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In Cold Blood - 범죄심리 소설의 발전단계와 방향에 대한 개인적 질문들

 

 

 

 소설을 평하기 전, 먼저 내 기억 속 추리소설에 대한 편린 몇 조각을 꺼내보고자 한다. 군대를 제대하고서였다. 허리 디스크로 의병제대를 해서, 외할머니 댁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이미 외할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외삼촌들도 모두 도시로 상경해, 외할머님만 계시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외할머니 밭일을 소일거리 삼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생각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님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거의 종일 한량처럼 누워서 책만 읽었다. 그중에서도 그때 가장 많이 읽었던 책들이 추리소설들이다. 딱히 읽을 만한 책들이 외할머니 댁에 없기도 했다. 그나마 외삼촌들의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들이 추리소설들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시드니 셀던 등등. 그리고 이전의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난 도일의 명탐정 설록 홈즈 이야기 정도? 이 때문인지 내 기억 속에 추리소설이라 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정도의 용도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 이 글을 읽을 때엔 정말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굳이 내가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거의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 언제 다 읽을지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첫 장 약 120페이지 분량의 ‘그들이 살아있던 마지막 날’을 넘어가자, 생각보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틀 만에 책을 다 읽었다. 사실, 앞으로 다가올 지겨움에 대한 지레짐작으로 첫 장이 거의 하루 걸린 셈이고, 나머지 장들은 매우 흥미로워서 하루 만에 다 읽은 셈이다. 왜냐하면 이 글이 읽으면 읽을수록 단순히 추리소설이 아닌, 아니 정확하게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내게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내게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읽힌 것일까? 저자인 트루먼 카포티 스스로 밝혔듯이 이 소설이 저널리즘 접근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아니면 이 소설이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일까? 사실, 두 가지 다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특수한 범죄라는 대상이란 논픽션을 소재로 소설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의 접근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소재를 재구성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의 프로파일 중 유독 형사나 탐정들의 추리력이 빛을 발하여 범인을 잡은 논픽션 소재를 저자가 찾아 골라서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그런 소재를 골라잡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그런 전형적 추리소설의 재구성에도 관심을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재구성이라 함은 사건의 주인공인 탐정이나 형사의 1인칭 시점으로 독자가 들어가,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가는 형식의 추리소설 구성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마지막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1인칭 주인공처럼 일반적인 추리력으로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 확증하게 되지만, 소설은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추리소설은 일반적 독자의 추리력을 뛰어넘는 반전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추리란 세계의 매혹에 완전히 함몰하게 만드는 것이 그 역할이며 임무인 것이다. 물론, 근래 추리소설은 이런 고전적인 전형적 구조를 탈피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CSI수사대라든가, 기타 미드를 보더라도 이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범죄도 범죄자도 전형적이지 않을뿐더러, 때문에 그 수사방법과 과정도 단순한 추리로는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드나 장르소설에도 역시 반전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과학적인 수사방법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독자에게 또 다른 영역의 추리적 카타르시스를 대신 선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러한 현대적 장르의 추리소설 범주에도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엔 어떤 반전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과학적 수사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건 자체의 해결도 거의 기막힌 행운에 의한 우연의 산물에 의해서 해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심지어 이 소설에서는 사건 해결을 위한 복선조차도 거의 생략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냥 사건의 나열과 기록 연대기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 차라리 더 나을까? 하지만 다 읽고서, 개인적으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렸다. 그 때문인지 이 소설이 어쩌면 ‘죄와 벌’의 현대판 범죄심리 소설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모든 접근방식과 문체 그리고 소설의 주제마저도 전혀 다른 별개의 소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범죄심리학이란 관점에서 두 소설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자못 흥미로울 것 같아, 지금부터는 두 소설을 비교하면서 이 소설에 대해서 평해보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라스콜리니코프란 젊은 청년이 한 노파를 살해하게 되면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약 700-8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의 긴긴 내용 가운데 팔 할이 범죄를 저지른 동기에 대한 아주 자잘하고 치졸한 자아성찰에 관한 이야기란 사실이다. 즉, 이 소설은 인간이 죄를 저질렀을 때 야기되는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와 본질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다른 특별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주인공과 관련한 가족을 제외하고는 구원이라는 상징적 존재로서 소냐라는 등장인물, 그리고 재판과 관련된 인물들이 전부이다. 사실, 이 인물들마저도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인 고민을 위해 거의 배경적으로 저자가 끌어들인 인물들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즉, 이 소설은 순전히 인간의 범죄 심리의 근본과 양심에 관한 문제의 본질인 선과 악에 대해 질문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자체에서 이런 범죄적 인간의 유형들은 그에 따른 질문과 함께 점점 더 심화되고 진화해간다. 