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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 마을에서 띄우는 첫 번째 편지

 

얼마 전까지 내가 살던 당신의 마을에선

벌써 꽃들이 지고 신록이 뒤덮고 있겠지요.

5月이 다가오고 있는 이곳 산골짜기 마을에선

소복소복 눈이 내려와 가지가지마다 쌓이고

다시 정오의 햇발 아래 가지 끝에 흩날리는

눈꽃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져,

결코 봄은 오지 아니하고 내내 눈만 내릴 것 같은

여전히 긴긴 겨울의 시간인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겨울 내내 봄만 기다릴 것 같던

제 마음들은 전부 거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이 오지 아니하는 까닭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벚꽃, 목련꽃, 그 흔한 개나리도 보지 못했지만

이곳에도 흉흉하게 불어대는 칼바람의 길을 피해

낮은 꽃대와 잎사귀를 달고 듬성듬성 길가에

눈 더미를 뚫은 자리자리마다 노란 꽃들이 놓여있습니다.

그 옆으로 새하얀 연분홍의 조금만 종들을 달아놓은

이름 모를 꽃도 보이지 않게 피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저는 그 꽃의 이름을 모르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굳이, 알려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봄은 오겠지만 더디게 오며

그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저는

내내 침묵을 터뜨리며 이곳에 낮게 움츠려

누군가의 발길에 짓밟히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눈 속에 파묻혀 새순이 돋아 오르길 꿈꾸겠지만

보이지 않게 아무 이름도 없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골짜기 마을에서 띄우는 두 번째 편지

 

장마가 들이치기 전

이곳 산골짜기 마을에선

나비들이 무리를 지어

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바닥에 낮게 내려앉습니다.

꽃가루를 뿌려놓은 것도 아닌데

꿀을 발라놓았을 리도 만무한데

맨흙바닥에 나란히 앉아

마치 마지막 볕을 맞듯

깊은 잠심에 빠져 몽상에 빠져

도저히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어

가만히 다가서려 하면

바람에 낙엽이 일듯

떼를 지어 파닥거리는 일렁임,

어쩌면 그냥 그대로 비에 흠뻑 젖어

날개도 없이 다리도 없이

이 땅에 스르르 녹아

그토록 사랑했던 꽃들에게로

돌아가기를 꿈꾸고 있는지도

그렇게 침묵으로 기도하며

아직도 전, 긴 장마일지도모를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골짜기 마을에서 띄우는 세 번째 편지

- 목각실 안에 나방

 

가는 비 오는 비 정해지지 않고

시시때때로 내려오는 장마의 어느 날

태양의 빛을 찾아 여행하던 나비들이

제가 일하는 목각실 형광등 불빛 아래

줄지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형광등 위로 서너 마리 아래로 열댓 마리

줄을 타고서 우수수수

나비가루인지 형광먼지인지모를

흑빛가루들을 파닥파닥

베니어합판 위에 잔뜩 흩뿌려놓고선

한 밤이 지나가고 나면 두서너 마리

힘없이 그 위로 떨어져 파르르르

다시 한 밤이 지나가고 나면 두서너 마리

힘없이 그 위로 떨어져 파르르르

이제는 서너 마리밖에 남지 않은 나비들이

형광등 위아래를 쓸쓸히 지키고 있습니다.

내내 애처로운 마음이 조용히 사무쳐

이제는 더 이상 비도 내리지 않을 것 같은

어느 화창한 오후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서

훠이훠이 날아가라고 간절히 기도해보지만

밖에서 나래 치며 부르는 친구들의 몸짓에도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찬란한 태양 빛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고이 날개를 접은 모습이

더 이상 나비이고 싶지 않아

어둔 그늘 속에 파묻혀 숨만 죽이고 있습니다.

 

 

    

산골짜기 마을에서 띄우는 네 번째 편지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고

땅위를 종종종 걸어 다니는

한 마리 새가 있어서

종종새라 이름 붙였어요.

방울이 달린 연분홍 꽃들에

긴 주둥이를 한껏 꽂고서

투명한 검정날개를 파닥이는

한 마리 나비가 있어서

요정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제 방 창문 아래로 보이는

볏짚지붕 위를 매일 들르는

초록날개로 노랑가슴을 터는

한 마리 새에게 인사를 하고

9시면 모두 차단된 등불 아래

갑자기 반짝이는 반딧불에게서

희미한 불빛의 희망을 보고서

하루를 집어삼킨 절망에 대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여요.

어쩌면 굳이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어쩌면 굳이 당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산골짜기 마을에서 띄우는 마지막 편지

  

하루 세 끼 오롯한 식사를 마치고

먼 산자락 사이 빠알갛게 피어난 하늘을

새초롬하게 바라바며 얼굴을 붉힐 당신, 당신을

저는 이 곳 먼 산자락 사이 산골짜기 마을에서

방금 막 피어오른 붉은 가슴으로 마주하고파

산 아래 마을 둔덕까지 한 걸음에 내달려갑니다.

