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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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카프카와는 다른 묘한 에로티시즘의 향기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사기 위해 처음으로 직장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 들렸다. 보통 온라인상에서 편하게 구매를 했는데, 왠지 오랜만에 서점에서 직접 오래된 책 냄새를 맡고 싶다는 기분이 든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처럼 깔끔하게 잘 정돈된 서점에서 예전 헌 책방에서 느꼈던 그럼 정겨움을 느껴볼 수 없으리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사이에 비치된 ‘모래의 여자’를 찾는 과정에서 그간에 봐왔던, 그렇지만 다소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정겨운 이름들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마르케스, 베케트, 이문열, 밀란 쿤데라, 카프카 등등,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복잡한 심경으로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들과 함께 나열했던 어느 시인들의 이름처럼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이 이름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한지 어언 6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6년 동안은 확실히 지난 십 몇 년의 내 문학에 대한 관심과 관점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글쓰기 모임이 등단이라는 특정한 목적과 수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까닭에? 그렇다고 하기엔, 그동안 내가 이 모임에서 등단 목적으로 글을 제출해본 것은 신춘문예에 고작 두세 번 정도이다. 나머지 숱한 등단을 위한 글쓰기 대회에도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는 ‘엽서시’라는 특정한 문학공모 정보 제공 사이트를 알고 있음에도, 근 1년 동안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이 글쓰기 모임을 참여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에 겨우 꼽을 정도로 방문해봤을 정도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공모전에 글을 내본 적도, 아니 어느 공모전이 어떤 형식의 글을 원하는지조차 거의 알지를 못한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모임에서 원하는 등단용 작품에 대해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세계문학전집에서 내 시선도 한국문학전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나브로 젖어들었다. 그런데 지난 번 모임에서 선택한 ‘몰락하는 자’와 이번에 선택된 ‘모래의 여자’를 통해 그간에 잊혔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뭐랄까? 달콤하면서 독한 관념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탐미의식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면, 강한 자의식과 그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으키는 집요한 집착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모래의 여자’ 몇 장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문장의 집요함이었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와 우리네 문장의 서술형식이 같은 까닭인지, 문장에서의 집요함과 어떤 집착이 끈적하게 달라붙어왔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묘했던 것은 문장이 끈덕지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고, 간결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하지 못할 내용상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글속 주인공의 벌레에 대한 집착, 그것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모래 속에 사는 벌레에 대한 집착, 좀길앞잡이. 그리고 그와 함께 딸려서 전해지는 모래에 대한 집착. 그런데 왜 하필 모래와 좀길앞잡이일까? 주인공은 여기서 갑자기 유체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모든 과학시간이면, 특히나 물리 시간이면 더욱 생경하여 잠을 자거나 공상의 나래로 멍을 때리던 나로선,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가공할만한 정보력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함을 한층 빛내주는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이용해보았다. 그런데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함께, 유체역학이 기체와 액체에 관련된 운동에너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나왔다. 즉, 한 마디로, 유체역학이란 것은 기체가 액체로 변해도 원래의 성질을 유지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이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연구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고체인 모래에 대해 유체역학을 들먹인 것일까? 물론, 글속에서 주인공은 모래가 지닌 특수성에 대해 나름의 논지를 펼치기는 한다. 먼저, 모래가 다른 흙과 암석과 달리 일정한 크기인 1/8mm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 크기가 다른 암석 파편의 입자와 달리 바람이라는 유체에 의해 가장 멀리 이동될 수 있는 크기의 입자라는 정의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이 모래의 유동성에 의해 많은 찬란한 문명들이 매몰되어갔음을 글 중간에 살짝 언급한다. 즉, 이제까지 모래는 모든 사물들이 사라져도 바람과 함께 그 입자가 지닌 특유의 고유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해왔다는 측면에서 주인공은 모래를 유체역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반부에 이 글은 다소 난해한 모래와 좀앞길잡이에 대한 이야기로 거의 전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서 갑자기 주인공이 이 좀앞길잡이를 찾아들어온 사구에 정착해 있는 어느 마을에 갇히게 되면서 글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어 간다. 사실, 원래 직업이 학교 선생인 주인공은 이 사구에 살고 있는 ‘좀앞길잡이’ 중에 다소 변이종을 찾기 위해 며칠 간의 휴가를 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의 한 집에 묵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그 집에 감금되게 된다. 그것도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처음에는 주인공은 이 모든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유를 알고 나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유라는 것이 고작 모래 속에 파묻혀 지은 집인 이유로 날마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까닭이다. 즉, 여자 혼자서는 그 집에서 날마다 해야 하는 중노동과 가사를 전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니, 앞으로 불어닥칠 바람이 세찬 날의 위험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렇게 살기 힘든 구조의 집이라면 그냥 나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이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진 도심이나 마을로 가서 살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여자와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의 그 어떤 항변에도 묵묵부답일 따름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해본다. 처음엔 꾀병으로 아픈 척을 해서 자신이 얼마나 노동력으로써 무가치한지를 입증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마을 사람들은 애초에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남자를 그대로 방치해둘 뿐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남자는 작정을 변경하여, 마을에 적응하고 있는 척하다 마을 사람들이 여자의 집에 생필품 물자를 공급해주는 날에 여자를 인질로 해서 자신을 그 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을 사람들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오히려 물 배급을 중단함으로써 결국,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남자는 결국 마을 사람들과의 어떤 교섭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절망감으로 인해, 아니 사실은 오랫동안 해묵은 여자와의 섹스를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삶의 방식과 마을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남자 그 자신도 그 생활방식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그 마을을 탈출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해와 수긍이라는 측면에서일 뿐이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 박탈에 대한 부당함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번에는 다소 오랜 시간을 걸쳐 탈출 계획을 세운다. 마치 남자 자신이 마을에 다 적응한 것처럼 시간도 들이고, 여자와 관계도 가지면서, 마을의 구조에 대해 넌지시 여자에게 물어 물어서, 머릿속에 마을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고서,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남자가 끊임없이 도주한 길은 어찌된 일인지 마을로 다시 회귀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주가 들켜, 반대 길로 남자는 열심히 달아나본다. 하지만 남자는 모래 늪에 빠지게 되고, 결국엔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생활은 다시 지속된다. 매일 똑같이 바람에 실려 날려 오는 모래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구슬을 꿰매는 일을 하면서 언젠가 라디오를 집에 들일 날을 꿈꾸면서....... 