초기의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크프를 넘어서서,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신’이란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살인을 꿈꾸는 이반 표도로비치란 인물로, 그리고 ‘악령’에서는 이미 그러한 모든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악마적 초인으로써 소녀를 아무런 양심 없이 강간하기까지 하는 스타브로긴이란 인물까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인간은 점차 도덕적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거의 그 종국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도덕이란 인간의 한계조건을 벗어난 인간들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딕이라 불리는 히콕, 그리고 페리 스미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딕이란 인물의 경우에는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전에서도 주인공으로써 전면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지만, 그 주변인물로써 딕과 같은 인간 유형은 자주 등장해왔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추잡한 인간군상의 표상으로써,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의 한 얼굴로써, 딕과 같은 인물은 종종 소설 속에서 그 기능을 충실해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페리 스미스와 같은 인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름의 도덕적 관점은 형성하고 있지만, 살인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없고, 그 동기마저 불분명한,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같은 악마적인 시를 쓴 랭보나 소녀의 강간에 대해 주로 다룬 듯한 '말도로르의 노래'를 쓴 로트레아몽처럼 미치광이 천재이거나 예술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대중에 포함되는 우리이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미친놈이라고 낙인을 찍으면 되는 것일까? 이 둘 다 아니라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In Cold Blood'에서 작가는 페리 스미스를 다루면서, 중요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맥노튼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더럼 규칙'이다. 먼저, '맥노튼 법칙'이란 정신질환의 증후를 보이는 피고인 범죄자가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다면, 정신이상을 인정하지 않는 규칙이다. 반대로, '더럼 규칙'은 단순하게 피고가 저지른 불법 행위가 정신병이거나 정신적 손상의 산물이라면 형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는 관점이다. 재판 과정에서 페리 스미스의 정신감정을 맡았던 존스 박사의 경우는 페리 스미스를 '더럼 규칙'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렇지만 판사와 다른 모든 배심원들은 페리 스미스를 '맥노튼 법칙'에 의해 규정짓고, 사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법칙 모두 더 이상 어떤 도덕적인 잣대나 양심적인 화두에 대해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 시대에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더 이상 도덕적인 화두가 아니라, 매우 심리적이거나 법적인 문제로 이전했음을 이 글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글속에서 저자는 많은 부분 페리 스미스의 성장과정과 그에 따른 나름의 도덕적 가치관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인의 심리적 인과과정은 감춰져 있다. 그냥 갑자기 페리 스미스는 자기 삶에서 이제껏 누구보다 친절하게 대했던 느낌을 준 클러터 씨를 살해한다. 그것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물론, 글속에선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스미스의 정신상태가 이중으로 분열되어, 살인하고 있는 자아와 생각하는 자아가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말만 많고 허세 가득한 겁쟁이 딕에게 진짜 사나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누군가에 의해 어설프게 심리가 분석되어져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명 다 페리 스미스의 살인의 인과과정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설령 그렇게 설명이 된다하더라도, 이후에 등장하는 앤드루스와 같은 인물 유형에겐 이러한 두 가지 심리분석은 적용조차도 될 수가 없다. 평소에 모범생으로 살던 뚱뚱보 앤디(앤드루스의 애칭)가 자신의 부모형제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하리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마치 파리를 죽이는 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것이 똑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앤디의 정신 상태에 대해 그 누가 쉽게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이 문제에 대해 정신분열의 문제로 돌려놓고, 모든 도덕적인 책임을 심리적 문제로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소설 속에선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도덕 대신 법의 문제로 환치시킨다. 왜냐하면 '신'이란 절대적인 선 대신 다양한 선과 가치관을 인정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절대적인 도덕적인 잣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도덕이란 문제는 이제 개인의 문제일 뿐, 더 이상 사회적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일반적 함의가 담긴 도덕의 잣대를 법이란 틀에 담아 대신 활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페리 스미스와 앤드루스는 '맥노튼 법칙'과 '더럼 규칙'에 의해서 규정지어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총체적인 삶의 자리를 다루고 고민하는 문학이란 자리에서도 이 규칙이 통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 질문은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질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연적인 존재 성찰에 있어서 악의 문제는 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하기에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치열하게 다루어져야만 하며, 그에 따른 새로운 질문들이 끊임없이 야기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제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써 정착된 범죄심리란 장르의 소설이 거의 추리소설이란 틀로 고착화되는 경향은 다소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이런 장르의 거의 초기 형태라 말할 수 있는 이 글만 보아도 벌써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글보다는 더욱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그 저변에 깔린 비인간성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아니 고민하는 소설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비록 도덕의 잣대도 뭣도 다 사라진 시대라 할지라도, 그 화두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되새겨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직도 나는 그런 소설들에 대한 기대의 끈들을, 미련들을 포기하지 못하고서, 이렇게 자꾸만 되물어보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날을 기억

 

 

 

이제는 벌써 유년의 언덕배기

마른 엉겅퀴들 가득 엉키어

푸석푸석 아스러지는 소리 따라

밟아 올라서면,

밑동이 잘려버린 그루터기 하나

화석처럼 꼿꼿하게 굳어

쩍쩍 갈라진 틈새 사이로

겨울, 잠들기 위해

개미들이 기어 다니고

깊은 동굴 속으로 동굴 속으로

침잠해가고 있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그 그루터기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잔풀을 보며

그 여린 잎맥의 결을 따라 입맞춤하고

짓이기던 손끝에 베인 짙은 향내에

서러워 울었음을.

