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를 구출하라]승자독식 사회서 밀려난 ‘절망의 대명사’
입력: 2007년 12월 03일 18:45:52
 
한국의 비정규직 861만명 가운데 29세 미만의 비정규직은 225만명. 전체 비정규직의 26%가 20대라는 의미이다. 당연히 20대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다. 통계청이 지난 8월 실시한 ‘경제활동인구 부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임금노동자 367만명 중 비정규직은 53%인 192만9000명이다. 특히 20대 초반(20~24세)의 비정규직 비율은 무려 67%에 달했다. 10대 임금노동자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98%로 일찍 취업전선에 나온 10대의 경우 안정적인 일자리 구하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3일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주유소 ‘알바’를 용돈벌이용이 아닌 고정직업으로 삼는 20대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문석기자
20대 비정규직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에 따르면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총액은 2006년 51.3%에서 2007년 50.1%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또한 법정 초과근로 한도인 주 56시간을 초과하는 장시간 노동자 비중은 비정규직(21.0%)이 정규직(11.1%)보다 많고, 주 36시간 미만 단시간 노동도 비정규직(14.4%)이 정규직(0.1%)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층이 작업상에서 상대적 약자임을 고려할 때 20대 비정규직의 노동복지는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청년들은 정규직을 바라고 있지만 양질의 일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2년에서 2006년 동안 일자리가 많이 늘어난 직업은 청소원(24만3000명), 경비직(13만8000명), 학원강사(13만1000명), 웨이터(12만9000명) 같은 비정규직이었다.

88만원 세대들은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잃어가고 있다. 재학중에는 취업 공부로 날을 지새우고, 졸업 이후는 구인 시장을 헤맨다. 그런 노력 끝에 얻는 일자리는 ‘임시직’이나 ‘아르바이트(알바)’. 그것은 더 이상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용돈벌기가 아니다.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전하는 악순환의 시작이다. 알바는 본업이 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 ‘88만원 세대’들은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다. 특히 여성 ‘88만원 세대’에게는 성희롱·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한다. 인물들 프로필 그래픽 항목은 차례대로 (1)최종학력 (2)현재직업 (3)월수입 (4)지지후보 (5)독립여부 (6)이력


▲디자인 전공 대졸 여성 이수연씨


이수연씨(26·여)는 지난해 2월 졸업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6개월 동안 직장을 구하다 학과 교수의 소개로 공공디자인업체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다. 주 6일 일하고 60만원을 받았다. 회사측은 식비 10만원은 미리 떼고 50만원을 줬다.

오전 9시~오후 7시 근무였지만, 보통 10시까지 일했다. 회사가 제한 식비는 점심값이 아니라 저녁값이었다. 야간 근무를 강제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점심은 알아서 사먹어야 했다. 4대 보험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장은 “그거 하려면 50만원에서 떼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불만은 있었지만 잘릴까봐 아무 얘기를 못했다”고 말했다.

사장은 지방 출장갈 때면 이씨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어느 출장 길에 사장은 여관에 방 하나를 잡아 놓았다. 이씨는 “황당했지만 잘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치려 해 바로 도망쳐나와 집으로 왔다”고 말했다. 입사한 지 3개월쯤이었다. 이씨는 “주변에도 성희롱이나 성폭력 때문에 회사를 관둔 애들이 몇 명 있다. 소규모 업체일수록 꼼짝을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 첫 직장은 그렇게 날아갔다”고 말했다.

또다시 ‘백수’로 지내다 올 봄 한 액세서리 업체에 들어갔다. 월급은 75만원, 출근 시간은 있어도 퇴근 시간은 없었다. 밤 12시 퇴근을 밥 먹듯했다. 휴일이 없고 임금은 체불됐다. 이씨는 “이쪽 업계 사장들은 대부분 30~40대다. 사람을 어떻게 쓰고 버려야 하는지 아주 잘 안다”고 말했다. 초보에게 디자인의 기획·제작·납품까지 다 시키면서 허점을 찾아낸다고 한다. 월급을 올려주지 않기 위한 수법이라고 이씨는 설명했다.

이씨는 “쥐꼬리만한 월급에 액세서리 재료비를 나보고 사라고 해 한달에 50만원까지 쓴 적이 있다”며 “다시 잘려 경력을 쌓지 못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디자인 업계는 ‘경력’이 특히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월급이 두달 이상 체불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체납 월급과 대납 재료비 150만원은 아직도 못받고 있다.

이씨는 지금 커피숍에서 주 6일 하루 7시간가량 일하며 월 80만~90만원을 번다. “칼 퇴근에 일요일도 쉬고 일을 오래하면 시급도 오르고, 더 편하게 더 적게 일하며 더 많이 벌어요. 대학에서 4년 간 열심히 배운 것 써먹는 일보다 단순 노동이 더 보수가 좋은 거죠.” 그가 반문했다. “웃기지 않나요.”

▲주유원 아르바이트 고졸 이재진씨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 주로 하는 ‘알바’는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대표 직종이다.

이재진씨(19·가명)는 주유소를 전전하고 있다. 검정고시를 마쳤지만 대학 진학을 못했다. 지금은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일한다. 얼마 전 ‘해고’된 뒤 새로 구한 곳이다. 전 주유소에서 이유를 통보받지 못한 채 해고됐다. 이씨는 “한 두달가량 일했는데 사장이 어느날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그랬다. 왜 그런지는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일하다가 차가 없을 때 중간중간 앉아 있었는데, 아마 사장이 보기엔 내가 잔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전했다. “사장이 멀리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잘랐다. 나는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씨는 하루 7시간 일하고 60만~70만원을 받는다. 이씨는 “세차를 2대 정도 하면 힘들어서 5분 정도 쉬는데, 앉을 수는 없다”며 “사장님은 손님들이 보면 안 좋아한다며 탁 트인 공간에서는 절대 앉아 있지 말라고 그랬다”고 전했다.