하지만 그래도 남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집 앞 한 귀퉁이에 모래 덫을 만들어, 까마귀가 잡힐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는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왜냐하면 잡힌 까마귀에 자신이 편지를 달아, 그 까마귀가 멀리 날아가 어느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의 이야기가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귀의 생활권이 인간의 생활권과 밀접하기에 그 편지가 십중팔구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쯤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제 그 마을에 온지 반 년쯤 된 것 같다. 그동안 여자는 임신을 했고, 자신이 ‘희망’이라 명명한 모래 덫에는 잡히라는 까마귀는 잡히지 않고, 어이된 일인지 물이 솟아올랐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모래의 모관 현상 때문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남자는 자신의 ‘희망’의 지표를 까마귀에서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로 바꾸게 된다. 왜냐하면 잘만하면 그 유수현상의 연구를 통해 얻은 물로 마을 사람들에게 협박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남자의 목표는 탈출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협박으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어차피 그 모래의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물로 세상에 이야기해봤자 누가 자신을 알아주겠는가? 그 사실을 알아주고 들어줄 청중은 이제 마을 사람들 밖에 없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이제야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글을 처음 읽을 때는 문장의 묘한 집요함에 끌렸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그러니까 주인공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강금되면서부터 문득,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떠올랐다. ‘마의 산’의 주인공의 원래 계획과 달리 어느 요양소에 방문하게 되었다가 그 자신이 폐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7년 동안 강금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폐병이 어쩌면 그 자신에게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요양소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끊임없는 관념과 독설들이 왠지 모르게 이 글의 시작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이 대다수 관념으로 점철되어 있던 글이었기에 이 글 ‘모래의 여자’에서 등장하는 사구의 마을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이 글은 그런 관념들보다는 사구의 마을 중에서도 특히 과부인 여자의 집에 갇히게 되는 매우 불합리하지만 특정한 현상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카프카 식의 글쓰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카프카의 ‘굴’에서의 강금처럼, 이 글 속의 주인공은 모래의 마을과 여자에 강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스스로의 강금이었던 카프카의 ‘굴’과는 전혀 상이한 구조이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강금과 풍유의 구조들이 사뭇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다 읽고서, 일부러 미뤄두었던 작가 연보를 보니, 이 야베 코보라는 사람이 일본의 카프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토마스 만과도 그리고 카프카와도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감춰진 에로티시즘의 향기가 났다고 말하면 좋을까? 사실, 카프카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달리, 한 마디로 그 이전의 서양 작가들과 달리, 근원적인 관념과 그 관념에 대한 끝없는 나열들의 형식인 글쓰기가 아닌, 근원적인 불안과 생에 대한 허무이거나 허위의식을 풍유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를 했다. 그렇지만 역시 서양 작가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관념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근원적인 불안이거나 허무의식조차 관념의 역작용이거나 파생일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하지만 이 야베 코보의 경우 역시 성진국인 일본 작가인 까닭일까? 처음부터 등장하는 좀앞길잡이서부터 모래, 그리고 모래의 여자와 마을, 모두 에로티시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니, 거의 대놓고 전면에 드러내놓았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하기에 글속에서도 그는 모래의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좀앞길잡이의 유혹 행위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왜 하필 제목이 모래의 여자란 말인가? 글속 주인공이 계속 벗어날 수 없는 모래의 마을 그 자체를 여자가 대변하고 있기에, 제목을 그렇게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처음부터 글속 주인공은 다소 생경한 좀앞길잡이의 변종을 찾아 사구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소 특이한 변종인 여자를 찾아 사구의 마을로 들어섰던 것 아닐까? 그러한 이유로 이 모래의 여자에 야베 코베는 자신의 성적인 판타지와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불어 넣었으리라 예상해본다. 정신적 강간이라는 새로운 병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이 아닌 자연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원초적 여자의 이미지로써.......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혹은 내 개인은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성적인, 그리고 나름 완벽한 이미지의 여인을 판타지로 그려놓았다면, 왜 주인공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악한단 말인가? 그것도 마지막쯤엔 거의 덧없는 혹은 허무와 같은 이름의 ‘희망’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글속 주인공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끝끝내 마을 사람들과 상이한 자아일 것임을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마디로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두 가지 양면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이율배반의 첫 이유가 되는 모래의 여자이다. 모래의 여자는 말 그대로 모래라는 늪이다. 사실, 남자가 가진 여자의 성적 판타지이거나, 고유한 이미지는 그동안 물이거나 바람의 속성과 관련되어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이 글에서 여자를 모래로 표현했고, 모래가 가진 유체역학적 이미지,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줄곧 사용해온 물과 바람의 이미지를 동시에 모래에 투영시켰다. 거기에 덧붙여, 모래의 속성이 지닌 잔인함과 공포를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다. 즉, 우리 남성들이 투영시킨 여성의 판타지에 스스로 갇혀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여성이라는 희망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거나 혹은 이 주인공 남자가 이 판타지를 벗어나 어디 갈 데가 있단 말인가? 사실, 글속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남자의 어떤 탈출도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모든 길들은 모래의 여자에게로 되돌아오는 길 뿐이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주인공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여자를 임신시키게 되고, 유수현상과 관련하여 덧없는 ‘희망놀이’에 빠져있을 뿐이다. 즉, 끝내 이 모래의 여자라는 희망에 사로잡혀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임신이라는 짧은 언급을 통해, 주인공 자신은 전혀 희망이라 명명하지 않았지만, 여자에 대한 희망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계속 전개되어져 감을 은근히 말하고도 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혼자만의 ‘희망놀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어반복일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의 근본적인 속성이 지닌 허상과 덧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 허상이 존재해야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이 글은 여자에 대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희망에 관한 글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정리해보려 한다. 오랜만에 본 세계문학전집의 이 책을 통해 잠깐 관념의 세계에 빠져본 기분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이 처음부터 관념보다는 에로티시즘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글을 해석하는 내 자신이 너무 관념적이기에, 결국엔 관념적으로 빠졌던 것 같다. 그래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허무하지만,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관념에 빠지는 것 그 자체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의 남자가 하는 그 덧없는 희망놀이처럼 허무한 관념놀이도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잠깐 혼잣말을 중얼거려보며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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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0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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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불의 강’ - 그토록 생생한 적의와 마주하여

