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비극적 혁명가의 슬픈 연인
소설가 홍석중과 장윤현 감독이 해석한 그녀는...
텍스트만보기   홍성식(poet6) 기자   
▲ 영화 <황진이>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먼저 1980년대 민중주의자들 사이에서 떠돌던 농담 같은 이야기 한 토막. <춘향전>의 결말에 관한 것이다.

"이 도령이 과거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올라 옛 연인 춘향이를 구한다는 설정은 부르주아들의 환상유포에 불과해. 진정 핍진성 있는 대중소설이 되려면 변학도의 학정에 시달려온 기층민중이 낫과 곡괭이를 들어 관아를 깨부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걸로 이야기가 결말나야해. 물론, 이 도령은 이 민중봉기의 중심에 서야할 테고."

이 드라마틱하고도 흥미로운 전복적 상상력을 '황진이 이야기'에 대입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2004년 남한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가 주관하는 만해문학상을 북한 작가가 수상하는 보기 드문 일이 발생했다. 수상자가 월북한 작가 벽초의 손자라는 사실까지 더해져 그해 만해문학상은 이런저런 화제를 낳았다. 수상작은 <황진이>. 남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소재요, 인물이다.

바로 그 소설이 <접속>과 <텔 미 썸딩>의 감독 장윤현에 의해 영사막 위로 옮겨졌다. 주연배우는 유지태와 송혜교. 이전 영화들 속에서 묘사된 교태와 재기 넘치는 매력적인 기생 황진이가 아닌 혁명가의 연인으로 재탄생한 황진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북한 작가와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고 제작된 첫 남한 영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도 재미있다.

북한 작가와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

북한과의 교류를 위해 설립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사장 국회의원 임종석). 재단의 신동호 이사는 보다 대중적인 남북교류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 영화를 생각한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북한 작가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 '저 작품을 남한에서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지만, 영화 제작이란 적어도 수십억원의 자본이 필요한 일. 제작자를 찾는 일이 급했다.
그때 신 이사가 떠올린 사람이 1980년대 학생운동 동료였던 씨즈엔터테인먼트(<마리 이야기> 제작사) 조성원 대표. 둘은 수 차례 북한을 오가며 홍석중을 직접 만났고, <황진이>의 판권을 10만 달러(9500만원)에 사게된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본 홍석중은 만족감을 표시했고, "상업영화이니 만치 약간의 러브신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설명에도 "그 정도는 나도 이해할 수 있다"며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곧 열릴 금강산에서의 시사회에 그가 참석해 영화화된 자신의 소설을 접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의적들의 우두머리 '놈이'로 분한 유지태.
ⓒ 시네마서비스
교태 넘치는 기생이 아닌, 혁명가의 연인 황진이

여하튼 만만찮은 우여곡절 끝에 뚜껑은 열렸다. 홍석중 원작·장윤현 연출의 <황진이> 기자시사회가 23일 열린 것.

사실 우리에게 '황진이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다.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사연에서부터 위선적 선비 벽계수를 희롱한 일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바탕으로 '이선기후론(理先氣後論)'의 퇴계와 학문적 자웅을 겨루던 화담 서경덕과 주고받은 고담준론까지.

익숙한 이야기를 식상하지 않게 만드는 건 새로운 변주다. 하여, 장윤현 선택한 변주법은 앞서 언급한 민중주의적 방식. 교태 넘치는 웃음과 기가 막힌 거문고 연주, 거기에 더해진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사내들을 홀리는 황진이가 아닌 혁명가의 연인 황진이를 탄생시킨 것이다.

새로운 변주법과 함께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황진이 역을 맡은 송혜교와 불합리한 반상(班常)의 질서를 거부한 의적들의 우두머리 '놈이'로 분한 유지태의 연기다.

연인에 대한 개인적 사랑의 감정에서부터 궁핍의 삶을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민초들에 대한 연민까지를 눈빛으로 보여주긴 쉽지 않은 일. 하지만, 두 사람은 이 난제를 피해가지 않고 어렵잖게 소화해낸다. 주연과 함께 호흡한 조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호연은 영화의 사실감과 감동지수를 높인다.

영화가 절정을 향해 내달릴 무렵. 놈이가 황진이를 향해 토해내는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난 사람들과 함께 섬으로 갈 겁니다. 양반과 상놈이 없고, 착취도 없는 곳. 모든 사람이 서
로를 아끼며 평등하게 사는 섬으로 말입니다."

영화의 핵심메시지가 담긴 이 대사에서 만적 혹은, 임꺽정과 장길산의 그림자를 본 것은 비단 기자 만이었을까?

평생을 한 여자만 사랑해온 남자. 그 남자 외에 다른 사내에겐 몸을 줬을 뿐, 마음을 준 적이 없는 여자. 세상이 강제한 규범과 허위의 틀 탓에 단 한번도 서로에게 품은 애틋한 심사
를 고백하지 못했던 놈이와 황진이는 '섬'으로 갈 수 있었을까? 거기서 평등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었을까?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영화관에서 얻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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