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시즌 - [초특가판]
토니 뷔 감독, 돈 두옹 외 출연 / SRE (새롬 엔터테인먼트)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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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시즌 - 잃어버린 계절을 위한 염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인류에겐 추운 계절이 지나가면 반드시 봄이 오리라는 희망이 주어져 왔다. 그러나 현실은 판도라 때문인지, 모르긴 몰라도, 희망이라는 먼 수평선과의 차이만큼이나 온갖 고통들과 번뇌들 그리고 재앙들로 가득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번뇌들, 재앙들은 결국엔 희망마저 앗아가 버리곤 한다. 이 때문인지 우리는 그 숱한 시절들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부터, 이렇게 봄을 빼앗긴 우리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염을 하고 씻김의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내일로 나아가길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정말로 빼앗긴 봄이 돌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럼에도 우리는 그 오랜 세월동안 그 허무한 염과 씻김의 의식들을 계속 해왔다. 왜 일까? 아마 당장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쉬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 '쓰리시즌'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 물음에 가까운 대답들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선 놀라운 일이 하나 벌어졌다. 왜냐하면 거의 무명에 가까운, 그것도 매우 젊은, 26살의 한 신인 감독의 영화 하나가 극영화 부문 최고심사위원상과 관객상, 촬영상 등 세 개 부문을 휩쓸어 버리는 일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동안 독립 영화제로선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던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로 다루던 인권 문제나 사회 문제 같은 그런 내용이 아닌,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인데다, 그러한 내용을 뒤집어 버리는 영화이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베트남계 미국인인 퇴니 부이 감독의 영화 '쓰리시즌'은 이젠 모두에게 잊혀진 베트남의 상처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어르고 매만진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영화의 무대는 어제를 묻어두고서 살아가는 오늘의 베트남이며, 그 내용은 크게 세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하나의 큰 줄기로 나아가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베트남 소년 우디와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의 이야기

 

  우디는 만물 상자를 자신의 목에 걸고서, 비 오는 거리를 누비며, 시계, 라이터 등 잡동사니를 팔고 다니는 소년이다. 그리고 해거는 퇴역한 해병으로써, 베트남전에서 자신이 버린 딸을 찾아 베트남에 온 미국인이다. 그리고 영화는 전혀 관계없는 이 인물의 우연한 만남을 가정하고 있다.

 

  그날도 비 오는 거리를 오가며,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만물 상자를 목에 걸고, 장사를 하고 있던 우디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린 탓인지, 한 술집으로 들어가 장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우디는 우연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미국인 해거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해거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우디를 자기 테이블에 앉혀 놓고선, 물건을 팔아 줄 것처럼 하면서 술을 먹이는 것이다. 이제 겨우 열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우디에게... 그리고 우디가 취해, 잠시 졸음을 참지 못한 사이, 우디의 생명과도 같은 만물 상자를 가지고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때부터 영화는 우디가 해거를 찾아, 만물 상자를 되돌려 받으려는 이야기로 꾸며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 우디에게 매우 잔인한 일처럼 비춰진다. 그렇지만 영화는 여기서 다시 반전을 염두 해두고 있다. 왜냐하면 우디의 만물 상자를 해거가 훔쳐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거는 그저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디는 사라져 버리고, 수일 후에 나타나, 자신에게 만물 상자를 되돌려 달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해거에겐 만물상자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찾고자 원했던 자신의 딸을 찾을 길이 없어, 이제 내일이면 이 곳 베트남을 떠나야만 한다. 결국 영화는 여기서 마치, 어린 베트남 소년 우디와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의 아무 의미 없던 허무한 상황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새롭게 반전된다. 왜냐하면 우디는 해거에게서 만물 상자를 되찾지 못한 채, 비참하게 비를 맞으면서 길을 걷다, 우연히 자신과 같은 처지에 한 소녀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소녀와 함께 비를 피하려 들어선 어느 골목길에서 덤으로 버려진 자신의 만물상자까지 되찾게 된다. 그리고 해거는 우디와 헤어진 후, 괴로움에 술을 마시다, 맞은 편 테이블에서 다른 남자를 접대하고 있는 자신의 딸을 목격하게 된다. 끝으로 영화는 해거와 해거의 딸의 만남을 보여줌으로써, 어색하지만 이제 화해의 길로 접어들고자 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첫 번째 에피소드를 마치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 은둔 시인 다오 선생과 젊은 아가씨 키엔의 이야기

 