 

 

  오정희의 단편집을 읽어가는 동안 내내 ‘별사’와 ‘어둠의 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오정희의 다른 글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독 그와는 별개로 ‘불의 강’이란 글이 지금도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다. 그렇다고 그 글이 ‘별사’와 ‘어둠의 집’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느냐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론 ‘동경’을 읽으면서 5년 전 내가 쓴 품평이 얼마나 설익고, 또 얼마나 ‘동경’을 설읽었는지를 자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옛우물’의 글들 경우엔 개인적으로 완연한 노년 작가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불의 강’일까? 지금부터 내가 할 해석이 특별하기 때문에? 아니다.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가 해석하려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다소 금기시하는 상징적 해석의 방식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이러한 방식을 취해 이 작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하려는 까닭은 이 글 가운데 단 하나의 단어 ‘생생한 적의’란 그 단어에 나도 모르게 몰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1평짜리 아파트 6층 꼭대기에서 살고 있는 부부는 몇 해 전 아이가 죽고서, 적적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몇 년이란 시간만으로 갑자기 둘은 모든 것에 시들해지면서, 늙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가 죽고서 한 동안 남편은 밤늦도록 일하면서, 집에서 혼자 적적할 부인을 걱정해 자주 전화를 걸어주곤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그들이 결혼 초에 가끔 저녁 산책을 나가곤 했던, 하얗게 뻗은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솟아 있는 오래된 발전소 건물이다. 잿빛 우중충한 3층 구조인 그 건물은 비교적 작은 화력 발전소였으나,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원래 목적과 달리 해산물의 하치장으로 쓰이다, 제빙업자에 의해 얼음 창고로도 쓰였다가, 제빙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다시 비어있게 되었고, 지금은 때때로 갱 영화의 촬영 현장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남편은 언젠가부터 늘 그곳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고, 동시에 밤마다 외출을 나갔다. 그리고 담배도 피지 않는 그가 성냥갑을 늘 몸에 지니고서, 밤늦게 불에 탄 재 냄새를 흠씬 풍기고서 돌아왔다. 하지만 부인은 남편의 그런 잦은 외출을 막을 자신이 없다. 물론, 너무나 심약한 남편이기에, 만약 그녀가 몇 마디만 한다면 그는 당장 밤 외출을 중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남편과 어떻게 시간을 메울지 자신이 없다. 때문에 그녀는 차라리 그녀 몰래 시를 쓰던 남편을 떠올린다. 그렇게 자신의 터뜨리지 못한 발화를 삼키던 그의 시라는 발화를 그리워한다. 동시에 그 때문에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숨겨지지 않는 모든 발화의 전조에 대해 불안해한다. 대체 그는 밤마다 어디서 자신의 타오르지 못한 불꽃을 터뜨리는 것일까? 남편이 나간 동안 그녀는 현관 문틈 사이에 잠깐 외출을 나갔다 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서,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 모든 시발점인 발전소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발전소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녀의 알 수 없던 생생한 적의를. 남편은 처음에 발전소에 대해 소개하면서, 어릴 적 전쟁 직후 발전소가 그와 같은 아이들의 눈에 얼마나 대단해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동시에 그 거대함 때문에 발전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온갖 소문들로 한없이 부풀려져, 자신에게 어떻게 견고한 적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 때문에 그는 결국 단 한 번도 발전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 그런 발전소가 이제 곧 헐리게 된다. 어차피 달리 용도도 없는 건물이 오십년 가까이 버려져 있었기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발전소의 군데군데 판자가 떨어진 창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발전소 내부를 비추고 있다. 내부의 나선형으로 비틀려 올라간 가파른 층계를 뛰어오르는 남자들의 모습이 먼눈에도 확실히 잡혀오고 모여선 사람들의 윤곽이 불빛에 드러난다. 영화 촬영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남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역시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녀는 혼자서 선잠을 자다가 첫닭이 울기 전 들어온 남편을 껴안고서야 자리에 온전히 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스르르 긴장이 풀린 그녀는 잠시잠깐 잠에 빠져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사막 한복판에 꽃을 들고 있는 그를 본다. 그의 손에선 진한 자줏빛 꽃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사막은 붉은색 셀로판지를 통해 보듯 온통 붉은빛이다. 그 사막을 그녀는 그와 함께 건넌다.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그와 그녀를 위해 어느 술집 주인이 술 한 병을 건네준다. 하지만 그 사막을 다 건넌 후 마른 목을 축이고자 병을 땄을 때 병속에 든 술은 뜨거운 물이 되어 수증기로 피어오른다. 그때 그가 말한다. 마른 동남풍의 바람이 알맞게 분다고. 동시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온다. 그 소리에 그녀는 꿈에서 깬다. 그리고 불에 탄 재 냄새를 풍기며 현관 앞에 서 있는 남편을 본다. 남편은 발전소에서 불구경을 하다 겨우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그를 자신의 가슴 깊숙한 품으로 안으며 그를 잠재우면서, 꽃보다 더 진한 어둠 속에서 메마른 목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삵을 보고 있는 듯한 쓸쓸함에 짐짓 소리 내어 우는 시늉을 한다.

 

