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cite mill 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학창시절에 아르바이트(이하 편하게 알바로^^) 한 번 안해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한창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대학생 때 놀고도 싶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데 돈은 없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알바를 해본 적이 있다. 나와 친구 3명이 타이어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내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딱 3일 나가니까 힘들고 귀찮아서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갔다가 미모의 여대생이 내일부터 알바로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치고, 친구들과는 먼저 말 붙이는 사람이 승자로 만원빵 내기를 했지만 다들 소금쟁이 사촌 소심쟁이인지라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고 묻은 돈으로 노래방을 갔던 찌질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인사이트 밀>도 비슷하게 시작한다. 자동차가 있으면 여친이 자동으로 생길 것 같아 방학 때 알바를 뛰어서 자동차 마련(과 더 중요한 여친 마련)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아르바이트 잡지를 뒤적이던 주인공 유키. 그런데 잡지 구석에 실려 있던 인문과학적 실험의 지원자를 구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보고 기겁을 한다. 시급이 무려 11만 2천 엔이라는데...100엔당 원화 환율이 700, 800원대였던 작년과는 달리 최근 환율이 1천 500원이니까, 대충 한 시간에 170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여기서 잠깐 딴 소리, 경제에 완전 문외한인 내가 봐도 엔화 환율이 1년 사이에 두 배나 더 뛰다니 비정상적인 일인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음...아무리 생각해봐도 작년과 달라진 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것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2008년 11월 현재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시급을 보고 유키는 당연히 실험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헌데, 실험 장소는 구비구비 깊은 산중에 있는 기묘한 생김새의 원형 건물이라는 것이 아닌가. 건물의 이름하여 '암귀관'. 유키를 비롯한 실험 참가자는 모두 12명으로 불세출의 미남부터, 신비스러울 정도의 우아함을 갖춘 미소녀, 나이도 많은데 로커 차림을 고수하는 아저씨까지 몽타주만 봐도 범상치 않은 그룹이다. 자, 이제 배경과 인물은 모두 갖춰졌다. 그러면 이제 인문과학적인 실험 내용만 공개되면 되는데...


하나, 참가자들은 암귀관에서 일주일간을 외부와 완전 격리된 채로 지내야 한다. 각자의 방과 더불어 적절한 의식주는 보장된다.
둘,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면 시급 2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셋,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탐정이 되어 살인자를 밝혀내면 시급 3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등등.


어쩐지 참가자들 사이에 살인을 부추기는 룰이다. 더구나 참가자들은 고전 추리소설의 흉기 한 가지씩을 복불복으로 지급받은 상태. 유키가 받은 건 셜록 홈스 <얼룩끈>에 나오는 부지깽이다. 이래서는 언제 어디서 살인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사실 12명이 다 그냥 얌전히 있다가 나가기만 해도 시급이 워낙 세기 때문에 일주일에 1천 800만 엔이라는 거액이 보장되는지라 멤버들은 그렇게 하기로 신사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평온하게 참가자들이 수다나 떨면서 일주일을 때우다 나가는 이야기라면 굳이 책으로 쓸 이유가 없겠지. 다음 날부터 12명의 참가자들은 하나씩 죽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여기까지만 소개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유독 촉이 빠른 분들이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집어들 것이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날 끝을 보고 대만족의 환성을 지를 것이다, 바로 나처럼. 몇 명의 참가자가 서로를 죽인다는 설정에서 <배틀 로열>을, 비정상적인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 <큐브>나, 연쇄살인이 철저하게 게임 감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일본 드라마 <극한추리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여러 장면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 같은 고전 걸작 추리소설에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바치기도 한다. 참가자들에게 지급되는 흉기는 전부 잊지 못할 걸작 추리소설들의 소품이라 많이 본 사람일수록 더 흐뭇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는 국내에도 소개된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등의 소소한 사건들을 소박하게 풀어나가는 일상계 추리소설로 명성을 떨쳤지만, <인사이트 밀>에서는 의외로 본격 추리소설의 약점으로 흔히 거론되는 작위적인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속도감이 넘치면서 젊은 층의 구미에도 딱 맞는 게임 감각의 재미로 충만한 새로운 스타일의 본격 추리소설을 내놓은 게 이채롭다. 요 몇 년 사이에 나온 책 중 재미 만으로는 최고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결말도 본격풍으로 논리적으로 모든 진상을 도출해내는데, 범행의 진짜 목적이나 동기 같은 부분까지는 몰라도 단순히 범인을 맞추는 것만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걸 유일한(억지로 찾자면) 약점으로 꼽고 싶다. 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요즘같이 흉흉한 시국에 골 아픈 건 읽기 싫고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집어라.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키리고에...>를... 죄송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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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11-26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제목 보고 얼른 달려왔어요.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

