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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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꽃잎2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고



 내게 있어서 김수영이란 시인의 소리는 이제까지 이 시를 낭송하던 대학 동아리의 존경하던 선배의 목소리로 각인되어져 있다. 낙시촌, 즐거울 낙(樂), 시 시(詩), 마을 촌(村)이란 글자 그대로, 시를 즐기는 마을을 꿈꾸며 화요일 밤마다 조그만 대학 동아리 방에서 시를 낭송하던 날들, 그날들의 한가운데에 선배가 그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의 떨어지는 속도와 무게로 느릿하게 그렇지만 묵직하게, 임종의 생명 같고, 혁명 같고, 바위 같은 꽃잎을 낭송하던 순간, 어쩌면 나는 그때까지 모든 시가 꿈꾸는 침묵을 터뜨리는 지점을 발견했을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일까? 몇 년 전 예기치 않던 죽음의 순간을 넘기고서, 다시 일상의 궤도로 돌아와 산책을 하던 날들, 나는 모르게 가만히 이 시를 읊조리면서 떠올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임종의 생명 같은 꽃잎의 자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나의 죽음이 그렇게 나의 삶이 조용하지만 무거운 혁명 같고, 바위 같기를 모르게 꿈꾸었을지도, 아마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폭포, 풀과 함께 이 시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는 아마도 시인 김수영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도 이 시 각 행의 구절, 구절마다 머리의 총성을 울리는 강렬한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주는 ‘눈’의 이미지가 아무리 부인하고, 부정을 하려해도, 순결과 순백을 의미하는 ‘눈’의 고유의 이미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이 시에서의 ‘눈’은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눈’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위로와 위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평화란 이미지의 ‘눈’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그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위장된 평화임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김수영 시인 자체가 지닌 저항의식과 ‘눈’이란 이미지가 가진 이중성을 떠올려볼 때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눈’은 그 순결함이란 유일무이한 무기로 모든 세상의 잿빛과 총 천연의 가을빛깔마저도 앗아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 강원도에서 어떤 경험을 통해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기도 하다. 1미터가 넘게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을 정화한 듯한 느낌, 동시에 그렇게 온 세상을 매장시켜버린 듯한 느낌, 그 무어래도 좋다. ‘눈’은 때론 그렇게 잔인하다. 하지만 이 시 자체 내에서 그러한 ‘눈’의 거짓과 위장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이것은 시인 김수영이란 저항의 이미지 속에서 꺼내온 ‘눈’에 대한 구차한 이미지이며, 해석일 따름이다. 실은 이 시 속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눈’이란 이미지가 더욱 ‘위장’과 ‘잔혹함’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구현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즉, 여기서 ‘눈’은 가장 완벽한 순백이며, 순결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젊은 시인들에게, 어쩌면 시인 그 자신에게, 그러할지라도 마음 놓고 기침을 하고,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어내라고. 왜냐하면 시는 시 자체가 완성이라고 믿는 순간, 더 이상 시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시의 천성이며, 본능이다. 시는 늘 자기 자신의 배반을 꿈꾼다. 그리고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침을 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반동에 대한 반동이며, 배신에 대한 배신이, 시이며 어쩌면 시인 김수영이 그토록 꿈꾸었던 혁명이 아니었을까?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디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이번에 김수영 전집 산문과 시를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다시 바라보게 된 시이다. 아마도 이 시를 다시금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수영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엔 이 시에서 등장하는 김병욱이란 월북시인과 그가 존경하던 김이석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마도 1연은 김병욱 시인에 대한 그의 존경과 콤플렉스가 담긴 시구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2연은 지레짐작이기는 하지만, 월남 소설가인 김이석이 마지막으로 한국일보에 개재하고자 했던 대원군이란 소설의 사료로써 비숍 여사의 이야기를 김수영 시인이 담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3연부터는 자신의 존경과 콤플렉스의 대상이었던 김병욱이란 시인, 그리고 김이석이란 소설가, 어떤 의미에서 대극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남과 북을 초월하여, 김수영 시인 그 자신의 근원적인 그리움, 향수로 한 발자국 나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그의 산문집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도 스스로 밝히듯이 요강, 망건, 장죽 등은 사라져가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져간다는 그 말속에서 김수영 시인은 그 말들이 자신의 향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왜 시인은 이 시 속에서 그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들을, 그 향수들을 반동으로 표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대한 뿌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 거대한 뿌리가 그가 4연에서 강하게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총성을 쏘는 듯한 씹과 개좇, 그리고 좇대강의 이미지와 너무나 흡사하게도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냥 쉽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 그냥 좇과 뿌리의 이미지를 다르게 생각하면 끝나는 문제일까?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반동도 아니고, 좇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김수영의 시는 어떤 의미에서든 반동이어야 하고, 좇이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용했던 개좇과 씹, 그리고 좇대강은 무섭도록 거대한 뿌리와 닮아 있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각기 다르게 시커먼 가지를 가진, 그렇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시인도 모르는, 나도 모르는, 그 거대한 뿌리란 것은......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여


결의하는 비

변혁하는 비……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이 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김수영의 시이다. 사실, 이 시를 통해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게 그동안 선배의 목소리로 깊게 각인된 김수영 시인의 <꽃잎1>의 이미지를 지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물론,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이유일 뿐이지만, 내게 있어서 그 선배는 김수영이란 이미지와 더불어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란 강한 경구와 함께 각인되어진 선배이다. 사실상, 고등학교 적부터 일기 대신 시의 형식을 빌려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시를 써왔다고 자부해온 나이지만, 정작 그 모든 시들은 거의 한낱 감정의 부스러기이거나 나부랭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선배를 통해 처음으로 나는 시라는 것이 자신의 똬리에 갇힌 채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듯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한 언어의 최상위 도구이며,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침묵의 발산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했기에 내게 있어서 그 선배는 시인 그 자체였다. 그 선배의 시가 좋았느냐, 좋지 않았느냐 그 문제는 둘째였다. 지금 내가 김수영의 시가 서정주나 김춘수의 시보다 덜 정갈하다고 느끼듯이, 시와 시인의 문제는 내게 있어서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별개의 문제이다. 즉, 김수영이란 시인이, 그리고 내게 있어 선배란 존재가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시 자체라기보다는 시인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시인 자체가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줄기차게 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온 소리! 이것은 어떤 영감으로 급작스럽게 얻어진 하나의 시를 넘어선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선배의 갑작스런 절필은 내게 하나의 큰 사건이었고, 충격이었다. 동시에 그 이유로 김수영은 내게 있어서 언제나 정이 아닌 반으로써 자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배의 절필을, 의미를 확장하여 선배의 배신을, 나는 쉬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이삼십 대의 대부분을 나는 선배의 그림자들을, 물론 이것은 글이기에 지나치게 과장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그런 시들을 내 안에 반으로써 정립하였고, 그렇게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으로 정립했던 김수영의 시를 다시금 보게 된 지금, 나는 이 시들이 내게 있어서 반이 아닌 오히려 정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도 비는 움직이면서 내리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보이고 있으며,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비는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임을 제하는 결의로써 끊임없이 여기저기 물방울을 튕겨내며, 그렇게 춤을 추면서...... 그리고 침묵하는 소리로 침묵을 터뜨리는 배신을 여전히 꿈꾸면서...... 비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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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의 거리 문예중앙시선 6
박정대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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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의 거리 - 감정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내 감정 공산주의에 대해

