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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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그리고 작가 자신이 말하는 누보로망

 

 

  아주 오래 전에 갑자기 한 친구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여자 친구랑 어느 카페에 들어왔는데, 카페 이름이 ‘누보로망’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 여자 친구가 그 의미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영어는 아닌 거 같고, 다른 나라 말 같은데, 왠지 나라면 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지만 당시 문학에 대해 겨우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가 그 뜻을 알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대충 아마 ‘새로운 사랑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그 의미를 잘못 가르쳐 주었던 것이 문득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누보로망이라는 그 의미는 전혀 반대인데 말이다.

 

 

  작품 속에 부재한 듯이 보이는 혹은 철저한 보는 자의 시선(블라인드 뒤의 시선)으로서만 존재하는 주인공과 그의 아내 A는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바나나 농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저녁이면 같은 식민지령의 프랑스인이라 추측되는 프랑크와 크리스티앙 부인과 저녁을 같이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늘 그렇게 반복된다. 다만 심상치 않은 것은 A와 프랑크와의 관계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마치 숨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집요하게 세세한 움직임과 미묘한 변화들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가장 집착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둘이 시내로 장을 보러 가는 일이다. 가는데 4시간, 그리고 오는데 4시간, 아프리카의 고르지 못한 길 사정을 감안하면, A와 프랑크 아침 6시 반쯤 출발해서 자정쯤에나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마치 전조라도 깔듯이 프랑크는 자신이 새로 구입한 엔진이 신통치 않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둘은 그 복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엔진 고장으로 인해, 그 날 밤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몇 번의 그런 일이 있었는지, 단 한 번뿐이었는지, 소설에서는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다. 집요하게 그 둘을 쫓는 화자의 시선만큼 불안정한 그의 시간과 공간 관념은 이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린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그 일이 반복되고 앞으로 반복될 것만 같은 뉘앙스를 띠울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설 속에서 화자가 집착하는 대상은 지네이다. 물론 화자는 지네 뿐 아니라 집안의 구조 부인 A와 관련된 모든 사물들에도 천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독 그는 지네를 무서워하는 아내와 그 아내를 위해 지네를 짓이겨 치우는 프랑크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지네의 죽음에 발작적인 경련을 일으키는 아내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동시에 그 남은 흔적들이 어떻게 집안 천장에 달라붙어 존재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지우기 힘든지 설명하는데 많은 장을 할애한다. 실제로 주인공은 그러한 지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을 한다. 고무지우개로 지워보기도 하고, 칼로 긁어도 보고,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새로 노란 페인트칠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내가 결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집안을 노랗게 단장한다 하여도 지네가 없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프리카이고, 어쩌면 지네는 화자를 은근히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처럼.

 

 

  사실, 스스로 줄거리와 작중 인물의 개성에 대해 철저하게 부인하는 작가인 로브 그리예의 소설 속에서 이야기 구조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위에서 묘사한데로 소설 속에선 이야기 구조가 부재하다. 그리고 작중 화자 또한 거의 부재하다 말할 수 있다. 이야기라 봤자 지독한 사물에 대한 묘사와 마치 사물화 된 듯한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나열하고 반복할 뿐이다. 어떠한 교훈도 감동도 심지어 삼류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사소한 기쁨조차 없다. 하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의도들이 곳곳에서 이야기 구조를 파괴한 이 소설의 새로운 형식 속에 깔려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대체 작가가 의도한-사실 작가는 작가 스스로 그 의도를 부인하고 있을지라도- 그 의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누보로망에 대한 비평서나 이론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평서나 이론들이 작가 로브 그리예의 소설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누보로망이 하나의 이론이기보다는 운동이라고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보로망은 소설에 대한 새로운 탐색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기존의 소설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으로 부정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험을 결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서는 로브 그리예가 주창하는 누보로망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의문을 던지는데 한계를 긋고자 한다.

 

 

