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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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최초 10년 동안 사람들은 향후 역사를 바꿀 천재들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파블로 피카소는 현대 미술을 다시 그렸고, 특허청에서 일하던 독일인 아인슈타인은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썼으며, 1900년에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 박사는 정신분석학이라는 혁명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니, 가히 천재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살인의 해석>에서도 세상을 바꿀 천재는 세기초의 10년 안에 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셰익스피어와 프로이트의 예를 들고 있는데, 2007년 현재 전 세계를 놀래킬 천재는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들고 나올지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하다.

 

<살인의 해석>은 정신분석학의 태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이자 '컴플렉스'라는 말을 만들어낸 또 다른 심리학의 거인 카를 융이 살인사건을 수사한다면, 이라는 흥미로운 가정으로 출발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기틀을 닦아놓은 심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이 오늘날 각광받고 있으니 아주 허황된 이야기도 아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활동하던 프로이트가 미국을 방문한 것은 생전에 단 한 차례, 미국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강연을 부탁했기 때문에 1909년에 배를 타고 건너온 것이 유일했다고 한다. <살인의 해석>은 이때 미국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프로이트가 참여한다는 일종의 팩션 미스터리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909년, 프로이트와 수제자 융이 뉴욕의 항구에 도착한다. 젊은 정신과 의사 스트래섬 영거는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성심성의껏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날 호화찬란한 발모럴 아파트에서 한 젊은 여인이 넥타이에 목이 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온몸에는 채찍과 면도칼로 난자당한 상처가 가득한 채. 공교롭게도 다음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또 한 번 뉴욕 시내에 울려퍼진다. 또 한 명의 여인이 살해당할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났지만 역시 채찍과 면도칼에 당한 상처가 났으며, 넥타이로 졸린 목은 피멍으로 얼룩졌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소녀, 노라 액튼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으며 사건 당일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심리적인 원인으로 실어증과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해본 경험이 많은 프로이트가 사건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와 융을 내세웠지만, 사실 주인공은 영거 박사와 리틀모어 형사다. 영거 박사는 프로이트를 대신해 노라 양을 치료하는데, 그녀는 곧 영거 박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사실 이것은 환자가 의사에게 보이는 무조건적인 숭배 현상을 뜻하는 전이에 다름아닌데, 영거 박사 역시 노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역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사랑인지 마음의 장난인지 반신반의하는 영거 박사와 노라의 이야기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또한 이 사건을 심리학이 아닌 증거 제일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경찰의 입장에서 수사하는 리틀모어 형사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직 젊기에 뇌물을 안 받아먹고 때가 덜 탔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담당 수사관이 된 것인데, 의외로 명탐정을 방불케 하는 뛰어난 추리력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를 통해 진상에 점차 접근해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배경이 20세기 초반이라서인지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빠른 템포의 스릴러 식이 아니라 엘러리 퀸 풍의 클래식 미스터리 형식으로 사건을 풀어가서 일단 반가웠다. 유전자나 다른 과학 지식 난무로 머리 아플 일도 없고. 하지만 확실히 미국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양식이 사양길이고, 쓰는 작가도 거의 없기에 참조할 작품이 별로 없어서인지, 고전 미스터리의 맛을 썩 잘 내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고전 미스터리의 맛은 매력적인 탐정이 단서를 잘 조합해낸 다음 명추리를 전개해 용의자 인간군상들 앞에서 트릭을 확 폭로하며 한 방을 멋지게 터뜨려야 맛이 사는 법인데 <살인의 해석>은 대체로 밍숭맹숭하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목에 새겨진 머릿글자를 둘러싼 공방도 이게 뭐 어쨌다는 건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별로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한 가지 더 실망스러운 점은 프로이트와 융이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홍보 문구와는 달리 프로이트가 약간의 조언을 해주는 정도고 융은 작품 내내 방황만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성실하게 씌어진 점은 마음에 든다. 작가 제드 러벤펠드는 당시의 시대상을 꼼꼼이 조사해 독자들이 마치 1900년대 초반 뉴욕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사실성을 덧입혔다. 그가 아니었다면 맨해튼을 잇는 다리를 건설할 때 아래가 뚫린,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상자 모양의 '잠함'을 강 속으로 투하시켜, 그 안의 물을 빼고 공기를 주입한 다음 인부들이 작업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밖에도 프로이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당대 미국의 지식인 계층(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따지고 보면 근친상간의 욕망인데, 은근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그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의 배척과 탄압, 살인 사건의 해결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프로이트와 융의 대립과 결별 등의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심리학이 태동하던 당대의 공기를 잘 잡아내고 있음은 칭찬할 만하다. 

 

작가 제드 러벤펠드는 프로이트를 오래 연구한 사람이라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프로이트의 대사는 거의 실제 그의 학설, 발언, 논문 등을 토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아주 허투로 쓰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또한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 프로이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만 있다면 누구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준이고. 미스터리로서도 적당히 재미있고, 시대를 초월한 프로이트 이론의 매력도 잘 살려내 누가 읽어도 그다지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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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2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도 엘러리 퀸을 느끼셨군요^^

jedai2000 2007-04-2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리 퀸이 이런 소재를 가지고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더 잘 했을텐데 ^^

2007-04-23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04-2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글쎄, 뭐 읽을 만은 합니다. 뒤의 설명이 좀 부실해서 그렇지,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몰입감이 있고 재미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