  처음에 내가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떠올랐던 단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그토록 ‘생생한 적의’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적의의 대상인 발전소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발전소였을까? 그것도 더 이상 아무런 생산도 하지 못하는 발전소, 그리고 처음부터 유독 눈에 거슬렸던 굴뚝이란 단어... 사실, 여기에 내 나름 내용을 요약한 줄거리에는 굴뚝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있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서 여자는 처음 발전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먼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굴뚝이 마치 자신의 6층 아파트 창 아래 바짝 다가와 창과 굴뚝 꼭대기가 직선으로 그으면 몇 미터 거리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어릴 적 너무나 거대하게 보여서 적의의 상징으로 남편에게 발전소가 자리 잡았던 것처럼, 부인인 여자에게도 역시 굴뚝으로 대변되는 발전소는 창을 가릴 만큼의 생생하고 거대한 적의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과 달리 굴뚝이라는 강조점에서 이상하게도 나는 남자의 성기를 떠올렸다. 아마 모양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앞에서 이야기한 내가 개인적으로 금기시하는 상징적 해석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발전소와 남자의 성기가 계속 무언가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점에서의 유사성은 이 소설에서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결정적으로 이 소설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주된 무거운 분위기는 이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은 은근히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에 빗대어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남편의 무력함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남편에게서 발화의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편은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그 이유로 더욱 발화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발화는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의 마지막 폭발처럼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발화는 억압으로부터 발생한 폭력 그 자체이다. 때문에 남편과 부인 모두 생생한 적의로 대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발화는 생생한 적의에 대한 폭발이 아닌, 생생한 적의의 폭발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럼에도 어떻게 그녀와 남편은 그 생생한 적의의 한 가운데서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조금도 뜨겁지 않은 화염 속에 누워서 서로 품으며 짐짓 우는 시늉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 소설의 적의의 폭발과 화해에 대해 나는 쉬 설명할 길을 찾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어쩌면 오래도록 뇌리 속에서 이 글이 잊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화자가 그녀가 아닌 내 자신이 되어, 조금은 그 방향을 달리 밝혀보고 싶다. 사실, 내게 있어서도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내 생식기는 말 그대로 나의 치부이며, 그 까닭으로 생생한 적의의 대상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해오지 못한 이 생식기의 발화의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그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화력 발전소가 불을 뿜고, 그렇게 발화를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듯이. 내게 있어서 나의 성기가 늘 발화를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그런데 왜 생생한 적의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분명,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열패감이 자의식에 쌓여, 발화 그 자체가 자위란 이름으로 자기 파괴의 형태이거나 혹은 사랑 없는 섹스란 이름 아래 폭력으로 변해버린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미 이렇게 변해버린 생생한 적의의 대상인 발화의 욕구를 어떻게 폭파시켜 없애버릴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발화의 욕망을 생생한 적의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어떻게 포장할 수 있냐는 말이다. 말 그대로 발화의 욕망은 발화의 욕망 그 자체로 본능일 뿐이고, 생생한 적의는 그 욕망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창조로 가지 못하는 열패감에서 기인한 것뿐인데, 어떻게 발화의 욕망이 생생한 적의가 아니라고 명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오정희의 소설 속의 여자도 남편의 방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물론, 완전한 이상 속에서 발화의 표현인 방화가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명명될 수는 있을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서, 연인 간에 아이가 없더라도 끊임없이 애정표현으로 하는 섹스를 그 누구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연인이 아닌 다른 여자들과 발화의 욕망을 풀 수밖에 없던 나 같은 남자들 혹은 여자들의 방화에 대한 엄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한 방화가 이 사회에서 불륜이거나, 성매매란 이름의 범죄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여기서 아주 작은 한 걸음만 더 나가게 되면 강간이거나 성폭력이 되어, 극도로 위험한 강력범죄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에서 불륜과 성매매에 대해 생생한 적의를 느끼고, 그러한 방화에 범죄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자명한 일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부인할 어떤 이론도 논리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그 생생한 적의의 대상인 방화가 인간의 본능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내 개인의 지극히 부끄러운 치부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이와 화해할 방법들을, 아니 방화의 작은 숨구멍들을 트여줄 방법들이 있어야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비록 짐짓 우는 시늉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조금도 뜨겁지 않은 화염 속에서 서로를 품고 있는 인간의 기이하기 짝이 없는 동물적 행위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거기서도 누군가는 메마른 목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삵을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인간은 저열한 자기모습을 타인을 통해 바라보며 연민하며 잠시잠깐 외로움을 달래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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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정희의 ‘어둠의 집’ - 공포의 근원 ‘적요’에 대하여



 오정희의 ‘별사’를 다 읽은 후 나는 마치 내 자신이 혼령이 된 것처럼 여겨져 선뜩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서 바로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어둠의 집’을 읽어 내려갔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어떤 커다란 파장을 준 글을 읽고서, 또 다시 다른 글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의 집’이란 제목은 내게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똑같은 제목의 자작시가 한동안 내 자아를 구축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어둠의 집’이 ‘별사’와 연결될 것 같은 예감 또한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여기에 ‘어둠의 집’과는 별개로 내 개인의 자작시를 올린 후, 내 ‘어둠의 집’이 어떻게 오정희의 ‘어둠의 집’에 압사 당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써내려보고 싶다.



어둠의 집


단단하고 거대한 성을 쌓을 거예요

벽돌은 금강석으로 하고

천장은 특수 알루미늄으로 덮어

빛 하나 새지 않도록 밀봉을 할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내부 구조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로 만들 거예요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동굴로 만들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바닥은 음습한 동굴에서 흐르는 지하수에

사막의 모래를 섞을 거예요

거기에 화사한 금빛가루를 덧입혀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만들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장식은 언어란 기호와 예수란 상징을

주로 사용할 거예요

그 위에 당신의 혼돈된 꿈의 이미지들을

비밀로 붙여 놓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오직 당신을 위해서

촛불 하나만은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그 촛불로 불지를 수 있다면

기꺼이 뜨거운 불구덩이가 되어 드리겠어요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컥컥 숨을 토해낼 수는 있을 거예요



 누구나 느끼겠지만, 이 시에서 어둠은 화려하다. 왜냐하면 어둠 그 자체에 대한 형상화보다는 감각적인 표현들로 어둠에 대한 반대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강석, 특수 알루미늄, 금빛가루, 예수, 부처, 촛불 등의 어둠과 상충되는 많은 단어들이 이 시에서 어둠을 생성하거나, 어둠에 감싸인 집안에 장식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이 집에서의 어둠은 무언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지어 어둠을 조성하는데 사용된 단어들인 미로, 동굴, 늪, 기호, 이미지, 불구덩이조차 어둠 그 자체에 대한 형상화와는 전혀 무관하다. 어떤 의미로 이 단어들은 유희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 단어들이다. 그러니 이곳에선 컥컥 숨을 토해낼 수 있는 숨구멍이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아마 이 주된 이유는 내게 있어 절망이란 또 다른 이름인 어둠이 결코 어둠 그 자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나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정희의 어둠은 나와는 전혀 상반되게 어둠 그 자체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무언지모를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 사실 처음에 나는 그 공포감의 연유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별사’에서 진행된 남편의 부재와 이제 다 커버린 아들의 부재로부터 연유한 어떤 외로움이 아닐까하는 생각정도에 머물러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것과는 별개로 방수가 안 된 천장에서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대한 기억만이 뇌리에 남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외로움으로 기인한 불면의 밤에도 똑,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대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에 가깝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어릴 적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대야로 받으며 재밌게 바라보았던 기억 혹은 역시 오래 전 다 잠기질 않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대한 기억이 전부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외로움 가운데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윤락업소에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집에 들어갈 시간이 애매하여, 그곳 수면실에서 잠을 청하던 때였다. 아무리 자려고 하여도 그 방에 바로 딸려있는 화장실에서 어딘지 누수가 되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 소리들은 내게 온갖 상념들을 일으켰다. 물론, 윤락업소라는 다소간의 열패감이 드는 장소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불면의 밤 유독 크게 들리는 시계의 초침소리와는 전혀 다른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시계초침소리가 신경을 건들면서 정신에 무언가 작용을 일으키는 소리라면, 하나하나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가슴을 건들면서 감정에 끊임없이 작용하여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러하기에 그 밤 나는 결국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벽에 쓸쓸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어떤 공포와 결부된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껏 계속 이야기해온 외로움 혹은 그리움으로 포장된 허무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차라리 공포라면 시계초침소리가 더 공포에 더 어울리는 소리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오정희의 ‘어둠의 집’을 처음에 읽었을 때, 어떤 공포의 감정을 예감하고, 그 공포가 내게 어떤 전율을 가져다주리라 막연하게 믿었던 것일까? 처음에도 지금도 계속 외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서.


