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까마귀>는 심리학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마키 다이스케의 <야호기野狐忌>라는 수필로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작가 다나카 히데미쓰의 자살을 직접 눈으로 본 충격과 그 끔찍한 광경을 같이 본 사나에라는 여자와의 추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어느날, 다나카 히데미쓰 전집의 해설을 부탁받고 자료 수집을 하다가 실종됩니다. 며칠 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발견되는데 속주머니 안에는 그의 새끼손가락과 그의 유서로 짐작되는 '눈먼 까마귀'라는 구절이 담긴 종이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생활 반응으로 봐서 그는 이미 죽은 걸로 밝혀집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왜 죽은 다음 새끼손가락을 잘랐을까, 눈먼 까마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사건은 점입가경으로 확대됩니다. 마키가 실종되기 직전 마지막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는 마키의 제자였던 출판사 직원 미토 다이스케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청산가리로 살해됩니다. 그가 살해된 곳은 '호메로스'라는 다방입니다. 마침 손님으로 와 있던 치구사 검사는 미토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습니다. '하얀 까마귀'라는 말이었습니다. 마키와 미토, 두 사람의 죽음에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한 치구사 검사와 노모토를 비롯한 형사들은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눈먼 까마귀'와 '하얀 까마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도처에서 까마귀가 날아드는 이 흥미로운 작품은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하는 본격 추리소설입니다. 초반엔 '호메로스' 다방에서 벌어진 미토의 청산가리 살해의 트릭을 벗겨내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후반에는 범인으로 짐작되는 인물의 철벽같은 알리바이 허물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트릭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읽고 나면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치구사 검사의 날카로운 추리력과 발로 뛰며 증거를 모으는 노모토 형사의 콤비 플레이가 멋지게 그려지며, 문단의 이면을 그리는 작품이니만큼 다양한 시와 작가들의 이야기가 작품에 품격을 높입니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두 가지 트릭이 모두 기발하고 그럴듯해 한 작품에서 독살 트릭과 알리바이 깨기라는 두 가지 맛을 골고루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네요. 치구사 검사는 탐정 역으로 특히 매력있는 인물로 괴벽이 없는 건실한 가장입니다. 마지막 트릭은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힌트를 얻어 해결해내는데, 요즘 탐정들이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하는 인물이 거의 없어 오히려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사건이 다 해결되도 안타까운 여운이 남는 작품으로 상당한 수준작입니다. 독살 트릭에서는 요란한 기계적 트릭이 아닌 인간 심리의 미묘한 부분을 이용했고, 알리바이 트릭에서는 단순하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한 멋진 트릭이었습니다. 작가 쓰치야 다카오가 트릭 제조에 상당한 역량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워낙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가라 더 이상의 정보는 없지만 날렵하면서도 기품이 배인 문장과 효과적인 트릭을 만드는 능력으로 봤을 때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작가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러나 89년 작품이니만큼 번역은 좋지 않고, 오타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습니다. 보면서 나름대로 교정을 보며 읽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워낙 구하기 힘든 작품을 읽은 데 만족했네요. 더구나 어렵게 발품 팔아 구한 책들이 사실 기대한 맛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120% 대만족을 시켜준 작품이어서 좋았습니다. 추리소설, 특히 본격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실망할 수가 없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발견하는 즉시 구입하시길...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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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2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 놓고 안 읽은 책입니다 ㅠ.ㅠ

jedai2000 2006-03-2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물만두님께서는 역시 없는 책이 없으시군요..^^;;
저는 헌책을 많이 수집하시는 분께 다행히 선물로 받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번역, 교정, 교열 최악이지만 트릭의 재미로만 봐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약속 드릴 수 있습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3-2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역시 레어본이죠? ^^;

jedai2000 2006-03-2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하기 어려운 책일 겁니다. ^^;;
 
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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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를 처음 잡았을 때는 제목이 아주 호쾌하다고 생각했다. 읽기 전에 귀동냥으로 들은 내용은 전인류가 흡혈귀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한 명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었다. 과연, 살아남은 인간 한 명이 온갖 특수무기를 들고 흡혈귀 군단과 처절한 대혈투를 벌이는 내용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남은 주인공은 하늘을 향해 호방하게 외친다. "나는 전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나의 상상이다. 실제 읽어본 <나는 전설이다>는 쓸쓸하고 가슴아픈 이야기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흡혈귀가 된 세상에서 고독과 절망을 느끼며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한 남자의 암울한 이야기가 어떤 출구도, 희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로버트 네빌은 밤에는 마늘과 십자가, 거울로 방어선을 구축해놓은 집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흡혈귀들과 대적하며, 낮에는 가가호호 방문해 태양을 피해 잠을 자고 있는 흡혈귀들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다. 그게 그가 하는 일의 전부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 차라리 나도 그냥 흡혈귀나 될까, 번민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아무 의미없는 투쟁을 계속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소설이 탁월한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런 류의 소설이 외면하는 로버트 네빌의 성욕을 놓치지 않고 그렸다는 것이다. 발표된 시기가 1954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대단한 것 같다. 로버트 네빌은 아내와 딸을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자로서 해소할 수 없는 성욕으로 고통받는다. 여자 흡혈귀들의 유혹에는 거의 모든 걸 포기하기 직전까지 간다. 장르소설에서 이런 성욕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거의 최초의 시도가 아니였을까?