Apple 2008-11-2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던 책인데 재밌나봐요~~저도 담아놔야겠습니다.^^

그린브라운 2008-11-2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좋아하는 작가네요 ^^ 기대됩니다

보석 2008-11-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읽기 전엔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첨부터 책장이 정말 잘 넘어가더라고요.

jedai2000 2008-11-27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제 글을 보시고 귀한 돈을 쓰시는데 감사는 제가 해야죠^^ 제가 그만큼 신뢰를 얻었구나 싶어 기분이 늠흐늠흐 좋네요~

애플님...어떤 메시지나 주제보다 철저하게 재미를 위해 봉사하는 책이죠. 애플님 약간 심각한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어떨지 걱정되네요. 재미는 최고예용 ^^

다락방님...앗! 좋아하는 작가시면서 아직 안 읽으셨다니 이 잼있는 책을...무지 잼있으니 기대하세요 ^^

보석님...페이지 빨리 넘어가고 잘 읽히기로는 비교할 책이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작가가 속편을 써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랍니다 ^^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Medusa Collection 3
아이라 레빈 지음, 김효설 옮김 / 시작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작년에 타계한 스릴러계의 거장 아이라 레빈의 1976년 작품이다. 24살에 센세이셔널한 데뷔작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고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미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평단의 극찬까지 받은 행복한 작가 레빈은 이른 데뷔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평생 단 7편의 작품만을 남겼다. 철저하게 과작으로 일관하면서 매번 색다른 소재와 탄탄한 완성도를 추구했던 스릴러 장인이라고 보면 된다. 책을 보면 그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영상적인 글쓰기가 탁월한 양반인지라 작품 대부분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판권으로도 돈 좀 만지셨을 듯.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오컬트 호러의 걸작 <로즈마리의 아기>, <스탭포드 와이프>, <슬리버>, <죽음의 키스>그리고 오늘 소개할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까지 책은 안 봤어도 영화로 그의 작품 하나 안 보신 분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재미삼아(?) 일화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로만 폴란스키의 <로즈마리의 아기> 영화를 보고 감동한 사이비종교 추종자들이 폴란스키의 아내이자 배우인 샤론 테이트를 토막살해한 건 유명한 스캔들. 폴란스키도 거장이지만 레빈의 워낙에 훌륭한 원작 탓도 없다고는 말 못할 듯하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은 제목 그대로 브라질에서 출발한다. 점잖은 노신사가 브라질 시내의 고급 일식집에서 6명의 남자들과 만찬을 즐기는데,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슬슬 용건을 꺼내기 시작한다. 노신사는 '죽음의 천사'라 불리는 실존인물 요제프 맹겔레 박사. 맹겔레는 의사 출신으로 맹렬 히틀러 추종자에, 게르만 민족의 우월한 유전자를 더욱 발전시킨다는 명목 아래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극악스런 생체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쌍둥이를 꿰매버리거나 눈동자 색을 파랗게 바꿔버리는 등 책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40만 명에 가까운 유태인들을 실험하고 학살했다니 그야말로 '악마의 의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나치 패망 후 잔당들의 도움을 받아 남미로 도피해 73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맹겔레가 남미에서 삶을 마감한 것과 이 작품의 배경이 브라질인 것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더하려는 작가의 의도 같다. 아무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맹겔레의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실제 그의 삶이 더 소설 같다.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소설...