 

 

 

 인은 이미지 자체가 한 편의 시다. 나는 솔직히 파르동, 박정대의 (미한지만, 박정대) 시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내내 그가 분명한 시인이며, 집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시가 마치 격렬한 쿠바 음악 같고, 때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의 음악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알고 있다. 시가 본질적으로 현재형이며, 앞으로도 내내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는 미래지향적 음률이라는 측면에서. 그렇지만 지금 내가 그의 시를 빌어 쓸 이야기는 그의 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에 대한 무한한 내 동경이거나,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된 깊은 좌절감일 터이다. 파르동, 여전히 시를 꿈꾸기만 시인이 되지 못한 이여.

 

 

  감정이 확장되어 감정의 무한에 당도할 때도 감정 공

산주의는 태동하지 않는다, 해상의 수평선과 지상의 지

평선에 당도했을 때 나의 생각이 그러했다

 

 

  어느 꿈결에 시가 물결처럼 내게 밀려들었을까? 고등학교 적 일기를 시의 형식으로 빌려 쓰기 시작한 그때부터? 아니면 혼자 룰루 여행을 떠나,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길에서 잠들고 싶으면 잠들었던 그때? 그 어느 때 나의 감정이 무한에 당도하여, 해상의 수평선과 지상의 지평선에 당도해 보았을까? 공간을 한정 없이 떠돌았을 때 나는 홍길동이 되어, 축지법을 쓰고 있다,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공간이동 속에서 오히려 내가 느낀 것은 중력의 축복이었다. 결국 어딘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그곳에서 감정은 무한하게 피어오른다. 무거운 중력으로 애련히 끓어오르는 감정의 확산, 세상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대한 애도의 일기, 나의 생각이 그러했다.

 

 

  나는 자생적 감정 공산주의자

 

 

  감정의 무한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것은 나의 본

질적 욕망일 뿐 소립자의 세계사 그 어느 페이지에도 감

정 공산주의는 기록된 바 없다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중력이 축복이라 말한들, 누군가의 표현으로 확장하여 중력이 은총이 된다고 한들, 세상 그 누구 하나 나와 공감해줄 이 없다는 그 사실을. 오래된 일기장 같은 곳에 볼펜을 휘휘 휘갈기며, 누군가를 위한 시를 쓴들,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기 위한 고결한 시를 써본다 한들, 그 누구도 나의 휘휘 휘갈겨 날려 쓴, 그래서 휘휘 날아 가버린 글씨를 알아볼 길이 없으며, 그 어느 누구의 배고픔도 결코 중력이 축복이 될 수 없으며, 중력이 내린 고통일 뿐이라는 그 사실을. 그렇게 나의 시는 의미 없이 사라져버릴 나의 욕망일 뿐이라는 그 사실을.

 

 

  담배를 피워 물고 저녁마다 감정의 확산을 꿈꾸는 나

는 자생적 감정 빨치산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마다 온 세계를 나의 감정으로

물들이려는 나는 극렬 감정분자

 

 

  그래도 갖은 욕망으로 쉬 잠들지 못하는 밤들, 피어오르는 것이 욕망인지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밤들, 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대라는 타자인 대상에 나의 욕망을 투사하여, 나의 생명이 되지 못한 정액들로, 때론 쓸데없이 붉게 미처 날뛰는 나의 심장의 피로 그대라는 온 세계를 물들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렇게 단 한 밤, 단 한 밤, 그대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날들이 그대의 날이 되어, 타자인 그대에게 투사된 내 모든 욕망들이 완벽히 소멸해버릴 수 있기를, 얼마나 꿈꿨는지. 불꽃처럼 피어올라 덧없이 사라지는 담배연기처럼, 그렇게 얼마나 나와 그대의 간격의 생멸을 꿈꿨는지.

 

 

  확장된 감정이 끝내 무한의 감정에 당도했을 때에도

나의 감정 공산주의가 한 일은 별을 향해 센티멘털 로켓

을 발사한 것

 

 

  그러니 언젠가 그 로켓이 또 다른 별에서 감정의 동무

들을 데리고 지구로 귀환하리라는 것을 안다

 

 

  꿈을 꿈꾸며, 존재하지 않는 그대를, 나의 누이를, 꿈꾸던 그 밤, 그 밤 내 꿈속에 홀연히 나타난 그대는 내가 밤새 뿌리쳐 내지 못해 뿌리내린 그대라는 환영, 잔상, 사념들, 그 모든 허튼 망상에 나는 ‘몽원’이란 이름을 붙여, 꿈속에서만의 바람이거나, 꿈속에서도의 바람이라고, 혹은 꿈의 근원이라고, 여전히 꿈동산에 머물러 그대에게 무한의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까? 그때 내가 부끄럽게 건넸던 그 편지를, 수줍게 띄웠던 엷은 미소를, 도망치듯 흘렸던 말들을, 시간이 지나도, 한 세월이 지나 꿈을 깨어도, 여전히 그대는 늙지 않고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는 그 사실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영원히 고착해버린 내 감정의 센티멘털을.