  일자리를 찾아 호치민시까지 오게 된 키엔은 연꽃을 파는 다오 선생의 집에 고용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키엔은 오전이면 연꽃이 피는 수렁으로 가 연꽃을 딴 후, 오후엔 시내로 나아가, 연꽃을 파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연꽃을 따면서, 키엔은 그곳에서 부르는 연꽃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시장 터에서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다오 선생의 부름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오 선생은 은둔자로서 그 곳 일하는 사람 가운데 누구도 본 일이 없었다. 아니, 다오 선생이 기거하는 집 근처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그 누구도 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키엔의 노랫소리에 다오 선생의 무슨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새벽녘 아무도 모르게 키엔을 따로 부른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에서 드러낸 사실은 다오 선생이 나병 환자라는 사실과 나병이 걸리기 전까진 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다오 선생은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은둔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키엔의 노랫소리를 듣자, 자신이 나병이 걸리기 전, 시장터에서 아낙네들이 부르던 노래임을 깨닫고서 자신의 젊을 적의 그리운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야심한 새벽 키엔을 몰래 불러, 다시 자신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다오 선생의 집에 종종 들릴 수 있게 된 키엔은 그때부터 다오 선생의 손이 되어, 잃었던 다오 선생의 시심을 되찾아 주려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다오 선생의 병이 깊어지면서, 다오 선생은 키엔을 부르지 않고서, 쓸쓸히 혼자서 죽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물로 키엔에게 자신의 젊을 적 사진이 담긴 자신의 시집 한 권을 남겨둔다. 여기까지 영화는 마치, 하나의 못 다한 사랑에 대한 비극적 에피소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다시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다오 선생의 시를 대필해 줌으로써 다오 선생이 죽어서 연꽃으로 피어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엔은 무수한 연꽃더미를 가지고서, 자신이 부른 노래를 들었던 시장터 강변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 연꽃을 띄움으로써, 다오 선생의 못 다한 소원을 이뤄준다. 실은, 늪 속에서만 가장 아름다운 시심을 꽃피웠던 다오 선생의 연꽃은 죽어서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젊은 시절의 시장터에서도 꽃피우길 간절히 원했던 까닭이다. 그러하기에 영화는 키엔이 불렀던 시장터 아낙네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강가에서 둥둥 떠다니는 연꽃을 보여줌으로써 두 번째 에피소드의 막을 내리고 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 창녀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는 어느 날 손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콜걸 렌을 자신의 씨클로에 태우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이는 렌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렌은 자신의 가난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기에, 콜걸이 되어,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세계인 호텔과 상류층 사회에 한 쪽 발을 들이밀고 있다. 그러니, 그런 렌에게 있어,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는 귀찮기만 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하이는 렌에게 아무런 바람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렌이 자신의 일을 끝마치고 호텔에서 나올 때면, 기다렸다가 렌을 태우고서, 렌의 집까지 데려다 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렌도 귀찮지만 자신의 편의를 위해 하이의 그런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그 어느 순간부터 하이의 행동이 부담스러워진 렌은 하이에게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며, 자신을 만나기 위해선 하룻밤에 50달러라는, 하이에겐 부담스러운 대금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하이는 평소 관심 없었던 씨클로 경주 대회에 참가하게까지 되고, 거기서 행운의 1등을 하게 됨으로써, 상금 200달러를 얻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렌과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이없는 것은, 하이는 렌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자신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의 아름다운 잠옷을 렌에게 선물하고선, 그 옷을 입어 보라고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대로 잠드는 렌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질 않는다. 그리고선 아침밥까지 주문해 놓고서, 그대로 사라져 버린 후, 다음 날 다시 렌을 찾아간다. 하지만 렌은 하이의 그런 사랑이 너무나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러하기에 렌은 돈과 옷을 하이에게 그대로 돌려주며, 제발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하이 앞에서 절규한다. 그러나 여자이기 때문일까? 자신의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하이의 그 묵직한 사랑을 렌은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하이를 자신의 집으로 들어서게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 또한 우리가 기존의 생각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 둘이 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하이는 정성스레 땀으로 가득한 렌의 온 몸을 닦아주며 어름으로써, 그 동안 창녀로써 때 묻은 렌의 육체를 깨끗이 씻겨주고 달래줄 뿐이다. 그리고선, 하이는 렌의 눈을 두건으로 둘러,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 후, 그 어딘 가로 렌을 데리고 간다. 그곳은 언젠가 렌이 하이의 씨클로를 타면서 말했던 곳이었다. 창녀인 렌이 가난했지만 꿈 많던 학창 시절, 나무에 매달린 꽃을 보며 떨어지길 기다렸던 그 시절, 어떤 잘생긴 남학생이 와서 꽃을 따다가 자신의 머리에 꽂아주길 바라던 그 시절, 그 시절 꿈꾸었던....... 나무에서 한없이 꽃이 떨어져,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머리에 꽃으로 화환을 쓸 수 있는 그 시절 그곳. 그러하기에 두건을 벗은 렌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하이의 씨클로가 렌의 집 앞에 언제까지나 머물 것 같은 풍경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만물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파는 소년 우디, 베트남전 버린 자신의 딸을 찾아 나선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 은둔 시인 다오 선생, 청순한 아가씨 키엔 그리고 가난한 콜걸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 영화는 이 불협화음과도 같은 여섯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종 씻을 수 없다 믿은 베트남의 상처를 어르고 달래며, 베트남의 잃었던 봄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두 살 때 베트남을 떠나 스무 살까지 줄곧 미국에서 자란 감독, 토니 부이의 서구적 시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토니는 영화 속에서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마치 우디와 해거를 통해서 오해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당하는 약한 자의 편에선 그것은 오해일 수 없다. 왜냐하면 강한 자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에 약한 개구리는 피를 토하고 거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약한 개구리들은 강한 자의 던지는 돌팔매와 화해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다. 절치부심이라고 했던가? 독하게 이를 악물고, 약한 개구리는 자신의 씻을 한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즉, 약한 개구리에게 씻김이란 건 오직 복수뿐이며, 그도 강한 자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시각 하에서 보면,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돌멩이는 말 그대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과 베트남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너무 간단하게 치부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화해와 공존이라는 시각 하에서 뒤늦게라도 내민 손길을 뿌리치지 말자는 얘기이다. 왜냐하면 이미 잃어버린 만물 상자를 아무리 해거에게 돌려 달라 해도 해거에겐 만물상자가 존재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걸 어떻게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씻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감독은 바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거에게 있을 거라 믿은 우디의 만물 상자의 미련을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히려 우디에게 우디와 같은 처지에 놓은 한 소녀와의 만남을 가정함으로써, 우디에게 이 연약한 소녀라도 잘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그렇게 약한 개구리끼리 오순도순 도우며 살아갈 때, 언젠가 잃어버렸던 만물상자가 예기치 않게 나타날 수 있음을, 그런 희망을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거가 아무 잘못도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디와는 오해일지라도 해거는 분명히 용서받을 일이 있으며, 그것에 대해 고백해야만 된다. 그런 이유로 해거는 자신이 버린 딸을 만나, 매우 두려운 마음으로 어색한 고백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버린 딸의 처지-남자를 접대하는 창녀로써의 처지-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해거는 반드시 고백해야 하며, 눈물을 뿌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약한 개구리와 강한 자의 오해가 풀어지고, 화해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개구리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살아남은 약한 개구리의 가족이나 친구가 강한 자가 서로 화해했다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개구리가 살아날 리는 만무하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감독은 또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생 씻을 없는 나병이라는 하늘의 저주로 살아갔던 다오 선생과 청순한 처녀 키엔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나병환자와 달리, 영화 속에서 다오 선생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연꽃과 같은 존재이다. 아니, 연꽃이란 건 수렁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던가? 연꽃의 마음이란 건 꼭 수렁 안에만 있지 않음을... 어쩌면 그러하기에 되려, 연꽃의 마음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터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연꽃은 그 강가에서 둥둥 떠다니며, 그들의 노랫소리에 화답하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었다. 그들과 정말로 대화하고 싶고, 정말로 함께 숨 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렁 속에서밖에 피어날 수 없는 연꽃은 어디로 가지 못하고, 그 스스로 은둔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자신의 젊은 시절의 그 꿈을 가슴속에 머금은 채.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서 키엔은 죽은 그 연꽃의 마음을 시장 터에 뿌려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베트남전이라는 상처 속에 죽어간 아름다웠던 젊음들과 꿈들을 묻어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되살아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넋이라도 강가에서 피어나라고. 아니, 이제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피어나라고. 그리고 이제 남겨진 이들에겐 사랑의 계절이 돌아오라고. 다시 해거의 딸과 같이 창녀인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가 다오 선생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청순한 처녀 키엔과의 못 다한 사랑을 이루어 준다. 그렇게 베트남에게 잃어버린 봄이라는 희망이. 꽃이라는 희망의 화환이 한가득 내려주라고.