맹겔레와 자리를 함께한 남자들은 전직 나치 친위대 대원들. 전 세계 각지(주로 남미)에 숨어 전범 재판을 피해 살고 있지만 제3제국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한몫을 할 수 있는 든든한(?) 친구들이다. 맹겔레는 그들에게 임무를 내리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친위대가 들어도 기가 막히는 내용이다. 전 세계 곳곳에 있는 60대 중반의 남자 94명을 조를 짜서 처치하라는 것. 그들의 공통점은 전직 공무원 출신에 고집 세고 사교성도 없지만, 특별한 고위 공직자도 아니었고 그다지 해가 되지는 않는 인물들이라는 것,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인이 있다는 것 정도. 이게 위대한 독일 제국의 부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 미션일까?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의 핵심 재미는 여기서 나온다. 암살자 나치들도 모르고 독자들도 알 수 없다. 이 모든 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음모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인가를.


한편 우연히 60대 노인들이 체계적으로 나치 잔당들에 의해 암살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치전범 사냥꾼 야코프 리베르만이 맹겔레와 더불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유태인 리베르만은 작품 속에서, 600만 명의 유태인 학살의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는 실존인물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해 사형시킨 장본인으로 나온다. 당시에는 그의 명성이 떠르르했지만, 전쟁의 상흔도 잊혀져가는데다 이제 늙고 지친 노인이 된 리베르만은 그저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유는 잘 몰라도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린 듯한 연속 살해에 의문을 품고 줄기차게 사건을 조사해 마침내 나치와 맹겔레의 음모에 관한 경악스런 진실을 알게 된다. 작품의 결말은 리베르만과 맹겔레의 대결로 이뤄지는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리베르만은 올해의 소설 속 '시니어 스타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할아버지로 나오는데 올곧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나이를 무색케 하는 활력이 샘솟는데다, 인간적이기까지 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은 이 책은 1991년에 고려원에서 페이퍼백 미스터리 문고로 발매된 책이다. 한 7-8년 전에 읽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희미하고 사망한 레빈도 기념할 겸 새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읽었던 책이니 큰 기대도 없이 설렁설렁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미칠 듯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과연 거장은 시간이 흘러도 거장이고, 명품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1976년에 나온 이 책이 요즘 나오는 스릴러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깊이 있으며 속도감까지 갖추고 있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이 모호한 노인들 연속 살해사건을 통해 독자의 호기심을 한껏 고조시켜놓은 다음, 소름 끼치는 음모의 전모를 드러내 독자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두 주인공의 강렬한 대결 장면을 통해 손에 땀을 쥐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한마디로 스릴러의 롤렉스 시계. 기가 막힌 명품이라고 할 수밖에.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에서 맹겔레가 획책하는 음모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살짝 어설픈 부분이 많다. 유전공학의 방법적인 부분도 그렇고, 인간의 환경이 성격 형성에 어떠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작가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1976년 작품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레빈이 당시의 작가들을 훌쩍 뛰어넘는 굉장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아무래도 1976년 작품을 지금의 과학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을까. 쥘 베른이나 H. G. 웰스의 작품은 요즘 과학의 눈으로 보면 말도 되지 않지만,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역시 현지에서 출판된 것 같이 1976년에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고, 2008년에 재출간된 게 아까울 따름이지 본질적인 작품의 가치에는 조그만 흠집도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작품이 쓰인 1976년은 1945년 나치 패망으로부터 3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다. 20대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았던 유태인이라면 50대나 60대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시점이라는 이야기다. 그들이 아직 나치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시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다니 당시에 이 책을 본 유태인들은 정말 극도의 무서움을 느꼈을 법하다. 그 공포는 60년도 더 지난 요즘에 와서도 충분히 유효하다. 최고의 스릴러 거장 아이라 레빈의 손끝에서 빚어진 공포라서 더욱 그러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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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11-19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_ㅠ악...이런게 언제 나왔어요!!!ㅠ ㅠ흐흑....아이라레빈 소설 출간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ㅠ ㅠ악악!!!저도 지르겠어요.흐흑..

jedai2000 2008-11-1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 나온 걸 모르셨나 보네요 ^^ 저도 레빈 책은 다 만족하고 있어요.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도 무지 재미있으니까 기대하세요~
 