 

 

  본질적 고독이 세계를 물들이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파르동, 먼저 이렇게 인사를 할 수밖에, 그대여! 한 낮의 꿈을 꾸고서 깨어나 보니, 한 세월이 지나고도 또 한 세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세월의 시대, 이제 그대를 향한 내 모든 시에, 나의 열정에, 그렇게 꼿꼿했던 내 고개에, 내 허리에 만성 통증이 생기고, 더 이상 잘라지지 않는 흰 수염이 자라나, 이제 그대는 나의 애도의 대상,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빌어 말할게요.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리고 이 말도 빌어 말할게요. <뭐 그래도 안녕> 더 이상 날 찾지 말아요. 어차피 난 혼자인 걸요. 그래도 혼자인 날 위해, 그대를 위해,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시 하나는 여기에 남기고 싶어요.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매일 동네 어귀에 트럭 한 대 대놓고서

  20년 동안 한결같이 회를 팔아온 아저씨의

  파닥파닥 물차 오르는 생선 대가리에

  탕탕 칼을 쏘고 쓱싹쓱싹 배 가르는 소리를

  시에 담아

  다리에 실금이 가 입원한 어느 어머님의

  못난 아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병원에서 몰래 나와

  둔탁둔탁 걸어오는 석고붕대의 저린 발자국 소리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인 그대와 나의

  엷디 엷은 층층 사이 사이에 긴 다리를 놓아

  그대와 나의 체온 사이로 영혼의 습도를 녹여서

  겨울에 성에 낀 버스 창가에 그대 입김으로

  한여름 하염없이 창밖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는 어느 아픈 소년의 숨결을 섞어

  시를 적어 놓을 수 있을 텐데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고통의 멍에와 슬픔의 결들 사이에서

  한 마리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 꿈이 되어

  차창 밖 갇혀버린 풍경들 속에 풍경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잃어버린 표정들을 환하게 비추어

  되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P.S.

 

 

  굵은 글씨는 시인 박정대의 시집 ‘모든 가능성의 거리’와 ‘체 게바라 만세’에서 인용한 글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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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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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중심으로 글의 스타일에 관해

 

 

  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나는 이번에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문학을 등진 채 (특히, 한국문학을) 살아온 내가 뭔들 읽어봤을까, 스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여하튼 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평소 귀에 익었으면서도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내 또래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의 문학적인 유행을 나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비평은 개인적 소감을 중심으로 하되, 각 글의 스타일적인 면을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각각 짚어보고, 기호의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다.

 

 

  먼저, 순차적으로 책을 읽기도 해서 그랬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단연 눈에 띄었던 작품은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였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소 양가적인 측면이 있기에, 아마 내 비평도 내가 개인적으로 다소 싫어하는 양비론적 비평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실, 읽기 전 작가 소개부터 눈에 띄었다. 후장사실주의자? 이름부터 조금 거시기한데, 그걸 왜 굳이 작가 소개에 썼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저 후기 사실주의자의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로 넘겼다. 그런데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언가 분명한 의도성이 다분히 느껴졌다. 일단, 글 자체가 거의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었다. 물론,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는 건축가의 이름들과 건축기법 그리고 미술기법에 대해 공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문제는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었다.’는 그 방식 자체에 있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보통 소설은 가령 그것이 과할지라도 자신이 쏟아낸 지식의 열정을 어떻게든 주워 담아, 수습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아마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평범한 우리들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의 해저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떠오를 수 없거나, 아예 미리 발을 대보고 발밑을 헤아리기 어려워 다가가길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그의 지적인 열거방식이 단순히 열거에서 끝나지 않고, 그 격하게 뿜어낸 지적인 배경들을 그의 글속에서 그가 어떻게든 수습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처음 그 광대한 넓이에 혹해 다가서보려 하지만, 그 깊이에 질색해 슬며시 발을 빼게 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에 에코의 세계는 중세라는 철저하게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시대로 국한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이미 중세라는 시대를 ‘암흑’으로 규정짓는 것을 넘어서, 현대가 현대후기를 말하고 있는 시대이다. 왜 모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모더니즘이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왜 예술이 예술을 부정하고, 그 부정한 예술을 다시 부정하는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말하는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이러한 질문이 배경이 된 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구라는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마지막 모더니스트를 통해 ‘벙커’ 속에 들어간 우리의 자화상을 풍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김중업과 고든이란 인물을 통해 도시개발로 대변되는 모던주의 건축을 비판하고(김중업), 자르고, 대항하려(고든)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여기에 박정희 시대의 김현옥이란 인물을 통해 서울의 공간과 이구의 제자 김원을 통해 뉴욕이란 공간의 비교를 통해 또 하나의 극명한 대척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말 ‘모르겠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결국 전적으로 이 글이 취한 구성방식 때문이다. 겨우겨우 이 글을 다 읽고서 나는 처음에 작가가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소설 속에 적용하고 싶었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내 눈에 거슬렸던 ‘후장사실주의’란 용어가 번뜩 떠올랐다. 그래서 이제껏 거의 잘 보지 않았던 작가 후기와 작가 인터뷰까지 찾아보면서, ‘후장사실주의’가 뭔지 알아봐야만 했다. 