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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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최초 10년 동안 사람들은 향후 역사를 바꿀 천재들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파블로 피카소는 현대 미술을 다시 그렸고, 특허청에서 일하던 독일인 아인슈타인은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썼으며, 1900년에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 박사는 정신분석학이라는 혁명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니, 가히 천재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살인의 해석>에서도 세상을 바꿀 천재는 세기초의 10년 안에 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셰익스피어와 프로이트의 예를 들고 있는데, 2007년 현재 전 세계를 놀래킬 천재는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들고 나올지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하다.

 

<살인의 해석>은 정신분석학의 태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이자 '컴플렉스'라는 말을 만들어낸 또 다른 심리학의 거인 카를 융이 살인사건을 수사한다면, 이라는 흥미로운 가정으로 출발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기틀을 닦아놓은 심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이 오늘날 각광받고 있으니 아주 허황된 이야기도 아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활동하던 프로이트가 미국을 방문한 것은 생전에 단 한 차례, 미국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강연을 부탁했기 때문에 1909년에 배를 타고 건너온 것이 유일했다고 한다. <살인의 해석>은 이때 미국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프로이트가 참여한다는 일종의 팩션 미스터리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909년, 프로이트와 수제자 융이 뉴욕의 항구에 도착한다. 젊은 정신과 의사 스트래섬 영거는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성심성의껏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날 호화찬란한 발모럴 아파트에서 한 젊은 여인이 넥타이에 목이 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온몸에는 채찍과 면도칼로 난자당한 상처가 가득한 채. 공교롭게도 다음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또 한 번 뉴욕 시내에 울려퍼진다. 또 한 명의 여인이 살해당할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났지만 역시 채찍과 면도칼에 당한 상처가 났으며, 넥타이로 졸린 목은 피멍으로 얼룩졌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소녀, 노라 액튼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으며 사건 당일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심리적인 원인으로 실어증과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해본 경험이 많은 프로이트가 사건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와 융을 내세웠지만, 사실 주인공은 영거 박사와 리틀모어 형사다. 영거 박사는 프로이트를 대신해 노라 양을 치료하는데, 그녀는 곧 영거 박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사실 이것은 환자가 의사에게 보이는 무조건적인 숭배 현상을 뜻하는 전이에 다름아닌데, 영거 박사 역시 노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역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사랑인지 마음의 장난인지 반신반의하는 영거 박사와 노라의 이야기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또한 이 사건을 심리학이 아닌 증거 제일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경찰의 입장에서 수사하는 리틀모어 형사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직 젊기에 뇌물을 안 받아먹고 때가 덜 탔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담당 수사관이 된 것인데, 의외로 명탐정을 방불케 하는 뛰어난 추리력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를 통해 진상에 점차 접근해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배경이 20세기 초반이라서인지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빠른 템포의 스릴러 식이 아니라 엘러리 퀸 풍의 클래식 미스터리 형식으로 사건을 풀어가서 일단 반가웠다. 유전자나 다른 과학 지식 난무로 머리 아플 일도 없고. 하지만 확실히 미국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양식이 사양길이고, 쓰는 작가도 거의 없기에 참조할 작품이 별로 없어서인지, 고전 미스터리의 맛을 썩 잘 내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고전 미스터리의 맛은 매력적인 탐정이 단서를 잘 조합해낸 다음 명추리를 전개해 용의자 인간군상들 앞에서 트릭을 확 폭로하며 한 방을 멋지게 터뜨려야 맛이 사는 법인데 <살인의 해석>은 대체로 밍숭맹숭하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목에 새겨진 머릿글자를 둘러싼 공방도 이게 뭐 어쨌다는 건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별로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한 가지 더 실망스러운 점은 프로이트와 융이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홍보 문구와는 달리 프로이트가 약간의 조언을 해주는 정도고 융은 작품 내내 방황만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성실하게 씌어진 점은 마음에 든다. 작가 제드 러벤펠드는 당시의 시대상을 꼼꼼이 조사해 독자들이 마치 1900년대 초반 뉴욕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사실성을 덧입혔다. 그가 아니었다면 맨해튼을 잇는 다리를 건설할 때 아래가 뚫린,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상자 모양의 '잠함'을 강 속으로 투하시켜, 그 안의 물을 빼고 공기를 주입한 다음 인부들이 작업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밖에도 프로이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당대 미국의 지식인 계층(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따지고 보면 근친상간의 욕망인데, 은근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그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의 배척과 탄압, 살인 사건의 해결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프로이트와 융의 대립과 결별 등의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심리학이 태동하던 당대의 공기를 잘 잡아내고 있음은 칭찬할 만하다. 