‘노동기본권’은 없다. “근로계약서를 구경한 적도, 써 본 적도 없다”고 이씨는 말했다. 밥값과 차비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보건권’도 먼나라 이야기다. 주유소에서 일한 지 7개월. 일을 마친 뒤 친구들과 만날 때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으면 ‘주유 총’에서 나오는 꺼림칙한 냄새가 떠오른다. 자영업자에게 고용된 ‘알바’들에게는 특히 4대 보험 가입은 언감생심이다.

이씨는 대신 혼유보험을 들었다. “경유와 휘발유를 혼동해 잘못 기름을 넣어서 수리비가 240만원까지 나온 적이 있다. 이전에 사장이 하라고 해 혼유보험을 든 상태였다”며 “보험사에서 돈을 내줬는데, 사장이 나한테도 책임이 있으니까 30만원을 내라고 해서 월급에서 제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월급에서 까는 것’은 ‘알바’와 ‘비정규직’ ‘계약직’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조건이다.

▲하청업 비정규직 고졸 유재영씨


공장에서 일하는 ‘88만원 세대’들은 1980년대보다 더 힘든 노동의 조건에 처해 있다. 유재영씨(26·가명)는 인천 부평의 한 대기업 공장 노상에서 천막농성을 벌인 지 석달째다. 지난 29일 만난 유씨는 까칠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유씨는 서울의 한 공고를 졸업하고 방직 공장을 다녔다. “방직 공장에서도 고졸 학력은 학력도 아니었어요.” 유씨는 한 기술대학에 진학했지만 한두 학기를 다니고 휴학했다. 에어컨 설치 일을 보조하다 전차 정비병으로 입대했다. 2004년 제대 뒤 지엠대우의 하청업체에 입사한다. 공장에 자재를 보급하는 일이었다. 기본급 60만원. 4대 보험은 없었다. 연장 근무를 하면 80만~90만원을 받았다.

2005년 2월, 이 업체는 다른 하청업체에 인수된다. 급여는 조금 올랐지만 정규직 2명이 할 일을 해내야만 했다. “생산량은 늘어났는데 오히려 인원은 빠졌다. 인건비를 낮추려는 수작이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에 대한 불신이 더 고통스러웠다. “병원에 간다고 하면 소견서를 떼 오라고 그러고, 상가에 간다고 하면 부고장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비정규직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인가요.”

지난 9월, 유씨는 사내에 결성된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해 투쟁에 들어갔다. 원청회사가 하청업체의 외주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유씨는 “1차 하청에서 2차 하청으로 가면 고용 보장은 더 어려워진다”며 “회사에 요구했던 것은 고용 보장을 해달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원청 노무팀 구사대들이 나와 조합원들을 때리면서 폭력적으로 탄압했다”고 말했다.

원청회사는 업체 평가를 이유로 유씨가 소속된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내년 4월이 결혼인데, 해고를 당하고 말았어요. 해고된 걸 집에서는 아직 모릅니다.” 그는 “여자 친구는 결혼하기 전에 상황이 안 풀리면 그만하라고 한다”고 전했다.

▲불안한 계약직 스트레스 구영희씨


취업 전선 위에 불안하게, 위태롭게 서 있는 ‘88만원 세대’들은 지독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구영희씨(26·여)는 증시 사이트 회사에서 프로젝트 업무를 돕고 있다. 단기 계약직이다.

금융업계에서 PB 일을 하고 싶었다. 2005년 겨울부터 취업 스터디를 계속 해오고 있다. “열심히만 하면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에 들어갈 줄 알았어요.” 취업 스트레스가 왔다. 밤만 되면 두통에 온몸에 열이나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지금 다니는 증시 사이트 회사에는 친척 소개로 들어갔다. 구씨는 “아무래도 불안한 미래가 가장 힘들어요. 지금 회사는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요. 나같은 계약직은 필요한 일만 쓰고 버릴 거예요.” 그는 “그래서 구직 활동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소망을 물었다. 구씨는 “중견 이상의 기업체나 대기업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서울 중위권 대학을 나온 친구 중에 학점, 토익 점수도 높고 자격증도 많지만 최종 면접에서 항상 떨어진다. 학교서열, 여성 때문인 것 같다”며 “그런 구조적인 문제들 때문에 노력한다고 해서 내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회 구조를 순응해야 할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구씨는 “비정규직을 다 없앨 수는 없다고 본다”면서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으로 들어가 경험을 쌓으며 정규직을 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구씨는 또 “노동 시장에도 유연성이 필요하고, 그래야 20대 태반이 백수인 이태백 사회에서 우리 20대에게도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배틀로열(Battle Royale)

무인도에 고립된 중학생들이 벌이는 생존 게임을 다룬 일본 영화다. 살기 위해 같은 반 친구를 죽인다는 무한 살육의 비극을 그렸다. 구직자들이 무한 경쟁의 취업 시장을 이 말에 빗대 쓰고 있다.

▶88만원 세대

한국의 20대 중 5%만이 대기업·공기업·5급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 95%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으로 붙은 세대 명칭이다. ‘88만원’은 비정규직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20대가 받는 평균 급여 비율 74%를 곱하면 세전 소득이 88만원이 된다는 데서 얻은 상징적 수치다. 우석훈·박권일 공저 ‘88만원 세대’가 원전이다.

▶스펙

구직자들의 학력과 학점, 토익 점수, 자격증, 연수 경험 등 취업 조건을 말한다. 명세서(specification)에서 따온 말이다. 과도한 취업자격을 요구하는 시대에 통용되는 젊은 세대의 언어이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김종목 강병한 김보미 오동근 유정인 유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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