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까마귀>는 심리학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마키 다이스케의 <야호기野狐忌>라는 수필로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작가 다나카 히데미쓰의 자살을 직접 눈으로 본 충격과 그 끔찍한 광경을 같이 본 사나에라는 여자와의 추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어느날, 다나카 히데미쓰 전집의 해설을 부탁받고 자료 수집을 하다가 실종됩니다. 며칠 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발견되는데 속주머니 안에는 그의 새끼손가락과 그의 유서로 짐작되는 '눈먼 까마귀'라는 구절이 담긴 종이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생활 반응으로 봐서 그는 이미 죽은 걸로 밝혀집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왜 죽은 다음 새끼손가락을 잘랐을까, 눈먼 까마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사건은 점입가경으로 확대됩니다. 마키가 실종되기 직전 마지막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는 마키의 제자였던 출판사 직원 미토 다이스케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청산가리로 살해됩니다. 그가 살해된 곳은 '호메로스'라는 다방입니다. 마침 손님으로 와 있던 치구사 검사는 미토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습니다. '하얀 까마귀'라는 말이었습니다. 마키와 미토, 두 사람의 죽음에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한 치구사 검사와 노모토를 비롯한 형사들은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눈먼 까마귀'와 '하얀 까마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도처에서 까마귀가 날아드는 이 흥미로운 작품은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하는 본격 추리소설입니다. 초반엔 '호메로스' 다방에서 벌어진 미토의 청산가리 살해의 트릭을 벗겨내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후반에는 범인으로 짐작되는 인물의 철벽같은 알리바이 허물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트릭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읽고 나면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치구사 검사의 날카로운 추리력과 발로 뛰며 증거를 모으는 노모토 형사의 콤비 플레이가 멋지게 그려지며, 문단의 이면을 그리는 작품이니만큼 다양한 시와 작가들의 이야기가 작품에 품격을 높입니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두 가지 트릭이 모두 기발하고 그럴듯해 한 작품에서 독살 트릭과 알리바이 깨기라는 두 가지 맛을 골고루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네요. 치구사 검사는 탐정 역으로 특히 매력있는 인물로 괴벽이 없는 건실한 가장입니다. 마지막 트릭은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힌트를 얻어 해결해내는데, 요즘 탐정들이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하는 인물이 거의 없어 오히려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사건이 다 해결되도 안타까운 여운이 남는 작품으로 상당한 수준작입니다. 독살 트릭에서는 요란한 기계적 트릭이 아닌 인간 심리의 미묘한 부분을 이용했고, 알리바이 트릭에서는 단순하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한 멋진 트릭이었습니다. 작가 쓰치야 다카오가 트릭 제조에 상당한 역량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워낙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가라 더 이상의 정보는 없지만 날렵하면서도 기품이 배인 문장과 효과적인 트릭을 만드는 능력으로 봤을 때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작가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러나 89년 작품이니만큼 번역은 좋지 않고, 오타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습니다. 보면서 나름대로 교정을 보며 읽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워낙 구하기 힘든 작품을 읽은 데 만족했네요. 더구나 어렵게 발품 팔아 구한 책들이 사실 기대한 맛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120% 대만족을 시켜준 작품이어서 좋았습니다. 추리소설, 특히 본격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실망할 수가 없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발견하는 즉시 구입하시길...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