그렇지만 허세 가득한 (개인적인 느낌에 정말로 자뻑과 후까시로 일관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후장사실주의’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어버전의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며, 대충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요지는 ‘후장사실주의’가 일종의 ‘Neo-Dadaism'이란 결론이었다. 뭐, 사실 남미에서 초현실주의에 반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동아시아로 넘어와 후장사실주의가 됐다느니, 하는 정의가 있긴 했지만, 별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물론, ‘새로운 다다이즘’에 대해서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맥락을 따라 나온 백남준의 작품들과 비틀즈의 존 레논의 아내였던 요코의 전위예술에 대한 어설픈 기억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20대 때 이후로 거의 소실해버린 기억의 편린일 터이다. 하지만 결국엔 그 모든 예술적 행위들이 상업적으로 변질해가는 예술에 대해 반대하는 일환의 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수백 대의 TV를 (이 게 더 상업적이라 개인적 생각도 있지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TV에 갇혀버린 현대인을 풍자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분명히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예술이 반예술을 추구하면서 대중들에게 고립되어가고, 오히려 일부 향유층을 위한 예술로 전락해버린 것처럼, 문학이 반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달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글의 소재는 이구라는 설정 상 한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대상을 씀으로써, 무언가 아시아적 정서를 배양하려했음은 분명하지만, 그 놀음방식 자체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외면한 서구적인 예술론에서 출발해서 끝났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작가가 충분히 젊기에) 그래서 작가가 조금 더 아시아적인 한국적인 정서 하에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도 세계에 우리만의 문학형식이란 걸 하나쯤 내놓을 수 있겠다는 기대도 품어보게 된다. 마치 일본의 오에겐자부로처럼, 서구의 기독교 사상을 철저히 일본의 신화로 재해석한 그의 방식처럼. 혹은 미시마 유키오의 아시아적인 미적 의식처럼. 하지만 저자가 계속 지금과 같이 허세 가득한 ‘후장사실주의자’란 트레이드마크를 붙잡고서, 대중을 외면하려고 한다면, 실제 ‘후장사실주의자’의 모태가 된 비현실주의의 책들처럼 어느 농부들의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지돈의 글을 읽고서, 바로 이장욱의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읽고 느낀 점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평이한 문장과 평이한 구성으로 글을 써서, 읽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별로 가슴에 남는 문장이 없었다. 윤이형의 ‘루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이 책속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다. 소재는 ‘퀴어’라는 특수한 소재를 담고 있었지만, 근래 유행하는 소재주의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연애소설이었다는 점이 아마 내 정서와 맞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초주의로 가득한데다 사랑에 다소 냉소적인 정서가 팽배한 내 개인이, 정반대급부인 순정적인 여자정서와 오직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 정서의 이 글을 읽었을 때 대비되는 감정선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누군가를 증오할 만큼 사랑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기존에 윤이형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열정을 이 작품을 통해서 느꼈던 것 같다. 최은미의 ‘근린’의 경우 매우 구성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인물의 배치를 통해 감정을 배제한 문장으로도 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능력은 애초에 이 소설이 얼마나 구성에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었다. 하지만 대개 구성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그러하듯이, 이 글이 독자에게 저자가 의도한 빈 벤치에 대한 감동이나 여운을 얼마나 남겼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진부한 설정과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지나간 세계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게 읽혔다. 그 이유는 캐릭터에 대해 생명력을 작가가 잘 부여한 까닭이라고 여겨본다. 손보미의 ‘임시교사’의 경우도 ‘조중균의 세계’와 같이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작품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보다 풍자적인 요소를 갖춘 세련된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조중균의 세계’처럼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P부인의 내밀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뒷맛의 씁쓸한 풍미를 남기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소재적으로도 지나간 세계가 아닌, 지금의 세계,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풍자가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는 가장 잘 쓰인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지나친 전형성을 싫어하지만, 이 글에서의 전형성은 전혀 그러한 느낌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아귀가 잘 들어맞으면서도, 내내 흥미를 유발시키는 구석이 있다는 전형적^^; 표현이 좋을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소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던 점은 누군가의 생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우연히 닮은 이름을 뉴스에서 보고서 혹은 갑자기 911테러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형체를 보면서, 죽어간 이를 추모하고, 위태로웠던 이에 대해 걱정하는, 보통 우리네들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 글속에 표현되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독자를 공감하고, 동시에 독자에게 공감 받을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이제 대강 정리를 해봐야 할 거 같다. 처음 의도와 달리 다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평에 치우치다보니, (다소 예감은 했지만) 다른 소설들의 전체적인 글쓰기 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근래 내 또래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한 것 같다. 각자의 방식으로 기존의 틀에 대항하면서, 때론 융화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비록 여전히 아마추어지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아마추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도 주어진 하나의 숙제일 거란 생각을 해보며, 부족한 평을 이만 줄여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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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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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배경과 의미를 중심으로

