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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하세 세이슈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요즘은 저희 출판사에서 작업중인 책들을 읽느라 정신이 없지만 집에 와서는 개인적으로 쌓아놓은 책들을 보려고 정신없습니다. 한 80여권 되는 거 같습니다. 어제 읽은 책이 바로 <불야성>입니다. 자정에 시작해 새벽 2시까지 미친듯이 읽어내려갔지요. 더 읽으면 출근에 지장있는데, 머리 속에서는 정지 신호를 계속 보냈지만 멈출 수가 없더군요. 결국 오늘 지하철, 버스를 타고 움직이면서 다 읽었습니다.
제목인 <불야성>은 중국집틱하기도 하고, 룸살롱틱하기도 하네요..ㅋㅋ
사실은 환락의 불로 타오르는 도쿄 가부키쵸를 상징합니다. 주인공은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혼혈아 류젠이(다카하시 겐이치)...
이 사람은 장물 취급을 하는 장물아비(세상에 좋은 아비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장물아비를...함진아비도 있고, 싸울아비도 있는데 말예여..-_-;)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음란한 어머니가 가출하자 거의 고아나 다름없이 되버린 그는 가부키쵸의 대만계 대부 양왜이안의 원조를 받으며 성장하지만, 대만 사회에 편입할 수 있는 상징인 대만어를 배울 기회는 갖지 못합니다.
이 양왜이안이라는 노인은 철저하게 상대를 이용해 먹는 인물로 협잡과 술책의 대가입니다. 그에게 정통 대만 핏줄이 아닌 류젠이는 이용의 대상이지 가족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류젠이는 어릴 때, 양왜이안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버림받고 맙니다. 고독한 하이에나가 되버린 그는 지옥같은 가부키쵸에서 단지 살아 남기 위해 남을 등쳐먹고, 속이는 위악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류젠이에게는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짐덩어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우휴춘...역시 혼혈아인 그는, 고등학교 때 자신을 혼혈아라고 깔보던 학생을 의자로 때려죽인 다혈질의 인간 쓰레기입니다. 류젠이의 보디 가드 노릇을 하던 그는 가부키쵸를 지배하고 있는 상하이 이민자 보스, 유엔천쿠이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자를 살해하고 도피합니다. 어느 날 우휴춘이 다시 돌아오고, 류젠이는 유엔천쿠이의 호출을 받습니다.
"3일안에 그를 데려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청천벽력같은 말에 오한이 솓는데, 그에게 위기는 계속 다가옵니다. 유엔천쿠이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북경쪽 보스 쯔이후도 류젠이를 협박합니다. 이 쯔이후는 잔인하기가 아이도 서슴없이 죽일 정도입니다. 가부키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3개의 최대 계파의 보스들인 양왜이안과 유엔천쿠이와 쯔이후에게 모두 표적이 되어버린 그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럴 때 울려퍼지는 우휴춘의 애인이라는 여자의 다급한 전화...
저는 이 애인이 우휴춘을 살려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도 걸작입니다. 우휴춘이 도박장에서 강탈한 돈을 들고 튄 그녀, 샤오리엔은 우휴춘을 팔테니, 그를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_-;; 도대체 착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은 안나오는 책인가요?
네...안나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 인물들은 가부키쵸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과 폭력, 돈과 술책으로 상대를 제거하는데만 눈알이 벌개진 인간 군상들입니다. 주인공이라는 류젠이는 19살때 두 사람을 죽이며, 한 남자를 강간했습니다. 등장하는 살인 청부 업자는 <레옹>처럼 인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칼로 살점을 저미며 흥분하는 변태입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대만계 갱의 총보스는 배신자의 자식을, 배신자의 손으로 죽이게 한 다음 인육을 먹였다는 인물입니다.
이런 인간 백정들같은 야수들 속에서, 혼혈아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혈혈단신이 되버린 류젠이가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이 책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혼혈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작가는 류젠이의 입을 통해 차별받는 일본내 혼혈아의 비참한 처지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대만계로부터, 중국계로부터, 일본계로부터 모두 배척받는 류젠이는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고독한 하이에나 류젠이는 압도적인 적들의 폭력에 대항해 순전히 머리(라기보다는 잔머리)와 계략으로 상대해 나갑니다. 친구도 자신을 형처럼 따르는 동생도,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한 여인도 때에 따라서는 거침없이 배반합니다. 도저히 정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차별받고, 천대받고 개처럼 헐떡이며 살아온 그의 지난 날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단 3일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는 에너지로 가득차 폭발할 듯 합니다. 3일이라는 데드라인이 주는 긴장감과 총격전의 넘치는 박력, 치밀한 암투가 주는 짜릿한 쾌감 등이 정신없이 섞여 돌아가는 불꽃같은 작품입니다. 앞에서는 불처럼 뜨거운 열기가, 뒤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드는 그런 정서적인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잔인하고, 섹스 장면으로 도배된 책이지만 싸구려 소설은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의 정글, 가부키쵸의 생태학에 관한 보고서로 보셔야 할 책입니다. 일단 재미면에서는 확실하지만, 지나치게 '쏀' 장면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호불호가 갈릴 책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인 하세 세이슈는 홍콩 배우 주성치를 좋아해 주성치의 이름을 거꾸로 써서 일본식으로 읽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주성치식의 쌈마이 정서가 아주 생활화된 사람인가 봅니다..ㅋㅋ 이 책의 속편 <진혼가>도 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보기는 힘들겠죠..-_-;; 일본 하드보일드 계의 거장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일본은 사회파, 하드보일드가 여전히 추리 소설계를 이끌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책 상태는 조금 엉망입니다. 오, 탈자도 많고요. 번역은 큰 불편없이 볼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역주나 고유명사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불친절한 책입니다. 아마 번역자가 1차 번역을 끝낸 초교 상태에서 바로 출간된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전문적인(?)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ㅋㅋ)
예를 들어 '리우만'이라는 말과 '후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설명은 커녕 괄호치고 한자로 넣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참고로 '리우만'은 유민- 떠돌아 다니는 사람(대충 이민자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후젠'은 복건성 사람을 말한답니다.
현대 일본 하드 보일드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박진감 넘치는 책이었습니다. 비슷한 대만 출신 킬러가 나오는 오사와 아리마사의 <독원숭이>가 킬러 독원숭이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을 강조하는 액션 오락물이라면 이 작품은 그보다는 조금 더 리얼하고, 조금 더 숨막힙니다. (<독원숭이>도 대단한 작품입니다.) 독자의 예측을 완벽하게 빗나가는 전개와 충격적인 마무리로 인해 여운도 길게 남습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p.s/ 금성무가 류젠이 역을 맡아 영화화되기도 했답니다.
p.s2/ 류젠이가 좋아하는 노래로 쯔이젠의 '이유스요우'라는 곡이 나오는데, 조선적 출신 록커 최건의 '일무소유'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