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나라당 최고위원 사퇴한 전여옥 의원
"이대로 가면 대선승리는 고사하고 한나라당이 망한다"
“국민의 마지막 경고 무시하고 야합으로 문제봉합… 빅2도 사라질 수 있어”
▲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4·25 재보선 참패 이후 한나라당은 격랑을 헤쳐 나왔다. 선출직 최고위원들이 잇달아 사퇴했고, 강재섭 체제 유지 여부를 놓고 이명박·박근혜 두 주자가 극한 대치 상황까지 갔다. 그러다 이명박 전 시장이 강재섭 체제를 다시 받아들이면서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됐다. 과연 한나라당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재보선 다음날 강창희 전 의원과 함께 최고위원직을 던져버린 전여옥(48) 의원을 만났다. 전 의원은 내분 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한나라당에 “지금과 같은 체제로 가면 망한다”며 여전히 매서운 비판을 던졌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두 주자에 대해서도 “재보선 참패로 불거진 한나라당의 문제를 이번에 야합해 덮어버렸다”며 “잘못하면 ‘빅2’도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재보선 참패 이후의 당 내분 상황이 결국 강재섭 대표 체제 유지로 봉합됐는데.


“이건 봉합이 아니라 야합이다. 국민은 한나라당에 레드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면 국민의 뜻에 따라 치열하게 몸무림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두 대선 주자가 국민의 뜻을 소외시키고 밀실에서 야합해 문제를 덮어버렸다. 두 주자 역시 스타덤에 올라 ‘빅2’가 된 상태에서 ‘이지 고잉(easy going)’하고 있다. 그 분들이야말로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한다. 재보선 유세 과정에서 빅2를 향해 ‘사람들이 달라진 것 같다’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유권자들의 말을 들었다. ‘다시 생각한다’는 건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박근혜에서 이명박으로 가는 게 아니라 둘 다 싫으니 무소속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보다 한나라당이 더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허물어지고 있는 단계다. 이번 재보선 패배가 우리에 대한 마지막 경고라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현 지도부가 전원 사퇴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나.


“그렇다. 지금의 집단지도부는 당원들이 뽑아준 선출직이지만 비토하고 의견을 내는 권한밖에 없다. 당을 디자인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대표의 권한이다. 그런 점에서 당을 이처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강재섭 대표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임명직 당직자만 교체하겠다는 것은 지도자답지 못하다.”



이 전 서울시장이 결국 분당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시각이 많다.


“이 전 시장은 이번에 지도자로서 실수한 것이다. 자기가 일각에서 오해와 비난을 받더라도 당을 위해서라면 어려운 길로 가는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박근혜 전 대표 측에서 ‘강 대표 체제를 무너뜨리면 바로 분당’이라는 도그마를 내세웠는데 이를 견딜 명분도, 당당함도 없었기 때문에 문제를 봉합해버렸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강재섭 체제가 한나라당을 뜻하는 게 아니다. 대체제도 얼마든지 있다. 아마 이 전 시장은 문제를 봉합하면서 경선 룰과 관련해 유리한 지분을 챙기려 할 텐데 이런 것은 국민의 눈에 다 보인다. 국민은 한나라당의 경선 룰에 대해 시시콜콜 잘 모른다. 다만 한나라당의 부패와 오만에 대해 분노하고 이대로는 한나라당에 정권교체를 시켜줄 수 없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래도 당을 깰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분당이 그렇게 쉽게 되리라 보지 않는다. 이 전 시장이 나가든, 박 전 대표가 나가든 따라 나갈 의원들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떤 덤터기를 뒤집어쓰려고 따라 나가겠는가. 지금은 3김시대가 아니다. 독자 신당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강재섭 체제가 무너지면 분당’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이대로 가면 다시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선출직 최고위원 중 강재섭·이재오·정형근 세 분만 남았는데 국민한테 신선하게 보이겠는가. 반성과 쇄신이 아니라 앞으로 경선 룰을 갖고 티격태격할 가능성만 더 높아졌다. 집안 싸움만 하다가는 정말 국민이 등을 돌린다. 더욱이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5·31 지방선거의 공천 비리를 다 까발려야 한다고 했는데 유탄을 맞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오면 정말 큰일이다.”



재보선 참패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었나.


“공천을 정상적·상식적으로 하지 않았다. 공천 과정에서 ‘박(근혜) 사람이다’ ‘이(명박) 사람이다’ 하다 못해 ‘강(재섭) 사람이다’까지 가세해 서로 갈라먹었다.”      



공천은 별도의 심사위원회에서 하지 않았나.


“물론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추천한다. 이번에는 웬일인지 나한테 심사위원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까지 왔다. 나한테 한 번도 그런 부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를 연루시켜 엉터리 공천의 명분 쌓기로 활용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정치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외부 인사에게 심사위원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 ‘한나라당이 이길 후보’ ‘반듯한 후보’를 골라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일부러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심사위에 참가했던 분이 ‘한나라당 큰일 났다’고 하더라. 거의 협박하다시피 ‘이 사람 해줘야 한다’는 분위기였고 소수 의견을 묵살했다고 한다. 심사위는 핫바지였던 셈이고 지분 가진 사람들, 대표와 총장 등 집행 라인 사람들이 나눠먹었다는 얘기다. 나중에 심사위에서 올라온 명단을 보고 문제를 지적하기에 바빴다. 지방에서 전과 7범까지 공천 대상으로 올라왔다. ‘절대로 안 된다’고 얘기해 취소시켰지만 그것만 해도 힘에 부쳤다.”     



한나라당에서 왜 항상 공천이 말썽을 빚는다고 보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다니면 왜 훌륭한 사람을 영입할 수 없겠나. 그걸 하지 않고 자기와 관계된 사람들,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 자기 식솔들만 다 공천에 박아넣으려니까 이렇게 된다. 이른바 정치의 온정주의이고, 자기네 끼리끼리 신세를 값자는 것이다. ‘내가 너를 공천에 박아줬으니까 너는 나를 계속 모셔야 한다’는 태도다. 이래 갖고서야 당이 제대로 되겠는가.”  