 

 

 

  내 삶의 시기에서 여러 가지 굴곡이 많았지만, 그 모든 굴곡의 계기를 마련해준 결정적인 시기는 아마 신학교 1학년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특히, 신학교 1학년 2학기 때에 나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내 생각의 기반들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방황의 전조를 스스로 예감하게 되었다. 1학년 들어서자마자 한 달도 채 안 되어 모든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어간 소위 운동권 동아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2학기 때 들어간 동아리도 사실은 그 나물의 그 밥이었다. ‘새날을 사는 사람들’이란 동아리에서 ‘평화의 일꾼들’이란 동아리로의 방향 전환? 이름만 들었을 때는 역시 같은 운동권 동아리였고, 추구하는 바도 1학기 때 들어갔던 ‘새날을 사는 사람들’이란 동아리와 거의 방향성이 같았다. 다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구멍이 숭숭 뚫린 여백투성이의 동아리였다고 하면 표현이 딱 맞을까? 선배들은 그 전의 동아리 선배들과 같이 신학, 역사, 철학을 위주로 하는 여러 가지 커리큘럼으로 우리들을 학습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학습의 내용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주도하에 학습하기를 바랐다. 아니, 실상은 선배들에겐 우리들을 자기들의 생각으로 물들일 만큼 강한 카리스마와 열정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나와 동기들은 그 아래서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오히려 1학기 때 선배들에 의해 타의에 의해 혹독하게 학습했던 때보다 더 많은 공부를 스스로 해나갈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공부내용이 소위 자유주의라 불리는 현대신학과 포스트모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철학이어서, 지금에 돌이켜봤을 땐 다소 고대와 중세라는 뿌리를 잘라내고서 건너뛴 감이 없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스스로 여러 생각의 갈래들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하튼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에서 동아리 안에 함께 하던 우리 동기들은 끈끈하게 뭉쳤다. 사실, 다른 동기들이 나만큼 열정을 갖고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 어느 누구라도 어떤 열정과 꿈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동아리 내에 우리 스스로 ‘Holy Club'이라는 모임을 따로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유치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하면서도 경건함을 유지하자는 의도로, 감리교도의 뿌리가 되었던 웨슬리 형제의 ‘Holy Club'이라는 모임에서 그 이름을 따와, 그런 모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인지, 같은 동기들끼리만 모여서 그런지, 처음의 의도와 달리 나중엔 모임에서 여자 얘기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여하튼 그럼에도 처음에는 나름 매 주 책 한 권씩을 정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는 했다. 그리고 그 첫 모임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책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너무 길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을까? 거의 제대로 읽어온 사람이 없었다. 내 경우에도 읽어보려 했지만 처음부터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우리는 종교개혁에서부터 갈래를 둔 장로교파의 신학생들이었기에 가톨릭 역사에 대해 거의 피상적으로만 접했을 뿐, 제대로 배워본 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가톨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수도원을 전전해온 현재의 나조차도 너무나 국소적인 가톨릭의 역사와 철학을 다룬 이 책을 다시금 이해하는데 꽤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니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가 이 책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저 피상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염불 외우듯 이야기하며, 소설의 구성의 특이함에 대해 흥미를 나타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이다. 어리긴 했지만 신학생이었던 우리가 이 정도였는데, 다른 사람은 어떨까? 과연 이 책에 대해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할까? 아니, 굳이 이해해야 하는 걸까? 종교도 없고, 철학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문학적으로 단순히 풀기에도 이 책은 너무나 종교와 철학이라는 비문학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방대한 책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잘 감이 잡히질 않는다. 분명히 종교, 철학, 문학적으로 그 의미를 나누어서 살펴봐야할 것은 분명하지만, 따로 때어놓고 설명하다보면 그 밀접한 관련성을 놓치게 될 것이고, 같이 엮어서 설명하기엔 너무 방대한데다 내 역량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일단 내 개인적 역량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나누어 설명하되, 나름 밀접하게 관련시켜가면서 이 책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배경은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교황 요한 22세가 재위했던 14세기 초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 시기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시기적으로 이 시기는 15세기 중엽 르네상스가 발흥하기 전, 그 태동기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인 아비뇽 유수 이후 쇠약해진 교황 권력에 대해 교황들은 큰 위기감을 느낀다. 이 책에서도 잘 소개되어 있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청빈 사상의 대두이다. 사실 어느 시대나 수도사상은 청빈사상과 관련이 있어왔다. 로마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억압을 끝으로 순교라는 종교적으로 자기 생명을 바친다는 가장 위대한 개인적 헌신이 사라지게 되자,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바친다는 의미로 사막에 몰려들게 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개인적 극기와 청빈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 하였다. 다만, 초반에는 각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려던 것이, 여러 사람이 모이면서 공동체를 이루게 되어, 수도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도회 초기 역사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기도가 노동이며, 노동이 기도다.’라는 격언과 함께 자급자족을 유지해가면서 자신들의 기도의 삶과 성서읽기의 삶을 실천해나가려고 했던, 청빈 그 자체의 삶을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거룩한 성직자들의 노동을 만류하면서, 수도원 스스로 노동을 포기해가면서 부패해갔다. 물론, 주변의 농민들의 성직자에 대한 헌신은 아마도 로마의 멸망 이후 5-6세기부터 지나치게 확대된 교회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유럽이 봉건제도의 사회가 되면서, 종교에 대한 권력이 황권에서 교권으로 넘어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그 고유의 기능을 넘어서 변질되어지게 된다.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먼저는 교황권력의 확대로 인해 일종의 각 지역대표의 세계종교회의였던 공의회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그전까지 교회는 교회의 교리적이거나 역사적으로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공의회 소집을 통해 문제를 회의하고, 해결해나갔다. 그런데 교황권력의 확대로 인해 교황무오설이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교리가 등장하면서, 민주적인 공의회의 권력이 무색해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재판의 성격도 변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종교재판은 다소 틀린 교리에 대해 이단으로 파문을 할지라도, 그것이 말 그대로 파문일 뿐이지, 실제적인 형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그전까지는 어떤 지역의 대표가 교리적 문제가 있으면, 그 지역에서 목회를 못하게 하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교황권력이 무소불위가 되면서 한 번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면, 그것은 이제 극심한 고문 끝에 화형이라는 죽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교황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11세기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면죄부를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했더라도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교황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였던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성서에서 이르길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그가 지상에서 축복하면 하늘에서도 축복할 것이고, 지상에서 저주하면 하늘에서도 저주할 것이라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내가 앞에서 ‘교황무오설’이 전혀 출처도 없는 사상이라고 비아냥거리기는 했지만, 실제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가톨릭에서 ‘교황무오설’의 근거는 이러한 성서의 글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됐든 이러한 모든 교황의 절대적인 권력도 십자군 전쟁의 연이은 패배와 함께 점점 퇴색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비뇽유수라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출발한다. 아울러 여기에는 지금까지 언급된 두 가지 내용이 엇물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교황의 절대 권력에 반대하여 등장하게 된 프란체스코회의 극단파에 대한 내용이고, 여기서 꼬리를 잇게 되는 중세 말기의 뜨겁게 논의된 그리스도의 ‘사용권’과 ‘소유권’에 대한 문제, 그리고 ‘교황무오설’과 ‘공의회우위설’에 대한 논쟁이다.

 

 