 

작가 제드 러벤펠드는 프로이트를 오래 연구한 사람이라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프로이트의 대사는 거의 실제 그의 학설, 발언, 논문 등을 토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아주 허투로 쓰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또한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 프로이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만 있다면 누구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준이고. 미스터리로서도 적당히 재미있고, 시대를 초월한 프로이트 이론의 매력도 잘 살려내 누가 읽어도 그다지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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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2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도 엘러리 퀸을 느끼셨군요^^

jedai2000 2007-04-2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리 퀸이 이런 소재를 가지고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더 잘 했을텐데 ^^

2007-04-23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04-2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글쎄, 뭐 읽을 만은 합니다. 뒤의 설명이 좀 부실해서 그렇지,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몰입감이 있고 재미있어요 ^^
 
카후를 기다리며
하라다 마하 지음, 오근영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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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빛 파도가 넘실대는 남국의 섬,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 제목 <카후를 기다리며>의 '카후'는 오키나와 사투리로 좋은 소식, 행복 등을 뜻한단다. 좋은 어감 만큼이나 좋은 뜻이다. 오키나와의 작은 섬에 사는 아키오는 28살이 되도록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채, 자그만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애견 카후와 함께 하루하루를 재미없게 보내고 있다(애견만 없다 뿐이지 다른 신세는 필자와 비슷하다, 흑). 책 첫 머리에 아키오의 외로움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구절이 있었는데, 어쩐지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어 소개한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고백하자면 여기서부터 역시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과는 인연이 먼 인생을 살고 있는 필자가 급격히 몰입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아키오는 섬 밖으로 관광을 나갔다가 한 신사에 들러 기원문을 매달아둔다. 신에게 던지는 한 마디가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진지하게 미지의 여성에게 구애를 한 것이다. 

"나한테 시집오지 않을래요? 행복하게 해줄게요 - 아키오."

개인적으로도 특정한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친구들이랑 어디 놀러 가서 절이나 사당 같은 곳이 나오면 꼭 헌금을 하며 소원을 비는데, 친구들이 돈 낭비라고 다 비웃어도 나는 진지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이랑 잘 되기를 빌기도 하고, 지금처럼 항상 맑고 곱기를 기원하기도 하며 뭐 그런데, 인연이란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도 때로 어긋날 수도 있는 모양이니 뜻대로 되지 않는 애정이 벽에 부딪쳤을 때 신을 찾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결국 그렇게 많이 빌었음에도 본인은 신으로부터 어떤 기별이나 연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질투나게도 이 작품의 주인공 아키오는 대뜸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니, 사치라는 이름의 낯선 여자에게서 온 것이다.

"기원문이 진심이라면 저를 당신의 아내로 받아주시겠어요? - 사치"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사치를 몹시 기다린다. 하루하루 기대감이 실망으로 변해가지만 사치는 오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아키오는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은 지금껏 전부 나를 떠나갔다.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떠난 어머니, 나보다 단짝 친구를 더 좋아했던 짝사랑하는 여자애...평생 이렇게 외로울 팔자인가 보다, 하며 포기한 순간에 사치가 찾아온다. 눈부신 미소에 단아한 아름다움, 활달한 성격에 싱그러운 젊음을 소유한 사치가...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 사치"

 