 

이번 선거 참패에 두 주자 간 이전투구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상당히 기여했다. 두 주자가 서로 깎아내리고, 의원들 줄 세우기 시키면서 유권자들은 ‘한나라당이 경선까지 가는 것인지’ ‘이러다 당이 깨지는 게 아닌지’ 많은 불안감을 가졌다. 한나라당이 정신 차리고 있고, 어떻든 경선까지는 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공동유세를 했어야 했다. 어려운 지역에서 두 분이 함께 손 잡고 서 있는 사진 한 장이 유권자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번 재보선은 오는 대선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이 전 시장은 잘 몰라 전화 걸 처지가 아니었지만 박 전 대표에게는 여러 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 동안 최고위원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박 전 대표 측으로부터 ‘이명박 X맨’이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정말 그 분들이 잘하길 바라는 심정에서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안 된다’고 하더라. 신안·무안에 갔더니 20분 간격으로 두 분이 따로 유세를 하고 박 전 대표는 유세를 양보해준 김홍업씨에게 ‘고맙다’며 악수까지 했다. 대문짝만하게 난 사진을 본 당원들이 ‘이명박씨 하고는 얼굴도 서로 마주치지 않으면서 김홍업씨 하고는 어떻게 사진까지 찍느냐. 어떤 정치적 생각이 있느냐’고 항의했다. 나름대로 변명을 했지만 군색하고 화가 난 게 사실이다. 이 전 시장도 마찬가지다. 박 전 대표를 기다렸다가 ‘유세 잘 하라’며 한 마디 하면 안 되나. 이래 갖고는 12월 19일 우리가 원하는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두 주자가 이번 내분 사태를 겪으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두 주자한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파렴치한 형사범이나 패륜범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나. 경쟁을 하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정책 대결로 가면서 서로의 잘못에 대해 30%는 감싸야 한다. 왜냐하면 두 분 다 한나라당 후보니까 그렇다. 하나의 방향을 가는 동지라는 걸 서로 잊어가고 있다.”  


두 사람 간 관계뿐 아니라 당이 아래에서부터 갈라지고 있다는 우려도 많다. 의원들과 지구당 위원장들의 줄서기로 생겨난 균열이 봉합될 수 있다고 보나.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재보선 참패를 계기로 오히려 당을 난파시켜버리면 된다. 거기에서 생존하는 사람들, 수영해서 뭍으로 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가면 된다. 그런 당원들은 깨끗하고 사심(私心)이 없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과의 치열한 연대를 통해 당의 모습을 새로 제시해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두 주자가 당의 앞길을 가로막는 측면이 있다고 보나.

“빅2 때문에 한나라당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손학규 전 지사도 ‘군부 잔재’ 어쩌구 하면서 나갔는데 사실 15년 동안 한나라당에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다. 빅2 간 경쟁이 너무 심하다 보니까 여지가 없어서 나간 게 아니냐. 손 전 지사가 ‘숨통을 틔워 달라’며 나갔으면 인간적으로 더 진솔해 보였을 것이다. 이제 당내에서도 지역구가 불안해서 나오는 주자들 말고 진짜 빅2에 맞서 될 만한 주자들이 나오고, 당 밖에서도 그런 주자를 모셔와야 한다고 본다.”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빠져나오는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형체도 없이 망할 수 있다. 저쪽은 분진(分進)하면서 가루로 흩어졌다가 하나로 모일 태세지만, 여기는 거대한 초식공룡당으로 모여 있다가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 있다. "


의원들을 만나보면 줄 세우기에 대해 고민이 많은 것 같은데.

“한나라당 의원들도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유권자들에게 떳떳해야 된다. 오래 한다고 다 정치인이 아니다. 다선(多選)이라고 지역구에서 존경 받나. 의원들이 자긍심을 갖고 ‘나도 언젠가 빅2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잘 관리하고 줄 서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의원들 입장에서는 다음 번 공천이 걸린 문제 아닌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공천한다는 말인가. 안 되는 사람을 밀어넣을 수 없고, 유권자들이 원하는 사람을 자를 수도 없다. 나는 오히려 이번에 굉장한 희망을 느꼈다. 유권자들이 한나라당 의원들보다 더 정확한 정치 분석을 한다. 이번 재보선 선거 결과를 보면 ‘너희들을 응징하겠다’는 메시지가 명확히 읽히지 않나.”       


 


현 체제로 가면 대선 승리는 어렵다고 보나.

“대선 승리는 고사하고 당이 망한다고 본다. 지난 열 달 동안 지도부에 있으면서 한나라당의 문제점을 처절하게 느꼈다. 차라리 당이 깨져서 망하면 낫다. 당을 깰 힘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되면 자멸이다.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빠져나오는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형체도 없이 망할 수 있다. 저쪽은 분진(分進)하면서 가루로 흩어졌다가 하나로 모일 태세지만, 여기는 거대한 초식공룡당으로 모여 있다가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 있다. 바람 한 번 불면 벽제 화장장에서 풍장하듯이 다 날아갈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소수라도 치열한 소수가 있으면 이끌어갈 수 있다. 치열한 소수와 이야기해 다수로 만들 것이다. 국민을 움직이고, 외부 세력과 연대해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당이 없어지고 심판 받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 좌파 정권을 종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좌파 국가로 가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없어진다.” ▒


 


/ 정장열 차장대우 jr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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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nge] 한국영화 흥행성적표의 허와실
▲ illust 남지혜

장규성 감독이 만든 영화 ‘이장과 군수’의 첫 주말 성적이 40여만명으로 집계된 직후 이 영화를 제작한 싸이더스FNH의 차승재 대표를 술자리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는 것이 맞을까. 아니, 그보다는 차승재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이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제일 애매해.”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건 흥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망한 것도 아냐.” 갑자기 웬 ‘같기도(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명)’람. 하지만 그가 요즘의 개그 유행어를 알 리는 없다. 하긴 최근 들어 한국 영화판에서는 이 ‘같기도’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들 이러고 있는 것 같다. “이건 한국영화가 위기도 아니고, 위기가 아닌 것도 아녀.” 거 참 헷갈린다, 헷갈려.


흥행타율 면에서 난다 긴다 하는 차승재 프로듀서가 이렇게 고개를 갸웃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 주 40여만명, 개봉 4주 만에 전국 120여만명. 그런데 들어간 돈은 총 제작비 40억원 선이다. 입장료 7000원 가운데 2740원이 투자사·배급사·제작사의 몫이니까 어떻게든 150만명을 넘어서야만 손익분기점을 넘길 테지만, 요즘 같아선 거기까지 가기가 참으로 멀고 먼 산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개봉 첫 주말 40여만명의 수치만으로 이런 상황을 예상하는 노련한 프로듀서 차승재의 한숨이 이해할 만하다. 죽도록 힘들게 만들었는데 속된 말로 ‘똔똔치기’에 급급해야 하니 이걸 가지고는 결코 성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무조건 망했다고 좌절하는 것도 그렇고. 그의 말 그대로 참으로 애매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차승재 대표의 요즘 생각은 좀 남다르다. 박박 우겨가며 스크린 수를 유지하고, 광고 마케팅을 계속 강행하는 등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려고 애쓰지 말고 차제에 ‘그 놈의’ 손익분기점을 낮추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판단으로는 총 40억~50억원 선으로 돼 있는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를 30억원 선으로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제작비 30억원 운동의 시작이다.


얘기는 간단하다. 총 제작비(프로덕션 과정에 들어가는 순수제작비에 광고 마케팅 비용이 합쳐진 개념)가 평균적으로 30억원 선으로 낮춰지면 전국 100만 관객으로도 수익을 내는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마침 차승재 대표는 요즘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국내 프로듀서의 모임인 이 제작가협회를 통해 차 대표는 평균 제작비를 줄이는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 모두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비용을 줄인다는 건 기본적으로 인건비 구조를 축소한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모든 사람의 임금을 깎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얼마전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영화인노동조합과 임금 및 단체협약을 체결해 국내 영화 사상 처음으로 ‘영화 노동자의 최저임금제’를 관철시켰다. 이 협약에 따라 30억원짜리 영화를 15회 촬영할 경우 1억5000만원의 비용이 상승하는 효과가 생기게 됐다.