 

 

  그러하기에 이제 남겨진 우리에게 남은 계절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그들의 못 다한 사랑을 꽃피우는 봄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죽어간 이 땅에 혼백들은 생각보다 그리 치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가 자신들의 고통 속에 머물러 헤어 나오지 못하길 바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자신들을 곱게 묻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못 다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피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연꽃은 수렁에서만 피어오르지만, 해거와 해거의 딸의 대화하는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하고, 시장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강가에 띄워지기도 하며, 창녀 렌의 꿈 많던 시절로 돌아가 머리에 화환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 가슴속에 묻어둘 것은 이제 묻어두자. 그리고 꽃피울 것은 꽃피워, 지나간 상처들과 고통들과의 화해와 사랑의 계절을 꽃피워 보자.

 

    

 

연꽃의 마음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의 곁에 가까이 피어나

가 닿을 순 없어도

화사한 꽃밭에 어여삐 피어나

고이 드리울 순 없어도

여기저기 모르게 피어나

당신 발치에 부딪치는

얕은 파문처럼

고요히 번져 지고 싶어요

바람에 흔들려 흩날리는 벚꽃처럼

발그레 부끄러운 당신 머리 위로

황홀히 화환을 씌울 순 없지만

당신 머리맡을 밝히는

환한 촛불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싶어요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가슴 안에 먼저

놓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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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레오 까락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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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을 훔쳐라!



 스무 살,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던 시절, 나는 영화 나쁜 피를 보았고, 평생 그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미리 예감해버렸다. 컬러풀한 영상에 뒤섞인 회색빛깔의 세기말적인 우울함. 그리고 머리에 총성을 꽂는 듯한, 부유하고 흩어져 버린 대사들. 이해할 수 없는 배우들의 발작과 함께 대조되는 무미건조한 표정들, 그리고 몽환적인 영상의 이미지들. 그 당시 내 상황과 엇물려 마치 나는 그렇게 밖에 사랑할 수 없고, 그렇게 밖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버렸고, 지금도 그 고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라도 영화 나쁜 피에 대해 이 글을 통해 되 바라봄으로써 무언가 그 동안 내 속에 자연 알아진 그것들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면, 그래서 또 다른 배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렇게 그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겹지만 않을 수 있다면.......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을 일단 멈추어, 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본다.


 

 레오 까락스, 우리에겐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폴라X, 특히 퐁네프의 연인들로 매우 친숙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 심각한 우울함과 이해 할 수 없는 난해한 대사와 이미지들은 그를 다시금 우리로부터 예술영화감독이라는 별나라로 격리시킬 수밖에 없게 하였고, 그러하기에 우리에겐 너무나 범접하기 힘든 범죄형의 감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한 번 그에게 빠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독성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 심각한 전염성 불치병까지 얻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유독 내 경우에는 그 중에서도 나쁜 피 전염성 불치병이라는 레오 까락스 바이러스 균에 감염이 되어, 이제부터 애연가가 금연에 대해 광고하는 심정으로, 그 병의 위험성과 심각성에 대해 천천히 고백해 보고자 한다.


 

 핼리혜성의 접근으로 파리엔 이상 기후의 징조들로 가득하다. 연일 5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STBO라는 세기말적 병이 발발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괴상하게도 이 병은 어떤 바이러스라든가 병균의 감염 문제라기보다는 사랑하지 않는 섹스를 통해 발병되는 현상으로, 도저히 어떻게 미리 예방하기가 힘들뿐더러 치유할 수도 없는 불치병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죽음으로 이르는. 그러하기에 이미 여기서 우린 영화 속 파리의 세기말적인 절망과 우울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절망 가운데에서도 하나의 희망은 꼭 생겨나기 마련인지, 그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백신이 발견되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떤 불안과 혼돈의 전조를 드리우게 되고,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 알렉스가 등장하게 된다.


 

 알렉스는 거의 고아나 다름없는 존재다. 물론 아버지가 존재했고, 어머니가 존재했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를 평생 내버려둔 채 자신의 삶만을 살아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평생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이다. 한 마디로, 그의 삶 속에선 아버지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 시작부터 그나마 어디선가 존재하던 아버지는 미국 갱단에 의해서 살해되어 버리고, 이제 알렉스는 고아라는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던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과 아버지의 흔적들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룬 지금, 이젠 진정 자신만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 리즈에게마저 그는 이별을 선포하고, 여행의 길에 오른다. 어떤 몽환과 예감들의 전조로 가득한 여정을. 그리고 바로 그런 몽환을 쫓아 가다가 그는 안나를 발견하게 된다. 버스 창 사이로 유독 하얗게 도드라진 여자의 얼굴이 서려있다. 마치 이제껏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해 준 것처럼 신비로운 경이로 가득한 여자이다. 이미 어떤 굴레도 없는,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와 희망도 없던 알렉스에게 안나는 과연 어떻게 비추었던 것일까? 그저 떠나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 떠나질 때, 우리는 늘 어떤 신비와 경이로움 그리고 몽환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알렉스에게 안나는 나타났고, 그에게 그런 신비와 경이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유리창에 서린 얼굴을 따라 미행해 들어간다. 그리고 안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지....... 안나는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의 애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버지의 친구는 그동안 그를 간절히 찾아왔다. 한 마디로 자연히 그 둘은 알아질 수밖에 없는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알렉스의 여행이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서 떠나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 떠나지는 여행이 아닌, 그 동안 자신에게서 부재했던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가는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떠올려 보게 한다.


 

 마크는 알렉스의 아버지 장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갱단의 일원이었던 듯싶다. 특히 알렉스의 아버지 장의 경우는 도둑질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돈 씀씀이가 좋지 않았는지, 미국 갱단에게 자주 돈을 빌리다 못 갚게 되어, 결국 살해당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연 그 빚의 부채를 장과 같은 일원이었던 마크가 떠맡게 되어, 이제 마크가 다시 살해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 빚이라는 건, 아들에게 떠맡겨 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고전적 방식이라면 아들이란 존재는 당연히 아버지의 그런 죽음에 대해 알고 복수를 할 의무가 있다. 더군다나 알렉스는 장을 닮아 있었다. 한 마디로 알렉스 또한 도둑질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동안 마크는 알렉스를 찾아왔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갱단의 빚을 갚기 위해 그 당시 파리에 돌고 있는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 STBO의 치료 백신을 훔칠 것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은 알렉스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렉스는 안나를 쫓아, 제 발로 찾아 들어왔다. 그러니 마크로선 이 일은 기막힌 행운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로서는 끔찍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가 내린 그 천부적인 도둑질의 재능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다. 그가 아는 건 오직 지금 자신이 안나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운명이거나 숙명 같은 믿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안나가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크의 애인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안나는 마크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결코 자신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면 안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결국 마크를 도울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안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다만 안나와의 만남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마크를 도와 사랑 없는 관계로 발병하는 불치병의 치료 백신을 훔치는 것밖에는 달리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그 셋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게 된다.