 

또한 이 작품에서는 미국 중산 계급의 일상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꿰뚫고 있다. 아마도 3차 세계대전으로 암시되는 핵전쟁 후 아내와 딸이 원폭으로 인한 모래바람에서 발병한 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도 네빌은 출근을 한다. "누가 우리를 먹여살려주는 것도 아니잖아." 하면서...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도 출근하고, 일을 해야 하는 중산층의 일상이 나중에도 반복된다. 그는 하루 수명의 흡혈귀들 집을 매일매일 방문하여 가슴에 말뚝을 박는다.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도 그의 일상이다. 리차드 매드슨은 살아가기 위해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미국 중산층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실체를 이 작품에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나는 전설이다>의 탁월한 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책의 후반부에서 로버트 네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품 전반의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새로 읽으실 분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는 없지만 본문을 살짝 인용해보겠다.

"나는 이제 비정상적인 존재다. 정상이라는 것은 다수를 의미한다. 다수의 기준이지 한 사람의 기준이 아닌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1954년 출간 이래 2번 영화화되었다. 그중 유명한 것이 60년대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오메가맨>일 것이다. 그 외에도 조지 로메로의 시체3부작과 <28일 후>같은 최근의 좀비 영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작가 리차드 매드슨은 미국 SF소설, 판타지 소설, 공포 소설의 대부로 수많은 작품들의 시나리오와 원작을 썼으며, 스티븐 킹과 딘 쿤츠같은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든 살이 넘은 현재도 살아 있으며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전설이다>에는 표제작 말고도 10편의 단편소설이 있어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기에 무리가 없다. 오래된 작품이지만 시선을 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로버트 네빌이 유일하게 흡혈귀 신세를 면한 개를 만나 친구가 되고 싶어 노력하는 장면들은 더없이 감동적이며, 흡혈귀들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싶어 연구하는 장면들은 기발하기 이를 데 없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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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25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단편도 같이 있나요? 그래도 왠지 손이 가지 않는 작품입니다 ㅠ.ㅠ

jedai2000 2006-03-2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밀리언셀러 클럽에서 이 작품을 추천하시는 분들이 많아 읽어봤는데 꽤 괜찮았어요..그런데 솔직히 단편들은 좀 떨어지는 게 많아요..^^;; 그러니까 <나는 전설이다>가 220쪽 정도 되고, 단편들이 또 220쪽 됩니다. 한 마디로 <나는 전설이다>는 중편이라는 거죠. 손이 안 가시면 <나는 전설이다>만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클라이머즈 하이 1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함께(바소책)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의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2003년 작품. 세계 최대의 항공기 추락 사건을 맞아 취재 전쟁을 벌이는 지방신문사의 기나긴 일주일이 박력있게 펼쳐진다. 1권 256쪽, 2권 248쪽이라는 극악의 분권으로 이토록 재미있고 좋은 책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린 출판사의 무신경에 화가 날 정도다. 그러나 분권으로 상한 마음을 너그럽게 용서해준다면 이보다 재미있는 책은 쉽사리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평생 일선 취재기자로 남고 싶었던 고참 기자 유키가 5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항공기 추락 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총괄데스크가 되면서 긴장감은 고조된다. 사건의 경중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부장 기자들의 정치싸움과 특종을 터뜨리고 싶은 욕심에 불만이 고조된 부하 기자들 사이에서 유키는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국내에 소개된 전작 <사라진 이틀>을 보신 분들이라면 요코야마 히데오가 조직안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얼마나 잘 그리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클라이머즈 하이>에서는 조직내 파워게임을 그리는 작가의 솜씨가 더욱 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페이지 첫째줄을 읽고 있던 눈이 순식간에 오른쪽 페이지 맨 아래줄로 움직여버린다. 놀라운 흡입력이다.