  소설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의 ‘사용권’과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 프란체스코회의 극단적 청빈파에서부터 문제가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말한 대로 모든 수도회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따른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하기에 ‘청빈’이라는 것은 너무나 그들에게 당연한 교리였고, 특히 탁발수도회였던 ‘프란체스코’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의 교권이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극단적 청빈파의 경우 기존 사제의 성찬례를 인정하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로선 쉬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찬례’라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대신해 포도주와 떡을 나눔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예배의 중심이다. 그런데 사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그 성찬례를 거부한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와 결별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를 공격하고, 교회를 점거한다면, 어떻게 기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명백하게 교황에 대한 도전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죄가 성립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요한 2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자신의 교권을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청빈 사상을 실천하는 프란체스코회 25명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그 중에 4명을 화형시키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이 책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에서도 극단파는 소수였을 뿐이고, 대부분은 온건파였다. 그래서 이에 대해 당시 프란체스코회의 총장이었던 미켈레는 교황과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아비뇽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교황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이탈리아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요한 22세를 ‘공의회우위설’을 근거로 공의회에 고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후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의 지도적인 노수도자였던 카잘레의 우베르티노는 132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요한 22세의 나름의 사정이 있기는 했다. 당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교황권으로 인해 아비뇽에서의 교황청은 재정이 바닥이었다. 때문에 요한 2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교권확립과 더불어 교황청의 재정을 복원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더욱 프란체스코회의 청빈파가 눈에 가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요한 22세는 가톨릭 교회사적으로도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때문에 요한이라는 교황의 이름이 그 이후에 사용되는 요한 23세가 등극하기까지 약 7세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종교적인 배경은 이쯤으로 하고, 철학적인 배경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찌됐든 이 책의 키워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학’ 2장 ‘희극’에서의 ‘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이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이라는 가설이 있기 때문에, 철학이라기보다는 문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이 부분에 관해선 차후에 더 다루어보기로 하고, 먼저 중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되리라 믿어보며,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중세는 말 그대로 ‘암흑의 시대’이다. 그러하기에 철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굳이 중세를 공부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다. 너무 종교적인데다가, 그냥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로저 베이컨(물론 중세 사람이지만), 데카르트로 넘어가도 철학을 이해하는데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라는 시대는 유럽의 6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1000년의 시간이다. 이 긴 시간을 역사 속에서 지운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며, 때문에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말이 안 되는 의미일 것이다. 즉, 어찌됐든 간에, 중세에서도 철학은 지속되어져 왔다. 물론, 그 중심에는 ‘플라톤’ 사상이 축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진리’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할 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초기 기독교의 사도 시대가 끝난 후 교부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성 어거스틴’의 경우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을 엮어 그리스도의 사상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독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경우는 교회와 줄곧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10-11세기 유대 철학자들과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책들이 대거 유입되어 들어오기 전까지, 거의 금서에 가까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세시대의 학자들이 전혀 접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강한 ‘플라톤주의’의 색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배격했다는 것뿐이다. 실제로 10-11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이 대거 유입된 이후에도 교회는 그와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13세기에 모든 신학과 철학 사상의 중심이었던 파리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공연하게 강의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미 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학에서의 지적인 열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열망에 가닿아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하는 토론의 중심엔 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근거로 하는 논증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플라톤만 해도 자연보다는 자연 우위에 있는 ‘이데아’라는 개념을 상정하여, 기독교 형이상학과 원만하게 병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플라톤 철학에 반대하여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그러한 ‘이데아’를 부정하고, 자연 개체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었다. 때문에 모든 자연의 사물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분류를 묶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근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자연과 만물에 초월한 신에 대한 개념과 대립되게 된다. 때문에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은 어떤 면에서 쉬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언제까지 금기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등장한 것이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은 간단하게 말해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철학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한다. 즉, 언제까지 철학을 금기시할 수 없던 교회에서 입장을 바꾸어 철학과 신학의 종합을 시도했던 것이 ‘스콜라 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대표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리고 그가 당시 모든 학문의 중심지였던 파리 대학의 철학교수라 활동했던 시기가 13세기 말엽이었다. 물론 그곳에서의 그의 삶은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그의 노력으로 인해 철학과 신학의 타협은 13세기 말엽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철학과 신학을 따로따로 분리시켜서 자연에 대해선 철학, 나머지 영역에 대해선 신학이라고 설명하고서, 종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4세기에 이르면 철학적으로 신을 입증하려는 모든 시도 자체를 거부하는 ‘유명론’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시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연과학적으로 신을 입증하려는 영국의 ‘경험주의’ 사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의 스승인 윌리엄이 영국의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로저 베이컨’의 제자란 사실은 이 책이 실제적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논외로 하더라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주인공의 스승을 통해 투영한 이 책의 사상의 근저가 철학적인 이성보다는 입증 가능한 경험 하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당시의 종교적인 현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와 가장 흡사한 시각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부터 사실상 거의 결론과 다름없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왜 하필 이 책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중 ‘시학’에 대해서 다룬 것일까? 