때문에 비용을 줄이는 대상은 그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스타의 몸값을 중심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몇몇 제작자가 남의 돈 수십억원을 투자 받아서는 BMW나 아우디 같은 고가의 외제 차를 몰고 다니며 흥청망청 진행비를 쓰는 행태도 강력하게 지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건 어쩌면 비본질적인 얘기인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20여회에 찍을 수 있는 영화를 30여회까지 끌고 가는 비효율의 프로덕션 과정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즉 영화 제작 방식에서 현대적 매뉴얼의 도입이 시급할 것이다.


국내 최고의 배우라는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도 100만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평균 제작비를 30억원으로 줄이면 “100만도 못했어?”라는 얘기가 당당히 “100만이나 했어”로 바뀔 것이다. 이제는 그런 얘기를 듣고 싶다. 그럴 때도 됐다. 정말 그럴 때가 됐다. ▒



/ 오 동 진 | 고려대 사학과 졸업, 문화일보·연합통신·YTN·문화부 기자, 필름 2.0 취재부장, 씨네버스 편집장 역임. 현 D&D 미디어 대표, 동의대 영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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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2030’ 빈털터리 세대
[신동아 2007-04-25 10:51]
프랑스에서 출간된 ‘프로실업자’ 자서전 ‘나는 24년간 배부른 백수’ 표지 이미지와 일러스트.

1998년 국내 중견기업 이사직을 끝으로 명예퇴직한 박모(59)씨는 올초 셋째딸(26)로부터 각서 한 장을 받았다. 내용인즉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최소 5년은 직장생활을 하겠다”는 것.

“대학 마칠 때까지 등록금에 용돈까지 대주고 동남아 영어연수도 보내줬는데, 취업한 지 겨우 2년 만에 불쑥 외국으로 떠난다니 선선히 보내줄 수 없죠. 실컷 돈 들여 공부하고 돌아와 곧장 시집가겠다고 하면 우리집 기둥뿌리 뽑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붕마저 내려앉을 테니까요.”

박씨는 딸 넷을 뒀다. 맏이가 대학생이고 나머지 셋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명예퇴직해 의류소매업으로 네 딸을 어렵게 공부시켰다. 지난해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마침내 무거운 짐을 좀 더나 싶었다. 그런데 졸업 직후 결혼한 맏이를 제외하곤 세 딸 모두 사실상 그의 울타리를 못 벗어나고 있다. 2001년 수도권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둘째딸은 1년 넘게 구직에 매달리다 포기한 뒤 그와 함께 옷가게를 운영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막내딸은 2년째 구직 중이다. 셋째딸이 유일하게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는데, 지난해 말 사표를 내고 영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박씨는 “요즘 매일 누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10년 전 퇴직금과 아파트 담보 대출금으로 사업을 시작할 땐 그래도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보다 젊었고, 10년만 고생하면 아이들도 제 밥벌이를 할 테니 그때까지만 뒷바라지 하고 그 뒤엔 우리 부부와 어머니 노후 생활비나 벌면 되리라 생각했죠. 노후자금은커녕 빚만 늘어서 아파트마저 팔고….”

지방의 가난한 집안 외아들로 태어난 박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남의 집 살림해서 번 돈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갔다. 홀어머니는 고생하며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킨 걸 자랑스러워했다. 1990년대 초 서울 강북의 50평형대 아파트로 이사할 때,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등록금 낼 돈이 부족해 죽은 남편의 형제들에게 손 벌려야 했던 마음고생을 다 보상받았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지난해 박씨 가족은 아파트를 팔고 평수를 줄여 빌라로 이사했다. 박씨는 그날 어머니가 눈물 훔치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지 애비 등골 다 빼먹고…”

“사업을 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어요. 아이들 교육비에 생활비를 감당하려니 대출금과 카드 빚만 불어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불안했어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를 팔아 되는 대로 빚을 정리했지요. 어머니가 지금도 속상해하세요. 저야 아이들이 더 좋은 대학에 못 간 게 꼭 제 무능력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지만, 어머니는 다르죠. 아이들과 어머니 사이에 골이 깊어졌어요.”

팔순을 넘긴 노모로선 대학까지 나온 말만한 손녀들이 밥값을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지 애비 등골 빼먹다 시집가면 그만이지.” 둘째딸(29)은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가슴을 후벼 판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아버지 고생하시는 게 마음 아파 그런다는 걸 알지만 속상하죠. 할머니가 아버지를 대학 보내셨을 땐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취업 허가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구직자 중에 4년제 대학 안 나온 사람 있나요? 대학 졸업장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데…. 저나 동생들이나 답답하죠. 고등학교만 졸업한 엄마는 제 나이에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전 아직 미혼에다 모아둔 돈도 없으니까요.”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대학생수(전문대, 일반대, 교육대, 대학원 포함)는 1975년 23만5000여 명에서 2002년에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인구 1만명당 대학생수는 1975년 66.7명에서 지난해 623.2명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매년 50만이 넘는 대학졸업자(전문대, 교육대, 일반대 포함)가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다. 박씨가 대학생이던 시절 전체 대학생 수의 2배를 넘는 규모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체감 청년실업률’이 15.4%에 달한다. 지난해 통계청이 집계한 청년실업률은 7.9%인데, 이는 청년층 경제활동인구(463만4000명) 중 실업자(36만4000명)만 감안한 수치고, ‘체감 청년실업률’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는 취업준비자까지 실업자에 포함시켜 계산한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구직 포기자까지 합하면 청년실업자(15~29세)가 100만명이 넘고, 청년실업률은 19.5%까지 올라간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높은 청년실업률이 장기간 지속되는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수급 불일치’를 지목한다. ‘산업 고도화에 따라 기업의 고용 유발력이 축소(노동 수요 감소)되고 있는 한편, 대학 졸업자가 꾸준히 증가(노동 공급 증대)하는 학력 인플레이션이 전반적으로 직업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한 마디로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작아지는데, 구직자의 눈높이는 점점 높아진다는 얘기다.

현대경제연구원 표한형 연구위원은 “학력 인플레도 문제지만, 산업 전반에서 자본집약도가 높아짐에 따라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는 것이 높은 청년실업률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보고서에 따르면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가 줄어들고 있다. ‘괜찮은 일자리’란 ‘정규직이고, 평균임금의 1.5배 이상을 받으며 주당 근로시간이 18~50시간인 일자리’를 뜻하는데, 2002년 71만4000여 개에서 2005년 67만2000여 개로 감소했다.