  첫째, 누보로망은 위에서 밝힌 대로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소설을 위한 시대적 탐험과 고뇌이다. 과거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 나름대로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만 더 이상 교훈으로써 혹은 어떤 재미로써의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던 소설의 기능이 기실 유명무실해지면서 소설은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르트르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들은 그것을 참여에서 찾으려고 하였고, 어떤 이들은 소설을 통해 어떤 사회적 참여와 동시에 어떤 철학적 고찰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시대적 기능들도 이미 그 밑천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누보로망은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소설을 쓰고자하는 당시 일련의 프랑스 작가들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기존의 소설의 이야기 구조와 작중 인물, 형식과 내용, 그리고 기존의 작가의 역할들을 부인한다. 먼저 이야기 구조에 대해선 이미 시대적으로 해체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플로베르서부터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이러한 유행은 프루스트에게서 더 자유로워졌고, 포크너나 베케트에 이르러선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미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시점에 맞추어 이야기 구조를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취사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작중 인물의 경우, 발자크에서 보여주는 전형적 인물형이라는 것이 현대에 들어서 그 의미를 상실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혁명과 현대라는 시대에 진입하게 위해 많은 대전을 겪어야 했던 프랑스에서 그러한 전형적 인물들은 무언가 시대를 대변하거나 독자들의 감정을 대리하여 해소시켜주는 기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서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가 있을까? 절대적인 권력과 영웅이 사라진 지금 그러한 전형적 인물을 묘사하는 자체가 아마도 시대적 착오일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기존의 서구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소설과 예술 전반에 대해 형식과 내용을 분리한  후, 그들의 휴머니즘과 사회주의라는 진실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소설에 대해 형식주의라 비판하는 경향에 대해 재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은 새로운 탐험이며 모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비판가들은 좋은 글, 그리고 좋은 소설에 대해 휴머니즘이나 사회주의란 그들의 바탕 아래 예전의 것들에 대한 향수만을 복사하거나 재생시키기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기존의 작가 역할이 너무나 전지전능하고 인본주의적이었음에 대해 로브 그리예는 비판을 한다. 예를 들어, 기존의 작가들이 ‘날씨가 변덕스럽다’라고 표현한다던가, ‘웅크린 산’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어떤 작가 자신의 시선 속에서 사물을 의인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독자에게 감정이입이라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동시에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 자세와 재창조를 방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가는 철저하게 사물과 인간을 분리시켜, 그대로 있음에 대해 묘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소설의 예술적인 무용성의 기능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예술의 가치는 어떤 실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인은 망치로 못을 박지만, 음악가는 망치를 통해 어떤 새로운 찾으려고 한다. 전자는 실용적이지만 후자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하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예술의 가치는 현존하고 있다. 소설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혹은 어떤 감동과 진짜 인생을 대리 경험하기 위해서 소설을 봐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소설이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소설이 철저히 무력하다는 이유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기실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저자는 소설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할 수 없다. 그냥 소설 그 자체를 위해 글을 쓰고, 창조 그 자체에 의미를 구하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하지 않은 로브 그리예의 소설 질투와 누보로망 사상에 대해 너무나 쉽게 접근하고 쉽게 단정지은 작업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저자의 소설과 사상을 통해 소설의 기능에 대해 몇 가지 화두를 던져볼 수 있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찾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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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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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 - 치욕과 절망이란 이름의 계절의 끝자리에서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남해 금산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중에서

 

 

 

  치욕의 시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금산’을 통해 기억하는 이성복 시인에 대한 이미지는 이러한 것이었다. 시대의 치욕을 자신의 치욕으로 품는 사내, 그래서 고통스러운 사내, 고통스럽지만 희망을 노래하는 사내. 이러한 치욕의 변주는 더불어 그의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단단히 구축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름의 끝’을 통해 그는 이제까지 그가 품어왔던 치욕을 무언가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시도하고 있는 거 같다. 사실, 이 시집 속에선 그는 거의 의도적으로 ‘치욕’이란 단어 자체를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아주 흐린 날의 기억’이란 이 시 속에서 시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새와 무덤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냥 아주 쉽게 이 은유에 접근하자면, 새는 어떤 자유와 동경, 욕망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그가 혹은 우리가 바라봐야할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것들이다. 끝나버린 희망, 끝나버린 노래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희망과 노래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덤과도 같다. 그렇지만 삶은 그렇게 쉽게 놓아지는 희망의 끈이 아니다. 사방을 둘러쌓은 죽음의 냄새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무언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우리의 무력한 육신으로 온 힘을 다해 관 두껑을 밀어제치는 힘으로라도. 그렇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다. 대체 왜 이 시인은 그 이전의 절망들을 그 치욕들을 온전하게 품었던 그 작업들을 뒤로 하고, 무언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차원은 무엇일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어쩌면 쉽게 이 시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은 짙은 기독교적인 냄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집의 첫 시인 ‘느낌’과 마지막 시인 ‘그 여름의 끝’은 교묘하게 운을 마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무리한 상상을 해본다.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처음 꽃나무에 꽃이 필 때, 우리는 돋아나는 생생함으로 처음 느낌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느낌은 어떻게 지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그렇게 느낌은 사라져 가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두 번째 연의 시구들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릴 것이다.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얼룩처럼 지고 비틀려도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이 되어 남겨지는 것이다. 시인에게 그렇다면 그 얼룩은 무엇이었을까?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얼핏 시인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정리하는 듯한 이 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상기시킨다. 그러난 시인의 얼룩이라는 현재의 맥락을 따라가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붉은 꽃인 백일홍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단, 이 시집에서 뿐 아니라, 시인은 전 시집에 여러 시에서도 붉은 꽃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 붉은 꽃들은 분명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 어쩌면 시인의 치욕이거나 혹은 그것의 변주로써 기독교적 사랑일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도 그러한 점은 분명히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다고. 이것은 스스로 그의 진정성에 대해 스스로 책문하려 한다기보다는 스스로의 진정성에 대한 자문일 것이다. 어찌됐든 그의 붉은 꽃잎으로 대변되는 진정성은 여러 폭풍우 속에서도 잘 견디어 냈다. 그런데 그렇게 억세게 버티던 그 꽃잎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그의 절망은 끝나버렸다. 그렇게 그의 치욕을 떨쳐낸 것일까? 아니면, 온전하게 치욕으로 물든 그 자신에 대한 받아들임이라고 말해야 할까? 사실 무엇이 답이라고 규정할 순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동안의 시인의 치욕은 또 다른 차원으로 변주되고자 시도되고 있다는 것밖에. 왜냐하면 시인의 치욕은 한껏 꽃피워 이제 붉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이젠 굳이 시인이 스스로 치욕이란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시인은 붉게 물든 얼룩, 치욕 그 자체이고, 그것은 끝난 절망으로써,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니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

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으며

 

 

 