 

 안나는 늘 마크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알렉스는 안나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그 전에 알렉스의 애인이었던 리즈는 아직도 알렉스를 잊지 못하고, 알렉스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다시 예전부터 리즈를 좋아하였던 알렉스의 절친한 친구인 도마는 리즈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마지막 그 꼭지 점에 서 있는 마크는 오직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을 훔쳐야 한다는 것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그들은 자신을 바라다보는 존재들에게 매정하지 못하고, 순간순간마다 조금씩의 마음을 내어주고 있다.


 

'순간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그 순간으로 영원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알렉스는 안나에게 묻는다. 그러나 안나를 고개를 젓는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순간의 모든 즉흥적인 감정이 모두 진실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랑일 수 있다면, 안나는 알렉스를 몇 번이고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알렉스는 그렇게 수십 번 리즈를 사랑했었다. 그런데 왜 불현듯 갑작스럽게 알렉스는 리즈를 버려야만 했고, 전혀 알지도 못하던, 그것도 오직 마크만을 바라보고 있는 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알렉스는 말한다. 속도감을 찾고 싶었노라고. 그렇다면 왜 알렉스는 안주하지 못하고 질주해야만 하는가? 안나와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다시금 속도감을 잃어버리는 안주가 아니란 말인가? 사랑이란 것이 그 폭발할 듯한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영원히 식지 않고서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무엇이어야만 한단 말인가? 알렉스의 옛 애인 리즈는 말한다.


 

'알렉스, 넌 사랑을 몰라.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리고 알렉스는 말한다.


 

'여자들이 나에게 그러더군. 단순해지라고. 그런데 그 단순해진다는 게 나한테는 너무 어려웠던 거야.'


 

 어쩌면 알렉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안나에 대한 그 사랑에 있어서, 잃었던 자신의 열정의 속도감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린 알렉스의 선택은 자신 하나에게만 속해 있던 문제는 아니었다. 마치 먹이 사슬처럼 알렉스의 친구 도마는 닿을 수 없는 리즈를, 다시 리즈는 닿을 수 없는 알렉스를, 그리고 다시 알렉스는 닿을 수 없는 안나를, 마찬가지로 안나는 닿을 수 없는 마크라는 수평선을 쫓아 달려가는 형국이 되어, 결국 그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있던 리즈와 도마에게로 그 모든 관계의 병적증상이 드러나게 된다. 리즈는 알렉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알렉스와 가장 절친하던 친구 도마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알렉스를 배신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 없는 관계를 통해 도마는 STBO라는 사랑 없는 관계에서 오는 세기말적 병에 걸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역으로 알렉스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 STBO를 치유하기 위한 백신을 알렉스가 훔치는 과정에서 도마가 이 모든 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경찰에 밀고를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렉스는 연구소에서 백신을 훔치는 순간, 사방에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버리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단 하나의 인질인 자기 자신의 머리통에 총을 꽂고선, 당당하게 경찰들 앞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미리 도마의 밀고를 눈치 챈 리즈의 도움으로 그 곳을 탈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은 약간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알렉스는 도주과정에서 자신을 쫓던 경관을 총으로 쏴 죽였을 뿐 아니라, 갑작스런 리즈의 등장으로 인해 마크와 안나 그리고 또 다른 모두에게 배신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다시 자신을 도피시켜 준 리즈에게로 영영 안주하면 된다. 그러면 그 모두에게 배신자가 될지언정, 어쩌면 자신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또 다시 잠든 리즈를 버려두고서, 안나와 마크에게로 달려간다. 마치 늘 부재하였음에도 떨쳐버릴 수 없던 자신의 냉정한 아버지를 평생 바라보던 어머니에 대한 그 연민을 져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사실 그 이전에 영화에선 아마 과거에 알렉스의 아버지 장과 연인이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미국 갱단의 여두목이라는 존재가 나와, 알렉스에게 마크와 안나를 배신할 것을 촉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알렉스는 마치 그 배신에 대해 거의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차피 알렉스에게 중요한 것은 안나이지 마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미국 갱단 여두목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것 또한 알렉스가 아닌 마크이며, 게다가 사실 마크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알렉스를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 무엇보다도 마크는 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늙었음에 비해 안나가 너무 젊고,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크의 목숨만 보장된다면, 알렉스 자신은 그 미국 갱단에게 STBO의 치료 백신을 넘겨주고서, 받은 돈으로 안나와 함께 어딘가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된다. 어쩌면 이것은 마크가 가장 바라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안나는 결코 마크를 저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어리석게도 알렉스는 죽어도 안나를 배신할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결국, 알렉스는 리즈의 도움으로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리즈를 버려두고서 안나와 마크에게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신의 대가로 미국 갱단에게 총상을 입게 된다.


 

'마치 나의 인생은 연습장에 마음대로 그려진 낙서처럼 그렇게 살아져 왔어.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부셔지기만 하고, 해변이나 바위에 닿지 못하는 파도처럼. 그리고 인생을 알았을 땐 모든 것은 이미 늦어버렸지. 하지만 그래도 난 믿었어. 아직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그들 모두는 원래 예정대로 스위스로 달아날 비행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알렉스는 총상이 심각해져, 이제 거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엔 미국 갱단이 쫓아오고 있고, 다시 그 뒤로 리즈의 오토바이가 뒤따르고 있다. 처음 이 사실을 몰랐던 마크와 안나 일행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알렉스의 숨겨진 총상에서 피가 새어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시면서, 마크와 안나는 사태를 파악하게 된다. 마크는 복수심에 그동안 두려움에 떨었던 미국 갱단과 그 여두목에게 총을 겨누어, 그들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이미 그렇다 해도 알렉스의 죽음만은 도저히 어이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알렉스는 비행장에 도착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둔다. 뒤따라온 리즈에게 그 특유의 복화술로 이야기하면서.


 

'리즈, 나의 귀여운 리즈, 모든 것은 끝났어.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우리의 지난날처럼 되겠지.'