정부 창출 일자리, 오히려 毒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펴낸 ‘양극화 극복과 사회통합을 위한 사회경제정책 제안’ 보고서도 ‘양질의 일자리 감소’를 사회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 KDI는 ‘노동부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30대 대기업 집단 소속 계열사와 공기업, 금융회사 등의 종업원 수가 1997년 157만9000명에서 2004년 130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이들 기업의 종업원 수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134만3000명(1999년)으로 급감한 뒤 2002년 124만5000명까지 감소세를 유지하다 2003년 127만1000명, 2004년 130만5000명 등 회복세로 돌아섰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KDI 김용성 연구위원은 “고임금 일자리는 대체로 제조업, 특히 대기업에 많은데, 제조업 분야의 대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추세라 제조업 분야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다”며 “서비스 분야에서 일자리를 창출해 이를 보완해야 하는데, 서비스 분야 생산성이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어 20~30대 고학력자의 노동시장 진입이 상당히 어려운 상태”라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20~30대의 실업이 장기화하면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외국의 경우 실업자가 저학력층에 몰려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고학력 실업률이 월등히 높은 데다 이들이 장기적으로 사회에 진입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아예 구직을 포기하고 비경제활동인구로 빠져버릴 것”을 염려하는 것. 그렇다고 ‘정부의 직접적인 일자리 창출’이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니다. 김 연구위원은 “정부가 창출하는 일자리가 대부분 단기적인데다 민간기업에서 요구하는 역량 획득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오히려 취업에 약점으로 작용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공공근로 경험이 오히려 ‘실업자 경력’을 확실하게 부각한다는 이유로 구직자들이 기피한다는 것.

현대경제연구원은 청년실업 대책으로 “산업수요와 성장산업의 소요인력을 고려한 종합적 직업·대학교육 체계 개편, 지속가능한 일자리에 재정지원 집중, 일자리 창출 동력 강화를 위한 투자 확대,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고학력 청년층에 인센티브시스템 확립 등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3명 중 1명은 대졸자

1980년엔 대졸자가 25세 이상 인구 전체의 7.7%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5년엔 31.4%가 대졸자다. 25세 이상 성인 3명이 모이면, 그중 1명은 대졸자인 셈이다. ‘대학을 나오면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옛말이 되어버렸다.

‘대학졸업장’이 아무런 프리미엄 효과를 내지 못하니 취업희망자들은 새로운 프리미엄을 강구한다. 그래서 구직자들 사이엔 취업 ‘5종세트’ ‘7종세트’란 말이 나돈다. 명문대 졸업장, 외국어 성적, 해외 경험, 기업체 인턴십, 각종 자격증, 봉사활동…. 취업 준비를 위해 졸업을 미루고 휴학 중인 서모(26·남)씨는 “여기에 ‘능력 있는 부모’를 더하면 최상의 ‘스펙’이 된다”고 말한다.

‘스펙’이란 명세서란 뜻의 specification을 대졸 구직자들이 줄여 쓰는 말로, 입사지원서에 기입하는 내용을 가리킨다. 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이 자녀의 학교성적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가 공공연한데다, 어학연수나 각종 자격증 획득을 위해선 등록금 외에 추가 비용이 들고, 그 비용으로 ‘스펙’이 차별화되는 데서 나온 얘기다.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를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업체며 ‘취업 족집게 과외’도 성행한다고 하니 부모의 경제력이 취업의 지름길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기자가 취재 중에 만난 10여 명의 미취업 대졸자 및 대졸예정자 중 1명을 제외하고 모두 6개월 이상의 해외 어학연수 경험이 있었다. 연간 등록금이 사립대 인문계의 경우 1000만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해외 어학연수까지 대학생이 으레 거쳐야 할 과정으로 자리잡아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는 허리가 휠 지경이다.

허리가 휠 망정 부모가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여력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대학등록금에 어학연수비용까지 감당하느라 사회에 진입하기도 전에 채무자 신세가 되는 젊은이도 적잖다. 수도권의 한 사립대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 김모(28)씨는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졸업 전 네 학기 등록금을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다. 두 학기는 생활자금까지 대출받아 총 1500만원 가까운 빚을 진 상태로 졸업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꼭 취업을 해야 하는 김씨는 ‘in 서울’ 대학이 아니라는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6학기를 마치고 멕시코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1년 학비와 체류비 1000만원은 친척에게서 빌렸다.

실제 임금보다 높은 유보임금

2003년에 대학을 졸업해 취업전선에 나선 김씨는 암담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김씨는 해외영업 및 마케팅 업무에 관심을 가졌으나 스페인어 전공자를 원하는 기업이 드물뿐더러 있다 해도 ‘경영학 전공’ ‘토익 고득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결국 한국무역협회의 무역 실무 1년 과정과 영어학원 토익반에 등록했다. 그러던 중 ‘보험용’으로 지원한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씨는 한참을 고민했다.

“고작 영세한 무역회사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무리하게 돈을 들여 공부한 건 아닌데, 당장 학자금 대출 이자에 카드대금을 내야 하고, 친척들 보기도 민망해 결국 첫 출근을 했어요. 곧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막상 취직하고 나니 다른 데 또 원서내고 면접 보러 다닐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벌써 4년이나 다녔어요. 이젠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요즘은 중소기업에 다닌 경력이 별 인정을 못 받는다고 해요.”

KDI 김용성 연구위원에 따르면 “1990년대 대학설립이 자유화하면서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고 수준이 됐고, 대졸자들은 ‘대학을 나왔으니 이 정도 이상은 받아야 한다’는 유보임금(reservation wage)을 기업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게 잡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막연한 기대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기업엔 아예 지원하지 않거나 설사 지원해 합격하더라도 입사를 하지 않으니 구직 기간이 길어진다.

최근 ‘동아일보’와 취업정보업체 인쿠르트가 공동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졸 구직자 이력서 111만5000여 건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대졸구직자의 ‘희망 연봉’은 실제 대졸 초임보다 많고, 꾸준히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1799만원, 2004년 1878만원, 2005년 2041만원, 2006년 2137만원. 반면 연봉 전문 사이트 오픈샐러리가 조사한 국내 전체 기업의 대졸 초임 평균은 2003년 1760만원에서 2006년 1897만원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소규모 무역회사에 다니는 김씨 역시 ‘일단 취업이 되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형편이 안 되는데도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이다.

‘명품’ 바람이 생필품에까지 번져 2030세대를 ‘빈털터리’로 만든다.

“인터넷에 떠도는 3000만원, 4000만원 하는 연봉이 제가 받게 될 액수인 줄 알았어요. 그게 일부 금융회사와 소수 대기업에 국한되는 얘기란 걸 뒤늦게 알았죠. 아직도 학자금 대출금을 갚고 있는 저를 보면서 어머니가 그러세요. ‘난 너희 남매 대학만 졸업하면 우리 집 형편이 금세 필 줄 알았다’고.”