 

 

그 밤, 그 언덕 아랫마을

무수히 펼쳐진 창가의 불빛들과

가로등 불빛들로 촛불을 켜고

지금은 아이의 아빠가 된 동무들과

못 다 부른 별빛의 노래를 부르며

별똥별처럼 바닥으로 그 아래로

타들어가는 소망으로

떨어져 갔었음을.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차도 위에 헤드라이트 불빛들처럼

금세 모두 사라져 갔지만

우리 모두

그곳에 있었음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장소] 2015-03-12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오셨습니다.

몽원 2015-03-12 14:53   좋아요 1 | URL
종종 소리 없이 님의 서재도 들리고, 제 서재도 들렸습니다. 조금 바빴습니다. 하하;;
 

 

 

 

신앙 없는 자의 외침

 

 

랭보,보들레르,기형도,부처,예수,네루다

고흐,고갱,루오,도스토예프스키,바흐,헨델..

사막보다 건조하고 남극보다 냉랭한

별이 뜨지 않는 마을에서 당신들의

몸뚱이 없는 이름들을 덜컥 불러봅니다.

아린 목젖에 걸린 통증이 가슴으로 내려와

콕콕 쑤셔오는 고통 되어

관능에 촉수가 달린 당신들의 고귀한

몸뚱이,몸뚱이 불러봅니다.

허공에 둥둥 얼굴 없는 목이 떠다니고

보이지 않는 관음의 시선 위해 당신들의

이름, 이름들 새겨 넣습니다. a1,p4,r3,z5,g7,,,

아..아파옵니다. 피..피가 납니다.

알..알겠습니다. 젯..젯..젯.. 지.랄.

1+4+3+5+7=20, 1*4*3*5*7=420, 420-20=400,

당신들은 이제부터 모두 400번의 지랄 같은

감정들입니다. 400번의 힘겨운 자위입니다.

400번의 구타입니다. 그러나 당신!

당신의 몸뚱이는 어디 갔나요?

저는 멀리 유배를 떠나, 당신을 기다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신앙 없는 자의 편지

 

 

당신의 영혼에 한없이 흔들리는

흐느낌이고 싶었습니다.

영혼이 없다면 당신의 마음에

끈덕지게 눌어붙은 눈물이고 싶었습니다.

그마저 없다면 가난한 거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뿌리쳐진 제 손길은

어디에 가 닿아 미끄러져야만 하는 건지요?

세상이 아닌 당신을 전부가 아닌 하나를

가질 수가 없고 찾을 수가 없어

그 무엇도 드릴 수가 없고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어

아무런 믿음 없이

아무런 바람 없이

메마른 당신께

안부를 묻고 또 묻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뿌리 이야기 - 아프고 느린, 그래서 어쩌면 너무 오래된 접근방식에 대한 의문

 

 