그리고 그것도 존재하지도 않는 ‘시학’의 2부 ‘희극’편 ‘웃음’에 관해서 다룬 것일까? 사실, 시학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비극’에 관해서 말하기 전, 서두에 시학이 다른 문학과 달리 운율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소재를 다룬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모방하여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비극’과 동시에 ‘희극’에 대해 비교하여 다루고 있다. 그리고 ‘희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웃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비극’과 달리 어떻게 이야기 구성과 담화로 발전했는지는 모른다고 나오며, 다만 고대 아테네에서 집정관들의 허락 하에 희극이 성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아테네의 희극은 아마도 메가라라는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을 남근사상과 함께 디오니소스 축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즉, 일종의 열광과 도취 상태의 의식인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온 것으로 유추함으로써 희극을 비극보다 다소간 덜 발전된 형태의 극적인 형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실제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을 그때까지 가면을 쓰는 방식으로 인간의 왜곡된 형태와 추악한 형태를 웃음이라는 가벼운 형식으로만 다루었을 뿐, 진지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진정으로 인간의 본질을 다루기 위한 복합적인 서사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이었다고 그는 생각한 듯싶다. 실제로 당시 고대 그리스의 희극엔 일종의 이솝우화와 같은 이야기는 존재했지만, 3대 비극 작가와 같은 쟁쟁한 작가들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즉, 이 소설에서 가정하고 있는 ‘시학’ 제 2장에 나오는 ‘웃음’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소설적인 상상력이라는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먼저는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적인 철학사상이 중세시대에 ‘스콜라 철학’이라는 종합의 형태로 타협가능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키가 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순히 자연의 사물 개체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서열을 나눔으로써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대상인 자연이라는 가장 최상위 그 위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소설의 핵심에 대한 이해이다. 사실, 지금 이 소설에 대해 역량이 되지 않아, 평론이 아닌 배경 소개를 하고 있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이 소설이 소설적 가치를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너무나 많은 종교적 철학적 관심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게 정말 소설책인지, 아니면 중세철학책인지, 실제와 허구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장 ‘희극’편의 ‘웃음’에 관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가정이며, 상상이기에, 이 책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왜 하필 ‘웃음’에 관한 이야기였을까?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잡설들을 열거하였지만, 이 글의 핵심은 ‘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이 책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진짜로 웃었느냐, 웃지 않았느냐, 뭐 이런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교회 종탑 꼭대기에 천사가 몇 명 서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소비적인 논쟁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핵심은 왜 저자가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부 ‘희극’편에서 ‘웃음’에 관해서 다루고, 이야기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사실, 많이 돌아왔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엔 금욕과 정절 등으로 점철된 중세에 대해 ‘웃음’으로 풍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즉, 이 글에서 ‘웃음’이란 ‘금욕’이란 키워드로 대변되는 중세시대의 종말에 대한 예견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새로운 키워드로써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끝으로 장미라고 불리는 이름도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결국 책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로 국한시키는 것보다는 ‘웃음’이라는 더 큰 키워드로 풀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P.S.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과 관계없이 종교적 측면에서도 이 글은 내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 있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와 세속적인 교황의 대립이라는 측면이 내 개인적인 맥락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아마도 나는 스무 살 적 방황을 시작할 때 프란체스코의 청빈파가 주장하는 그러한 맥락 하에 있었던 것으로 회고해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청빈파의 맥락은 ‘진리’와 ‘전통’이라는 맥락보다는 ‘진실’과 ‘개혁’이라는 맥락에 늘 서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또 다시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프란체스코회는 여전히 존속하고 그 ‘청빈’의 사상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지만, 결국 청빈파의 극단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결국 교황이라는 다소 세속적인 종교집단이 진리라는 명목 하에 자신의 ‘전통’을 고수해왔고, 그로인해 결국엔 지금의 온건한 프란체스코회를 포용하여 그 청빈사상을 존속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내 개인이 종교로부터 돌아서게 된 것은 내 극단적 성격으로 인해 ‘진리’와 ‘전통’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하려는 의지를 갖지 못하고, 모든 ‘진리’와 ‘전통’을 세속화되었다는 시각으로 싸잡아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세속화 된 것은 인간이지 ‘진리’와 ‘전통’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빈파의 극단적인 무리들은 사제들을 교단에서 몰아세웠고, 나는 교회를 떠나버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종교의 속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동시에 고뇌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의문부호를 달아보며, 길고 길었던 잡설을 마쳐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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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6-18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랫만에 장미의 이름˝과 재회 군요. 며칠째 밤을 계속 새워 멍..한 상태라..마지막 즈음, 웃음에 왜 희극이냐- 를 나름
답해야 겠다, 했는데 정리가 안되는 군요.대충 말하자면 비극은 지옥과 현실을 웃음은 희망,스스로 구원이기 때문에 교회
가 힘을 발휘 할 능력 상실을 상징. 장미란 여성과 행복, 스스로 찾는자유 질서 .있어서는 교회에 반하는(수도원에서 특히)
때문에 [장미 의 이름]이란 제목 이 된 것이 아닐까...강제하기 위해 비극과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필요악 인 셈이죠. 희
극이야 말로 선한 힘, 뭐,그래서 피니스아프리카에 (세상 끝의 도서관 온갖 세계의 책은 전부 다 있다는 수도원의 장서각)
는 불꽃을 피우리라~ 로 그럼 범인은? ...안 알랴줌....ㅎㅎㅎ 이미 아실테죠?!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래되어
이 얘기가 맞는지도 자신없는데..최근 절대지식 세계고전 을 읽어둔 것도 조금 이랑, 몽원님의 페이퍼글을 읽어 조합해서
결론 끌어내기..해본..것에 불과..^^ 그럼 곧 이 번 주도 끝나가는 군요..마지막 월말까지 마무리 잘하시고 장마,메르스 에
건강 잘 챙기시길..또 정신 좀 차리면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몽원 2015-06-22 03:55   좋아요 0 | URL
좋은 댓글로 깔끔한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글을 쓰느라, 여기 자주 들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젊은작가상 받은 작품들과 시집 읽고 서평 쓸 생각이라.. (젊은 작가상 작품집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 님 서재에도 있어서 어차피 말씀드리려 했지만^^;) 여하튼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꾸벅~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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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old Blood - 범죄심리 소설의 발전단계와 방향에 대한 개인적 질문들