김용성 연구위원은 “유보임금을 낮춰 중소기업이나 서비스업에 취업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 경제가 그렇지 않은 상황에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근로조건과 임금 격차가 심해진데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직이 어려워지면서 젊은층이 좌절을 겪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고학력 청년층의 구직기간을 늘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을 비롯한 고임금 일자리를 고집하고, 소득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긴 시간 취업준비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일자리’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올 초 전국경제인연합이 2005년 매출액 기준 3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고용동향 및 채용계획’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기업 201개사 중 140개 기업만이 채용계획인원을 밝혔고, 61개사는 올해 채용계획이 없거나 미정이라고 응답했다. 주요 기업 140개사의 올해 신규 고용계획 인원은 3만4900명. 경력 채용까지 포함한 숫자라 실제 신입채용 규모는 훨씬 작다. 산업별로는 전기전자업종의 신규 고용계획 인원이 1만5397명으로 전체의 44.1%를 차지했고, 음식료 및 자동차, 조선 순으로 조사됐다. 주요 기업들이 밝힌 채용계획 중 눈에 띄는 점은 전체 3만4900명 중 2만595명(59%)을 매출액 순위 50대 기업에서 뽑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지방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김모(25)씨는 “취업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서울의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1, 2년 만에 거의 다 취업을 한다”며 “지방대 출신이 파고들 틈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대입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야 알겠다”고도 했다. 대기업이나 고임금 일자리 창출이 저조한 상황에서 적은 일자리마저 최상의 ‘스펙’이 몰리는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청년실업 대란’ 속에서도 일부 대학 출신자는 2~3군데에 동시 합격하고, 지방대 출신 구직자는 면접 한 번 못 보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유학과 공무원 시험 중 택일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4학년 정모(24)씨는 해외 어학연수로 갈고닦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우수한 학부 성적으로 무장해도 취업문을 통과하지 못한 청년 백수가 수두룩한 상황을 보고 일찌감치 진로를 바꿔 취업에 성공한 경우다.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정씨는 지난해 말 국가공무원 7급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정씨는 대학 3학년 때인 2004년 8월에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최근 공무원 또는 공기업 취업에 ‘올인’하는 ‘공시족(公試族)’이 늘고 있는 상황에 비춰보면 경쟁이 극심해지기 직전에 한 발 앞서 준비한 셈이다. 부모의 현실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5학기 때 부모님이 먼저 권유하셨어요. ‘요즘은 유학도 다녀오고, 실력이 출중해야 취업할 수 있다는데, 어학연수 1년 다녀올 비용으로 2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 어떻겠냐’고요. 공무원집단이 ‘철밥통’이다 ‘우물 안 개구리다’ 하며 비판받지만, 생각해보니 열심히 하면 문화관광이나 통상 쪽에서 전공을 살릴 수 있겠더라고요. 나중에 공부를 더 할 기회도 있고.”

경남 마산 출신인 정씨는 휴학 후에도 서울 신촌 원룸에서 자취를 계속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용돈을 아무리 아껴 써도 집세에 관리비, 생활비까지 더하면 한 달에 50만원으로 부족했다. 학원비며 교재비는 별도다. 정씨는 “신림동에 가면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며 “학원에 등록할 돈이 없어 도강(盜講)하는 사람도 적잖다”고 말한다. 시험 정보며 사교육인프라 면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현격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는데,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궁핍하게 생활하는 청년층이 많다고 한다.

“부모님 말씀이 저 대학 보내는 데 1억원은 족히 들었대요. 지난해 가을학기에 복학하면서부터는 등록금 전액을 학자금 대출 받아 냈어요. 벌써 1000만원 가까운 빚을 졌답니다. 무거운 짐이에요.”

“누릴 건 누리고 살아야지”

하지만 정씨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더라도 저축에만 매달릴 생각은 아니다. 전시, 공연 등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를 유감없이 충족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은 용돈이 적으니까 제 돈으로 표를 사는 건 사실 한 달에 한 번도 벅차고, 주로 이벤트에 응모해 당첨되거나 초대권을 가진 친구가 있을 때 공연을 관람해요. 좋은 옷, 명품 가방 같은 건 제 분수에 안 맞다고 생각하지만 문화생활만은 기회 닿는 대로 최대한 누리고 싶어요. 엄마는 나중에 월급 받으면 절반을 뚝 떼서 저금하라고 하시는데, 전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축하느라 지금 누릴 수 있는 걸 못 누리는 건 좀 그래요. 적금 비율을 좀 줄이더라도 적립식펀드 등에 넣어 효율적으로 재테크를 하면 되잖아요.”

지방대학 교수인 이모(64)씨는 1999년 대기업에서 퇴직한 후 재취업에 성공한 경우다. 비슷한 시기에 직장에서 퇴직한 친구들은 “지금껏 현직에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워하지만, 이씨는 벌써 내년으로 다가온 정년퇴직 후를 걱정하고 있다. 이씨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뒀다. 군대 간 막내아들(25)은 아직 대학 2학기를 남겨뒀고, 두 딸은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했다. 첫째딸(31)과 둘째딸(29)은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러나 두 딸 모두 가정경제엔 별 보탬이 안 되는 상황이다. 첫째딸은 줄곧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최근 박사과정을 밟기로 마음먹었고, 둘째딸은 지난해 일간지 기자가 됐지만 여전히 꼬박꼬박 용돈을 타 쓰고 있다. 둘째딸이 성남시에서 출퇴근하기 힘들다고 해 지난해 전세로 마련해준 24평형 아파트 관리비며 각종 공과금도 이씨의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둘째 말이 세금 떼고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이 100만원 겨우 넘는데요. 그런데 사회 초년생이 돈 쓸 일이 좀 많나요. 옷 사고, 구두 사고, 가방 사고, 여자들 화장품 값은 또 왜 그리 비싼지. 아내가 딸에게 준 제 명의의 신용카드를 여태 회수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요새 젊은 애들은 약아서 제 명의의 신용카드가 있을 텐데도 비싼 거 살 땐 꼭 제 카드를 써요. 지금이야 제가 버니까 그럭저럭 버티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죠.”

사회진입장벽이 높은 것과 더불어 ‘돈 쓸 데가 많다’는 것 또한 20~30대를 ‘빈털터리’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기성세대는 “버는 돈 없이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하고, 모으기보다 쓰는 걸 우선한다”며 젊은 세대를 한심스러워하지만 정작 괴로운 건 ‘쓸 데는 많은데 돈이 없는 그들’이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우리나라 20~30대를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코드는 ‘소비’”라고 말한다.

“20~30대는 이전 세대와 분명히 달라요.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어선 시대에 태어나 놀이나 유희를 소비로 대체했죠.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과 모여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놀기보다 전자오락기, 텔레비전, 워크맨을 이용해 혼자 노는 걸 즐겼고, 자라면서 과외나 학원으로 내몰렸고요. 지극히 개인적인 세대로 자라나 성인이 된 다음에도 백화점 구경하고, 인터넷 쇼핑하는 게 그들의 놀이문화죠. 브랜드에 대한 지식과 이해(brand literacy)가 부모세대보다 월등히 높아서 어른들이 모르는 브랜드를 많이 알고, 문화적 정서를 광고로 습득한 세대예요. 그러니 소비에 대한 지식도 많고 열정도 강하죠.”