아름다운 오키나와의 자연을 배경으로,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외로움을 간직한 아키오와 사치가 점점 가까워지고,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를 돋운다. 왜 이쁘게 사랑하는 커플을 보면 괜시리 훔쳐보고 싶고, 그저 예뻐 보이고, 잘 됐으면 하고 응원하는 게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우리네 마음 아닌가.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튼튼한 결실을 맺기를 열심히 바라며 읽었다. 제1회 '일본 러브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데, 분명히 매력있는 소설이다. 만나고 가꿔워지다, 오해를 겪고 이별하지만,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는 대강의 설정은 통속적이고 대부분 짐작 가능하지만 솜씨 좋게 빚어져 있어 결점을 찾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의 오해는 대부분 아키오의 우물쭈물함, 용기없음, 지레짐작에서 비롯되고 있어 '이런 바보'하면서 내내 욕을 하면서 보았다. 마지막 100여쪽을 볼 때는, '빨리 사치의 마음을 알아채란 말야', 하면서 하도 몰입하면서 봤더니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순진한 아키오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풋풋한 연애담, 꼭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사치라는 여인의 매력,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남국의 싱그러운 바람, 전쟁 같은 도시가 아닌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시골의 여유를 안겨줘 한참을 잊지 못할  독서가 될 듯하다. 좋은 연애소설은 아마도 책장을 모두 덮고 나면 나도 지금 당장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카후를 기다리며>를 읽고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닷가 모래밭을 단둘이 다정하게 걷고 싶어서, 철 지난 사랑 노래를 찾아 듣고 싶어서, 카메라처럼 내 눈에 나만을 보고 웃어주는 한 여인을 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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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 밀리언셀러 클럽 58
조지 펠레카노스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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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는 어린 크리스토퍼를 상상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 매일 아침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개 짖는 소리도 듣던 아이. 창문을 내다보며 기적의 터치다운을 꿈꾸고, 경기장 밖으로 만루 홈런을 쳐내는 상상을 하고, 옆자리에 앉은 예쁜 여학생을 그리워하던 아이. 엄마가 준비하는 아침식사 냄새를 맡고 엄마의 콧노래를 들었을 아이. 그리고 엄마가 고개를 삐쭉 들이밀며 이제 일어나 학교 갈 시간이다, 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던 아이......

 

LA에 제임스 엘로이가 있고, 보스턴에 데니스 루헤인이 있다면, 워싱턴 D.C에는 조지 펠레카노스가 있다. 비록 펠레카노스가 그간 국내에 소개되지 못해 진가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을 읽어본 결과 엘로이나 루헤인 급의 '크라임 픽션Crime Fiction'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거명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듯하다. D.C가 미국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범죄율로 유명하듯이 펠레카노스의 작품의 수위 또한 대단하다. 그리스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나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다양한 체험을 했다고 하는데, 직접 보고 들은 밑바닥 생활을 묘파하기에 그렇게 리얼한 범죄소설이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는 펠레카노스의 사립탐정 데릭 스트레인지 시리즈의 제1작이다. D.C 토박이 데릭 스트레인지는 초로의 전직 경찰관이자 현직 사립탐정이며, 흑인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이곳 D.C에서 바람난 애인 뒷조사로 짭짤한 이문도 좀 남기고, 애인이 있지만 적당히 바람도 피면서 그럭저럭 남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즐기는 것은 서부영화 사운드트랙 듣기. 도입부에서 스트레인지는 뜻밖의 의뢰를 받게 되는데, 크리스토퍼 윌슨이라는 사망한 흑인 경관의 어머니로부터 아들의 죽음을 재조사해달라는 것이 의뢰 내용이다. 크리스토퍼는 비번인 날 술을 마시고 거리를 걷다, 노상 방뇨를 하려는 백인을 제압한다. 반항하는 백인과 실갱이가 커지자 소란이 나게 되고, 순찰 중 이 장면을 목격한 백인 경찰관 테리 퀸은 동료 경찰인 줄도 모르고, 총을 들고 있던 크리스토퍼를 쏘아 죽인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전말인데 크리스토퍼의 어머니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아들이 흑인이라, 천한 흑인과 같이 경찰 생활을 하는 것이 고까워 일부러 죽였다는 것. 스트레인지는 의뢰를 받아들여 테리 퀸을 만난다. 테리 퀸은 동료 경찰을 오인 사망케 한 죄로 해임되어 헌책방에서 일하고 있다. 멋진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좌절된 현실에 늘 억압된 분노를 품고 산다. 스트레인지는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친절하고 진실되어 보이는 테리가 그리 싫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서부영화 사운드트랙을 좋아하는 취미도 같고. 하지만 때로 화산처럼 분출되는 테리의 돌발적인 폭력성에 완전히 그를 믿지는 못하고 있다. 더구나 테리가 한 눈에 반해 구애하는 흑인 아가씨 주아나에 대한 테리의 마음이 혹시 자신의 수사를 피하기 위한 위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작가 조지 펠레카노스는 오우삼의 <첩혈쌍웅>의 미국 배급을 맡기도 했단다. 아마도 오우삼과 <첩혈쌍웅>을 무척 좋아하는 듯,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의 스트레인지와 퀸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고결한 남자들만의 우정으로 점차 분신이 되어가는, 영락없는 오우삼 영화의 두 주인공 모습과 판박이가 아닌가. 여기다 작가는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영화 문법도 그대로 가져온다. 비열한 마약상, 타락한 경찰, 사기꾼, 마약에 중독된 창녀, 백인 쓰레기, 남미 갱 등이 등장해 페이지를 욕설과 수다로 화려하게 수놓으며, 각각 다른 인물과 이야기가 툭툭 던져지다 나중에 모든 상황이 하나로 합쳐져 짜릿한 쾌감을 주는 스타일은 그야말로 잘 만든 타란티노 영화를 보는 듯하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스트레인지와 퀸에게 각각 포커스를 맞추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와 전혀 무관한 마약 밀매꾼들의 이야기도 병행되어 처음에는 이게 뭔가, 했었다. 하지만 이 세 이야기는 결국 정교하게 한 가지 결말로 수렴되니 안심하기 바란다,