마스터 앤드 커맨더 1 오브리-머투린 시리즈 1
패트릭 오브라이언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삶이 팍팍해서일까. 요즘 바다에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푸르른 대양을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릴 것 같고, 내 머리 위에 불어오는 상쾌한 바닷바람은 온갖 망상과 잡념으로 찌든 머릿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누구나 바다를 동경하고 바다에 얽힌 추억 한 가지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바다는 틀에 박힌 삶에 지쳐가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모험심을 자극하며 잠시 고단한 현실을 잊고 꿈을 꾸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3부작의 성공 요인도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겠는가. 여기 바다를 소재로 한 하나의 매력적인 소설이 있다. 해양 모험소설의 대표작인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마스터 앤드 커맨더>가 바로 이 작품으로, 갱 영화에서의 <대부> 같은 존재, 혹은 무협소설에서 김용의 <사조삼부곡> 같은 위치를 점한다고 보면 되겠다. 3년 전에는 러셀 크로 주연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은 아니고, 21편에 달하는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의 10번째 작품 <세상의 끝>을 영화화한 것이란다. 마침 영화도 DVD로 가지고 있어 조만간 볼 예정이다.

 

고등학교 때 <대항해시대>라는 컴퓨터 게임을 하며 주말 밤을 새우기 일쑤였는데, <마스터 앤드 커맨더>를 읽으며 그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 유럽의 18, 19세기라는 비슷한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항해의 준비 과정과 실제 항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그럴싸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잭 오브리는 아버지가 해군 장성이지만 밑바닥부터 다른 배에서 구르다 마침내 소피 호의 정식 함장이 된다. 그는 유능한 선원들을 모으고 오랜 항해를 위해 물자를 채우며 착착 밑준비를 한다(여기가 사실 <대항해시대>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이다). 한번 출항하면 배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므로 의사가 꼭 필요하다. 오브리는 우연히 알게 된 박학다식한 학자이자 의사 스티븐 머투린을 군의관으로 삼아 마침내 닻을 올리고 바다로 향한다. 

 

뱃사람으로서 유능하지만 재물과 승진, 여자 등의 욕망에 불타 있는 속물 잭 오브리와 생명을 중시하는 고결한 이상주의자 스티븐 머투린은 성격이 많이 다르지만 서로를 몹시 위하며 깊은 우정을 쌓아간다. 이 시리즈를 오브리-머투린 시리즈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점점 깊어가는 두 사람의 우정과 내면의 성장, 파란만장한 인생 항로가 21권이라는 많은 양의 소설을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돛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가 패트릭 오브라이언이 철저하게 19세기 초의 관점으로 모든 걸 묘사했다는 데 있었다. 솔직히 소피 호와 잭 오브리가 다짜고짜 적국인 프랑스, 에스파냐 상업선을 나포하는 장면들은 해적이나 다를 바 없었고, 오브리의 불륜 행각, 혹은 흑인이나 장애자들에 대해 편견 섞인 대사들을 마구 내뱉는 장면들은 아마 요즘 나오는 소설이라면 그렇게 쓰지 못했을 것 같다. 작가는 그저 철저하게 당시 뱃사람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출 뿐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19세기의 시대상, 인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로서 이 작품이 가진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피 호는 4파운드 짜리 작은 대포 14개만을 갖춘 조그만 배다. 이 시원찮은 배를 이끌고, 뛰어난 전술로 적함을 연전연파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장면들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짜릿하다. 특히 오브리와 머투린의 순간적인 기지로 다 죽었다 싶은 장면에서도 무사히 탈출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통쾌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대형 대포 32문을 갖춘 카카푸에고 호를 격파하는 부분. 적함으로 밧줄을 타고 뛰어들어 처절한 살육전을 전개하는 오브리와 소피 호 선원들의 모습은 박력이 철철 넘친다. 이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절대로 놓치지 마시길. 작가 패트릭 오브라이언은 문필가면서 범선에 조예가 깊은 모양인지 엄청 정교하게 소피 호를 그린다. 앞돛대, 가운데돛, 아딧줄, 바람받이, 활대, 패덤...사실 뇌에 과부하가 걸리며 머릿속으로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범선의 모습을 상상하며 읽어보려 했는데,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게 되더라. 가치 있지만 솔직히 읽기가 쉽지는 않다고 고백하고 싶다. 나처럼 가볍게 해양 모험소설로서만 읽는 방법도 있을 테고, 역사나 범선, 해양에 관한 자료를 꼼꼼히 찾아가며 공부하는 독서도 있을 수 있다. 어떻게 읽든 잘 쓴 소설임은 분명하고 읽으면 유익한 작품이니 자기만의 독서법을 찾아 재미나게 즐기시길...