실제로 얼마 전 부모로부터 독립해 혼자 원룸에서 살고 있는 정모(28)씨는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돈을 모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휴일에 갈 만한 곳은 백화점뿐이고, 잡지에선 매달 새로운 트렌드와 신제품을 알려주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한쪽에선 쇼핑몰 ‘특가 상품’이 한 번 와서 봐달라며 깜빡거리니 욕구를 억제할 수 있겠냐”는 얘기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국민소득 수준이 높지 않았을뿐더러 사회적으로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는 캠페인이 이어졌다.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외제품 소비는 생각 없는 사람들의 사치와 허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생활수준이 급격히 향상된 데 이어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와 1990년대 중반 무역장벽 완화는 소비 범위를 국제적으로 넓혀놓았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정부는 “소비가 경제를 살린다”며 돈 쓰는 걸 부추겼다.

‘부자 되세요’ 코드

대학생 해외 어학연수 바람도 20~30대의 ‘수준 높은’ 소비를 이끌었다. 해외 유학 경험자는 자신이 머물던 나라에서는 한창 인기지만 아직 한국엔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 제품을 쓰고, 그 나라의 음식을 찾아먹는 것으로 유학 경험을 과시한다. 미국을 본거지로 한 베트남 음식 전문점 체인 ‘포호아’가 강남에 1호점을 낸 게 1998년이고, 이듬해 이대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외환위기로 주춤했던 해외 어학연수 기류가 다시 살아날 즈음 속속 국내에 진출한 이들 해외 브랜드는 유학 경험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기자는 2004년 ‘크리스피크림 도넛’이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에 입점했을 때 미국 뉴욕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동료 기자가 “미국에 있어본 사람은 이 맛을 잊지 못한다”며 길게 줄 선 사람들 대열에 ‘당당하게’ 합류하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유모(30·여)씨는 3년째 교제 중인 남자가 있지만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다. “둘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번 돈으로 결혼해 생활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계산이 안 나온다”는 게 이유다.

“대학졸업 후 줄곧 직장생활을 했는데, 남은 돈이 없어요.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 전세금이 전부인데, 그나마 4000만원 중 2000만원은 부모님이 보태주신 거고요. 그렇다고 사치스럽게 생활한 건 아니에요. 카드 빚 없이 연봉 2800만원으로 예쁜 옷 사 입고, 여름휴가 땐 동남아라도 다녀오고, 면세점에서 갖고 싶던 가방 사고, 친구들과 만나면 맛있는 음식에 와인 한 잔 곁들일 수 있으면 알뜰한 거죠(웃음). 다만 모아둔 돈이 없어 집을 못 산다는 게 흠인데, 6년간 악착같이 모았으면 과연 집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도 않잖아요. 굳이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한,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김난도 교수는 “정치적 이슈가 대학가를 지배할 때는 소비에 관심이 있어도 드러내기 껄끄러웠지만, 사회 전반이 소비적으로 바뀐 다음, 특히 외환위기 이후엔 ‘부자 되세요’가 전국민의 열망이자 코드로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생필품까지 ‘명품 바람’

“‘소비의 평등화’란 허울을 쓰고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사치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만연하게”(김난도 지음, ‘럭셔리 코리아’) 된 것도 20~30대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치품이 외제차, 고급 예물, 양주 등에 국한됐을 때는 자신이 번 돈 안에서 알뜰하게 사는 게 미덕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명품 바람’이 생필품에까지 번지면서 ‘비싼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에, ‘비싸도 좋은 것’을 고집해야 ‘센스 있고 감각 있다’고 평가받는 풍토다.

대형 마트 식품 매장에만 가 보아도 한 종류의 채소가 그냥 채소와 무농약 채소, 유기농 채소로 나뉘어 있고, 분유 코너 또한 일반 분유, 고급 분유, 유기농 분유로 구분해 진열돼 있다. 유기농 분유 값은 같은 용량의 일반 분유 값의 3배가 넘는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던 30대 초반의 주부 두 사람은 “그냥 채소에 일반 분유 사가면 계모인 줄 알겠다”며 유기농 분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네 살 난 딸을 둔 맞벌이 주부 최모(37)씨는 아이 놀이방비와 도우미 아주머니 월급을 주고 나면, 자신의 월급에선 남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유아용품만은 최고를 쓰지 않을 수 없다”며 “전업주부인 친구 중엔 육아비용 때문에 친정에 손 벌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조모(34·남)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2년 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처가로 들어갔는데, 설 무렵 장모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바람에 집안이 엉망이 된 것. 10년 전 혼자 된 장모는 쓰러지기 전까지 작은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었다.

“장모님이 그 연세가 되도록 바깥일을 계속 하는 게 마음이 쓰이긴 했어도 집안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는데, 막상 장모님이 쓰러지시니까 집안이 지뢰밭처럼 문제투성이더라고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직장생활을 해본 적 없는 아내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인터넷 쇼핑을 자주 했나 봐요. 집에 아이 옷, 장난감, 갖가지 교구와 책들이 나뒹구는데 그런 것들이 그렇게 비싼 건지 몰랐어요. 이번에 보니 얼마 안 되지만 전에 살던 집 전세금도 다 써버리고, 매달 빠져나가는 할부금이 200만원에 가깝더라고요. 지금껏 장모님한테 생활비 한푼 안 드리고 살았는데 당장 입원비는커녕 생활비도 없으니…장모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현금 100만원, 카드 100만원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2030세대의 ‘실망소비’를 부추긴다.

탤런트 김정은이 “부자 되세요”를 외쳐 화제가 된 광고는 알다시피 신용카드사 광고다. 신용카드는 부자가 아닌 사람도 부자처럼 소비할 수 있도록 소비 패러다임을 바꿔놓았고, 그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인 세대가 20~30대다. 김난도 교수의 설명이다.

“신용카드는 지급이 편리하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어요. 과거엔 100만원짜리 물건을 사려면 100만원을 모아야 했는데, 요즘은 일단 ‘긁고’ 나중에 값을 지급합니다. 일단 소비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거죠.”

100만원짜리 물건에 욕심이 생겨 악착같이 100만원을 모았다고 해도 막상 현금 100만원을 손에 들면 선뜻 돈을 써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달라진다.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면 돈의 가치가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소비의 기억’이 잘 누적되지 않는다. 그러니 당장 현금이 없어도 소비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카드대금 명세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계산하지 못한다.

직장생활 3년차에 접어든 신모(29)씨가 술값, 밥값 외에 별다른 지출이 없는데도 매달 카드대금으로 나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성세대는 소득이 생기면 저축부터 하고 남은 돈으로 소비를 했던 반면, 20~30대는 소득이 완성되기 전부터 지출액을 쌓아놓는다. 우선순위도 다르다. 과거엔 ‘집을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든 욕구 충족을 ‘내 집 마련 뒤’로 미뤘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 “서른두세 살 쯤에 결혼했으면 한다”는 신씨도 “내 집 마련을 미루고 자동차를 먼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다른 욕구를 포기하기보다 내 집 마련 시기를 미루거나 전세로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신씨가 생각하는 아파트 전세금은 얼마쯤 될까. 기자가 기억하는 선에서 “구로구의 24평형이 1억3500만원, 마포구의 같은 평수는 1억9000만~2억5000만원, 용산구의 32평형은 1억9000만원 정도”라고 하니 신씨의 눈이 동그래진다. 연봉을 한푼도 안 쓰고 5년 넘게 모아도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기 때문이다.