 이번 오정희의 ‘별사’와 ‘어둠의 집’을 품평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두 작품을 먼저 읽지 않았다. 그냥 오정희의 다른 작품들을 먼저 쭉 찾아보았다. ‘바람의 넋’, ‘불꽃놀이’, ‘옛우물’까지 그녀의 단편집을 모조리 읽은 후, 다시 ‘별사’와 ‘어둠의 집’을 찾아 읽었다. 품평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만큼 그녀의 글 자체에 홀려버린 까닭이 컸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오정희가 그곳에 내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대부분 지루하기 짝이 없거나 진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인 거리’, ‘동경’, ‘옛우물’, ‘불의 강’ 등의 몇 작품을 빼고는 그다지 흥미롭게 읽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작품들 가운데 하나 ‘적요’가 내가 ‘어둠의 집’에서 느낀 공포에 대한 근원의 의문을 꿰뚫고 관통하였다.


 사채놀이로 돈을 벌고 있는 노인은 가정부를 하나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록 그녀에게 월급을 주질 않는다. 월급을 받는 순간 더 이상 가정부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누구도 냄새나는 노인의 시중을 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행여 노인 시체라도 치워할 날이 오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이 노인네 얼마나 괴팍하기 그지없는지, 입안에 낀 이물질을 거리낌 없이 닦아주려는 가정부의 손가락을 아무 이유없이 피나도록 깨물기까지 하는데, 어느 누가 그 기분을 어떻게 알고 다 받아줄 수 있겠는가? 그 때문이었을까? 가정부는 모레쯤 온다고 말하고 노인네를 혼자 내버려두고서 떠나버린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은 모레가 아니라 앞으로 쭉 계속될 가정부의 외출이라 생각한다. 늘 그래왔다. 어릴 적 어여쁘기 그지없던 딸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그 누구도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혼자선 제대로 설 기운도 없는 그의 집안엔 그저 무겁고 어두운 적막감만 감도는 가운데, 이젠 수도꼭지에서 뚝, 뚝, 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무거운 적요가 지겨워 그는 가정부의 손가락을 깨무는 것으로 응석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또 감내해야할 혼자만의 시간을 그는 어떻게 보내야할까? 노인은 사탕 한 줌을 손에 쥐고서 놀이터로 향한다. 거기서 따돌림을 받아서 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하다. 그는 사탕을 주면서 그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다.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만화를 보여주면서 아이를 조금 더 오래 머물도록 한다. 하지만 점점 밖은 어둑해지고, 이제 아이는 집으로 가야할 시각이다. 노인은 아이에게 복숭아를 주면서 좀 더 있으라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가정부가 나가면서부터 온종일 계속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던 수도꼭지를 잠가달라고 부탁한다. 아이가 수도꼭지를 잠그러 간 사이 노인은 오렌지 분말을 물에 타서 주스를 만든다. 그리고 아이에게 주스를 건넨다. 그 주스에는 수면제 한 봉지가 섞여있다. 아이는 주스를 마신 후 몽롱한 정신 가운데 자신의 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난 장마 때 솔밭에서 새끼를 낳은 개였다. 아이는 그 개에게 음식을 늘 훔쳐다주었다. 그런데 어른들이 낮에 자신의 개에게 복숭아를 주고선, 끌고 가버렸다. 그리고서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은 후, 끓는 물에 넣어버렸다. 자신에게도 복숭아 세 개를 주고서 그만 가라고 했다. 아이는 그것을 먹은 이야기를 차마 다 하지 못한 채 손에 든 복숭아를 떨어뜨려버리고 그만 잠에 빠져든다. 아이가 깨문 복숭아의 선홍빛 자국은 시들어, 수분이 말라가고 그곳에 끈질기게 파리떼가 달라붙고 있다.