  이제 성큼 다가온 겨울, 쉬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가슴 속에 품고서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시인은 다시 봄이 오기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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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지사 시선은 다..가져도 더 욕심이날 뿐..
이런걸..갈증이라하나요.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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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의 지식인의 절망과 선택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남북 분단이라는 어떤 허리 디스크와 같은 통증이 만성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어떤 고통이라기보다는 그저 익숙한 ‘무엇’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이러한 시점에서 최인훈의 ‘광장’을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고등학교 적 뜨거웠던 마음 이 후, 십 몇 년이 흘러 다시금 한 호흡에 ‘광장’을 집어삼킨 후, 먹먹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무언가 흠뻑 젖은 스펀지처럼 무겁지만, 여느 때처럼 전철 창문에 부딪치는 내 잔상은 이질적으로 차갑고 날카롭기만 하다. 대체 이제 와서 이런 신파극이 다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책속의 명준을 빌린 저자의 얘기처럼 지금 이 시대는 광장이라는 것이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거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시끄러운 음악에 빠져있는 대학생, 게임 중독인 중고등학생들, 그도 저도 아니면 초조하게 어찌 시간을 때울지 몰라,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폭발할 지경이면서도 이렇게 멍한 표정을 지어낼 수밖에 없는 모두 자기 밀실에 갇힌 무력한 존재의 껍데기들 밖에 없는 것을. 한국 문학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들은 대체 어디서 야기된 것일까?

 

 

  사실,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듯이 난 한국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감히 문학을 논하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런 내가 한국 문학을 제법 읽었다는 것이다. 최인훈의 경우만 놓고 봐도 그렇다. 광장, 구운몽, 화두, 그리고 드라마로 만들어진 상도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접하고, 알게 된 그의 소설들. 어쩌면 내게 있어서 한국문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이 최인훈이라는 작가일 것이다. 특히, 이 ‘광장’이라는 작품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그의 대표작이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재밌게 읽었던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우리의 한계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명준은 어느 명문 대학에 철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는 해방과 함께 북으로 넘어갔고, 어머니는 곧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던 한 지인에 의해 부족함 없이 보호받으며 자라게 된다. 하지만 그는 무력하다. 해방 후 남한이라는 사회 속에서 너무도 철저하게 그는 무력하다. 자유가 팽배한 사회, 그러하기에 모든 부패마저도 만연한 사회. 그 속에서 그는 젊은 호기로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의 현실 속에서 그저 무력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별안간 그에게 예기치 않았던 일이 생겨난다. 북으로 넘어간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하면서, 그는 갑자기 요주의 인물이 되어 버려, 빈번하게 경찰서에 끌려가고, 구타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에게 그동안의 삶에 대한 일종의 반성과 각성의 의식이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그에게 윤애라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전부터 알아오기는 했지만, 그의 무력함과 변변치 않은 성격 때문에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던 여자. 하지만, 경찰서의 그 일 이후,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는 윤애에게 한 걸음에 달려가게 되고, 그 때부터 그는 그 동안의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나와 윤애의 집 식객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둘은 관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윤애는 도통 알 수가 없는 여자이다. 한 번 몸을 섞었기에 가까워졌다 싶으면, 그 다음엔 다시 그를 거부하여, 그를 힘들게 하고, 되레 그에게 어떤 알 수 없는 죄의식마저 심겨 놓는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갑작스럽게 어떤 제의가 들어오게 된다. 북으로의 밀항선! 아버지가 있고, 어떤 마르크스주의라는 뜨거운 열정과 혁명의 정신이 살아있는 장소! 그러나 막상 북으로 왔을 때 그가 본 것은 혁명의 빈껍데기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어떤 개인적 주석도 불가능한 사회. 그저 당에서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사회. 그와 동시에 당간부로서 남한의 부르주아들과 똑같은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 모든 것은 그를 염증 나게 하고, 지치게 만드는 것뿐이다. 북한 역시, 그가 소리 낼 수 있는 광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그는 다시 은혜라는 한 여자를 통해 밀실을 발견해 낸다. 그리고 은혜라는 여성은 윤애라는 여자와는 달리, 그 어떤 경우에도 그를 거부하지 않고 품어준다. 심지어 발레리나로서 가장 꿈일 수 있는 모스크바행도 포기하고 그를 위해 남아준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를 버리고 떠나간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한다. 남한이라는 광장도, 북한이라는 광장도, 그리고 윤애와 은혜라는 밀실도 잃어버린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광기밖에 없었다. 아니, 주인공인 명준은 그러고 싶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은인이었던 아버지의 친구 아들 태식이 자신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자신이 형사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폭행을 하고,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어 있는 자신의 옛 여자 친구 윤애를 거리낌 없이 윤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마저도 끝까지 갈 수 없었던 그는 태식과 윤애를 몰래 탈출시키고, 그 당시 가장 위험했던 낙동강 지역으로 자원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극적으로 은혜를 재회를 한다. 자신을 배신했던 여자, 그렇지만 다시 자신을 찾기 위해 간호병으로 지원하여 낙동강까지 찾아온 여자. 그 둘은 전쟁이라는 외부의 엄청난 비극 속에서 그 둘만의 밀실인 동굴을 만들어 놓고 도피해 들어간다. 그러나 낙동강 전투의 마지막 날 은혜는 전사하고 만다. 그렇게 명준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리하기에 휴정협정 날, 그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모르고, 자신 또한 이제 어떤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없는 그런 곳. 병원 문지기라든지, 소방서 감시원이라든지, 극장의 매표원이라도 좋다. 그저 여생을 소박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라면, 그렇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렇지만 정말 그런 곳이 있긴 있는 것일까? 한참을 그렇게 표류하던 어느 날, 그는 줄곧 그의 배를 쫓아오던 갈매기 속에서 은혜와 그녀가 어느 날 읊조리던 딸에 대한 소망을 새끼 갈매기 속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실종된 채,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는 캘커타를 향해 항해를 계속해나간다.