 

주인공은 스트레인지지만 더 매력적인 인물은 자책감과 분노, 열정, 억압, 혼란으로 가득찬 복잡한 내면의 퀸이기에, 그가 범인이 아니었으면 하고 몹시 바랐다. 하지만 계속 의혹의 여지를 남겨두어 그가 악인인지, 정의의 편인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게끔 만든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며, 스트레인지가 고생스레 모아온 관련자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결국 사건의 진상을 도출해내는 과정은 독창적이며 매우 흥미롭다. 이젠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 되는 미국의 인종 갈등도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갈등을 넘어 아예 서로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흑백의 모습은 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하지만 결국 흑인 스트레인지와 백인 퀸이 하나가 되는 것은 마약범들의 노리개가 된 아가씨를 구출하기 위해 <황야의 무법자> 음악을 들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출전하면서부터인데, 약한 여자를 구출하는 서부 사나이들의 활극이란 점에서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주의와 마초이즘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가 보기에 유치한 영웅주의와 마초이즘이 미국의 본질인 것을.

 

거의 익히지 않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처럼 생생한 폭력과 도발적인 성애 장면, 걸쭉한 욕설, 대중문화에 바탕을 둔 농담(<리쎌 웨폰>을 패러디한 농담이 그중 백미다) 등 B급 영화스런 재미가 살아 있는 책이다.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겠지만, 좋아할 사람은 거품을 물 그런 작품. 쓸데없이 꼬아서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저돌적으로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미국 사회를 안에서부터 곪게 만드는 고질적인 문제들-인종 차별, 범람하는 마약, 총기 허가 등-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힘을 가진 작품으로, 꾸미거나 숨기지 않고 이 모든 문제들을 직시할 것을 종용하기에 결국 깊은 감동까지 남긴다. 조지 펠레카노스, 크라임픽션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이제 빗소리만 시끄러웠다. 빗줄기가 창고 지붕을 하염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정체가 뭐야? FBI? 마약반?"

레이가 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혼자야."

얼이 말했다.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당신 카우보이야?"

레이가 비아냥댔다.

'그래, 그게 바로 나다.'

 

 

p.s/ 아무리 복고 열풍이라지만 80년대를 연상시키는 제목과 표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들고 읽으면 다 쳐다보는 것 같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 원제 이 살리기 어려운 제목이라지만, 지금 제목보다는 더 좋게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괜찮은 작품인데 표지와 제목에서 먼저 점수가 깎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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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기대됩니다.

jedai2000 2007-04-2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이런 남성적인 범죄소설도 좋아하니까 매우 좋았는데, 판매지수를 보니 후속작을 볼 수는 없겠더군요. 아듀~ T.T
 