  저자가 글속에서 밝힌 대로 뿌리라는 오브제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을까? 글속 화자의 남자친구의 뿌리에 대한 깊은 천착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처음 쓰일 때부터 일정부분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예정된 부분이 있었다. 뿌리를 통째로 뽑힌 어느 한 인간의 자아성찰적인 고백과 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뿌리 찾기, 이 글은 이렇게 두 남녀의 뿌리라는 존재 찾기의 작업을 실제적인 뿌리를 사용한 설치미술 이야기로 오롯하게 풀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글속 남자주인공이 거대하고 무거운 뿌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수십 개의 못을 박고, 촛농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아릿하고 느리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방식이 뿌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읽는 내내 이러한 방식에 대해 구태의연하다고, 그래서 무언가 아쉽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여기엔 내 개인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다른 철학적 접근방식과 선입견이 작용한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 글을 온전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글을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후, 읽는 동안 떠올렸던 내 개인의 뿌리의 접근방식과 대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먼저, 글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저자의 뿌리를 묘사하는 세밀한 방식이었다. 마치 실제로 뿌리를 마주대하고 있는 착각이 일게끔 김 숨 작가는 뿌리에 대한 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부분은 거의 첫 서두에 나오는 복숭아나무 뿌리에 관한 묘사이다. 사람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나리자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복숭아나무 뿌리에 빗댄 인간 감정의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을 처음부터 빠져들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나아가, 포도나무 뿌리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천근성을 지닌 뿌리에 대해 접근한다. 천근성을 지닌 뿌리는 깊게 뿌리를 내리는 심근성의 뿌리와 달리 넓게 퍼지는 뿌리를 의미한다. 즉, 어떤 면에서 언제든지 쉽게 뽑힐 수 있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 글속 화자와 그리고 그 남자친구와도 같이. 물론, 어떤 면에서 집요하게 뿌리에 집착하는 글속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심근성의 뿌리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고아였기에, 태생부터 뿌리가 뽑혀진 인간이 지닌 안정에 대한 강박을 오히려 더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글속 화자보다 오히려 훨씬 더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속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포도나무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남자친구 그리고 글속 화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국, 글속 화자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 때 종군위안부가 됨으로써 원치 않게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통째로 뽑힌 고모할머니의 손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손금은 남자친구의 포도나무 뿌리 작품에 ‘남귀덕’이란 고모할머니 이름으로 고스란히 되살아나, 그녀와 남자친구를 정신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은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잘 맞물려진 구성과 의미를 갖춘 글로 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내 개인의 의문은 서두에도 밝혔지만, 그 접근방식에 있어서의 구태의연함이다. 즉, 또 다른 접근방식들에 대한 내 개인적 질문들이다.

 

 

  첫째로, 뿌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읽는 동안 내 머리에 스친 생각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읽었을 때 알게 된 덩이식물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덩이식물은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종류의 식물들로 나무들과 달리, 따로 줄기와 뿌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즉, 감자나 고무나 그 자체가 뿌리이면서 동시에 줄기이고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식물들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 한 그루에 뿌리 하나 줄기 하나라는 방식으로 따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나무와는 달리, 덩이라는 그 말 자체가 일컫듯이 뿌리가 수평적으로 엉켜 하나의 군집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식물들을 의미한다. 즉, 감자와 고구마는 뿌리 하나에 수십 개의 감자와 고구마들이 뒤엉켜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뿌리에 대한 개념은 깨지게 된다. 왜냐하면 뿌리가 더 이상 존재의 근원을 찾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표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선 더 이상 뿌리에 대한 물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덩이식물이라는 한정적인 존재방식의 이야기이기에, 극단적인 설정이다. 그렇지만 뿌리에 대한 천착을 저자가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면, 심근성과 천근성이란 뿌리라는 설정보다 더 근원적인 이런 접근방식에도 물음을 가져야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두 번째는, 포도나무 뿌리라는 대상이었기에 글을 읽는 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이었다. 무엇이냐면, 나무의 뿌리가 아닌 잘린 가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사실, 신학생이었기에 신학을 포기하는데 있어 나는 내 나름의 화두와 이유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내가 찾았던 것은 성서에서 나온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에서였다. 성서에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이기에 그 줄기에 접붙여지지 않은 가지는 말라비틀어질 것이라고, 그 때문에 잘려서 불태워질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길로 가기를 거부하는 이라면 과연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내 경우엔 줄기가 아닌, 말라비틀어지고 잘려서 불태워질 가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 자신이 너무나도 말라비틀어져, 그 이유로 목마른 가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까닭으로 잘리는 가지는 나무 전체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게끔 하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제물로 불타오르는 표징의 불꽃은 참 포도나무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생생한 증거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지극히 모순이고 역설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러한 자기 부인이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성의 논리로 자아를 구축한 내게 있어서, 뿌리에 대한 이 글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많았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뿌리에게만 집착한단 말인가? 잘리고 버려진 줄기와 가지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물론, 이 글이 처음부터 천근성이란 뿌리의 특질을 통해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쓴 글이기에, 이러한 물음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같이 너무나도 다른 물음의 전제를 지닌 인간에게 있어선, 이 글의 그러한 점들이 너무나 구태의연하게만 느껴졌다. 만약 폭을 조금 더 넓혀 나 같은 인간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거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이 글에 대한 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매우 잘 쓴 글이고, 잘 짜인 글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뿌리라는 문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겁다. 그 이유로 늘 한 가지 방식으로 정형화되어 접근되어졌고, 질문이 던져져 왔다. 사실, 뿌리란 문제를 어떻게 쉬 가볍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방식과 물음들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러한 방식이 글을 방만하고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여,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을 택했다면, 최소한 남녀 주인공의 다소 신파적인 설정은 피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뿌리의 문제로 재고해볼 수 있도록... 아니면 뿌리 오브제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여, 자연스럽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뿌리의 문제로 환기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어땠을까? 잘 쓴 글이고, 좋은 글이었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아, 딴지 아닌 딴지를 자꾸 걸어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