 

 

  역시, 억지로 써내려가는 글들이라 짜임새가 없다. 그렇지만 대강의 줄거리를 재구성하면서, 다시 한 번 한 호흡으로 읽어내려 간 후의 먹먹한 감정을 재현시켜 본다. 결국 소설은 현실이라는 광장 속에서 남과 북이 하나로 가는 길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있다. 아니,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미력하게나마 작가는 하나로의 꿈을 소설이라는 밀실을 통해 바로, 주인공 남녀 명준과 은혜를 통해 꿈꾸었던 거 같다. 그러하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명준은 제 3국, 중립국으로 가는 것조차 포기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도리어 그는 은혜라는 갈매기의 표상을 통해 그들이 꿈꾸고 소망한 딸이 바로 새끼 갈매기라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비록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는 순간부터 그 자신의 언저리에서 무언가 귀신처럼 달라붙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여, 총으로 쏘려고 하기까지 하였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내이며, 자신의 딸임을 뒤늦게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갈매기가 되어 그는 지금도 어느 저 바다 위 창공 위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밀실이 아닌, 사회적 광장 속에서도 하나 되기를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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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광장을 읽고
97년 쯤였나..유정.무정 춘원을 떠올렸던 기억이 아련하게 있다고..왜..춘원이 떠올랐나..글의 어디에서..그의 광장은 최인훈 이라는 어떤 브랜드가 쌓아온 뭔가와 다르다 느꼈던..그게 고통스러웠는지..그 글읽고 감상 쓰기 조차 힘들었던 기억만..있다.고...가까운 시일내 다시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또 뵈어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SE (2DISC) - 일반 킵케이스
이렌느 야곱 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도플갱어(Doppleganger=Double Goer), 분신, 또는 생령. 살아있는 사람의 또 다른 닮은꼴로서, 때에 따라 에고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카운터파트로 표상되기도 한다. 정확히 일치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당사자 아니면 알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만나는 자는 곧 죽는다! 독일의 민담분석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이지만, 이와 유사한 모티브는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언뜻 제목만 들었을 때는, 그리고 청순하기 그지없는 이렌느 야곱의 알몸이 슬며시 보이는 영화 스틸을 보아도, 또 영화의 소재가 도플갱어에 착안했다는 점만 들어보아도, 분명 나는 이 영화가 아주 야한 영화이거나, 아니면 인간 심리의 한 요소를 파고드는 스릴러물일 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이 키에슬로프스키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순간 나는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통해 이런 기대에 대한 배신을 철저히 맛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10분도 채 안 되어, 그 배신의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전혀 무시되어버린 인과율, 도저히 내러티브를 잡을 수 없는 몽롱한 대사들과 배우들의 돌출적인 행동들, 표정들... 그런데도 가슴은 알 수 없는 슬픔 비슷한 감격들로 벅차올라, 영화 내내 울려 퍼졌던 단조의 애잔한 선율이 각인되어 버리는 기이한 현상... 그러하기에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머리와 가슴이 극심하게 이중적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현상에 도저히 그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단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란 영화에서 얻은 여운의 연장선상 정도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 근래, 우연히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모든 영화 음악을 관장했던 쯔비그유 프라이즈너의 음악을 찾아 듣다가, 다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보게 됨으로써, 나는 그 이전의 내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정리될 필요성과 함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때처럼 내 마음에 오래 남겨지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마치, 어릴 적 사라졌지만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의 한 부분인양 빛바랜 영상들... 영화는 처음 그런 영상 속에서 폴란드에서 태어난 한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귀결과도 같이, 어떤 전조와 예감들로 가득 찬 몽롱한 장면들과 대사들이 스쳐지나간다.

 

 "기다렸던 별이 왔다. 저 아래 뿌연 것, 이제 곧 크리스마스 축제가 시작될 거란다. 보이니? 보여줘? 저기 안개가 아닌 희미한 별빛들.."

 

 "첫 잎이다. 봄이 왔구나. 이제 나무는 잎사귀로 가득 찰 거란다. 솜털 같이 연한 잎맥들.."

 

 

  성장한 베로니카에겐 이제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는 그 서두를 이렇게 꺼내고 있다. 그런 다음, 다 자란 베로니카의 갑작스런 정사신과 함께 베로니카의 사랑과 희망들,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보여주기 시작한다.

 

 