 

 알렉스가 그렇게 숨을 거두자, 리즈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홀연히 왔던 그 모습 그대로 오토바이를 타고서 돌아간다. 그리고 안나는 갑자기 미친 듯이 비행장 활주로에서 뛰기 시작한다. 마크가 그 뒤를 쫓지만 금세 멀어져 가고, 마치 한 마리 새가 된 듯 뛰어가는 안나의 모습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영화 나쁜 피는 사실 그 줄거리 잡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또 여러 가지 이야기로 읽힐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복잡한 씬 하나하나에 담긴 이미지는 마치 의미의 과열된 포화 상태처럼 여기저기 흩날려 있어, 영화를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강의 줄거리와 어설픈 평을 가지고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다. 더군다나 비록 '나쁜 피'라는 영화 하나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영화로 볼 수는 있긴 하지만,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레오 까락스의 영화들과 기묘하게 연관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 때문에 이 영화를 보았을 적에 나는 그 몽환적이고 발작적인 배우들의 동작과 대사들 말고는 머릿속에 모호한 느낌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슴에 남아, 무언가 파도치는 것처럼 내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다시 그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되었고, 결국 시간이 오래지나 어느 순간에 내가 그 속에 흠뻑 담가졌다 나왔음을 자연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나는 여러 번에 사랑을 했고, 그것이 불가능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사랑이란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무슨 사랑이기에, 그것은 불가능으로 밖에 치달을 수 없는 것이었을까?


 

 영화에선 줄곧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 백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간에 모두가 그 곳으로 향해져 있음을 우린 그 관계의 고리 속에서 알 수가 있다. 심지어 미국 갱단의 여두목마저도 그 치료약에 목말라 있음을 우린 영화를 보면서 금세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이라는 게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사랑이 없어서 생긴 병이라면 사랑만 있다면 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이라는 의미는 종국적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왜 알렉스는 그리고 모두는 사랑이 오길 자연 기다리지 않고서, 그것을 훔쳐내려 한단 말인가? 사랑이 훔쳐질 수 있는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결코 사랑은 훔쳐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왜 알렉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고, 끝내는 그 죽음에 이르는 그 불치병으로 자신을 내던진 것일까? 여기서 잠깐 우리는 알렉스의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해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알렉스의 아버지 장은 천부적인 도둑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그런 장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지만, 그 천부적인 도둑질 재능 하나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어떤 물건에 대한 것이 아닌 사랑에 대한 것임을 우린 금세 눈치 챌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전혀 훔쳐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하기에 다시 어쩌면,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도둑질 할 수 없는 도둑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이유로 유독 그들의 관계는 사랑 없는 관계 속에만이 놓여 있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을 훔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랑은 결코 훔쳐지지 않고, 훔쳐진 사랑이라면 그들한테 이미 흥미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장은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알렉스를 낳았고, 알렉스는 다시 부재했지만 평생 그에게 짐이 된 그의 아버지 장을 떨쳐내려 몽환적인 안나와의 사랑에 기대었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배운 도둑질이라는 재능 말고는 아무 재능도 없었기에, 다시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서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는 이런 알렉스가 절망으로 흘린 나쁜 피를 얼굴에 묻히고선, 마치 새가 된 듯 비행장 활주로를 뛰어감으로써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함께 그 불가능성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왜? 왜? 사랑은 그렇게 끝까지 그 목마름으로 불가능해야만 하는 것일까? 알렉스와 안나, 리즈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버지라는 그 부재한 대상의 나쁜 피들을 정녕 떨쳐 낼 수 없단 말인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알렉스는 안주하지 않고 질주하길 원했다. 아마도 알렉스는 그것을 사랑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안나의 마지막 심장이 터질듯 달리는 모습은 그러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알렉스인 감독 자신(레오 까락스의 본명은 알렉스 뒤퐁이다)의 염일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레오 까락스는 사랑하는 그 순간순간 자체가 완전한 채로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순간의 감정들 그리고 열정들, 불꽃같은 욕정들....... 이런 사랑에 대해, 자연 시간이 지나지면서, 우리는 늘 불신해 왔다. 왜냐하면 빨리 불타오르는 불줄기일수록 금세 식어지는 모양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그 찬연히 불타올랐던 그 순간 보다 더욱 오래도록 남는, 싸늘히 다 타버린 잿더미들을 아직도 치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순간에 완성될 수 있는 진실 일 수 있으며, 순간의 감정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말할 수 있겠는가? 쉽게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었다고, 그것은 사춘기적 불장난이었다고, 아니면 그것은 쉽게 써 내려져간 낙서였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 사랑이란 건 오래 지속되어야 하며, 서로 간에 불꽃이 튀어 올라 빚어질 상처들은 미연에 방지하면서 혹은 조금씩 양보해 가면서, 그렇게 버티어 가는 것이, 그렇게 밀고 당기면서 자연 익숙해지는 것이어야지, 확 피어올랐다 금세 사라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 하룻밤의 사랑이라도 그 순간 진실했고, 진정 사랑하고 싶었다면,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말 아닐까?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리고 순간은 지나가면 사라져 버리는 그 무엇이지, 오래도록 멈춰 서는 그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잠깐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레오 까락스는 진심으로 그런 자기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었던 거 같다.


 

'순간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그 순간으로 영원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그러나 우리는 안나처럼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니 우리 모두의 나쁜 피라는 굴레들은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그것은 거짓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도 버거운 것처럼 안주할 곳을 찾아, 연일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부표들 같이 맞닿지 못하고 서로를 부유해야 하는 것일지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렉스도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리즈와의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대체 사랑이란 건 무엇이란 말인가? 심장이 터져 버리도록 날아오를 수 있다면, 그리고 마치 다리를 잃어버린 새처럼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수 있다면, 끝내 곤두박질치며 맨 머리로 맨 바닥에 부딪친다 해도 우리의 모든 나쁜 피들을 이 땅에 흩뿌릴 수 있다면, 추락하는 모든 것들에 날개가 없다 해도, 피비린내 나는 온 몸으로 섞어지는 자태가 추악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위로 꽃이 피어 오를 수 있을지도, 그리고 한 마리 새가 그곳에 내려 앉아 있을 수 있을지도,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순간의 사랑! 어쩌면 그것은 이런 권태로운 기적 속에서 일어난 신비일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다시 어쩌면 순간순간의 모든 사랑들로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그렇게 믿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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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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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쩌면 그 어느 날 나도 흐린 酒店(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거나 혹은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를 설명해 낸다는 것? 예전부터 나는 여기에 깊은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매우 큰 두려움을 느껴왔던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우주나 신, 혹은 이데올로기나 역사와 같은 거대한 문제와 결부되지 않다손 치더라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대상들에 대한 묘사를 결코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머니, 아버지, 친구들 그리고 사랑했던 그 누군가...... 그러나 언제나 하나의 묘사 속에서 그들은 왜곡되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왜곡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했던 그 누군가를 바라보는 자아 또한 심하게 왜곡되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대상을 그 자체로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자아란 이 세상에 없을뿐더러, 그것을 알아버린 자아라면 대상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이미 왜곡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조차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가(아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건 대체 무엇이 있을까?