 

 

 

 소설을 평하기 전, 먼저 내 기억 속 추리소설에 대한 편린 몇 조각을 꺼내보고자 한다. 군대를 제대하고서였다. 허리 디스크로 의병제대를 해서, 외할머니 댁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이미 외할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외삼촌들도 모두 도시로 상경해, 외할머님만 계시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외할머니 밭일을 소일거리 삼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생각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님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거의 종일 한량처럼 누워서 책만 읽었다. 그중에서도 그때 가장 많이 읽었던 책들이 추리소설들이다. 딱히 읽을 만한 책들이 외할머니 댁에 없기도 했다. 그나마 외삼촌들의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들이 추리소설들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시드니 셀던 등등. 그리고 이전의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난 도일의 명탐정 설록 홈즈 이야기 정도? 이 때문인지 내 기억 속에 추리소설이라 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정도의 용도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 이 글을 읽을 때엔 정말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굳이 내가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거의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 언제 다 읽을지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첫 장 약 120페이지 분량의 ‘그들이 살아있던 마지막 날’을 넘어가자, 생각보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틀 만에 책을 다 읽었다. 사실, 앞으로 다가올 지겨움에 대한 지레짐작으로 첫 장이 거의 하루 걸린 셈이고, 나머지 장들은 매우 흥미로워서 하루 만에 다 읽은 셈이다. 왜냐하면 이 글이 읽으면 읽을수록 단순히 추리소설이 아닌, 아니 정확하게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내게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내게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읽힌 것일까? 저자인 트루먼 카포티 스스로 밝혔듯이 이 소설이 저널리즘 접근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아니면 이 소설이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일까? 사실, 두 가지 다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특수한 범죄라는 대상이란 논픽션을 소재로 소설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의 접근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소재를 재구성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의 프로파일 중 유독 형사나 탐정들의 추리력이 빛을 발하여 범인을 잡은 논픽션 소재를 저자가 찾아 골라서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그런 소재를 골라잡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그런 전형적 추리소설의 재구성에도 관심을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재구성이라 함은 사건의 주인공인 탐정이나 형사의 1인칭 시점으로 독자가 들어가,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가는 형식의 추리소설 구성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마지막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1인칭 주인공처럼 일반적인 추리력으로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 확증하게 되지만, 소설은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추리소설은 일반적 독자의 추리력을 뛰어넘는 반전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추리란 세계의 매혹에 완전히 함몰하게 만드는 것이 그 역할이며 임무인 것이다. 물론, 근래 추리소설은 이런 고전적인 전형적 구조를 탈피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CSI수사대라든가, 기타 미드를 보더라도 이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범죄도 범죄자도 전형적이지 않을뿐더러, 때문에 그 수사방법과 과정도 단순한 추리로는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드나 장르소설에도 역시 반전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과학적인 수사방법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독자에게 또 다른 영역의 추리적 카타르시스를 대신 선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러한 현대적 장르의 추리소설 범주에도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엔 어떤 반전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과학적 수사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건 자체의 해결도 거의 기막힌 행운에 의한 우연의 산물에 의해서 해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심지어 이 소설에서는 사건 해결을 위한 복선조차도 거의 생략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냥 사건의 나열과 기록 연대기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 차라리 더 나을까? 하지만 다 읽고서, 개인적으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렸다. 그 때문인지 이 소설이 어쩌면 ‘죄와 벌’의 현대판 범죄심리 소설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모든 접근방식과 문체 그리고 소설의 주제마저도 전혀 다른 별개의 소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범죄심리학이란 관점에서 두 소설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자못 흥미로울 것 같아, 지금부터는 두 소설을 비교하면서 이 소설에 대해서 평해보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라스콜리니코프란 젊은 청년이 한 노파를 살해하게 되면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약 700-8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의 긴긴 내용 가운데 팔 할이 범죄를 저지른 동기에 대한 아주 자잘하고 치졸한 자아성찰에 관한 이야기란 사실이다. 즉, 이 소설은 인간이 죄를 저질렀을 때 야기되는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와 본질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다른 특별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주인공과 관련한 가족을 제외하고는 구원이라는 상징적 존재로서 소냐라는 등장인물, 그리고 재판과 관련된 인물들이 전부이다. 사실, 이 인물들마저도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인 고민을 위해 거의 배경적으로 저자가 끌어들인 인물들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즉, 이 소설은 순전히 인간의 범죄 심리의 근본과 양심에 관한 문제의 본질인 선과 악에 대해 질문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자체에서 이런 범죄적 인간의 유형들은 그에 따른 질문과 함께 점점 더 심화되고 진화해간다. 초기의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크프를 넘어서서,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신’이란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살인을 꿈꾸는 이반 표도로비치란 인물로, 그리고 ‘악령’에서는 이미 그러한 모든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악마적 초인으로써 소녀를 아무런 양심 없이 강간하기까지 하는 스타브로긴이란 인물까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인간은 점차 도덕적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거의 그 종국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도덕이란 인간의 한계조건을 벗어난 인간들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딕이라 불리는 히콕, 그리고 페리 스미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딕이란 인물의 경우에는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전에서도 주인공으로써 전면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지만, 그 주변인물로써 딕과 같은 인간 유형은 자주 등장해왔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추잡한 인간군상의 표상으로써,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의 한 얼굴로써, 딕과 같은 인물은 종종 소설 속에서 그 기능을 충실해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페리 스미스와 같은 인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름의 도덕적 관점은 형성하고 있지만, 살인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없고, 그 동기마저 불분명한,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같은 악마적인 시를 쓴 랭보나 소녀의 강간에 대해 주로 다룬 듯한 '말도로르의 노래'를 쓴 로트레아몽처럼 미치광이 천재이거나 예술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대중에 포함되는 우리이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미친놈이라고 낙인을 찍으면 되는 것일까? 이 둘 다 아니라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In Cold Blood'에서 작가는 페리 스미스를 다루면서, 중요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맥노튼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더럼 규칙'이다. 먼저, '맥노튼 법칙'이란 정신질환의 증후를 보이는 피고인 범죄자가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다면, 정신이상을 인정하지 않는 규칙이다. 반대로, '더럼 규칙'은 단순하게 피고가 저지른 불법 행위가 정신병이거나 정신적 손상의 산물이라면 형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는 관점이다. 재판 과정에서 페리 스미스의 정신감정을 맡았던 존스 박사의 경우는 페리 스미스를 '더럼 규칙'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렇지만 판사와 다른 모든 배심원들은 페리 스미스를 '맥노튼 법칙'에 의해 규정짓고, 사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법칙 모두 더 이상 어떤 도덕적인 잣대나 양심적인 화두에 대해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 시대에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더 이상 도덕적인 화두가 아니라, 매우 심리적이거나 법적인 문제로 이전했음을 이 글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글속에서 저자는 많은 부분 페리 스미스의 성장과정과 그에 따른 나름의 도덕적 가치관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인의 심리적 인과과정은 감춰져 있다. 그냥 갑자기 페리 스미스는 자기 삶에서 이제껏 누구보다 친절하게 대했던 느낌을 준 클러터 씨를 살해한다. 그것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물론, 글속에선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스미스의 정신상태가 이중으로 분열되어, 살인하고 있는 자아와 생각하는 자아가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말만 많고 허세 가득한 겁쟁이 딕에게 진짜 사나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누군가에 의해 어설프게 심리가 분석되어져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명 다 페리 스미스의 살인의 인과과정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설령 그렇게 설명이 된다하더라도, 이후에 등장하는 앤드루스와 같은 인물 유형에겐 이러한 두 가지 심리분석은 적용조차도 될 수가 없다. 평소에 모범생으로 살던 뚱뚱보 앤디(앤드루스의 애칭)가 자신의 부모형제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하리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마치 파리를 죽이는 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것이 똑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앤디의 정신 상태에 대해 그 누가 쉽게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이 문제에 대해 정신분열의 문제로 돌려놓고, 모든 도덕적인 책임을 심리적 문제로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소설 속에선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도덕 대신 법의 문제로 환치시킨다. 왜냐하면 '신'이란 절대적인 선 대신 다양한 선과 가치관을 인정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절대적인 도덕적인 잣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도덕이란 문제는 이제 개인의 문제일 뿐, 더 이상 사회적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일반적 함의가 담긴 도덕의 잣대를 법이란 틀에 담아 대신 활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페리 스미스와 앤드루스는 '맥노튼 법칙'과 '더럼 규칙'에 의해서 규정지어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총체적인 삶의 자리를 다루고 고민하는 문학이란 자리에서도 이 규칙이 통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 질문은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질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연적인 존재 성찰에 있어서 악의 문제는 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하기에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치열하게 다루어져야만 하며, 그에 따른 새로운 질문들이 끊임없이 야기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제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써 정착된 범죄심리란 장르의 소설이 거의 추리소설이란 틀로 고착화되는 경향은 다소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이런 장르의 거의 초기 형태라 말할 수 있는 이 글만 보아도 벌써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글보다는 더욱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그 저변에 깔린 비인간성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아니 고민하는 소설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비록 도덕의 잣대도 뭣도 다 사라진 시대라 할지라도, 그 화두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되새겨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직도 나는 그런 소설들에 대한 기대의 끈들을, 미련들을 포기하지 못하고서, 이렇게 자꾸만 되물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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