  베로니카... 베로니카는 성악에 재능이 있지만,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처지이기 때문에 그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있는 조금은 불쌍한 처녀이다. 그러나 매우 착한 심성의 소유자로 아버지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고, 또 자신을 끔찍이 생각해 주는 안텍이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에 행복한, 이런 의미에선 다소 평범한 처녀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금은 먼 지방에 혼자 살고 있는 숙모의 건강이 안 좋아진 이유로 베로니카는 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서 떠나야만 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히도 이제까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녀에게 있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베로니카는 친구가 일하고 있는 한 오페라 악단에 우연히 찾아갔다가, 어느 선생의 눈에 들게 되어, 테스트를 받은 후, 예외적으로 발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로니카에게는 한 가지 지병이 있었다. 무엇이냐 하면 심장이 약하다는 사실이었는데, 호흡이 중요한 오페라의 소프라노에게 있어서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베로니카는 그 사실을 숨기고서,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이런 베로니카의 죽음이 예견이라도 된 듯, 우연히 관광을 와, 시위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베로니카의 도플갱어, 베로니크와의 대면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베로니카는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크를 단 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견하게 되지만, 베로니크는 베로니카를 보지 못하고, 사진만 찍음으로써 그 죽음의 운명을 피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베로니카가 자신이 사랑하던 아버지와 안텍 곁을 떠나면서 예정되어졌던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베로니카는 자신의 방에서 어떤 꿈이라도 꾼 듯, 갑작스레 놀란 모습으로 일어나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과 늘 함께 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예감을 고백하고, 그러하기에 이 세상에선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유언과도 같이 남기고선, 여행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로니카는 이미 아버지와 안텍의 곁을 떠나던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있어 오페라라는 것이 너무나도 위험함을 알고 있었지만, 과감하게 그 무대 위로 올라서기를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예정되어져 있었고, 영화 속에선 그 모든 예정의 클라이맥스로써 베로니카가 주연 소프라노로 노래하게 될 음악 콘서트무대를 설정하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정중한 무대 위에선 지휘자의 지휘봉이 내려가고, 모든 악사들은 장중하면서도 슬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조소프라노의 비정한 독주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처녀 베로니카의 천상의 소리가 꿈을 꾸듯 그에 화답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메조소프라노라는 무대 뒤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선 이젠 베로니카만이 무대의 중앙에 남아, 천상을 꿰뚫고 올라서려는 듯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희미해지는 목소리는 힘을 잃어가면서, 베로니카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계속되어지고, 지휘자는 더욱 거세게 베로니카에게 노래하도록 지휘봉을 휘두른다. 다 죽어 가는 한 마리 새에게 어떤 숨겨진 힘이 있었을까? 마지막 나래를 펴는 노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울려 퍼지지만, 결국 베로니카는 견디지 못하고서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그렇게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다 이루어진다.

 

 

  영화가 시작한 지 30분도 안되어, 주인공이 죽어버린다면, 이제 영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베로니카가 부활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본격적인 고스트 장르로 반전되는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잔인하게도, 그대로 관속에 묻어지는 베로니카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다시는 베로니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젠 갑작스레 프랑스로 넘어가, 그의 영혼의 쌍생아, 똑같은 외형에, 똑같은 습관들 그리고 똑같은 꿈을 가지고 있던 베로니크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베로니크... 처음, 베로니카를 잡을 때 그의 남자 친구와의 정사신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갑자기 영화는 베로니크의 정사 신을 잡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절정에 달아오른 모습을 비쳐준 후, 그 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베로니크의 모습을 담아낸다. 같이 함께 있던 남자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베로니크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기에 떠나버리고, 베로니크는 홀로 남겨져, 자신의 까닭 모를 슬픔의 원인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불현듯 다시 장면이 바뀌어, 베로니크는 아마 자신의 성악 지도 선생이라고 생각되는 한 노인에게 찾아가, 모든 것을 포기하겠노라고,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전혀 새로운 베로니크의 사랑과 꿈에 대해 천천히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로니크 역시 홀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하며, 성악에 재능이 있는, 착하기 그지없는, 다만 베로니카와 달리 폴란드가 아닌 프랑스에 사는 평범한 처녀이다. 하지만 어떤 남자와의 정사 도중 갑작스레 느낀 커다란 상실감과 부재감은 베로니크 심경에 변화를 주어, 꿈꾸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리고, 이젠 조용히 조그만 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운명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무언가 정체 모를 존재에 대한 예감들을 통해 알렉산드로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를 전혀 모르고 있다. 단지, 그는 자신의 학교에서 우연히 인형극 공연을 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단 한번뿐이었던 우연한 그의 인형극은 베로니크 자신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을 가지게 하였고, 그것은 인형극의 주인공이었던 알렉산드로에 대한 불확실한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이었다.

 

 

  다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는 온통 까맣고, 파리해 보이는 한 무용수 인형과 함께,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손만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대사도 없이 무용수 인형은 자신을 움직이는 손에 의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마치 날고 싶은 듯, 아름답고, 처연하게... 그런데 그만 무용수는 다리가 부러져 버렸는지,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어버리고, 급기야 슬픔에 빠져 죽어버리게까지 된다. 인형극을 보던 모든 관객들은 슬픔에 빠져 버리고, 인형극은 마치 끝이라도 난 듯, 춤과 함께 어우러졌던 음악도 꺼져 버린다. 그런데 무용수 인형이 나왔던 조그만 상자 속에서 한 남자 인형이 나오더니, 죽은 무용수 인형에게 고이 잠들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그 담요 속에 완전히 가려져, 이제 영원히 잠든 줄만 알았던 무용수 인형이 날개를 달고, 나비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선 하늘 위를 훨훨 날며, 다시 춤을 추면서, 인형극은 끝을 맺는다.