 

 

 

p.s/ 원저에는 단 하나의 역주도 없고 자주 나오는 프랑스어, 에스파냐 어 등에 대한 설명도 일절 없다고 하는데, 이걸 일일이 찾아 역주를 달고 번역한 번역자 분의 고생이 정말 굉장했을 것 같다. 번역에 2년이나 걸렸다는데 과연 그랬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다음 편은 2010년에 보게 되는 건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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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라쿠 살인사건
다카하시 가츠히코 지음, 안소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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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샤라쿠는 기존 화단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혜성같이 등장해 1794년부터 1795년까지 단 10개월간 140여점의 우키요에만을 남기고 그야말로 홀연히 사라진 화가라고 합니다. 당대에는 별로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유럽에 수출되면서 고흐 등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추앙을 받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홍도가 혹시 샤라쿠가 아닐까 하는 흥미로운 가설 때문에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미술의 세계에는 완전 문외한이나 다름없어 걱정은 했지만, 일본 우키요에와 샤라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매우 기대하며 읽은 책이랍니다. 대개 자기가 관심없는 분야는 읽지 않고 넘어가는 분들이 많은데 한 권의 책을 보면서 재미도 얻고 배움도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게 독서의 묘미겠지요.

 
샤라쿠 연구계의 양대산맥이 있습니다. 학계의 니시지마 교수와 재야의 사가 아츠시가 그들입니다. 두 사람이 대립하는 이유는 우키요에 연구에 대한 관점 차이 때문이죠. 우키요에는 본시 판화로 유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완성된 판화 그대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니시지마 교수의 견해, 판화는 조각칼로 밑그림을 파는 판화가의 솜씨가 작품의 완성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에 판화 이전의 밑그림(육필화)에 진정한 우키요에 화가의 숨결이 드러난다는 것이 사가의 의견입니다. 둘다 나름 설득력이 있어 누가 옳고 그르다를 나눌 수 없는 문제죠. 그렇다면 서로의 학설을 존중하며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면서 각자의 연구에 매진하면 될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은 그렇지 못했죠. 격렬하게 서로를 비방하며 학회를 조직해 자신들의 세를 구축하고 그 힘을 과시하기 일쑤입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순수한 배움의 터전인 학계도 썩을 대로 썩은 모양입니다.


 
소설은 재야의 거물 사가 아츠시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시작합니다. 경찰은 여러 정황상 사가가 자살을 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죠. 사가의 처남인 헌책방 업주는 이젠 쓸모없게 된 사가의 자료들을 헐값에 내놓는데 떨이로 자료들을 왕창 사간 게 바로 주인공이자 니시지마의 조교인 츠다입니다. 츠다는 설렁설렁 사가의 자료들을 살피다 기요치카라는 우키요에 화가가 머리말을 쓴 화집 한 권을 발견합니다. 그 화집은 완전 무명인 치카마츠 쇼헤이라는 화가의 그림을 모은 것입니다. 허나 한 호랑이 그림에 뜻밖에 '도슈사이 샤라쿠가 치카마츠 쇼헤이로 고치고 그림'이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의문의 거장 샤라쿠의 정체가 쇼헤이일까요? 츠다는 만약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이 가설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허나 조사가 깊어질수록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시체로 발견되고 마는군요.