 이 소설을 읽자마자 나는 ‘어둠의 집’에서 느낀 공포의 근원을 불현듯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외로움이 아닌 적요였다. 물론, 어떤 의미로 두 단어는 같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만 다른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외로움이란 어휘는 이제껏 공포와 연관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쓸쓸함 혹은 허무함과 비슷한 감정을 담은 어감에 가까웠다. 하지만 적요라고 했을 때는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제껏 나는 그런 감정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엔 적요란 단어 자체가 생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의미 자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버석거리는 느낌에 사전을 찾아보기까지 하였다. 말 그대로 적적하고, 고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적적하고, 고요하기에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기까지 할 수 있는가이다. 사실, ‘어둠의 집’에서 적요는 구체적이지 않은 구석이 많다. 그저 물방울 소리에 연관되어 수돗물을 틀어놓고서 바닥을 흠뻑 적실 때까지 넋을 놓았다거나, 잔디를 깎다 갑자기 튀어 오른 물에 잔디들을 뿌리 채 뽑았다는 등의 장면을 묘사해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계속 어둠속에서 느끼던 어떤 시선의 정체에 대해서 예견하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예견이거나 예감일 뿐, 적요 그 자체에 대해 드러내놓고 정면으로 대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글 거의 대부분은 분위기 자체를 통해서 어떤 공포에 대한 예감을 조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적요’에서는 정면으로 그 공포와 마주하고 있다. ‘어둠의 집’에서 예견된 공포가 거의 실질적으로 표현된 아이의 죽음을 통해 바깥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노인이 만든 어둠의 집에서 영영 감추어질 죽음으로, 그러하기에 내면으로 삼켜질 폭발로 끝을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사실에 크게 전율했다. 하나는 적요가 가져다주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한 번도 조우해본 적 없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게 여겨지는 적요란 또 다른 공포의 이름에 대해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오정희의 뛰어난 실험정신이었다. 사실, 나는 오정희가 어떤 개인적인 체험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떠한 체험을 했던지 간에, 이러한 극대화된 적요를 체험하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글을 통해서 ‘어둠의 집’에서 시작된 적요란 공포의 예감을, ‘적요’란 소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구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아마 이를 통해 그녀는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적요의 끝을 그녀 자신의 내면으로 삼키고, 소화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돌고 돌아 방만하게 떠벌렸던 글을 정리해보아야겠다. 사실, 처음에 나는 이 글을 통해 내 속에 감춰진 공포에 대해 까발리고, 앞으로 그 공포와 어떻게 조우해야 할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한 그 감정들을 다루기엔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사실, 공포란 말 자체가 너무나 추상적이기에 그것을 평으로 써낸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이야기와 실험으로써 체화시켜야 한다는 단 하나의 깨달음만을 여기에 우선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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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 - 작가와 함께 대화로 읽는 소설
오정희.이태동 지음 / 지식더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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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별사 - 홀린 글 읽기를 정리하며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 오전 6시 30분쯤 눈이 번뜩 뜨였다. 무언가 꿈속에서 예지와 전조로 가득찬 어떤 계시라도 받은 듯 아련한 떨림이 온몸을 감싸 돌고 있었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지난밤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보기도 전에 책상 위 모니터 앞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무정’, 춘원 이광수가 썼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 파란 커버의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있었다. 내 기억에는 이 소설을 산 적도, 읽은 적도 결코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도 꿈일까, 잠시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으려 할 때, 어머니가 불현듯 들어왔다. ‘벌써 일어났니? 밖에 누가 책을 많이 버려놨더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네가 책을 좋아하니까, 깨끗한 걸로 하나 주워왔다.’ 평소 어머니는 내가 책을 사 모으는 것을 마뜩치 않게 여기셨다. 방 두 면이 책장으로 가득차 있는 것도 모자라, 내 방 발코니에 또 책장이 두 개나 더 비치되어 있으니, 어머니로선 책 좀 그만 사라고 성화를 부리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게다. 그런 어머니께서 갑자기 책을 구해오시다니, 그것도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인 ‘무정’을. 깰 때부터 무언가 전기에 지린듯한 전율로 가뜩이나 몸서리치며 일어났기 때문이었을까? 그 책이 마치 기억할 수 없는 지난밤의 계시를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책의 커버를 살펴보았다. 고교생이 읽어야할 논술필독서,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책 커버 귀퉁이의 광고멘트 같은 조그만 그 글귀에 눈이 멎었다. 그리고 갑자기 5년 후에 논술카페를 운영하면서, 고교생을 가르치고,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선연히 눈에 그려졌다. 5년, 내가 이제껏 내 마음대로 산 대가로 진 빚들을 갚아야할 5년이라는 시기, 그렇지만 사실 그 5년이란 기간은 빚을 갚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런데 5년 후 내가 어떤 돈으로 카페를 운영하면서 고교생들에게 논술수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예감이며, 환시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때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5년 후 결혼을 했을 때라는 가정이 따라붙었다. 사실 그 가정 속엔 어머니가 평소 늘 하시던 말씀이 포함되어져 있었다. ‘네가 결혼만 하면, 집이든 뭐든 다 해주겠다.’라는 어머니의 입버릇 같은 말씀들, 평소 그 이야기들을 나는 늘 흘려들었다. 왜냐하면 애당초 결혼할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도 온갖 방황과 낭만이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나는 어머니의 속을 끓이고, 또 얼마나 금전적으로 손을 벌려왔단 말인가? 그런데 왜 그때 그 순간 나는 아주 당연하게 결혼과 어머니로부터의 도움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5년이라니? 내 삶 가운데 단 한 순간이라도 이제껏 내가 그러한 기간을 두고 무언가를 계획했던 적이 있단 말인가? 물론, 내 앞에 그 어떤 다른 명제보다 가혹한 현실이란 벽이, 대출과 빚이란 생생한 이름의 상황이 5년이란 기간 동안 놓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껏 나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런 식으로 기간을 두고 계획을 하는 삶을 살아온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구속이란 이름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 아주 사소한 전조만으로도 이제껏 품어온 나의 모든 가치관을 뒤집어 엎어버릴 만큼 뇌파에서부터 시작된 아드레날린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차고 넘쳐났다. 그렇게 그 상태 그대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오전에 은행이 영업을 시작하기 전, 남는 시간에 읽고 있었던 오정희의 단편집 ‘유년의 뜰’을 펼쳤다.


 別辭, 다소 생소한 한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앞의 별자는 알겠는데, 뒤의 글자가 도통 무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한자사전으로 찾아보니, 말씀 사자였다. 별사(別辭), 이별의 말, 벌써 제목부터 무언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글은 그러한 심상치 않은 구석을 전혀 숨길 의도를 감추지 않고서, 묘지를 향해 시나브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멈춘 곳은 ‘신작로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딱 그 시각이 은행영업 시작을 위해 내가 마지막 점검을 하는 시각이기도 했고, 이상하게도 그 지점이 아침부터 마법에 걸린 내게 무언가 앞으로의 새 길을 제시할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날은 구정연휴를 앞둔 날이었다.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로 새해를 앞둔 마지막 날이 되기도 할 것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그리고 평소처럼 후문을 연 뒤, ‘정문 오픈합니다.’란 멘트를 외치고서, 정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의 대부분 신권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날 우리 은행에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만 원짜리 신권이 발행되질 않았다. 때문에 신권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냥 헛걸음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게 오전부터 은행에 사람들이 쉬지 않고 붐볐다. 대기표는 계속 열 명을 넘어서, 스무 명 가까이 됐고, 기계들은 그날 내 기분처럼 미쳐 돌아가는지, 번호표 모니터가 고장 나고, 세금공과기마저 전혀 돌아가질 않았다. 아마 평소라면 이 대란에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을 토하는 고객들로 넘쳐나고, 나도 쉴 새 없는 고객들의 요청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로 내가 그 모든 상황을 조정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고, 아니 나를 위해서 마치 그 상황이 조성된 것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 어떤 고객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장 난 기계 덕에 내 할 일이 줄어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랬을 거라 여겨지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 어떤 믿음에 불타오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신의 힘을 뛰어넘는 힘과 열정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사실, 나는 이 말을 쭉 불신해왔지만, 그리고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그날의 일들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바쁜 와중에도 나는 고객들에게 커피를 타주거나 차 한 잔을 대접할 여유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날따라 몸이 불편한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그때마다 창구의 한 여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으면 다소 차가운 느낌의 그 아가씨와 그런 눈맞춤에도 나는 별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그때마다 그녀가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해결사처럼, 몸이 불편한 손님들을 자신의 창구로 모셨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문득 나는 내 논술카페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감정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뜨거운 마음으로.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에 대한 그 불현듯한 감정으로 아침부터 시작된 내 막연한 예감에 대한 궤짝이 맞아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그날 모든 상황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나를 위해서 운명처럼 예비된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힘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은 시간마저 내가 조정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누군가가 말한 시간의 상대성 이론처럼 시간은 내가 마음먹는 순간 천천히 가기도 하고, 눈 깜짝할 새 흐르기도 하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전혀 현실적일 수 없는 하루였다. 그렇게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점심시간인 12시가 되었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중국집에서 간짜장을 먹은 뒤, 커피 한 잔에 담배를 태우면서 시간을 때우다, 1시 정각에 은행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오전부터 내내 오정희의 별사의 ‘신작로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는 글귀가 목구멍에 걸려, 책을 들고서 전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던 멸치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점심을 먹으며,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안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어져 나갔다. 낚시를 하러가서 사라진 한 남자와 낚시를 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무덤을 방문한 여자의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는 교묘하게도 두 남녀의 이야기가 한 날 벌어지는 것처럼 써서 두 남녀가 전혀 관계가 없는 듯 표현하면서도, 두 남녀의 이야기의 교합지점을 만들어놓음으로써 두 남녀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종국엔 그날의 이야기가 백중에 벌어진 일이라 하면서, 우란분재, 망자의 날, 달은 밝아 만월이라 정리하고 있다. 마치 두 남녀 모두 망자이었어도 전혀 상관없었을 것처럼, 덩달아 나도 망자인 것처럼, 그날 숱하게 은행을 혼령처럼 떠돌던 손님들이 내게 있어 망자였듯이.