 

 

  인형극 내내 인형을 조정하던 알렉산드로를 바라보았던 베로니크는 그때부터 알렉산드로와 수수께끼 같은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 역시, 인형극과 비슷하여 조정하는 쪽은 알렉산드로가 되고, 베로니크는 마치 무용수 인형처럼 조정하는 알렉산드로를 따라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한 밤 중에 울려 퍼지는 갑작스런 전화, 그리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끊어 버리는 남자의 거친 숨결... 갑작스레 배달되기 시작한 발신지가 적혀 있지 않은 소포들, 구두끈, 담배가 들어있지 않은 버지니아 담배 케이스,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 알 수 없는 존재에게로부터 전해지는 이 수수께끼를 통해 베로니크는 조금씩 자신에게 상실되었던 존재감들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우편물의 대상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구두끈은 알렉산드로가 쓴 소설책과 연관이 되어 있다든지,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는 지금 알렉산드로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던지... 그리고 교묘하게도 동시에 그것은 폴란드에서 존재했던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의 흔적들과 연관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조그만 물건들에도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영혼의 떨림을 느끼게 되어, 더욱 알렉산드로에게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냄으로써 베로니크는 운명과도 같은 알렉산드로와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알렉산드로의 존재가 베로니크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영혼의 안내인과 같은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닌 그저 평범한 한 남자, 그것도 매우 속물인지도 모를, 그저 그런 남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알렉산드로가 베로니크에게 그러한 소포물을 보내고, 한밤에 갑작스런 전화를 걸고서 한 마디도 안한 행위들을 한 것은 자신의 소설 속에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에 대한 실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설을 위한 실험대상으로써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사실을 안 베로니크는 충격을 먹고, 알렉산드로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에게서 도망을 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런 베로니크에게 갑작스레 사랑을 느꼈는지, 베로니크를 쫓아간다. 그리고 결국,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같이 동침하게까지 된다. 그리고서 이제 둘은 서로에 대해 알고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거기서 우연히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가 폴란드에 관광을 하러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베로니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상실감의 원인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그리고 영화는 이상하게도 이 때문에 처절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베로니크를 달래는 알렉산드로와의 갑작스런 정사신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크나큰 상실감을 맞이하여 정사를 중단하였던 베로니크의 지난 정사를 만회하기라도 하고 싶은 듯. 여하튼 그렇게 해서 베로니크와 알렉산드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베로니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의 무용수 인형이 하나가 아닌 둘임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알렉산드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인형극이 격렬하기 때문에 여분으로 하나 더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베로니크는 거기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슬픔을 느끼는 베로니크가 알렉산드로의 손에 이끌려 한 무용수 인형을 춤추게 하는 모습과 그 밑에 누워서 버려진 다른 무용수 인형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 후, 알렉산드로가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베로니크의 읽어 주는 장면을 통해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설명 해준다.

 

 

  "1966년 11월 23일, 이 둘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둘 다 검은색 고수머리에 고동색 눈을 가졌다. 두 살 때, 한 아이가 난로에 손을 데었고, 며칠 후 다른 한 아이가 손을 댈 뻔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산드로의 소설의 이 대사를 통해서 확실히 베로니카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베로니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 앞에 아직 봄을 맞지 못하고 죽어 있는 듯한 나무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불렀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영화의 내용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이야기를 많이들은 편이었다. 영혼의 쌍생아 개념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가 이러한 개념을 통해 블루, 레드, 화이트 때처럼 유럽통합에 대한 풍자를 하였다는 둥, 진정한 자아 찾기에 관한 영화라는 둥, 기타 둥둥..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선입관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혀, 감성적이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영화의 이미지들에 대해서 의미에 집착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머리와 가슴을 분리시켜 놓는 기이한 현상만 일으키게 했다. 가령 예를 들면 구두끈에서 연결되는 베로니카와 베로니크의 연결고리에 대해 집착한다던가, 인형극의 의미에 대해 과대해석 한다던가...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됨으로써, 의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눈을 감아, 가만히 울려 퍼지는 영화 속에 아름다운 선율들을 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영화가 가 닿고자 하는 지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우리를 대신해 사라져 간 것들... 우리 몰래 우리를 지탱해 준 소리 없는 침묵의 존재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분신'에서 골랴드낀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분신에게 가정과 직장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삶을 빼앗기면서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공포들을 느끼고 있는 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비단, 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또 다른 이중 존재라고 생각되어지는 영혼들에 대해 깊은 공포를 느껴왔다. 그러하기에 정신분석학에서 도플갱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가 죽음을 의미하고, 망령 혹은 원혼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가깝게, 우리들의 공포 영화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공포의 대상이 얼마나 우리를 닮아 있는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는 것은 왜 그 형체들이 그토록 우리 자신을 닮아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히치콕이나 다른 어떤 이들은 새와 개 등의 형상을 통해 우리 공포의 원형을 그려내기도 하긴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새와 개 자체도 매우 의인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늘 우리를 닮은 것들에 대해 깊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것이다. 그것은 대체 왜일까?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있는 것들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생명이란 건 죽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반드시 생명엔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만약 생명에게 죽음이 없다면 그건 이미 생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이라 감히 말 할 수도 없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이름 붙여보지 못한 미지일 뿐일 것이다. 즉, 그러하기에 우리는 늘 우리라는 존재감 밑에 깔려진 죽음이란 그림자를 떨쳐 낼 수가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누군가의 혼령과 원혼을 보았다 하고, 그를 보고서 공포를 느끼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까닭도 없이 그 망령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혹 우리는 거기서 앞으로 다가올 우리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위해 던져진 죽음의 의미를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하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생명과 그 모든 것을 되찾고자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대체 우리를 위해 죽어간 것들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위의 물음들을 떠안고 있다.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그러한 우리의 공포의 대상인 분신을 통해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그리고 소통의 길로 가닿고자 몸부림친다. 아련한 영상의 이미지들,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뛰어가는 베로니카의 모습, 한 사회가 몰락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르크스 동상이 철거되어 운반되어지는 모습, 아직 가득 잎사귀를 이루지 못하고 뜯겨진 연한 잎맥의 여릿함들... 그리고 다시 자기도 모르게 베로니크를 위해 죽어간 베로니카 그 자신... 그의 다 못 이룬 성악가로써의 꿈, 다리가 부러진 무용수 인형의 하늘 위로까지 춤추고 싶은 그 강한 열망들...