20~30대를 경제적으로 괴롭히는 또 하나의 복병이 집값이다. 참여정부 최대 골칫거리 부동산문제는 특히 20~30대를 절망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서울대 석사 출신의 대기업 대리 이모(31·여)씨는 ‘5월의 신부’가 된다. 상대는 지난해 친구 소개로 만난 4년 연상의 직장인. 똑같이 직장생활 6년차에 접어든 두 사람은 각자 모은 돈을 합쳐 마포의 20평형대 아파트를 매입했다. 동료들은 “‘내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워하지만 정작 이씨는 “빚더미 위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며 심란해 한다. 이씨와 예비신랑이 직장생활 만 5년 동안 모은 돈은 1억원이 넘는다. 그중 결혼식 및 혼수비용을 제하고 남은 8000만원이 내 집 마련 비용이다.

“명품 가방 하나 사지 않고 알뜰하게 모은 거예요. 매년 여름휴가 때 해외여행 다녀온 게 사치라면 사칠까. 남편 될 사람도 입사 초기에 중고 자동차를 산 것 말고는 차곡차곡 모은 편이고요. 막상 집을 구하러 다녀보니 8000만원이 턱없이 적은 돈이더라고요. 결국 20년 넘은 아파트를 1억5000만원 대출받고 샀어요.”

빚더미 위의 ‘스위트홈’

가진 돈의 두 배 가까운 빚을 져가며 굳이 집을 사야 할까. 이씨는 “남의 집을 전전하기 싫다”는 일반적인 이유 외에 “집을 손수 예쁘게 꾸미고 싶다” “지금 무리해서 사지 않으면 평생 집을 못 살 것 같다”는 두 가지 이유를 더 댔다. 최근 33평형 아파트 전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권모(37)씨도 “대출금 이자를 내는 것보다는 전세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내가 ‘내 집이 아니라 집을 마음대로 꾸밀 수 없다’고 얘기할 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겐 ‘내 집’이냐 아니냐에서 더 나아가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사느냐도 중요한 관심사다. 이 때문에 요즘은 신혼집을 마련하는 경우 집값에 인테리어 비용 1000만~2000만원을 더 보태야 하는 추세다.

결혼 적령기로 접어든 자식을 둔 부모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소 판 돈으로 대학을 다녔을망정 취업해 열심히 모으면 수년 내에 내 집 마련이 가능하던 시절은 간 데 없고, 평생을 저축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졸업과 동시에 언론사에 입사한 김모(52)씨는 1988년 목동의 27평 아파트를 2020만원에 분양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월급이 80만~90만원(상여금 별도)이었고, 초등학교 입학 전인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김씨의 부인 이모(52)씨는 “(남편의 소득 중) 상여금 전액과 월급의 일부를 떼어 모으면 1년에 500만~600만원은 모았다”며 “그때만 해도 월급쟁이가 허리띠를 졸라매면 몇 년 안에 내 집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목동의 27평형 아파트 매매가는 7억~8억원(스피드뱅크 실 구매가, 3월9일 현재).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을 둔 이씨는 “우리 아들이 월급 모아서 집을 살 수 있겠냐”며 “(결혼할 경우) 결혼식을 간소하게 하고, 양가에서 1억원씩 내놓아 전세를 얻으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또 “집값이 턱없이 오르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이 아예 돈 모으기를 포기하고 버는 족족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며 걱정스러워했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 표현대로라면 ‘실망소비’다. “주택가격이 급증한 탓에 내 집 마련 가능성이 없다고 전망한 20~30대가 실망스러운 마음에 소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집값 급등’이 20~30대에게 미친 여파는 ‘실망소비’ 수준을 넘어서 사회 구성원 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고, 일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킨 것은 물론 직업관까지 바꿔놓았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홍모씨(35·여)의 얘기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면 으레 부동산 얘기가 나와요. 얼마 전 대학 동기 한 명이 2003년 1억8000만원에 분양받은 33평형 아파트가 요즘 6억원을 넘는다고 자랑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1억7000만원으로 전세를 얻은 제 자신이 정말 바보 같더라고요. 은행 빚 내기 싫어서 전세 살았는데… 이제 그 친구랑 저는 ‘계층’이 완전히 달라졌죠.”

돈으로 나를 드러낸다

소위 최고의 직장으로 손꼽히는 삼성전자 신입사원도 ‘요즘 같은 추세라면 내 집 마련은 이루기 힘든 꿈’이라고 생각한다. 올 초 삼성전자에 입사한 S(27)씨는 “DTI(총부채상환비율) 적용 이후 내 집 마련은 물 건너갔다”고 말한다.

“재테크는 남이 연 5~7%의 소득을 올릴 때 10~15%를 번다는 의미잖아요. 재테크를 잘해봤자 지금으로선 제 능력으로 집을 갖는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얼마 전에 본 4컷 만화가 요즘 젊은 세대의 실정을 아주 잘 보여주더라고요. 한 명은 우수인재로 연봉 3500만원 받는 직장에 취업해 1년 만에 2000만원을 모았고, 다른 한 명은 부모 잘 만나 중소기업에 취직하자마자 3억원짜리 아파트를 선물 받았는데 1년 만에 1억원이 올랐다는 얘기였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열심히 살려는 사람의 의지가 꺾이죠.”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우리나라 20~30대가 “소비에 대한 열망과 소비 가능한 자원 사이의 격차가 큰 세대이며, 다른 세대보다 결핍과 불만에 훨씬 민감하다”고 말한다. 부모세대에 비해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보냈지만, 외환위기 당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냉혹한 현실을 목격하며 양극단을 체험한 이들은 성인이 된 뒤엔 ‘로또’와 ‘부동산 광풍’이라는 인생역전의 기회(?)와 마주했다. 부모세대가 전쟁과 산업화, 민주화 시대에 살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했다면, 20~30대는 대체로 자기 자신과 ‘돈’에 집중한다. 다만 돈을 모으는 것보다 돈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목표를 둔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는 “20~30대의 소비성향이 기성세대가 염려하는 것처럼 쓸 줄만 알고 벌 줄은 몰라 생산성을 저해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소비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할 겁니다.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 투잡(two jobs), 스리잡(three jobs)도 감수할 겁니다. 물질문화에 노출될수록 삶이 더 각박해지죠. 젊은이들이 고소득 직종에 관심이 많고 직업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연봉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죠.”

소비 욕구가 일할 동기를 제공하면 다행이지만, 직업 선택의 이유가 단지 ‘돈’이라면 청년실업 장기화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유보임금에 밑도는 직장엔 입사를 포기하고, 재수 삼수를 하는 한이 있어도 ‘높은 연봉, 안정된 정년 보장’이 트레이드마크인 공기업 입사를 고집하며, 대학 졸업 후에 다시 치·의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현상 등이 그 부산물이다.

“똑똑한 애들은 다 의대 갔는데…”

S씨는 인재들이 의대와 고시로 몰리는 현상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며 걱정스러워했다.