운명의 서 1
브래드 멜처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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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서>가 작년 가을 미국에서 꽤 성공한 작품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읽기 전, 기대는 매우 컸었다. 과연 책 소개글을 보면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전직 대통령들이 자문한 정치 스릴러까지 재미있을 요소가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실제 책을 읽어보니 기대보다는 못했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낚였다'는 생각이 절로 날 만큼 그 비중이 작았고, 솔직히 이야기의 주된 흐름과는 전혀 무관해 그야말로 변죽만 울린 셈이다. 단순히 말해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프리메이슨에 의해 건축되어 현재 워싱턴 D.C 지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정도만 간략히 소개되는 정도고, 그마저도 빼버린다 해도 책 내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그토록 숭배한다는 '운명의 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고. <운명의 서>의 또 하나의 강력한 축인 정치스럴러 면에서는 아주 실패하지는 않았지만, 쓸데없이 지나치게 복잡한 감이 있고, 적이 친구로-친구가 적으로 과도하게 반전을 시도함으로써 중구난방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주인공은 라이언 매닝 현 미합중국 대통령의 젊은 보좌관 웨스 할로웨이다. 자신의 실수로 보좌관 중역이자 대학 때부터 대통령의 친구였던 론 보일과 대통령의 면담이 취소되자, 항의하는 론 보일을 달래기 위해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기로 한 나스카 레이싱 장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 그를 태운다. 정식 면담 대신 차 안에서 못 한 이야기 나누라는 배려다. 대통령을 보려고 수많은 군중들로 북적대는 레이싱 경기장에 도착한 리무진에서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내리자마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광신도 저격수인 니코가 총을 난사한 것이다. 다행히 대통령은 총에 맞지 않았지만 론 보일은 세 발의 총을 맞아 호송 도중 사망하고, 웨스는 뺨에 구멍이 뚫려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버린다. 그러나 얼굴의 상처도 잊은 채 웨스는 깊은 슬픔에 빠지는데, 자신 때문에 론 보일이 죽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내가 론 보일을 리무진에 태우지만 않았더라면...암살 사건의 여파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과 웨스를 비롯한 보좌관들은 낙향하고 전직 대통령과 그 측근으로써 그럭저럭 살아간다. 8년 후, 매닝 대통령은 말레이시아에 초청 연설을 가게 되고, 충실한 대통령의 그림자 웨스도 따라가는데 그곳에서 볼 수도 없고, 봐서도 안 되는 한 인물을 보게 된다. 8년 전에 죽은 론 보일을. 론 보일 때문에 그토록 마음 아파했는데, 그가 살아 있었다니 하늘이 무너질 일이다.

 

여기까지가 초반부의 내용인데 독자를 상당히 몰입시키는 구석이 있다. 템포도 빠르고, 웨스가 느끼는 절절한 슬픔도 크게 공감이 간다. 하지만 작가 브래드 멜처는 그 이상 나가지 못했다. 구색은 다 갖췄지만 어딘지 치밀함이 결여된 스토리(예를 들어 모든 음모의 주모자로 알려져 웨스가 심혈을 기울여 찾던 삼인조의 정체는 두 다리 건너 전화 한 통화에 그들의 이름, 나이, 이력 등이 술술 나와버린다)가 뼈아프다. 전술했듯이 워싱턴 지도에 숨겨진 프리메이슨 상징들을 소개하고, 대통령이 풀던 크로스워드 퍼즐에 감춰진 암호까지 수록해 흥미를 돋구고 있으나, 결국 그 해답이란 것도 공허하고 플롯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미아처럼 혼자 떠돌고 있다. 배신과 배신, 음모와 음모로 점철된 복마전 같은 정치판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 그런지 최후까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를 알 수 없는데, 너무 복잡하게 꼬다보니 앞에 공들여 만든 설정이 뒤의 반전과 어그러져 어설퍼 보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싱싱한 회와 일등급 한우라는 최상급의 재료로 섞어찌게를 만들어버림으로써 재료들의 맛을 제대로 못 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좋지 않은 내용만 주로 휘갈겼는데, 미덕이 아주 없는 소설은 아니다. 먼저 실제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두 전 미국 대통령이 감수했다는 전직 미국 대통령의 삶은 큰 흥밋거리가 된다. 알래스카에서 뉴욕까지 모든 도로를 전화 한 통화로 텅텅 비울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이 이제는 신호등 앞에서 빨간 불이면 멈춰야 한다는 그 권력무상의 쓸쓸함을 그럴듯하게 그리고 있는 점은 돋보이고 재미있다. 아마도 대통령 보좌관들에게도 많은 리서치를 한 듯 웨스가 대통령에게 느끼는 감정들-대통령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다-이 잘 살아 있는 것도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역시 <운명의 서>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대통령의 그림자로서 살아가던 웨스가 권력을 위해 속고 속이며 한없이 속이는 정치꾼들의 실체를 파악하고는 오로지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는다는 멋진 결말일 것이다. 너무 긴 감이 있고, 부족한 점이 많이 눈에 띄는 소설이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작가가 멋지게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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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1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하늘바람 2007-04-1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 전 못 읽어보아서 참고할게요 님

jedai2000 2007-04-1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대부분 아쉬운 점이나 좋은 점이나 사람이 보는 관점은 비슷한 것 같아요 ^^

하늘바람님...가볍게 시간 때우기로 보시면 나쁘진 않을 거예요 ^^
 
야구 감독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인간 세상의 무슨 일이든지간에 때가 중요한 법인데, 이 소설 <야구 감독>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나왔습니다.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선보이는 본격 야구소설인 이 작품이 나올 즈음해서 한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일본 프로야구가 거의 동시에 개막을 하니 야구라면 밥보다 좋아하고, 술자리에서 침을 튀기며 응원하는 팀 자랑에 여념이 없는 열혈 야구팬들은 소설과 실제 경기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습니다.