 

 주.절.거.림... 주.접.거.림... 처음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를 접했을 때, 나는 이 단어를 머릿속에서 연신 떠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는 詩라는 것이 머릿속에 맺힌 어떤 소리의 울림이거나 떨림이라고, 혹은 숨김이거나 미끄러짐이라고, 아직까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지우의 시는 그것은 고사하고, 자기 넋두리 비슷한 것이 마치, 한낱 관념의 찌꺼기나 쓰레기 같은 이미지들을 조합 시켜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시의 내용이라는 것도 얼마나 황폐하기 그지없는지, 그의 표현처럼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발가벗겨진 부산물들처럼 부질없어만 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시집 뒤편에 있는 소설쟁이라는 그의 친구 이인성의 시집에 대한 평론을 보면 이것을 ‘겹의 두께’라느니, ‘에로틱한 몸뚱이’라느니 하면서 극찬을 해대는데, 한 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역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느글거리는 비곗살 가득한 삼겹살의 그 두툼한 육질이 어디 에로틱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에로틱하다손 치더라도, 그건 육체에 대한 지나친 병적 관념이 아니라고 감히 그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하기에 나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황지우의 시를 다시 펼쳐보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왜 증오하거나 역한 것들이란 어느 새면 슬며시 다가와 그 거부했던 몸짓으로 옭아 들어가게 되는 건지...

 

 겨울, 찬바람의 느낌이 볼 살을 부비우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스피드에 적응하기로 한 난, 이제까지 일하던 독서실 일을 그만두고서, 오랫동안 고집스레 써오던 삐삐를 버리고, 핸드폰을 사고, 운전 면허증을 땄다. 그리고 다시 스무 살 때처럼 집을 나와, 노가다 판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집에 할머님 제사가 있어, 다시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뭐, 한 집안의 장손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내 개인의 피치 못할 사정상, 나는 집안의 제사가 있을 때마다 늘 부담스럽기만 하다. 왜냐하면 나는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적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그 때부터... 그리고 신학대를 갔다는 이유로 오래 동안 나는 그 어디서든지 절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 식구들 또한 뭐라 그런 적은 없었다. 이미 하나의 관행처럼 식구 모두가 절을 하고 그 때마다 나는 뻣뻣하게 서서 그것을 찬찬히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 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와는 거의 스무 살 터울 나는 우리 집안 막내가 절을 하다 말고, 갑자기 내게 물어 보았다.

 

“왜 큰 형은 절을 안 해요?”

 

 왜일까? 언제나 거대하거나 혹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보다 갑작스레 순진무구함으로 던져지는 질문들 앞에서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오래 전에는 물론 나는 분명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서, 절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언젠가부터 나에게 그 신념은 이미 버려져 너덜거리는 누더기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응당 나는 한 집안에 장손으로서, 그리고 사람 된 도리로서, 응당 제사상에 절을 했어야함이 옳았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러고자 마음먹은 적이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뭐, 달리 이유가 있어선 아니다. 그저 이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굳어져 편안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군가들에게 나는 그렇게 대답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 알아 지게 될 거라고...

 

 

初經(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제사를 마치고서, 다음 날, 나는 제사일로 인해 하루 일을 빠지게 되어 24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머니가 일하는 동대문 밀레오레의 지하 매장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제사일로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일한 어머니가 아침 10시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일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멋도 모르고 간 그곳은 여성 속옷 전문점이었다. 그 동안 어머니께서 새벽에 동대문 시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여자 속옷을 파는 일인지는 전혀 몰랐었다. 그러하기에 무척이나 당황한 나는 처음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런 아들을 잘 알고 있을 어머니이기에 이런 일을 예상하셨는지, 미리 앞의 가게 아가씨들에게 귀띔을 해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앞의 가게 아가씨들이 나를 대신해 가게를 정리해주고, 물건을 팔아주는 것을 온종일 멀건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아니, 나는 심지어 손님이 오든 말든, 가게에 물건 파는 일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종일 앉아 책을 읽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결코 다시 펼쳐 보지 않았던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 詩를 읽는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왠지 詩 같아 보이지 않는 긴 활자채의 황지우 시들이 제법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황지우의 시는 전혀 그로테스크 하지 않은 속옷 가게에서 그로테스크 하게 시를 읽는 나와 너무도 어울려 있었다.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오후 3시 넘어서 어머니가 오셨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어, 황지우 시집을 덮었다 다시 읽고, 그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심하게 어지러웠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등장으로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게 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종로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시집과 음반을 사볼 요량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왜냐하면 그간 나는 의도적으로 무언가 시를 읽고, 새로운 음악에 심취해 보는 일에 대해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하루 고된 노동으로 겨우 번 돈으로 그런 부르주아한 삶에 갔다 바치기가 억울하기도 하였고, 시나 음악 같은 것들에 대한 나의 집착이 자꾸 나를 뒤쳐지게 한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졸업한 학교의 동아리에서 후배들이 준비한 시낭송회를 다녀온 뒤, 나는 나의 그런 생각들을 다시 고쳐먹어야한다고, 금세 변절해 버렸다. 뭐랄까... 왠지 이런 것마저 없다면 내 삶이 너무나 황폐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나의 아버지처럼...

 

 