“똑똑하다는 애들은 대부분 인문계는 고시, 자연계는 의대로 몰리는데, 우리나라의 법률시장이나 의술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으니 큰일이죠.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외고열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이런 추세라면 앞으론 유치원 때부터 입시준비에 시달려야 할 거예요.”

S씨의 말은 ‘십장생’이란 신조어를 떠올린다. ‘십대들도 장차 백수가 될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비관적인 의미다. 실제로 경제전문가도 비슷한 걱정을 한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고령화시대에 부가가치를 창출해 노령인구를 간접 부양해야 할 20~30대의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은, 지금의 10대가 노동시장에 진입해야 할 시기에 엄청난 사회·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성세대의 경제활동으로 유지되는 화로가 어느 순간 꺼져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피하기 위해선 “서비스산업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창출하는 등 직업 스펙트럼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요즘 젊은이들이 똑똑하긴 하나, 계산적이고 안정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사회의 앞날을 걱정하던 모습이나 개척정신, 모험심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아쉬워했다.

20~30대의 소비성향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김난도 교수도 “학생 대부분의 꿈이 돈 많이 벌고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으로 귀결되는 오늘날의 세태는 분명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속수무책인 상황이에요. 물질주의는 숙명이지만 과시욕에 치중한 지금의 소비 행태는 분명 비정상적입니다. 소비 외에 젊은이들이 즐길 만한 도락(道樂)이 없는 것도 문제지요. 과거엔 젊은이들이 학교, 장래희망, 가치관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는데, 요즘은 소비욕망이 곧 정체성이에요.”

1970, 80년대까지만 해도 사상지나 문예지, 시사월간지가 젊은이들의 지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극했다. 그러나 요새 젊은이들은 패션·명품 잡지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누가 얼마를 벌고,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 그리고 어떤 집에 사는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 일러스트레이션·박초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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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관두면 뭐할지…정부 대책? 이젠 안믿어”
제주 감귤 농가
한겨레 허호준 기자
“무신거 먹엉 살아야 할지 모르쿠다. 경해도 농사는 해얍주, 어떵?”(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농사는 해야지 어떻게 해요.)

지난 9일 오후,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강윤범(55)씨의 한라봉 하우스 시설에는 소형 굴삭기가 굉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굴삭기는 5년생 한라봉 나무들을 뿌리채 연신 뽑아냈다. 한라봉은 4년째부터 수확이 가능하고, 5년째는 한그루당 6㎏(3만원) 정도 수확한다. 강씨는 수년동안 고생한 ‘돈’을 버리고 있는 셈이다.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 자신의 감귤밭에서 강창이(64)씨가 시름에 잠겨 있다.

자식 대학보낸 감귤밭 내버릴 수도 없고…

뽑힌 한라봉 나무를 부지런히 옮기느라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강씨는 “미국산 오렌지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시설 재배한 한라봉은 경쟁이 안된다. 그래서 다른 작물을 심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라봉을 뽑아낸 곳에 망고를 심을 예정이다. 망고는 심은 뒤 4~5년 뒤에 수확한다.

그는 현재 한라봉 1200평, 감귤 750평, 망고 600평 등을 시설재배한다. 경비를 빼고나면 연간 5천만원 정도 돈을 번다. 30년 가까이 감귤 농사만 해왔다는 그는 “지금 상태만 돼도 농사를 해볼만 하지만 미국산 오렌지류의 수입과 한-중 에프티에이까지 체결되면 농촌에는 그야말로 재앙이 닥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설재배는 투자비가 많이 든다. 강씨도 1억3천여만원의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시설재배하는 농가들은 평당 10만~13만원의 초기 시설투자비가 들어 1500평 이상이면 5천만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다들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걱정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정부가 대책을 세운다는데, 신뢰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 그는 “정부가 농촌을 위해 믿을만한 대안을 언제 제시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사례도 제시했다. 도지사가 5차례나 에프티에이 협상장을 찾아다녀도 된 것이 하나도 없고, 감귤 재배 역사가 40여년이 되는데도 시장에 팔 정도의 품종을 제주도 자체적으로 개발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연구소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화를 내듯 되물었다.

수천만원 빚은 또 어떻게 갚을지 막막

보성리 옆동네인 대정읍 구억리 감귤밭에서 만난 강창이(64)씨는 비닐작업복과 마스크를 쓴 채 혼자서 2500여평의 감귤밭에 창가병 방제용 농약을 뿌리고 있었다. 기자를 만나자 담배부터 꺼내 문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협상 내용을 아느냐’고 묻자, “농사만 짓는 사람이 계절관세니 뭐니 하는 말뜻을 알겠느냐”며 “그래도 감귤은 이제 끝이라고 하니 앞으로 뭐하면서 살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40여년 동안 농사 이외에는 다른 일은 해본 적이 없다는 강씨는 그동안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 8천여평의 밭을 소유하고 있다. 노지감귤 2500평과 한우도 12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는 몇년 전에 생산량을 줄여야한다는 제주도의 방침을 받아들여 감귤밭 3500평을 없앴다. 그는 “아들 둘을 대학까지 보낸 감귤밭을 없앤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며 “또 감귤밭을 내버릴 수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 제주도 주요작물 재배 면적
한라봉 시설재배 포기도

제주시 한경면 산양리에서 부인과 함께 농약을 치고 있던 전업농 이동익(50)씨는 지난해 에프티에이 기금 지원을 포함해 3천만원의 빚을 얻어 1천여평의 감귤 비가림 시설을 만들었다. 그는 “비가림 시설 감귤은 3월에 출하되기 때문에 저관세 오렌지류의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어쨌든 감귤로 승부를 걸어볼 생각이지만 대안이 없어 요즘 잠이 오지 않는다”고 답답해 했다.

현재 제주지역에는 전체 농가의 86%(3만1천여가구)가 감귤을 재배하고 있고 농가 수입의 51%를 차지한다. 그러나 한-미 에프티에이로 감귤농사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만 있을 뿐, 마땅한 대체 작목이 없어 농가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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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러기 > 책값이 너무 비싸다!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동네서점에서 김훈 선생의 신작을 살펴보다  빈정이 상했다. 김훈의 애독자이지만 이번 책의 정가 11000원은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다.

이전에는 대부분 소설들이 9천원대였지만 요즘은 1만원이 훌쩍 넘는 책들도 많다.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어 보인다. 나름대로 표지에 공을 들이느라 돈이 많이 들어갔을까? 표지에 돈을 많이 쓴다고 김훈 소설이 달라지나? 게다가 겉표지가 본문보다 커서 쉽게 우그러지고 잡고 읽기에도 너무 불편하다.  이익만을 생각하는 출판사의 알량한 속셈이 뻔히 보이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

학고재는 완당평전 같은 괜찮은 인문서를 내던 출판사로  아는데,  이번에 뜬금없이 소설책을 내면서(그렇다고 김훈 선생을 비판하는 건 아니다)  욕심이 동했는지 너무 가격을 높게 매겼다. 아무리 책가격은 붙이는 사람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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