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노블우드 클럽 2
사사모토 료헤이 지음, 정은주 옮김 / 로크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피보다 진한>의 뒤표지 문구를 보면 '물보다 진한 것은 피, 피보다 진한 건, 그것은 정(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웬지 '1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 3층 위에...'가 떠오르네요. 왜 이런 게 떠올랐을까요-_-??? 아무튼 남보다야 피가 섞인 사람을 챙기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남도 돕는걸 하물며 가족인데...하지만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서로를 보듬어주며 깊은 정으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가끔 접하곤 합니다. 역시 생물학적인 유전보다 참된 가정을 일궈나가는 데는 정이 더 중요한 법인가 봅니다. 웬지 <좋은 생각>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피보다 진한>을 보고 그런 생각이 참 많이 들더라구요.

 

가족의 유대라는 건 무엇인가? 를 묻는 이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되며 흘러갑니다. 젊었을 때 주먹 좀 휘둘렀던 야쿠자가 세월이 흘러 암으로 죽음을 앞둔 병약한 노인이 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사립탐정 케이를 불러 일생일대의 회한을 이야기합니다. 35년 전, 노인의 아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들을 낳고는 곧바로 사망하자 한창 혈기방장한 야쿠자였던 그는 의사를 다짜고짜 폭행해버립니다. 이내 경찰이 찾아오고 갓 태어난 아들을 들쳐업고 튄 노인은 공원에서 유키라는 여자를 만납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유키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이를 맡아 기르겠다고 제의합니다. 어차피 자기는 잡히면 감옥에 갈 몸, 그리고 감옥에서 나와도 엄마도 없이, 험하게 사는 자기 밑에서 자라게 하느니 아무것도 모를 때 양자로 주자는 생각에 노인은 아들을 유키에게 맡깁니다. 복역 후 야쿠자에서 발을 뺀 노인은 건실한 사업가가 됐지만 이제는 병마가 찾아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아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 일념에 케이에게 35년 전 그날 밤의 유키와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게 된거죠. 친아버지랍시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죄스럽지만 가는 길에 장성한 아들을 한번만 만나고 싶다는 노인의 진심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한편, 노인의 의뢰를 받아들인 케이에게도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촉망받는 형사였던 케이는 아내와 아들, 모든 가족을 뺑소니 사고로 잃어야만 했던 것이죠. 헌데 그냥 뺑소니 사고가 아닙니다. 자산가 노부부를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용의자가 도주 중에 케이의 가족을 치고 달아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용의자는 형사들의 심증으로는 노부부의 아들 아키노부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단서가 없습니다. 케이는 절망해 경찰을 그만두고 방황하다 사립탐정 일을 하는데, 당시 노부부와 케이의 가족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범인이 또다시 연쇄 살인사건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맹세한 케이는 의뢰받은 노인의 아들을 찾는 일을 하는 짬짬이 그 사건을 수사합니다. 유력한 용의자 마약쟁이 아키노부의 곁을 맴돌면서 말이죠.

 

<피보다 진한>의 가로축(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아키노부 사건)과 세로축(35년의 세월이 벽으로 가로막힌 노인의 아들 찾기)을 이루는 두 이야기는 모두 흥미로워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는 35년 전 헤어진 피붙이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의 원수를 갚는 일이니 감정적으로, 심정적으로 주인공 케이를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제발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만족스럽게 해결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작품의 진행은 전형적인 'seek & hide', 일종의 숨바꼭질과 같습니다. 당시 관계자를 한 명 한 명 만나 단서를 모으고 증언을 듣고 증거를 찾아 어느 정도 진상이 떠오른다 싶으면, 숨겨졌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수사는 난항에 빠집니다. 계속되는 조사로 난관에 봉착한 수사에 활로를 찾고, 또다시 복마전에 빠지고...이런 구조가 반복되죠. 하드보일드나 경찰소설, 사립탐정물(P.I) 등을 한 권이라도 보셨다면 충분히 어떤 구조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케이의 끈질긴 수사를 통해 마침내 두 이야기가 결말을 맞게 되고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나 오래오래 묻혀 있던 진실이 마침내 드러납니다. 그 끝에 있는 건 놀랍게도 가슴 절절한 가족 간의 사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긴 세월 케이의 곁을 지켜줬던 가족의 따스함을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 아버지, 엄마, 정 이런 말만 들으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마음 여린 독자라면 모두 저처럼 손으로 눈가를 훔치고 말 걸요. 하지만 지나치게 감동 일변도로 마무리되는 책만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돋는 독자라면 피하는 편이 좋겠죠. 케이를 둘러싼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결말에 우연의 작용이 너무 심하고, 심히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고, 케이가 진실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추리나 두뇌를 써서가 아닌 등장인물 중 한 명의 고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도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감점입니다. 읽고 나서 느낌이 나쁘지 않고 적절한 분량에 빠른 진행, 그럴싸한 재미 무엇보다 무척 감동적입니다만, 온전한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부족한 점도 보여 역시 취향에 따라 선택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p.s/ 원제는 <시간의 기슭>이지만, 우리말 제목 <피보다 진한>이 10배 더 좋습니다. 제목을 더 좋게 바꾼 모범사례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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