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놀이로 창의력을 키운다 - 3세 이상 아이를 신나고 바쁘게 만드는 책
트리시 쿠프너 지음, 이원영 옮김 / 샘터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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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놀이로 창의력을 키운다>는 아이들 셋 둔 캐나다의 한 어머니의 실제 육아방법이 녹아 있는 책이다. 다른 만들기 놀이책이 실제 만들기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면도 있는 반면, 트리시 쿠프너씨가 쓴 이 책은 일상 생활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저자는 유난히도 비가 많이 오는 캐나다 해안 지방에서 정신없이 아이들 셋을 돌보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즐겁고 창의적으로 놀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놀이를 창조해내기 시작했고, 그런 놀이들 3백여 가지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라 한다.

이렇게 쓰여져 있는 놀이 하나 하나를 읽다 보면 저자의 애정어리고도 신나는 육아 방식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저자가 실제 생활에서 놀이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주변에서 쉽게 응용해낼 수 있다. 실천 교본으로 그만인 셈이다.

EQ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무한히 상상할 수 있고, 아이들의 욕구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어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고, 아이들을 신나고 바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 책에 나와있는 3백여 사례들은 만3세에서 만6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아이 연령에 맞는 놀이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 연령에 맞으면서 쉽게 응용할 수 있는 놀이를 체크한 후, 계획에 맞춰 꾸준히 아이와 놀아주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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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안도현 / 샘터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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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할 때는 외로워 하자>는 시인 안도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안도현 씨는 현대인이 외로움을 잃어버려가고 있다고 한다. 아니, 인간 소외가 심화되어가고 개인으로 파편화되어간다는 이 세상이 외로움을 잃어가고 있다니 그럴 수 있는가. 더군다나 외로움을 얘기하면 그게 마치 무슨 사치품인 양 비아냥거리거나 감상주의에 빠진 신세 좋은 소리라고 치부받기 쉬운 세상에 외로움을 온 몸 깊숙이 받아들이라니 될 소린가.

그러나 그가 천착하는 외로움이란 다르다. 꼭 낀 바지보다 헐렁한 바지를 입을 때, 채워졌을 때보다 부족한 것이 있을 때, 주마간산 지나칠 때보다 어슬렁거리며 사물을 관찰할 때 자신을 찾게되고 이 세상을 볼 수 있기에 외로움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마음의 빈 공간이 있을 때 흘러들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빈 공간 한 뼘쯤은 남겨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 그의 글이기에 자연에 대한 글이나 과거, 작은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글이 많다. 다니던 교직을 던지고 전주시 교외에 흙집을 수선하여 전원에 묻혀 글을 쓰는 이로서의 자신의 생활상과 그리 동떨어진 감성은 아니다.

인공(人工)적 변화에 대한 한탄과 경시가 조금은 지나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 또한 한 삶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인공적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밖에서 조망한다면 그러한 느낌으로 현대의 변화를 느긋하게 바라보고 관조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에는 시인의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글들이 많다. 사물의 깊이에 다가서는 시인의 감성을 느껴질 때 아, 감탄할 때도 있고, 가슴이 쩌릿쩌릿해질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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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제1권 - 도원에 피는 의(義)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원작, 이문열 평역 / 민음사 / 198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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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후한시대인 180년대부터 위/촉/오 삼국시대가 성립하고 다시 진으로 통일되기까지의 약 100년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이문열 평역인 이 책의 장점은 나관중의 삼국지를 기반으로 번역했되 다른 삼국지에 비추어 평설을 해놓았다는 점이다.