 젊을 적 신학생이기를 원하였고, 시인이기를 원하였던 아버지는, 그리고 언젠가 자기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와 결혼했다고 말한 나의 아버지는, 그럼에도 술 한 잔 할 줄 모르고, 바람 한 번 피워보지 못한 나의 아버지는, 그 언젠가부터 언어를 잃어버리셨다. 그러하기에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없었다. 대부분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꼭꼭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기 시작한 날 이후로는 보통 나 혼자 머릿속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한다. 아버지 너무 죄송하다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너무 무섭다고... 그러나 우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서로를 잘 이해한다. 그러하기에 결코 서로의 삶에 대해 타박하거나 관여하지 않는다. 같이 단 둘이 식사를 할 때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할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국을 끓이고, 나는 밥상을 차리고,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면, 나도 따라 들고...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시면 내가 밥상을 치우고, 아버지는 설거지를 하시고... 그리고 나는 그 와중에 언젠가 우연히 아버지께서 혼잣말처럼 뱉어낸 주절거림을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가 다 결혼하고 나면, 시골로 내려가 못 다한 공부를 하시면서, 정원이나 가꾸고 싶다던...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씁쓸한 주절거림을.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가만히 거울을 바라다본다. 아직 아랫배도 나오지 않았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는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봐줄만 하다. 그리고 아직 치기 어린 눈빛은 슬픔을 알기엔 반항심으로 그늘져 있다. 그러나 바싹 말라버린 볼 살 위로 튀어나온 광대뼈와 부르튼 입술은 벌써 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찌든 듯한 고통의 눈빛이 지어보여 진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그러나 어쩌면 그 어느 날 나도 흐린 酒店(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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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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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20대 때 기형도의 시 중 나는 이 시를 가장 좋아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내 본연의 자기연민이거나, 역으로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관한 연민의식으로부터의 발아였을 것이다. 아니, 사실 아무래도 좋다. 그것이 자기연민이었든 타인에 관한 연민이었든, 분명한 것은 저 시를 통해 나는 지금의, 혹은 향후 앞으로의 나의 몇 년 후를 예감했던 것 같다. 속은 이미 헐어버렸지만 날렵한 듯한 외양으로 부러지지 못한 채 나무줄기에 매달려 있는 모양의... 무언가 잔혹한... 혹은 이미 말라 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생생한 줄기 앞에서 뒹구는... 무언가 황폐한... 그렇지만 나는 그 때 한 가지 예감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줄기에 매달려 있든, 줄기로부터 부러져 나오든, 그래서 잔혹하든 황폐하든, 그 존재 자체에 깃든 허무가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전혀 충일하지 않고, 그래서 전혀 나의 방어막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 이것이 예상보다 무척이나 서글프고 서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나는 결코 예감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나는 지금부터 이 슬픔에 대해 정직하게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다. 이것이 비록 내 치부를 드러내는 치욕밖에 될 수 없는 작업이 될지라도.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가 별개가 아니었던 스무 살 적을 떠올려 본다. 그 때 비록 나는 나의 동정을 창녀촌에 갖다 파는 멍청한 짓을 했지만, 첫사랑의 손길엔 떨려했고, 첫입맞춤에 온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단지 그녀의 손끝 체온과 입술에서 불어오는 숨결만으로도 세포 하나하나 각자가 분열하여 ‘감각’이란 이름의 또 다른 세포를 낳고, 그 세포를 통해 ‘영혼’이란 이름의 또 다른 생명을 낳을 것처럼, 그렇게 믿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말했듯이 사랑을 배우고 알기엔 너무 멍청했다. 나의 동정을 그렇게 쉽게 팔았듯이, 나의 감각을, 나의 영혼을, 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다는 그 이유로 너무도 간단하게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단지 섹스란 행위 하나에 손쉽게 팔아버렸다. 아니, 그 밑 모를 바닥으로 너무 쉽게 매몰되어 갔다. 그런 황폐한 인간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아주 단순한 손끝 감각으로부터 전해오는 세심한 배려가 사랑의 시작이자 완성이라는 사실을...

 

 

발화는, 그렇게 끔찍했다.


 

 스무 살 적에 그녀에게 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자 현학적인 말로 떠벌였던 것도 아니고, 그런 관계를 실제로 맺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실은 어느 누구보다 이제껏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비록 내 품에서 잠시 쉬고 있지만 그 누군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도 너무나도 소중한 내 친구라는 사실을. 그러하기에 그녀와 친구 둘을 모두 너무 사랑했던 나로선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이란 말로 내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애써 위로하며 자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말의 올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그 단순한 현학적 말장난 때문에 나는 그녀와의 예정된 이별이란 수순 이후,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집착해왔다.

 

 

안마시술소를 나온 뒤 기분은 더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그녀 이후 이제까지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고, 그녀들과 쉽게 관계를 맺고, 그렇게 쉽게 헤어져 왔다. 그러나 나의 대다수의 관계는 업소의 여자들과의 관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채팅으로 여자를 만나 하룻밤의 관계를 맺거나,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나는 그녀들에게 제대로 치근덕거려 본 적이 없다. 아니, ‘자자’라는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온 적조차 거의 없다. 내 스스로 그런 내 모습을 너무 혐오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에게도 쉽게 성욕을 느끼는 내가 나의 그런 성욕을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나는 누구보다도 욕망을 추구하고 싶노라고, 그리고 그래왔다고 떠벌려 왔지만, 기실 나의 욕망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스러워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에게조차 나는 너무나 쉽게 자고 싶다고, 그렇지만 사귀기는 부담스럽다는 말로 철옹성을 치고서, 그녀들과의 관계를 거부해 왔다. 그리고선 아주 쉽게 안마시술소와 같은 업소의 여자들에게로 도망을 쳤다. 때론 그녀들과 연인 비슷한 오랜 관계를 맺기도 하면서...

 

 

내가 처음부터 은교를 음심으로 본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모든 말들이 변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찌됐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의 모든 여자에게 음심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 음심을 쉽게 드러낸 적은 없다. 너무나 황폐하게 변해버린 내 감정을 내 진심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고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자꾸 보고 싶기도 했고, 자꾸 생각나기도 하긴 했다. 그렇게 하나의 욕망의 구멍이라는 존재로서 여자가 아닌, 존재 그자체인 여자로서의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나를 휘감아버리는 음심에 그만 나는 절망해버렸고,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국, 모든 감정을 부인하곤 했다. 마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아니 아무런 감정의 미동도 파동도 없었던 것처럼.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내가 만난 그날 밤의 슬픔은 후자였다.


 

 언젠가 절친한 후배 하나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형은 책 읽고 울어 본 적 있어요? 나는 초등학교 때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 1주일 동안 울었었는데...’ 잠깐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버지가 어릴 적 어머니와 이혼을 해서, 남달리 감성이 예민할 수밖에 없던 후배의 상황, 그리고 그에 비해 정작 문학을 한다고 하지만 빈약하기 짝이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간... 문득, 삼국지를 읽었을 때 관우가 죽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후배에게 그 장면에서 분해서 한 번 운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후배는 내 대답이 너무 엉뚱했던 탓에 ‘형은 진짜 남자다.’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분명 코믹한 상황과 대화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자꾸 서글픈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실은 그 삼국지에 관한 기억마저도 날조된 기억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슬픔을 터뜨렸던 그 마지막 때는 언제였을까? 나라는 존재는 실은, 남자다움이거나 혹은 담담함이란 외피를 가장하며, 줄곧 내 모든 감정을 삼켜오기만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쉽게 내 진심을 외면한 채 나락해가며, 동시에 수인으로서 이제까지 내 모든 시간을 써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거울 속에 들어서 있는 남자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이 모든 얘기들이 전혀 소설과 관계없는 허튼 소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이 글이 이럴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다. 아니, 글을 읽자마자 이 글의 적요 속에 감춰진 ‘나’라는 인간의 황폐함과 그 슬픔에 정면으로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니, 일이었다. 이미 일주일 이전에 개략적으로 나는 글을 완성시켰지만,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텍스트의 모든 맥락과 이야기 그 자체를 무시한 채 ‘나’라는 인간만 가득한, 그것도 징징 짜는, 마치 나의 외로움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모두 전가시키는 듯한 이 글을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육체의 과실이 어느 생생한