저는 사실 일 년에 한 두번 정도 야구 구경을 가는 그렇게까지 야구팬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대학교 다닐 때 야구선수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한 번 썼다가 보기 좋게 낙방한 경험이 있어 경기의 박진감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야구를 어떻게 요리했나, 살펴보고 싶어 읽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완전 항복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스포츠소설이구나, 하면서 완전 감탄했지요. 작가 에비사와 야스히사의 해박한 야구 지식과 마치 지금 야구장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간결하면서도 박력있는 문체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야구 감독>은 1979년에 나온 작품으로 제 나이와 동갑입니다. 그 시대에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 완성도의 작품을 내다니 확실히 일본 엔터테인먼트 문학의 저력은 넓고도 깊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승엽 선수가 맹활약하고 있는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에도 최강의 팀이자 모든 팀을 통틀어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난 3루수 히로오카 타쓰로는 최약체 앤젤스의 감독을 맡아 복수전에 나섭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외다리 타법의 홈런왕 왕정치, 재일교포이자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안타를 가장 많이 때렸던 장훈,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투수로 활약해 올드팬들은 잘 알고 계실 김일융 등이 한 팀에 있었던 당시 요미우리는 V9(9연속 우승)을 하는 등 설명이 필요없는 강팀입니다. 그런데 앤젤스 선수들은 경기 중에 코를 후비지 않나, 한 시합에 두세 번씩은 필수적으로 알을 까는 집중력 실종에 근성 제로의 낙오자들입니다. 이 한심한 팀을 한 사람의 야구 감독 히로오카가 어떻게 변모시키는가가 핵심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 야구 팀에 관여하고 계시는 분들이 시뮬레이션 삼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 시즌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악재를 다 경험하는 히로오카. 그는 이기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제대로 된 훈련법을 가르쳐주며, 때로는 윽박지르고 때로는 다독이며, 가끔은 경기의 세부 하나하나까지 간섭하고 가끔은 선수들을 완전히 믿고 재량을 주는 등 지혜롭고 현명한 방식으로 팀을 정상권으로 만들어갑니다. 눈치빠른 분들은 여기까지 읽고 아마 깨달으셨을 겁니다. 이 책이 아주 훌륭한 경영서일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예컨대 회사에서 부서장직을 맡은 분들이나 사장님들이 만약 이 책을 읽으면 비단 야구만이 아니라 어떻게 한 조직을 이끌어나가 성공할 수 있는가를 실제 현실에서의 상황과 접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똑같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얻어가려면 생각이 필요한 법입니다.

다수의 선수들이 실명으로 출현해(앤젤스 팀은 전원 허구지만, 감독 히로오카 타쓰로는 실존 인물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명승부를 펼치는 이 소설은 야구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물론 환상적인 재미를 주고, 저 같은 얼치기에게는 야구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가이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은 히로오카의 팀 메이킹에 흥미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경기 자체의 두근거림을 느끼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이 점 주의하세요. 그리고 아무래도 옛날 작품이다 보니 지금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간혹 나옵니다. 예컨대 앤젤스 구단주인 올림픽 건설회사 사장은 팀이 연이어 승리하자 기분이 좋아져 여비서 엉덩이를 만지는 장난을 치는데, 여비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1979년은 사장님들에겐 좋은 시절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사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성희롱이죠.

번역이 너무 직역투라 약간 아쉽고, 표지가 작품의 격에 맞게 좀더 고급스러우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작품 자체의 재미만은 요즘 나오는 웬만한 소설들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최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야구란 단순한 공놀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승리를 향한 열정과 본래 이기적으로 태어난 인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화합의 차원에서 그리고 꿈을 향한 도전 정신을 충족시켜주는 야구는 아마도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선 가장 재미있는 놀이 중 하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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