 

항공기 사고가 기둥 줄거리라면 산을 좋아하는 친구 안자이와의 우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과의 반목과 화해를 그리는 것이 보조 줄거리이다. 기나긴 취재 전쟁을 끝내고, 결국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유키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단 두 작품을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작가의 취향이 짐작이 가는데, 미스터리의 얼개를 빌려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추구하는 것이 작가의 장기라고 할 수 있겠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눈물을 참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중년남성의 심리 묘사에 탁월함을 보인다. 일만 알고 살아온 인생이지만 가족도, 보람도, 명예도 잃은 중년남성의 자조와 비탄의 정서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주인공들은 참된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지난 날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다. 저무는 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묘사할 줄 아는 작가다.

 

다만 감동에 치우쳐 마무리가 작위적일 정도의 감동 일변도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라진 이틀>에서도 이 점에 불만을 가진 독자들이 많았다. 무언가 그럴듯한 미스터리가 있는 것처럼 독자를 끌고 가다가 결국 한바탕 눈물로 마무리짓는다는 것이다. <클라이머즈 하이>에서도 이런 불만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결말 직전까지의 놀라운 박진감은 진도 7의 메가톤급 지진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았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는 12년 동안 기자로 재직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신문사의 모습을 이토록 정확하게 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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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1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는 미스터리가 아닌 휴머니즘을 바탕에 둔 인생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시각인 것 같아요.

한솔로 2006-03-17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보관함에 있는 걸 장바구니로 끄집어내야겠군요ㅎ

jedai2000 2006-03-17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동감입니다..^^;; 인생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시각이 심포 유이치랑 웬지 비슷한 거 같습니다.

한솔로님...재미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쓸쓸함의 주파수
오츠 이치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오츠 이치는 젊은 작가입니다. 1978년생으로 저와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네요. 열일곱 살 때, 잡지의 소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고 합니다. 상당히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2002년작 GOTH가 대표작입니다. GOTH라는 작품은 호러소설의 분위기와 본격 미스터리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단편집이라는데 평이 대단히 좋아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국내에 오츠 이치는 <너밖에 들리지 않아>와 <쓸쓸함의 주파수>라는 두 권의 단편집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쓸쓸함의 주파수>에는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작품인 <미래예보>에서는 미래가 보이는 소년이 자신이 본 미래를 노트에 적습니다. 마치 유명한 일본 만화 <데스노트>와 같은 설정이죠. 하지만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작품인 <손을 잡은 도둑>은 깔끔한 소극입니다. 벽에 구멍을 뚫고 도둑질을 하려던 남자, 뚫어놓은 벽에 손을 집어넣다 우연히 한 여자의 손을 잡아 버립니다. 달빛이 아름다운 밤, 벽 사이로 도둑과 손을 맞잡은 여자의 기막힌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 번째 이야기인 <필름 속 소녀>는 호러풍의 단편입니다. 소심한 영화 동아리 여대생이 우연히 발견한 필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잃어버린 이야기>는 교통사고로 오른팔의 감각만이 살아있는 남자와 아내와의 소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부 특색이 있는 단편들로 오츠 이치의 다채로운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가 후기를 보니, 그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전업 작가가 될까 아니면 평범한 샐러리맨이 될까 망설이던 시기가 있었답니다. 대학 이전부터 글을 썼지만 유명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글만으론 생계가 곤란합니다. 하지만 기계 부속품 같은 샐러리맨 생활은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죠. 이런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잡지사 편집자가 애절한 이야기 단편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쓴 게 <미래예보>입니다. 이 작품이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무런 꿈과 비전도 없는 주인공의 출구없는 답답한 생활에서 오츠 이치의 고민이 많이 투영된 듯 합니다. 젊다는 것은 가능성도 많은 법이지만, 그만큼 미래에 대한 암담함에 고민이 많은 시기이기도 하니까요. 젊은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해볼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미래예보>의 주인공과 오츠 이치에게 괜시리 친근감이 듭니다. 오츠 이치는 딱 저의 세대 작가이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필름 속 소녀>는 같은 잡지의 무서운 이야기 특집에 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래예보>와 <필름 속 소녀>는 의뢰를 받아 아이디어를 짜내서 쓴 것이기 때문에, 자살충동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이 작가는 근본적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써야지 마음 편하게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나 봅니다. 그래서 우연히 떠오른 착상으로 신나게 써내려간 <손을 잡은 도둑>은 어느 정도 만족한다고 후기에 적었더군요. 제가 보기에도 이 작품이 가장 근사한 단편이 된 것 같습니다. 달밤에 양손을 마주잡은 도둑과 젊은 여자라는 상황도 절묘하고, 묘하게 웃음을 쿡쿡 나게 합니다. 잔잔한 마무리도 인상적인 좋은 단편입니다.

