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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ㅣ Medusa Collection 3
아이라 레빈 지음, 김효설 옮김 / 시작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작년에 타계한 스릴러계의 거장 아이라 레빈의 1976년 작품이다. 24살에 센세이셔널한 데뷔작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고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미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평단의 극찬까지 받은 행복한 작가 레빈은 이른 데뷔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평생 단 7편의 작품만을 남겼다. 철저하게 과작으로 일관하면서 매번 색다른 소재와 탄탄한 완성도를 추구했던 스릴러 장인이라고 보면 된다. 책을 보면 그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영상적인 글쓰기가 탁월한 양반인지라 작품 대부분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판권으로도 돈 좀 만지셨을 듯.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오컬트 호러의 걸작 <로즈마리의 아기>, <스탭포드 와이프>, <슬리버>, <죽음의 키스>그리고 오늘 소개할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까지 책은 안 봤어도 영화로 그의 작품 하나 안 보신 분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재미삼아(?) 일화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로만 폴란스키의 <로즈마리의 아기> 영화를 보고 감동한 사이비종교 추종자들이 폴란스키의 아내이자 배우인 샤론 테이트를 토막살해한 건 유명한 스캔들. 폴란스키도 거장이지만 레빈의 워낙에 훌륭한 원작 탓도 없다고는 말 못할 듯하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은 제목 그대로 브라질에서 출발한다. 점잖은 노신사가 브라질 시내의 고급 일식집에서 6명의 남자들과 만찬을 즐기는데,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슬슬 용건을 꺼내기 시작한다. 노신사는 '죽음의 천사'라 불리는 실존인물 요제프 맹겔레 박사. 맹겔레는 의사 출신으로 맹렬 히틀러 추종자에, 게르만 민족의 우월한 유전자를 더욱 발전시킨다는 명목 아래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극악스런 생체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쌍둥이를 꿰매버리거나 눈동자 색을 파랗게 바꿔버리는 등 책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40만 명에 가까운 유태인들을 실험하고 학살했다니 그야말로 '악마의 의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나치 패망 후 잔당들의 도움을 받아 남미로 도피해 73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맹겔레가 남미에서 삶을 마감한 것과 이 작품의 배경이 브라질인 것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더하려는 작가의 의도 같다. 아무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맹겔레의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실제 그의 삶이 더 소설 같다.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소설...
맹겔레와 자리를 함께한 남자들은 전직 나치 친위대 대원들. 전 세계 각지(주로 남미)에 숨어 전범 재판을 피해 살고 있지만 제3제국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한몫을 할 수 있는 든든한(?) 친구들이다. 맹겔레는 그들에게 임무를 내리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친위대가 들어도 기가 막히는 내용이다. 전 세계 곳곳에 있는 60대 중반의 남자 94명을 조를 짜서 처치하라는 것. 그들의 공통점은 전직 공무원 출신에 고집 세고 사교성도 없지만, 특별한 고위 공직자도 아니었고 그다지 해가 되지는 않는 인물들이라는 것,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인이 있다는 것 정도. 이게 위대한 독일 제국의 부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 미션일까?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의 핵심 재미는 여기서 나온다. 암살자 나치들도 모르고 독자들도 알 수 없다. 이 모든 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음모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인가를.
한편 우연히 60대 노인들이 체계적으로 나치 잔당들에 의해 암살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치전범 사냥꾼 야코프 리베르만이 맹겔레와 더불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유태인 리베르만은 작품 속에서, 600만 명의 유태인 학살의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는 실존인물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해 사형시킨 장본인으로 나온다. 당시에는 그의 명성이 떠르르했지만, 전쟁의 상흔도 잊혀져가는데다 이제 늙고 지친 노인이 된 리베르만은 그저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유는 잘 몰라도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린 듯한 연속 살해에 의문을 품고 줄기차게 사건을 조사해 마침내 나치와 맹겔레의 음모에 관한 경악스런 진실을 알게 된다. 작품의 결말은 리베르만과 맹겔레의 대결로 이뤄지는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리베르만은 올해의 소설 속 '시니어 스타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할아버지로 나오는데 올곧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나이를 무색케 하는 활력이 샘솟는데다, 인간적이기까지 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은 이 책은 1991년에 고려원에서 페이퍼백 미스터리 문고로 발매된 책이다. 한 7-8년 전에 읽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희미하고 사망한 레빈도 기념할 겸 새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읽었던 책이니 큰 기대도 없이 설렁설렁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미칠 듯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과연 거장은 시간이 흘러도 거장이고, 명품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1976년에 나온 이 책이 요즘 나오는 스릴러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깊이 있으며 속도감까지 갖추고 있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이 모호한 노인들 연속 살해사건을 통해 독자의 호기심을 한껏 고조시켜놓은 다음, 소름 끼치는 음모의 전모를 드러내 독자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두 주인공의 강렬한 대결 장면을 통해 손에 땀을 쥐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한마디로 스릴러의 롤렉스 시계. 기가 막힌 명품이라고 할 수밖에.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에서 맹겔레가 획책하는 음모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살짝 어설픈 부분이 많다. 유전공학의 방법적인 부분도 그렇고, 인간의 환경이 성격 형성에 어떠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작가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1976년 작품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레빈이 당시의 작가들을 훌쩍 뛰어넘는 굉장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아무래도 1976년 작품을 지금의 과학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을까. 쥘 베른이나 H. G. 웰스의 작품은 요즘 과학의 눈으로 보면 말도 되지 않지만,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역시 현지에서 출판된 것 같이 1976년에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고, 2008년에 재출간된 게 아까울 따름이지 본질적인 작품의 가치에는 조그만 흠집도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작품이 쓰인 1976년은 1945년 나치 패망으로부터 3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다. 20대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았던 유태인이라면 50대나 60대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시점이라는 이야기다. 그들이 아직 나치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시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다니 당시에 이 책을 본 유태인들은 정말 극도의 무서움을 느꼈을 법하다. 그 공포는 60년도 더 지난 요즘에 와서도 충분히 유효하다. 최고의 스릴러 거장 아이라 레빈의 손끝에서 빚어진 공포라서 더욱 그러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