 그날 나는 점심시간에 마저 내친 김에 ‘어둠의 집’까지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어떤 까닭모를 공포와 대면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내게 어떤 전율을 가져다주리라는 사실을 넌지시 예감하며, 혼자서 환희에 떨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한 이삼 년 전 함께 모임을 하던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 무척이나 오정희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분명 생각이 났을 거다. 그렇지 않고선 일반적인 상태에서 나는 연이 끊긴 사람에게 먼저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통 친구들에게도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런데 생뚱맞게 그날 오정희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로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소주 두 병을 혼자서 마시며, 그에게 주저리주저리 그날의 무섭고 생경한 그렇지만 희망으로 가득한 예감과 예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아침 일어나면서부터의 예감부터, 갑자기 생긴 결혼할 마음과 동시에 그날 전혀 생각지도 않게 눈에 들어온 한 여자에 대해, 그리고 도저히 예상할 수도 없는 5년 후의 이야기들에 대해, 혼령이 된 기분으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그는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어쩌면 내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나는 1시간 동안 소주 두 병을 들이켰지만 전혀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생생해지고 명료해지는 내 정신과 마주해야했다. 때문에 그날 내가 그에게 한 말은 그 어떤 거짓도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반쯤 미친듯한 이야기를 혼자서 떠들 순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와는 6시쯤 만나서 10시쯤 헤어졌다. 그리고서 앞으로 새로운 길을 마주하게 될 5년이란 시간이 되기 전, 마지막 나락을 위해 나는 윤락업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것도 그날 오전부터 예견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밤 11시부터 새벽 6시까지 나는 내 마지막 나락을 향해 있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날 불현듯 눈에 들어온 한 여자가 떠올랐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카페를 지키고 있을 그녀의 모습, 그리고 오전엔 글을 쓰며, 오후엔 카페에 흡연실 대신 따로 마련한 조그만 칸막이 유리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 때문인지 새벽 6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역시나 쓸쓸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 어떤 마지막 나락도 내게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전날의 모든 예감들이 한낱 개꿈 같은 거짓된 예지와 예감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소 비참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잠은 구정연휴 5일 동안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서 다시 출근한 날 아침 나는 운명 같은 예감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가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날 아침부터 스스로 혼령이 된 내 자의식이 만들어낸 환몽이었을 뿐,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예감과 전조들을 거짓으로만 치부하기엔 나는 여전히 몽환적인 인간이다. 때문에 아직도 신작로가 세 갈래로 갈라진 지점을 떠올리고 있다. 어디로 가야 그 망자의 날, 우란분재의 어원에 등장하는 목련존자처럼 아귀에 떨어진 중생(혹은 나락에 떨어진 내 자신)을 구하러 수행승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달은 밝아 만월이 되어 혼령이 되어버린 내 자신을 비추어 스스로 바라보고,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별의 말이란 떠난 사람이 아닌 남겨진 사람의 절망을 위해 스스로를 안위한 후 떠난 사람을 침묵으로 보내주는 말이듯이, 내 자신의 새로운 날들을 위한 희망이 아닌 과거의 절망을 위해 이제 스스로에게 고해야할 침묵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당분간 이별의 말로 절망하며, 다가올 희망에 대해 말없이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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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턴트 - 2010년 제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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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턴트 - 훌륭한 기획과 다른 마케팅으로 나온 작품에 관한 개인적 생각들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지만 나는 보통 책을 읽을 때 서평과 저자 약력을 잘 보질 않는다. 물론, 처음 페이지를 넘길 때 나오는 저자 사진과 나이 정도는 봐둔다. 뭐랄까? 첫 인상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어떤 세대인지에 대한 궁금증? 그래서 이번에 읽을 때도 역시 저자의 사진과 더불어 나이를 보았다. 1976년생, 나와 같은 나이, 그리고 다소 동안으로 보이면서, 유약해 보이는 사진. 하지만 여기서 내가 뒤에 덧붙인 유약해 보인다는 이미지는 방금 떠오른 이미지이다. 사실, 그냥 처음 보았을 때는 조금 꽁생원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글을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군더더기가 없는데다 대담하게 살인자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데, 같은 세대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까지 곁다리로 펼쳐지면서, 사진으로만 판단했던 첫 인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하지만 글을 다 읽고서 품평을 써 내려가는 지금 나는 왜 갑자기 꽁생원과 비슷한 어감의 유약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초반부 글을 읽었을 때 몰두했던 흥미로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왜 씁쓸하고 텁텁한 느낌 비슷한 개운치 못한 뒷맛에 한참을 이 품평을 쓰는 것에 대해 주저하게 되었을까?