 

하나의 단편집에서도 각각 다른 장르로 재미를 주는 오츠 이치의 재능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묘하게 매력이 있는 작가로, 쉬운 문장을 구사하며 머리 속에서 바로 그림이 그려지는 회화적인 이미지 표현에 능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기회가 닿으면 술 한 잔 하고 싶은 친구같은 느낌이 드는 작가였습니다. 현재는 GOTH로 받은 인세를 탕진하며 쓰고 싶은 글들을 마음껏 쓰고 있다고 합니다. 꿈을 이룬 것이 부럽기도 하고, 샘도 나네요. 한창 기세가 올랐을 때 신작을 쏟아내지 않느냐고 주위에서는 면박을 주지만 자신은 지금이 행복하답니다. 작가 소개에 보니 취미는 한 밤중에 조깅하기랍니다. 왜 밤이냐 하면 낮에는 창피하니까. 그런데 밤에도 조깅하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몰래 나무 뒤에 숨어서 발각되지 않기를 기도한다네요. 자기 작품만큼 섬세하고 감수성이 독특한 사람 같네요. 이제부터 저도 이 귀여운 작가의 팬이 되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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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6-03-1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하시다가 전업작가로? ㅋㅋ

jedai2000 2006-03-1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오츠 이치와 제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츠는 GOTH로 대박을 터트려서 이제 고민이 필요없는 위치가 됐죠.
저와 오츠가 가장 다른 게 재능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흑흑.
저도 대박을 쳐서 그 인세로 평생 쓰고 싶은 글이나 쓰면서 소일하고 싶은데...^^;;
 

-루스 렌델 여사

<뮤즈의 홀>의 원제는 'From Doon with Death'로 무려 루스 렌델 여사의 데뷔작입니다. 현일사라는 출판사에서 91년에 출간됐네요. 예전에 우연히 입수해 아주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인데 분량도 적어 주말을 맞아 가볍게 읽어보았습니다. 역시 루스 렌델 여사다운 재미있는 작품으로 레지널드 웩스포드 경감이 등장하는 첫 작품입니다.

영국의 킹즈마크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마가렛 파슨스라는 여자가 실종됩니다. 다음 날 그녀가 킹즈마크햄과 조금 떨어진 농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자 웩스포드 경감과 부관인 버덴이 사건의 조사에 나섭니다. 살해된 마가렛은 두 사람이 보기엔 촌스러운 시골 여자에 다름 아니었지만, 그녀의 남편에게는 재치있고 편안한 살림꾼이었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전 국민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발견된 편지에서 그녀를 민나라고 부르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둔'이라는 사람이 용의자로 등장합니다. 둔은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갈구하며 미치도록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얼굴을 가진 마가렛의 죽음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웩스포드 경감의 추리가 펼쳐진다는 내용입니다.

64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국내에 나온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본격 추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후계자로 불리우는 그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1부에서는 현재 마가렛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2부에서는 그녀의 과거를 찾고, 3부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구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살해당한 사람의 됨됨이를 다른 이의 회상으로 재구성해 짜릿한 재미를 안겨주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데뷔작답게 웩스포드 경감이 진범을 알게 되는 과정이 조금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그녀의 문장력이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1930년생인 루스 렌델 여사는 원래 기자 출신으로 데뷔작 <뮤즈의 홀>에서 등장시킨 웩스포드 경감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다수 썼습니다. 이 시리즈는 작년에도 출간되는 등 여전히 진행 중인 시리즈입니다. 그 외에도 <내 눈에 비친 악마>나 <유니스의 비밀>같은 독립된 작품들을 꽤 많이 남겼구요. 놀랍게도 바바라 바인이라는 이름으로 또 걸작들을 다수 출간합니다. 가히 현대 추리소설계의 신화적 존재 중의 한 명입니다. 작품의 질과 양, 추리문학상 수상작들의 수를 세어보아도 그녀와 대적할만한 추리소설가는 현존하지 않습니다.

<내 눈에 비친 악마>와 , 바바라 바인 명의의 로 영국의 골드대거상을 탔고, 역시 바바라 바인 명의로 쓴 로 미국의 에드거상을 수상했습니다. 모쪼록 제가 적은 이 작품들 만이라도 국내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만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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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1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지고만 있고 그냥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 하고 있습니다. 읽어야 하는데요 ㅠ.ㅠ

jedai2000 2006-03-1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물만두님 쵝오! 없는 책이 없으시군요.^^;;
솔직히 옛날 책이라 번역은 별로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단숨에 읽을 만큼 흡인력이 있어요. 어차피 집에 있는 책, 없어질 것도 아니고 천천히 시간날 때 보세요..^^;;

상복의랑데뷰 2006-03-26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책들일수록 점점 더 안 읽게 되지요 ^^

jedai2000 2006-03-2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헌책을 구해놓긴 하지만 새책에는 순위가 밀리는 법이죠. 웬지 낡고 지저분해 보여 손도 안 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