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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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아프고 느린, 그래서 어쩌면 너무 오래된 접근방식에 대한 의문

 

 

  저자가 글속에서 밝힌 대로 뿌리라는 오브제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을까? 글속 화자의 남자친구의 뿌리에 대한 깊은 천착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처음 쓰일 때부터 일정부분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예정된 부분이 있었다. 뿌리를 통째로 뽑힌 어느 한 인간의 자아성찰적인 고백과 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뿌리 찾기, 이 글은 이렇게 두 남녀의 뿌리라는 존재 찾기의 작업을 실제적인 뿌리를 사용한 설치미술 이야기로 오롯하게 풀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글속 남자주인공이 거대하고 무거운 뿌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수십 개의 못을 박고, 촛농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아릿하고 느리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방식이 뿌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읽는 내내 이러한 방식에 대해 구태의연하다고, 그래서 무언가 아쉽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여기엔 내 개인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다른 철학적 접근방식과 선입견이 작용한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 글을 온전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글을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후, 읽는 동안 떠올렸던 내 개인의 뿌리의 접근방식과 대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먼저, 글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저자의 뿌리를 묘사하는 세밀한 방식이었다. 마치 실제로 뿌리를 마주대하고 있는 착각이 일게끔 김 숨 작가는 뿌리에 대한 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부분은 거의 첫 서두에 나오는 복숭아나무 뿌리에 관한 묘사이다. 사람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나리자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복숭아나무 뿌리에 빗댄 인간 감정의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을 처음부터 빠져들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나아가, 포도나무 뿌리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천근성을 지닌 뿌리에 대해 접근한다. 천근성을 지닌 뿌리는 깊게 뿌리를 내리는 심근성의 뿌리와 달리 넓게 퍼지는 뿌리를 의미한다. 즉, 어떤 면에서 언제든지 쉽게 뽑힐 수 있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 글속 화자와 그리고 그 남자친구와도 같이. 물론, 어떤 면에서 집요하게 뿌리에 집착하는 글속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심근성의 뿌리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고아였기에, 태생부터 뿌리가 뽑혀진 인간이 지닌 안정에 대한 강박을 오히려 더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글속 화자보다 오히려 훨씬 더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속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포도나무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남자친구 그리고 글속 화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국, 글속 화자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 때 종군위안부가 됨으로써 원치 않게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통째로 뽑힌 고모할머니의 손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손금은 남자친구의 포도나무 뿌리 작품에 ‘남귀덕’이란 고모할머니 이름으로 고스란히 되살아나, 그녀와 남자친구를 정신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은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잘 맞물려진 구성과 의미를 갖춘 글로 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내 개인의 의문은 서두에도 밝혔지만, 그 접근방식에 있어서의 구태의연함이다. 즉, 또 다른 접근방식들에 대한 내 개인적 질문들이다.

 

 

  첫째로, 뿌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읽는 동안 내 머리에 스친 생각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읽었을 때 알게 된 덩이식물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덩이식물은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종류의 식물들로 나무들과 달리, 따로 줄기와 뿌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즉, 감자나 고무나 그 자체가 뿌리이면서 동시에 줄기이고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식물들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 한 그루에 뿌리 하나 줄기 하나라는 방식으로 따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나무와는 달리, 덩이라는 그 말 자체가 일컫듯이 뿌리가 수평적으로 엉켜 하나의 군집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식물들을 의미한다. 즉, 감자와 고구마는 뿌리 하나에 수십 개의 감자와 고구마들이 뒤엉켜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뿌리에 대한 개념은 깨지게 된다. 왜냐하면 뿌리가 더 이상 존재의 근원을 찾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표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선 더 이상 뿌리에 대한 물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덩이식물이라는 한정적인 존재방식의 이야기이기에, 극단적인 설정이다. 그렇지만 뿌리에 대한 천착을 저자가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면, 심근성과 천근성이란 뿌리라는 설정보다 더 근원적인 이런 접근방식에도 물음을 가져야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두 번째는, 포도나무 뿌리라는 대상이었기에 글을 읽는 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이었다. 무엇이냐면, 나무의 뿌리가 아닌 잘린 가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사실, 신학생이었기에 신학을 포기하는데 있어 나는 내 나름의 화두와 이유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내가 찾았던 것은 성서에서 나온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에서였다. 성서에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이기에 그 줄기에 접붙여지지 않은 가지는 말라비틀어질 것이라고, 그 때문에 잘려서 불태워질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길로 가기를 거부하는 이라면 과연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내 경우엔 줄기가 아닌, 말라비틀어지고 잘려서 불태워질 가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 자신이 너무나도 말라비틀어져, 그 이유로 목마른 가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까닭으로 잘리는 가지는 나무 전체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게끔 하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제물로 불타오르는 표징의 불꽃은 참 포도나무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생생한 증거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지극히 모순이고 역설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러한 자기 부인이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성의 논리로 자아를 구축한 내게 있어서, 뿌리에 대한 이 글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많았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뿌리에게만 집착한단 말인가? 잘리고 버려진 줄기와 가지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물론, 이 글이 처음부터 천근성이란 뿌리의 특질을 통해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쓴 글이기에, 이러한 물음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같이 너무나도 다른 물음의 전제를 지닌 인간에게 있어선, 이 글의 그러한 점들이 너무나 구태의연하게만 느껴졌다. 만약 폭을 조금 더 넓혀 나 같은 인간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거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이 글에 대한 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매우 잘 쓴 글이고, 잘 짜인 글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뿌리라는 문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겁다. 그 이유로 늘 한 가지 방식으로 정형화되어 접근되어졌고, 질문이 던져져 왔다. 사실, 뿌리란 문제를 어떻게 쉬 가볍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방식과 물음들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러한 방식이 글을 방만하고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여,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을 택했다면, 최소한 남녀 주인공의 다소 신파적인 설정은 피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뿌리의 문제로 재고해볼 수 있도록... 아니면 뿌리 오브제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여, 자연스럽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뿌리의 문제로 환기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어땠을까? 잘 쓴 글이고, 좋은 글이었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아, 딴지 아닌 딴지를 자꾸 걸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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