     

  처음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욕망에 관해 아주 깔끔하게 다룬다는 점이었다. 특히, 이 부분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이 글의 화자가 어느 콘도에 갇혀 정체모를 회사로부터 거액의 고료를 받고서 추리소설을 쓰는 장면이었다. 화자는 여기서 세 개의 추리소설을 쓰는데, 사실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느 정치인의 인슐린 과다복용으로 인한 쇼크사와 유명 목사의 개인적 불륜으로 인한 추락사, 그리고 무더운 날씨로 인해 발생한 메탄가스 폭파사로 죽은 어느 농부의 이야기. 하지만 화자가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만드는 그 바탕이 된 출발점이 권력욕, 명예욕 그리고 개인적 죄과였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웠다. 물론 세 번째의 개인적 죄과는 결국엔 거짓이었고, 경제적 이익의 문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여하튼 이렇게 볼 때 이 세 소설 모두 결과적으로 추리소설 공식의 출발점인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떠올린 추리소설은 화자가 직접 글에서도 언급한 시드니 셀던의 작품들이었다. 물론, 화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어릴 적 셜록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과 만화를 보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이제와 잘 기억도 안 나긴 하지만, 분명 인간 욕망의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추리의 과정 그 자체에 중점을 두는 소설이거나 만화들이었다. 그런데 시드니 셀던의 작품들은 전혀 판이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은 기본적으로 추리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빛바랜 기억임에는 틀림없다. 군대를 의가사제대 하고서 요양 삼아 시골에 내려갔을 때 삼촌들의 서재에 꽂힌 아주 누렇고 빛바랜 그 책들의 양질만큼. 하지만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화려했던 표지들이다. 부를 상징하는 사람 옆에 너무한 섹시한 여자와 혹은 겜블러들의 그림들이 가득했으니까. 그리고 내 기억들에 남아 있는 그 책의 결말들 대부분은 비극적 자살이거나 욕망이 얽힌 관계 속의 타살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어떤 추리소설이 주는 반전의 짜릿함보다는. 그런데 이 소설은 여기서 한 단계 진일보하여, 그러한 비극적 자살과 욕망들에 의한 타살의 배후에 존재하는 회사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회사는 누구나 읽다 보면 자연히 알아차릴 수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거대 자본주의이거나 구조주의에 관한 상징이다. 그러니 극적인 서사로 가득했던 시드니 셀던의 소설에서 분명 한 단계 진일보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현재 사회는 그러한 극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사회도 아니고, 실제로 일어나는 사회도 아니니까. 만약 정말로 어떤 죽음에 궁극적인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게 된다면, 분명 그것은 어떤 극적인 서사보다는 거대 자본주의라는 구조에서 기인한 문제가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죽음을 기획하는 컨설턴트를 설정하여, 사회의 구조에 대해 냉정한 시선으로 파헤치고 들어간 내용은 내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소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꼭 극적인 서사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것도 다소 신파적인 설정부터 너무나 착하기 그지없는 콩고라는 설정까지? 왜 그런 설정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바로 위에서 나는 여러 가지 의문들을 던졌지만 사실 이 글에 관한 가장 큰 의혹은 마지막 질문에 있다. 왜 그렇게 너무나도 거대하게 착한 콩고라는 설정을 두었냐는 점이다. 사실, 소설이기에 어느 정도 서사는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설정에 다소 신파적이기는 하지만 현경과 예린의 대비되는 등장은 나쁘지 않았다. 이로써 얼마든지 회사와 개인의 얽힌 문제들을 풀어갈 수도 있었고, 또 회사의 실체에 대해 궁극적인 질문들을 던질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콩고로 화자는 떠나버린 것일까? 여기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글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고릴라를 보고 싶었다고. 이 부분은 이 글 전체를 읽다보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바가 있다. 고릴라가 의미하는 바가 처음에는 매우 원초적이고 욕망으로 대변되는 모습으로 나오다가, 나중에는 순수로의 회귀를 의미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왜 생뚱맞게 콩고란 말인가? 물론,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던 바는 알고 있다. 저자는 거대 자본주의 담론에 대해 다루고 싶었고, 그래서 굳이 애초부터 고릴라라는 복선을 깔아 콩고까지 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로써 콩고가 가진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인가? 왜 갑자기 그렇게 착한 척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까지 실컷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떠벌려놓고, 그 실체이면서 허상인 회사에 대해 말해놓고서. 갑자기 무슨 구호단체 광고처럼 콩고의 절망과 대비되는 우리 사회의 위선에 대해서 떠벌린단 말인가? 왜 그냥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그렇게 쉽게 무마해버린단 말인가? 조금 더 인간의 욕망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회사의 실체와 허상에 대해 파헤쳐 들어갈 순 없었단 말인가? 글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상념들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솔직히 너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내 머릿속을 휩싸이게 한 상념은 이렇게 착한 글에 대해 그리고 착한 글을 지향하는 저자에 대해 실망하는 내 자신이었다. 왜냐하면 최근 나는 도덕적인 끈을 풀어버렸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몸소 체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도덕적인 끈이라는 것이 어떤 자명한 논리가 없더라도 존재할 수 있도록 그 당위성에 대해 생각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착한 글을 보고 실망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분명히 이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럼에도 개운치 못한 이 뒷맛에 지금도 실소 비슷한 허망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그렇다면 만약 이 글이 콩고라는 설정이 없이, 현경과 예린으로 조금 더 회사의 실체와 인간의 욕망의 부분에 대해 파고들었다면 달랐을까? 물론, 이는 콩고라는 뜬금없는 설정보다 더 어려운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더 치밀해야 하고, 더 밀도 있는 서사가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 느끼는 이 씁쓸한 뒷맛과는 조금은 달랐으리라 예상해본다. 물론, 그렇다하여 화자 말대로 거대 자본주의에 대해, 이 거대한 구조주의 사회에 대해 어떤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것도, 서사가 주는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 결론이 흐지부지한 글이 될 공산이 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어떤 글이 하나의 지향성을 갖고 그 방향으로 치달을 때 갑작스러운 반전으로 도피하여 독자를 허망하게 만드는 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이기에 오히려 서사로써 조금 더 회사의 실체와 허상에 대해 접근했다면, 생각해볼 거리를 더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대충 글을 마무리해야할 것 같다. 분명 재미있고 흥미 있는 글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너무나 착한 반전 때문에 김이 다 빠진 콜라를 마신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역으로 개인적으로 글을 쓸 때 범하지 말아야할 반전이란 미학의 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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