물통에서 멱감는다

그러나 물 밖에선

투구와 같은 힘센 실다발을 풀며

떨어지는 물에 목이 잘리는

황금의 머리가 빛난다


           -P.Valéry, <목욕하는 여인>에서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르고,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야 할 거 같다. 처음 나는 기형도의 시 ‘노인들’을 인용하면서, 내 본연의 자기연민과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식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발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내 사랑과 동시에 그렇게 시작도 해보지 못한 내 사랑의 나락에 관해 줄곧 두서없이 이야기해 왔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홀했던 것은 내 지나친 감정이입 탓에 처음에 밝힌 어떤 예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이미 표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춰진 언급은 거의 어떤 자기변명과 가까웠다. 그러하기에 그것이 어떤 예감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필연으로 표현되어진 느낌을 내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코 필연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결국 필연이라는 말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기책임을 다른 무언가로 전가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미 처음 그녀와 관계가 시작됨과 동시에 끝나가는 것을 예감하면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하고, 줄곧 그 예감에 따라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삼십대의 내 모습이 이렇게 황폐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무줄기에 날렵하게 매달려 있는 추악한 마른 나뭇가지의 모습이나 이미 말라비틀어질 대로 말라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잘린 채 그 앞에서 나뒹구는 마른 나뭇가지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의 육체가 풀과 같다면 어떨까? 푸르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뻣뻣한 나무줄기가 아닌, 거센 바람에도 이리저리 몸을 누일 수 있는 풀과 같다면, 그렇다면 어떠할까?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 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불에 타고 난 노트의 재를 그녀가 울면서 화장실 변기 속에 주워넣고 있었다. “할, 할아부지...... 아무 죄...... 없어요! 진짜로...... 시......인이었어요!”

 

 

 인간은 결국 죽는 순간까지 풀이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론 시를 통해 시 속에서 풀과 같은 인간을 창조하며 풀이 되는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을는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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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집 - 서정주 시집
서정주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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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집 - 뱀의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

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싶다하였으

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중략)..........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입에서 죄인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시의 이슬에는

 맻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껴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창씨개명을 하고, 신식교육까지 받은 아버지 덕택에 유복한 생활을 해온 미당이었지만, 그의 자화상 속에서의 아버지는 종이었다. 그리고 어매는 어떠했던가? 달을 두고서 풋살구가 먹고 싶다는 어매. 동상이몽이었을까? 아니면, 오지 않는 애비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이러한 부모 때문에 그의 젊음을 키운 것은 결국 팔할이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을 따라 어떤 후회도 없는 그의 핏빛 시편을 써내려 왔다. 대체 왜 그는 그런 시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수 있었단 말인가?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중략)...................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배암.

 

 우리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

 여라! 배암.


 

                                                ---<화사>---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난 사내. 징그러운 몸뚱이로 태어난 사내. 그렇게 뱀이란 운명으로 결정지어져 태어난 사내. 그런데 미당은 말한다. 꽃다님 같다고. 그리고 이브를 꼬여냈던 그 달변의 혓바닥으로 아름다운 입술들을 훔치려 한다. 그렇게 하늘을 물어뜯으려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 입술의 임자가 지닌 발꿈치로 대가리가 부셔질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꾸 자꾸 숨어서 기회를 노린다. 꽃뱀이란 태생의 운명처럼.

 

 

 복사꽃 픠고, 복사꽃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

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여. 피가 잘 도라....

아무병도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봄>---


 

 오랜 동안 기다려 왔다. 긴 동면을 깨고서 돌아온 피가 돌기 시작하는 계절. 그는 그의 선조가 그랬던 운명처럼 다시 여인을 꼬여낸다. 그리고 적도해바래기 열두송이 꽃심야, 횃불켜든우에 물결치는 은하의 밤으로 데려간다.

 

 

 적도해바래기 열두송이 꽃심야,

 횃불켜든우에 물결치는 은하의 밤.

 자는 닭을 나는 어떻게해 사랑했든가

 

 모래속에서 이러난목아지로

 새벽에 우리, 기쁨에오열하니

 새로자라난 치가 모다떨려.

 감물듸린빛으로 지터만가는

 내나체의 삿삿이....

 수슬 수슬 날개털디리우고, 닭이 우스면

 

 결의형제가치 의좋게 우리는

 하눌하눌 국기만양 머리에 달고

 지귀천년의 정오를 울자.


 

                           ---<웅계 上>---

 

 

 그 태고 적부터 지닌 그 요사한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그 선조가 받은 저주 때문에 생겨난 요술일까? 닭으로 둔갑한 뱀은 꼬여낸 암컷의 닭과 함께 치가 떨릴 만큼 기쁨에 오열을 한다. 그리고 심지어 지귀천년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은 바로 그 다음 시에 이렇게 드러난다.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자의 피가 먹고 싶습니까

 (운모석관속에 막다아레에나!)

 

 닭의벼슬은 심장우에 피인꽃이라

 구름이 왼통 젖어 흐르나....

 

 막다아레에나의 장미 꽃다발.

 

 

 ................(중략)...................

 

 

 임우 다다른 이 절정에서

 사랑이 어떻게 양립하느냐

 

 해바래기 줄거리로 십자가를 엮어

 죽이리로다. 고요히 침묵하는 내닭을죽여....

 

 카인의 새빩안 수의를 입고

 내 이제 호을로 열손까락이 오도도떤다.

 

 애계의생간으로 매워오는 두개골에

 맨드램이만한 벼슬이 하나 그윽히 솟아올라....


 

                              ---<웅계 下>---

 

 

 마치 성서의 이야기 같기도 한 이 시 속에서 그는 결국 그의 사랑하는 닭을 죽인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오들오들 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묻는다. 사랑이 어떻게 절정과 양립할 수 있느냐고?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사랑이 아닌 절정이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이의 절정으로 남겨진 그의 두개골 사이로 커다란 뿔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릴 적 만화에서 자주 본 악마와의 형상과도 같이.

 

 

 내 너를 찾아왔다 유나. 너참 내앞에 많이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거러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오는구나. 새

벽닭이 울때마닥 보고싶었다....


 

...............................(중략)..............................

 

 

                          종로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저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볓에 오는애들.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되는애들. 그들의눈망울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드러앉어 유나! 유나! 유나! 너 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

구나.

 

 

                                                ---<부활>---

 

 

  한 번의 죽음이란 절정으로 끝일 줄 알았다. 그러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절정만이 남아 오래도록 기쁨에 오열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죽였던 애계의 형상들이 도처에 다시 피어나고, 다시 생생이 살아, 다시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여기서 미당은 비록 그 스스로 뱀으로 태어난 저주스런 운명이지만, 그러한 뱀의 저주를 통해서만이 또 다른 생명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자기항변이든 그 무에든 간에 이것은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아름다운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미당의 자화상은 단순한 징그러운 몸뚱이가 아닌 꽃다님이란 또 다른 페이소스를 지닌 죽음이면서도 생명인 꽃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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