 
츠다는 샤라쿠의 정체에 파고들기 위해 기존에 거론되었던 샤라쿠 후보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은 츠다의 조근조근한 설명을 통해 샤라쿠가 그간 알려진 대로 무명의 가부키 배우가 아니라 누군가 모종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숨기고 샤라쿠로 활동했다는 이른바 '샤라쿠 별인설'에 대해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호쿠사이, 우타마로가 어쩌구 저쩌구 등 엄청 많고 생소한 우키요에 화가가 등장해 우리나라 독자들이 읽기에는 상당히 버겁습니다. 여기서 정신줄과 함께 책을 놓을 독자들이 꽤 보이는군요. 하지만 당대 현실을 바탕으로 샤라쿠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가는 작가의 대담한 상상력은 박력이 넘치고 무엇보다 꽤 공감이 가더군요. 읽고 나면 아, 과연 샤라쿠의 정체가 이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샤라쿠의 정체에 대해서만 줄기차게 거론하다 만다면 관련 종사자들의 아카데믹한 즐거움에만 봉사하고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작가 다카하시 가츠히코는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을 준비합니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독서의 흥미를 빼앗을 우려가 있어 적지 않겠지만, 생각보다 이 작품이 스케일이 굉장히 크며 구조 전체를 트릭으로 사용하는 기발함이 있다는 것만 이야기해두겠습니다. 또한 전형적인 기차 알리바이 트릭 깨기 요소도 있어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더욱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단히 독창적이고 뭔가 배우는 것도 있는 훌륭한 추리소설이예요. 읽어보면 일본에서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바로 알게 됩니다. 다만 샤란큐는 좋아해도 샤라쿠는 관심없다거나, 김홍도, 신윤복도 잘 모르는데 왜 일본 화가까지 알아야 하느냐,며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는 독자라면 읽어내기 버거울 것입니다. 그 나라의 문화나 사정이 너무 진하게 배어 있어 번역으로 맛을 살리기 어려운 책들이 가끔 있는데, 안타깝게도 <샤라쿠 살인사건>이 그런 책으로 보입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한번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는 책이나 현실에서도 머리 아픈데 소설까지 공부하면서 보기 싫다는 분들은 굳이 잡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p.s1/ 작가 다카하시 가츠히코는 <샤라쿠 살인사건>으로 에도가와 란포 상, <샤라쿠 살인사건>과 더불어 '우키요에 미스터리 3부작'을 이룬다는 <호쿠사이 살인사건>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 상, <붉은 기억>으로 나오키 상 등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중견 작가입니다. 우키요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데, 소개글을 읽어보니 걸물이더군요. 1960년대 고등학교 때 무작정 해외로 나가 일본인 가운데 처음으로 비틀즈를 만난 기록을 가지고 있다네요 ^^

 

p.s2/ 부록으로 주는 우키요에 엽서 세트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대부분의 책 부록이 받자마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만한 것들인데 반해 오래 보관하고 싶어지네요. 엽서 중에 다카하시 가츠히코가 어렸을 때 보고 반해 우키요에에 평생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소마의 후루다이라>는 저도 보고 놀랐습니다. 너무나 현대적이고 만화를 연상시키는 상상력에 우키요에를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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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8-10-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라쿠가 뭔가 했더니 화가였군요 :)
너무 일본 문화가 녹아있는 작품은 정말 읽기 힘들더라구요.
요괴 이 정도까지는 나름 괜찮은데 말이죠.

그나저나 제다이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

jedai2000 2008-10-14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라쿠는 유명한 화가래요. 저도 이 책 보기 전까지는 잘 몰랐답니다. 그래도 책을 읽으며 일본 문화와 전통 우키요에에 대해서도 약간 배우고 나쁘지 않았답니다 ^^ 요괴하니까 갑자기 교고쿠가 읽고 싶네요 T.T

정말 감사합니당. 마이리뷰 한 6번 정도 된 것 같은데 마침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되서 기분이 느무 좋네요~~
 
피보다 진한 노블우드 클럽 2
사사모토 료헤이 지음, 정은주 옮김 / 로크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피보다 진한>의 뒤표지 문구를 보면 '물보다 진한 것은 피, 피보다 진한 건, 그것은 정(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웬지 '1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 3층 위에...'가 떠오르네요. 왜 이런 게 떠올랐을까요-_-??? 아무튼 남보다야 피가 섞인 사람을 챙기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남도 돕는걸 하물며 가족인데...하지만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서로를 보듬어주며 깊은 정으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가끔 접하곤 합니다. 역시 생물학적인 유전보다 참된 가정을 일궈나가는 데는 정이 더 중요한 법인가 봅니다. 웬지 <좋은 생각>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피보다 진한>을 보고 그런 생각이 참 많이 들더라구요.