삼국지는 픽션과 논픽션의 비율이 7:3 정도라고 하나 이는 올바른 비율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굳이 이 비율을 따지자면 픽션이 9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나관중은 역사 사실에 기반하였되 상당히 새로운 경지에서 재창조를 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료 부족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역사적 사실에 얽매이기에는 소설적 창작력의 기운이 욱일승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여간 읽으면서 나관중에 대해서 찬탄하게 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삼국지를 보면서 역사는 영웅에 의해 움직이는가 아니면 민중에 의해 움직이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가장 논란이 되는 것 중의 하나인 조조와 유비에 대한 평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지는 젊어서는 읽되 늙어서는 읽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삼국지에서 기개와 기상을 취하고 늙은이는 교활한 술수를 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설사 자신이 삼국지를 통해 기개와 기상을 느꼈다 해서 젊은 축에 낀다 자랑할 것도 못된다. 왜냐하면 삼국지에서 항상 술수는 기개와 기상을 돋보이게 하는 소도구일 뿐이지 주연으로 나서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3세기(삼국시대)의 그런 웅대한 대륙의 기상과 14세기(나관중 집필 시기)의 그런 찬란한 문학을 꽃피우고도 20세기에 <로마인 이야기>를 뒤집을 수 있는 저작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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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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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씨가 택시 핸들을 놓고 프랑스 문화 비평을 들었다. 아니 프랑스를 통해본 우리나라 문화 비평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고독한 망명가가 애틋하게 타전하는 노래였다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밖에 있어도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이 결코 식지 않은 망명객의 애정어리되 결코 비켜가지 않은 날카로움을 지닌 문화 비평이다.

서문에 홍세화 씨는 '비판이 프랑스 사회를 추켜세우고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비판하였다 라는 단순한 차원에서는 벗어난 것이길 바란다'고 쓰고 있지만 글을 읽다보면 이러한 것은 나에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엉덩이를 삐죽 빼고서 힐난하는 비평이라면 고까운 눈으로 보겠지만, 홍세화 씨는 밖에 있음에도 오히려 우리들보다 우리 사회 깊숙히 들어와 있었으며, 오히려 우리들보다 우리 사회를 더욱 꿰뚫고 있었다. 이러한 비평은 끝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통쾌하기만 할 뿐이다.

홍세화 씨가 지난 20년 여정을 통해 우리들에게 선물한 것이 있다면 타 사회 문화에 대한 객관적이고 심도있는 접목을 꾀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이 점에서 우리들은 홍세화 씨의 고된 여정에 대해 감사해야할 지 모르겠다. 어느 누가 타 사회에 대해 이렇게 쓸 수 있겠는가. 설사 타 사회에 대해 쓸 수 있어도 어느 누가 타 사회에 비추어 우리 사회의 내면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꼬집어가며 얘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책을 고를 때 저자를 가장 먼저 본다. 누구 글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될 작가를 한 명 얻었다. 이 어찌 기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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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잠언 시집
류시화 엮음 / 열림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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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잠언시집이다. '잠언'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고리타분함으로 인해 '잠언시'를 '잠온 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고쳐 앉아 보면 '잠깬 시'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잠언시가 잠오는 시가 안되기 위한 첫번째 자세는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낮춰야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잠언시의 엑기스가 흘러들 것이다.

잠언시를 꼭 고리타분함으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다. 시대에 둔감하고 인생을 다 산 사람들의 교과서 같은 내용을 담은 시라는 식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잠언시는 시대의 조탁과정을 통해 정제된 글들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의 다양한 흐름도 역사 저변에 흐르는 도도한 흐름 속에서 파생되었듯이, 현대의 개인의 개성 역시 개인 저변에 깔린 자신에게로 던지는 자성의 흐름 속에서 생성되었다 할 것이다.

잠언시는 선각자의 날카로운 혜안이 돋보이거나 시인의 사물을 꿰뚫는 시각이 가슴에 저며오는 시는 아니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어느 수녀의 기도문에서도 올 수 있고 이름모를 범부에게서도 올 수 있는가 보다. 자기 자신에게로 조용히 향하는 글이라면 요란한 혜안보다 이러한 잔잔한 진리가 더욱 가슴에 젖어들기 쉬울 것이다.

테레사수녀의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를 원용하여 이 책 뒷편에 평을 쓴 이문재 시인은 '난 한번에 단지 한편의 시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테레사수녀나 이문재 시인처럼 한사람 한사람.. 한편 한편.. 사람과 시를 대해 나갈 수는 없지만 이 잠언시집에서 한 편의 시 정도는 가슴에 묻어둘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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