을 끌어들이고, 거기에 혼을 불어서 생동감 있게 만든 게 무슨 큰 문제인가? 오히려 우리가 읽는 역사에는 이것이 부족해서 탈이 아닌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인물이나 한니발을 언급할 때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게 엮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무협지처럼 이 책을 쫓다가는 시오노 나나미도 놓치고, 로마도 놓치고, 그 무엇보다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 인식을 놓치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 곳곳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얘기하고 있다. 1권 말미에 히틀러도 프랑스 혁명도 이미 겪은 현대인이 이에 대한 역사인식을 갖고서 과거 역사를 보게 되면 고정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수 있다라는 통찰도 가슴에 새겨 볼 만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어떠한 사상도 어떠한 윤리도덕도 심판하지 않고 로마인의 여러 소행을 추적코저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말은 이데올로기에 가려 이미 눈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교과서 식의 서술에 젖어있는 사람이나, 당파성에 입각한 역사평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역사를 결과론적으로 보거나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읽는다면 정말 보고자 하는 것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관점을 버리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로마인의 관점에서 그 당시를 읽는 게 일차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권에서는 로마가 어떻게 번성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을 내리고 있다면, 2권에서는 이러한 로마의 저력이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통해서 어떻게 발휘되는가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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