 

 

  베로니크는 사실 영화 속에서 전혀 베로니카와 상관없이 알렉산드로에게로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이 영화는 매우 평범한 일상, 하지만 다소 우연이 남발하는 일상에 대해 그린 그런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 베로니크는 자꾸 베로니카의 흔적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사랑의 대상인 알렉산드로에게로 향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그 대상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서, 베로니크는 참을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알렉산드로와의 격렬한 정사를 나눔으로써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즉, 영화는 무언가 하나가 이루어짐에 있어, 잃어버리게 되거나 소외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줄곧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베로니크의 사랑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이다. 그것은 아무리 그 누가 자신을 대신해 죽어갔다 하더라도 쟁취해야할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연함 가운데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의 사랑을 위해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 상실된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떠올려볼 생각을 하질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네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살아있고, 우리가 호흡하고, 입맞춤하는 이 것, 이것은 과연 우리만의 힘으로 스스로 얻어진 것이라 우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존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정말로 베로니카는 존재하는 것일까?

 

 

  봄을 맞이하기도 전 죽어버린 고목의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자. 가슴에 약동하는 호흡이 없다면, 양 볼을 그 마른 가지 끝에 부비며 울어도 보자. 그래도 떨어질 눈물 하나 없다면 온 몸으로 부둥켜안고서, 그 썩은 나무뿌리가 뽑히도록 서러워도 해보자. 어쩌면, 그렇다면 어쩌면, 그러한 존재들을 우리는 느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젠 그러한 존재들이 우리들의 공포가 아닌, 우리를 대신해 죽어간 사랑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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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와...와!^^ 그 때야 감독보다는 배우를 좋아한 셈인데..먼저 블루,레드, 화이트.
제가 고등학생때..부터 봤다.고 하면 이런 발칙..!할지도..모르겠어요.좀 더 영화보기가 쉬워진건 졸업후이지만 ..그 땐 친구방에 비디오를 볼수있는 작은 TV와 지금은 거의 쓸일 없어 저 역시 유물로 간직하고있는 비디오..가 생기고부터.. 잠 못자던 이 밤을 건너 다니며 영화를 흡수하던 시기...
저는 원치 않아도 일찍 독립인생이었으나..막 집을 떼어내고 민달팽이가되어..사회구성원이 되고자하던 외롬을 몹시 타던 친구때문에 그 녀석의 잠머리를 지켜 주느라..한 길 건너면 내 집..내 방을 두고 새벽이슬을 맞고 골목을 다니던 계집이었으니..덕분에 취향과 상관없이 많은 영화를 봤었노라고..
우린 이따금..그리워..서로 그러면서 과거를 추억하는데..ㅋ또 빠질 수없는게...옛 영화와..커피와..칵테일..등등..이라고..
베로니카의..는 블루 보다 한참 이전..영화.로 알고있다고. 블루 포스터 아래.위..어려운 발음으로 존재하던 그의 이름..크쥐시토프..는 대충 뭉게고 키에슬롭스키..라고 읽어 대며..라빠르망과..데미지와..줄리엣 비노쉬를 사이에 두고...아슬아슬하게 그를 읽어나가던..사회초년생시절까지...몽땅..
베로니카..가..불러들이는 시간의 증거들.!ㅎㅎㅎ 모처럼..옛 일기를 복기하듯..즐거웠네요..저의 이중 생활..속
영화보기가...

몽원 2015-01-14 15:56   좋아요 0 | URL

한 때 저도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서 모두 찾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건 저의 대학 초년 시절쯤... 군대를 제대하고 23~24살, 이 정도일 때쯤인 듯. ㅎㅎ 그러면서 마구 영화를 폭식하던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소화도 안 되는데... 별별 이계에서 온 예술이란 장르의 영화들을 ㅎㅎ 지금은 집중력도 딸리고, 졸려서 보지도 못할 그런 영화들을요. ㅎㅎ 그래도 가끔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무언가 마구 폭식할 수 있었던, 그래서 게워내야 하는데 목구멍에 내내 걸려 고통스러웠던 그때가...
 
문둥이에의 키스
프랑소와 모리악 지음 / 지성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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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

- 당신과 나의 허물어진 처녀성을 위해 남겨진 어느 고독한 이의 몸뚱이 하나

 

 

 

  쟝 펠루이에르와 에이미 그리고 기독교적 정념과 육체적 정욕, 연민과 소외, 니체의 선과 악, 그리고 문둥이에게 키스를 하는 성자의 일그러진 표정과 문둥이의 냉소... 너무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뚱그려져, 대체 어디서부터 이 글을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너무 많은 물음들은 이 글의 자연스러운 구도와 설정, 그리고 상황 그 자체에서 빚어지는 "어쩔 수 없음"을 어색하게 각색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 천천히 쟝 펠루이에르를 따라 글을 다시 읽어 내려 가보고자 한다.

