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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 인간에 대한 예의 Human Decency ㅣ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14
공지영 지음, 브루스 풀턴.주찬 풀턴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평점 :
인간에 대한 예의 - 이제 그만 미안해하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 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란 걸
그가 부르다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 영미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면, 왜 늘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떠올랐던 것일까? 1995년 내가 대학 1학년 때쯤 이 책들이 한참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오늘 두 책의 초판을 검색해보니 똑같이 1994년이었다. 그런데 두 책을 읽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이기 때문에, 그래서 짧다는 이유로, 아마 군대를 제대하고서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오다가다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공지영의 소설은 내가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그토록 선후배들에게 거론되었음에도 단 한 번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왠지 비슷하거나, 똑같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나의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이제야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빌어먹을, 80년대. 한 번도 내가 초대 받지 않은 그들만의 잔치, 그들만의 인간에 대한 예의.
비록 내가 지금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며 연신 조그맣게 발음하면서 글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1980년대의 운동권에 대해 감히 매도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실제로 접해보진 못해 알 순 없지만, 내 부모님 고향은 전라도 나주이고, 그 때문에 광주혁명 때 위협사격으로 총알 자국이 선명한 집안의 장남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1987년 6월 항쟁 때 아버지는 대학생들의 데모를 내게 옳다고 가르치셨다. 뉴스에서도 선생님들도 모두 저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줬는데. 그리고 어느 지방선거 때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기호 2번의 팸플릿만 내게 들이민 적도 있다. 또,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전라민국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하신다. 나 또한 그 때문인지 혹은 어릴 적부터 키워온 반골 기질 때문인지, 줄곧 기호 2번만 찍어왔으며, 스스로 약간 좌 쪽이 아닐까하고 의미부여를 종종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복지국가가 되어 잘 규격화된 사회보다는, 분명 부익부 빈익빈의 이 극단적인 사회적 구조가 빗어낸 온갖 구멍들을 더 사랑할 것이며, 이곳에서 더 잘 적응해온 그런 인간인 것을. 그리고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하단 말인가? 노동운동을 하던 후배들과 끝까지 하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 그토록 미안했단 말인가? 그들이 단 한 번도 따뜻한 수돗물이 나오는 집에서 살아본 적 없는 것과 자신이 그러한 삶을 누려온 것이 대체 왜 미안한 이유란 말인가? 그래서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는 온수와 보일러가 죄라도 된단 말인가? 왜 모든 것들에 그렇게 미안해하고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작가 자신도 그리고 나도 우리도 모두 이 사회에서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겪은 그들만의 80년대를 내가 감히 떠나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내 20대를 부인하지 못하듯,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함부로 말살시킬 수 없듯이, 우리 역사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80년대를 지울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서 그 80년대에 피해자였던 우리 아버지는 그 시대에 처음으로 가입했던 연금보험을 타면서 기뻐하고 계시며, 우리 어머니는 전라민국이라고 자랑스럽게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말하지만 그것이 남들에겐 쉬 발설해서는 안 되는 단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게 사람들은 변했고, 당연히 변한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사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마치 내 울분과 짜증을 토하듯 글을 써내려갔다.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은 이런 말들이 아니었는데, 다시 무언가를 되바라보고자 했는데, 그들의 80년대를 통해 나의 문학에 대해, 그리고 무언가 지워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 그런데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흐릿해져 간다. 공지영이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이민자라는 새 시대의 독특한 인물과 권오규라는 낡은 시대의 민주투사와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듯이, 그렇게 점점 나의 초점은 흐릿해져 간다. 왜 나는 그토록 80년를 쉬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 왜 지금도 지나간 우리들의 얼룩에 대해서 쉬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일까?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맞다. 일단은 가장 이 부분이 큰 사실이다. 게다가 나는 공상주의자다. 그러니 과거라는 현실보다는 과거에서 파생된 신화나 상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기질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이러한 80년대이거나 8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 감성 때문에 한국문학 자체를 멀리해왔다. 문제의 발단은 이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었을 때 내가 왜 그토록 그 감성을 멀리해왔는지 스스로 공감했고, 또 나의 20대 때의 판단이 옳았음에 스스로 만족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이유로. 어쩌면 이 글속에 나는 이민자라는 인물과 나는 비슷한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글이라는 것이 언제나 과장되어 포장할 수밖에 없어 글속에 이민자란 인물은 조금 재수 없게 표현되어있다. 스물하나의 나이로 대한민국 국전 대상, 대학 졸업 후 뉴욕 등지에서 대성공을 거둔 화가임에도, 갑자기 어느 날 성공의 허망함을 느껴 맨 발로 삼 년 간 인도를 여행하고, 아프리카 스케치 여행 등을 하다가 어떤 깨달음이 있어서 고국으로 돌아온, 글에서 표현한 그대로 정말 꿈같은 이야기의 대상이니까. 그냥 스물하나의 나이에 신학에 대한 회의로 1년 방황하고 이후 목장, 공장, 배를 탄 내 기행쯤은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맥락은 분명히 같다. 이미 더 이상 투쟁할 대상이 없어진 인간이 느끼게 되는 감성이란 건 배부른 허망함이라든가, 회의라는, 그리고 그 때문에 정말 꿈같은 방황일 뿐이라는. 그러하기에 우리는 모른다. 배고프다는 절망감과 절실함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사실 여기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왜 배고픔을 모른단 말인가? 어느 시대에겐 삶의 회의와 허무감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그것은 왜 삶에 대한 투쟁이 아니고, 삶에 대한 허기진 욕구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며, 그들이 그 큰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음을 잊지 못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해, 마저 정리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분명 그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나라는 하나의 자아에 국한되어 우리라는 커다란 자아를 혹은 우리라는 집단 무의식에 이르지 못하는 개인이란, 결국 사회에서 잉여일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이 그들의 뒷이야기를 정리해가듯, 나라는 개인이거나 우리 속에 속속들이 숨어있는 나 같은 개인들이 각자 나름의 이야기들로 힘겨워하며, 이전에도 지금도 결코 대항할 수 없는 커다란 구조 속에서 때로는 맞서 싸우며, 때로는 억울해하며, 그렇게 발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을.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의 미안함에 내가 미안해야할 까닭을 느끼지 못하듯, 그들이 스스로 변한 자신에게 백 번 후회한들, 그렇게 미안하다고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는 것이 삶이라는 혹독한 현실인 것을. 그러니 이제 그만 미안해하자. 아니면 그만 미안한 척 하자. 그저 담담하게 앞으로 다가올 현실들을, 진짜 삶의 이야기들을 소리내보자. 천천히 담백하게 그렇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