 

가족의 유대라는 건 무엇인가? 를 묻는 이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되며 흘러갑니다. 젊었을 때 주먹 좀 휘둘렀던 야쿠자가 세월이 흘러 암으로 죽음을 앞둔 병약한 노인이 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사립탐정 케이를 불러 일생일대의 회한을 이야기합니다. 35년 전, 노인의 아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들을 낳고는 곧바로 사망하자 한창 혈기방장한 야쿠자였던 그는 의사를 다짜고짜 폭행해버립니다. 이내 경찰이 찾아오고 갓 태어난 아들을 들쳐업고 튄 노인은 공원에서 유키라는 여자를 만납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유키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이를 맡아 기르겠다고 제의합니다. 어차피 자기는 잡히면 감옥에 갈 몸, 그리고 감옥에서 나와도 엄마도 없이, 험하게 사는 자기 밑에서 자라게 하느니 아무것도 모를 때 양자로 주자는 생각에 노인은 아들을 유키에게 맡깁니다. 복역 후 야쿠자에서 발을 뺀 노인은 건실한 사업가가 됐지만 이제는 병마가 찾아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아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 일념에 케이에게 35년 전 그날 밤의 유키와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게 된거죠. 친아버지랍시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죄스럽지만 가는 길에 장성한 아들을 한번만 만나고 싶다는 노인의 진심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한편, 노인의 의뢰를 받아들인 케이에게도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촉망받는 형사였던 케이는 아내와 아들, 모든 가족을 뺑소니 사고로 잃어야만 했던 것이죠. 헌데 그냥 뺑소니 사고가 아닙니다. 자산가 노부부를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용의자가 도주 중에 케이의 가족을 치고 달아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용의자는 형사들의 심증으로는 노부부의 아들 아키노부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단서가 없습니다. 케이는 절망해 경찰을 그만두고 방황하다 사립탐정 일을 하는데, 당시 노부부와 케이의 가족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범인이 또다시 연쇄 살인사건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맹세한 케이는 의뢰받은 노인의 아들을 찾는 일을 하는 짬짬이 그 사건을 수사합니다. 유력한 용의자 마약쟁이 아키노부의 곁을 맴돌면서 말이죠.

 

<피보다 진한>의 가로축(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아키노부 사건)과 세로축(35년의 세월이 벽으로 가로막힌 노인의 아들 찾기)을 이루는 두 이야기는 모두 흥미로워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는 35년 전 헤어진 피붙이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의 원수를 갚는 일이니 감정적으로, 심정적으로 주인공 케이를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제발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만족스럽게 해결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작품의 진행은 전형적인 'seek & hide', 일종의 숨바꼭질과 같습니다. 당시 관계자를 한 명 한 명 만나 단서를 모으고 증언을 듣고 증거를 찾아 어느 정도 진상이 떠오른다 싶으면, 숨겨졌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수사는 난항에 빠집니다. 계속되는 조사로 난관에 봉착한 수사에 활로를 찾고, 또다시 복마전에 빠지고...이런 구조가 반복되죠. 하드보일드나 경찰소설, 사립탐정물(P.I) 등을 한 권이라도 보셨다면 충분히 어떤 구조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케이의 끈질긴 수사를 통해 마침내 두 이야기가 결말을 맞게 되고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나 오래오래 묻혀 있던 진실이 마침내 드러납니다. 그 끝에 있는 건 놀랍게도 가슴 절절한 가족 간의 사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긴 세월 케이의 곁을 지켜줬던 가족의 따스함을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 아버지, 엄마, 정 이런 말만 들으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마음 여린 독자라면 모두 저처럼 손으로 눈가를 훔치고 말 걸요. 하지만 지나치게 감동 일변도로 마무리되는 책만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돋는 독자라면 피하는 편이 좋겠죠. 케이를 둘러싼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결말에 우연의 작용이 너무 심하고, 심히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고, 케이가 진실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추리나 두뇌를 써서가 아닌 등장인물 중 한 명의 고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도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감점입니다. 읽고 나서 느낌이 나쁘지 않고 적절한 분량에 빠른 진행, 그럴싸한 재미 무엇보다 무척 감동적입니다만, 온전한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부족한 점도 보여 역시 취향에 따라 선택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p.s/ 원제는 <시간의 기슭>이지만, 우리말 제목 <피보다 진한>이 10배 더 좋습니다. 제목을 더 좋게 바꾼 모범사례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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