 

 

  우리의 쟝 펠루이에르는 비록 좋은 가문에 상속자이지만,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의 얼굴에는 거역할 수 없는 형벌의 흔적이 있으며, 그의 전존재는 패배를 위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그런 소외와 절망은 그의 기독교적 정신의 바탕 아래 경도당한 니체의 물음 가운데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양양 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든 것이다. 약자와 낙오자는 멸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멸을 촉진시키도록 힘을 도와야 할 것이다! 모든 악덕 중에서도 가장 유해한 것은 무엇인가? 낙오자나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행위 즉, '그리스도교'이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언제 초인을 꿈꾸어 본 적 있단 말인가? 혹은 권력에의 의지를 믿을 만큼 그는 강인한 존재였던가? 오히려 지독한 패배주의자이며, 끔찍스러운 자기혐오덩어리인 그였건만, 그는 왜 니체의 이 경구들에 경도되었던 것일까? 어쩌면 바로 그 것, 자기의 나약함과 그 끔찍함, 그러하기에 연민에 목이메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그 종교적 중독성을 그는 철저한 죄악이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자신의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외모를 자신의 원죄라 느꼈고, 그러하기에 그것은 콤플렉스나 소외보다 원죄의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에이미란 존재가 나타난다. 생명에 불타면서 풀잎처럼 싱싱한,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순결한 육체의 소유자, 그리고 지극한 연정의 소유자... 사건의 전말이 어떠했든 간에 에이미는 쟝을 사랑해야만 했고, 쟝은 에이미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매일 밤, 원죄의식에 시달리는 쟝은 에이미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손 끝 닿지 못한 채 돌아눕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철저한 자기소외에 서러워 마른 눈물을 흘리면, 에이미는 벌레처럼 끔찍한 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과정 중간에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있다. 과연 문둥이들이 그들의 곪은 상처 위에 와서 닿는 성자들의 입김(혹은 키스)을 느끼며, 행복을 느꼈겠는가? 쟝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에이미의 그런 동정의 키스와 포옹을 뿌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침잠의 세계, 죽음으로 내려가진다. 그렇다면 남겨진 에이미는 어떻게 되는가? 그녀 또한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끔찍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제 처녀가 아닌 그녀의 몸은 이러한 죄의식과 정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이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약간 둔중한 이 부르주와 여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녀에게는 체념 이외에는 모든 길이 다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파리가 들끓는 소나무 숲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에 대한 정절이 자신의 겸허한 영광이 되리라는 것과,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노에미는 히드 숲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달리다가 구두 속에 모래가 괴어 무거워지고 온 몸에 힘이 빠지자, 그녀는 발을 멈추고 장 펠루에이를 닮은 어느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죽었으면서도 불같은 태양의 입김에 몸을 떨고 있는 꺼칠한 나뭇잎들을 달고 있는 왜소한 한 그루의 떡갈나무였다."

 

 

  사실, 프랑수아 모리악을 단순히 현대의 가톨릭 작가로 규정한다는 것은 너무 도식적인 공식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는 떼레즈 떼께루와 밤의 종말, 그리고 이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 결코 구원이 가 닿을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집착해 왔고, 꾸준히 그 절망적 상황 가운데 구원과 연민의 시선을 펜 끝을 통해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그 자신의 글들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연민의 시선을 매몰차게 거부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모순을 통해 기독교가 이 땅에서 지닌 실존성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끊임없이, 절망을 구원해내려 하고, 거기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절망의 이름은 그 자체로 어떤 구원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절망은 단지 절망일 뿐이지, 구원해야 할 무엇이거나 그러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는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설령 에이미가 진심으로 쟝을 사랑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쟝이 자신의 원죄의식을 쉬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전존재를 통해 가장 특수하고 그런 이유로 가장 본질적인 그 추함을, 그 원죄를 그 자신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포기하는 순간 그에겐 아무런 존재 가치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갈망이 절망 가운데 없다 말할 수 있는가? 쟝은 끊임없이 에이미의 육체를 꿰뚫고, 그녀의 영혼의 한 귀퉁이에서 안착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에이미의 키스를 배신하고서, 단지 에이미의 육체에만 깃들기를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로 오직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절망의 실존적 상황... 끊임없이 구원을 갈망하는 만큼 배신하는 절망의 본질... 이 소설은, 그리고 이 소설의 저자인 모리악은 늘 여기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어이할 줄 몰라, 서성이기도 하고, 어쩔 땐 고통 속에서 에이미와 같이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은 도저히 풀지 못하는 숙제처럼 남겨둔 채 글을 마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은총이며, 종국엔 구원에 이르는 과정임을... 물론 이 은총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에 대해 인간은 건드릴 수 없기에, 그가 늘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은총이었으면 하는, 구원의 여정이었으면 하는, 인간의 도저히 풀 수 없는 절망적 상황밖엔 없다. 그러하기에 그는 쟝과 에이미의 정념과 정욕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풀지 못하는 신비 자체로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이며, 바로 그 이유로 구원과 은총의 여정 속에 놓여 있기에... 그 자체로 우리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가 되어준다.

 

 

  모든 것은 은총이다! 비록, 에이미의 허물어진 처녀성의 버거운 자위의 대상으로써 시커먼 떡갈나무 한 그루 밖에 남은 것이 없을 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무언가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무언가에게로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P.S.

 

 내가 이 책을 접했을 때는 90년대 후반쯤이었다. 시중에 프랑스 모리악 책 자체가 많이 없었는데, 특히 이 책의 경우가 그랬다. 그래서 성바오로 출판사의 '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 하지만 원제는 '문둥이에게 보내는 키스'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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