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 쉽고 재밌는 소설에 대한 개인적 바람을 연에 실어 보내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내게 있어 가장 큰 질문 중 하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이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위험한 불안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 자체가 너무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겨먹은 자체가 관념적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벌써 앞의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그렇다면 관념적이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 머릿속에 물음표를 자아내고 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1>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견해나 생각, 2>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3> [불교]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부처의 진리를 관찰하고 생각함,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정의가 나와 너무나도 관련 있는 사항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2>의 정의가 눈에 들어왔다.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생각, 생각, 수많은 생각의 꼬리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떨리는 감정으로 주체하지 못해도 부족한데, 글을 쓰기도 전에 항상 미리 글을 왜 쓰는지 물으며, 주저하는 내 모든 감정과 생각의 연결고리들....... 그런데 그 연결고리들은 어찌하여 인과관계마저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지, 결국엔 뫼비우스의 띠처럼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처럼 돌고 돌아, 언제나 하나의 절망이란 이름으로 내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이토록 절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나는 그토록 글을 쓰고 싶어 했으며, 여전히 글을 쓰고 싶다고 스스로 다짐하듯 되뇌고 있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해왔다. 아마 그 글에 대한 첫 느낌의 아름다움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당연하게 생텍쥐페리의 첫 작품인 ‘야간비행’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당최 ‘어린왕자’와 연관이 되질 않는 작품이었다. 엄청나게 지루한데다, 내용도 뭘 위해 썼는지도 모르겠고, 관념적이라고 하기에는 관념이 너무 설익었고, 그냥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낭만을 이야기한 거 같긴 한데, 그냥 재미없을 뿐인, 정말 그렇고 그런 작품이었다. 처음엔 그냥 그의 첫 작품이니까, 그랬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시작이 지날수록 깨달아지는 한 가지는 무섭게도 그의 설익은 작품이었던 ‘야간비행’과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어린왕자’가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야간비행’에 대한 내 기억은 너무나 흐릿하다. 그럴만한 강한 인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왕자’가 비록 아주 세련되게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 읊고 있지만, 실은 어느 별에서 혼자 사는 지독히 외로운 한 ‘어린왕자’란 이름의 소년이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우주여행을 떠나는 모양새이고, ‘야간비행사’도 지독히도 외로운 자신만의 비행을 통해 자아를 발견해 가는 그런 과정이란 점에서 닮은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린왕자’의 내용이 어느 부분이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말들이 예쁘고, 좋은 비유로 가득하다할 뿐이지, 기실 너무나 현실적이지 못한 관념적인 이야기 그 자체 아니란 말인가? 그 때문인지, 혹은 내가 신이란 관념에 한때 너무나 크게 휘둘려서 인지, 이십대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헤르만 헤세,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카프카, 미시마 유키오 등등, 대부분 관념 그 자체를 다루는 소설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우리나라의 소설들을 읽지 않기 시작했다. 육이오 동란과 해방이후의 이야기들, 그리고 민주화 과정 속에 숱한 애환 섞인 이야기들이 그저 뻔하기 그지없는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자연스럽게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것이 마치 무언가 대단한 의미와 관념들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믿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연을 쫓는 아이’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듯이 상투적이라는 말이 왜 나쁘단 말인가? 쉽고 재밌게 쓴 소설이 왜 소설로써 가치가 없단 말인가?

 

  평소 내 습관대로 역시 서두가 반 이상을 차지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근 내가 당면했던 ‘쉽고 재밌는 소설’에 대한 화두가 이 소설 속에 존재했고, 너무나 오랜만에 읽어본 관념적이지 않은 장편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너무 쉽고 재밌게 쓰인 좋은 글을 마주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진 셈이었다. 마치 천일야화를 보듯, 혹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떠올리듯,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아랍영화들을 내내 마주하듯, 이 소설은 아랍이란 이국적인 풍경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며, 소설을 읽는 내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쓰면 되잖아. 그리고 우리 이야기들도 사실 크게 다르진 않잖아. 비록 너무나 좋아진, 그래서 너무나 각박하고 바빠진 세상이지만, 그래도 우리들도 우리들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런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어왔잖아. 자, 그럼 써봐! 이렇게! 그리고 네 얘기도 얼마든지 이색적이고 재밌는 모험과 이야기들로 가득하잖아! 주저하지 마! 용기를 가져!’ 하지만 정말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나는 그러기엔 너무나 관념적인 내 자신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일 년 동안 혼자 여행을 떠나고, 수도원에서 살고, 배를 타고, 목장에서 살아보고, 공장에서 살면서 일한, 그 모든 이색적인 풍경들과 경험들이 애초에 신이라는 관념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고, 여전히 그 무한대의 가까운 관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입장에서, 이렇게 쉽고 재밌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까? 결코, 포기할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관념도 철학도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다루는 혹은 이야기 그 자체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눈을 감고 다시 떠올려본다. 비록 주인과 하인의 관계였지만 카불에서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며 연을 날리던 아미르와 하산, 그런 아미르를 위해 아세프에게 맞으며 강간까지 당하던 하산과 그 장면을 몰래 멀리서 훔쳐보던 아미르의 배신....... 그리고 길고 긴 역사와 민족 종교란 인과의 과정을 통해 밝혀진 아미르와 하산의 이복형제란 진실, 그럼에도 영원히 화해할 길을 잃어버리게 된 하산의 죽음이란 절망적 현실과 동시에 평생 동안 자신을 옥죈 배신이란 굴레로부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인 하산의 남겨진 아들 소랍....... 그 소랍을 위해 모든 명예와 부가 보장된 미국을 떠나 전쟁 이후 죽음과 참혹한 현실만 거리에 가득한 카불로 향하는 아미르........ 그곳에서 무슨 기구한 운명처럼 다시 마주한 아세프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목숨을 위협받는 아미르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세프에게 새총을 쏘아 아미르를 결정적인 위기에서 구출해준 소랍....... 그럼에도 자신이 다시 아미르에게 버려지리라 믿고 자살을 시도해버린 소랍....... 그 이후 되살아났음에도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소랍의 길고 긴 블랙홀과도 같은 침묵........ 마지막으로 자신의 양자로 데려온 소랍과 미국에서 연을 날리며 작지만 서서히 진행될 소통을 꿈꾸는 아미르의 바람........ 그 바람에 나의 이야기들을 나의 꿈들을 실어 연을 날려본다. 쉽고 재밌는 그렇지만 지상에 쉬 안착하지 못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상한 모양새의 연을, 하늘에 높게 띄워본다. 바람에 훨훨 날아가기를, 그리고 언젠가 아무도 모를 어느 귀퉁이에 추락해 누군가에게 몰래 주워지기를, 그렇게 연으로써의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져주기를, 가만히 눈을 감고 바라본다. 언젠가, 그 언젠가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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