 

그러나 당신은 물으시겠지요?

노을이 피어오르는 산골짜기 마을에서

왜 떠내려 와야만 하는지를...

그러나 당신은 알고계신지요?

노을이 붉게 피어나는 산골짜기 사이사이마다

마주한 산 때문에 붉은 하늘은 볼 수 없으며

이곳에 감춰진 신비스러운 푸른 꽃들은

세찬 바람에 오들오들 떨다 지쳐 뉘여서

한 줄기, 한 줄기 꺾여가고 있음을,

그 먼 산자락 수묵화의 여백처럼 아름다운

짙은 안개가 낀 마을 안에선

시작도 끝도 없는 안개비가 종일 내려

볕이 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 길 숨겨진 어둠 사이로 바닥에 내려앉은

개구리들의 난자한 창자와

이계에서 온 커다란 우주비행선을 닮은

나방의 퍼덕이는 날갯짓으로 섬뜩한 그림자들을,

그리고 당신을 향한 이 내 붉게 타오르는 걸음들이

얼마나 어지러이 검붉게 선붉게 피어나는 것인지를,

그렇게 노을이 피고지고 있음을...

 

그러나 당신의 마을에서 온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바라보던 그 먼 산이 분명, 이곳이었고

떠내려 오던 이 길을 되돌아가는 걸음 위로

한등성이 너머 창문마다 희미한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그 사이 도란거리는 소리들이 하나의 기도가 되어

이 어두운 한 밤 불 밝히는 별빛으로, 풀빛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그렇게 멀고, 아름다운 먼 산이기에 저는

당신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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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말

 

 

당신은 앳된 새들의 말로 이야기합니다.

찌르륵거리는 당신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어

사자의 말로 으름장 놓으며

날랜 뱀의 혀로 당신께 간청해보지만

여전히 찌르륵거리며 짹짹거리는 당신은

그저 옹알이를 할 뿐입니다.

혹독한 겨울날, 사람들의 구둣발에 짓밟혀

검게 물들어버릴 눈발들을 보며

할머니의 주름살을 떠올리고

잔인한 정오의 태양 아래 총성을 울린

한 사내가 못내 아쉬워

당신은 바람의 말로 구름에게 부탁하여

너무 찬란한 태양을 품어주기를 기도합니다.

처녀성을 잃어버린 슬픈 봄날의 끝자락

당신은 눈 먼 소녀가 되어

너무 높지 않은 하늘이기를 소원하며

어차피 무너져 내릴 모래성이지만

뜨겁게 포옹하는 파도의 말로 가 닿아

너무 아픈 우리네 봄날을 고이 보내줍니다.

그러나 저는 도무지 당신의 난해한 언어를

이해할 수가 없어

찌르륵거리며 당신을 흉내내보고

짹짹거리며 당신께 말해보려 하지만

그저 나의 모든 의미는 당신께 한낱 옹알이일 뿐

우린 서로 결코 가 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앳된 새들의 말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당신의 말을 배우지 못한

당신의 깊은 자궁 속 어느 거친 몸부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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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없는 자의 기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모두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섰던

신학교 뒷산 마루

혼자서 몰래 담배를 태우러

빠져나왔던 겨울날이면

뻣뻣이 언, 마른 나뭇가지에 서린 달빛에

무성했던 그림자들의 잔가지

도망쳐도 쫓아오고, 쫓아가도 도망가고

바람에 툭, 툭 분질러지는 소리

끈덕지게 늘러 붙어

그 얼마나 어둠에게 영혼을 팔기를

갈망했건만,

유유히 남아 등 뒤를 지켜준

긴 그림자 끝자락에 걸려

하늘의 것은 하늘로 돌아가시라고

땅의 것은 땅에 남겨지라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어

잘게 부수고, 갈아

담배연기처럼 바람에 실어 보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이란 그 얼마나

잔혹하단 말인가?

길가에서 술 취해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울음처럼

차도에 누워 발을 내밀고 있는

주정꾼의 겨울잠처럼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그 누가 미리

염불을 외울 수 있단 말인가?

 

추운 겨울 밤, 나는 아직

너를 지우지 못하고 허기져 거리를 헤매다

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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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작업

 

 

핀에 꽂힌 나비 버둥거리며

파르르르 파르르르

날개를 펴고

촘촘히 박힌 꽃가루 털어내려

파르르르 파르르르

날개를 접고

더듬이로 더듬더듬

바닥을 기고

진액을 토해낸 갈린 배

흐물흐물 누에를 치고

부러진 다리로 비실비실

박차고 나와

한 계절 웅크렸던 빈 집

버려두고서 멀리

머얼리

날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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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는 당신께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로 바람에 옷가지가 휘날리도록 해진 신발로

밤새도록 걸어 다니는 당신, 아, 그러나 당신은 모르십니다. 당신의

너른 옷가지가 바람에 휘날릴 적마다 떠올려보는 단추 구멍 사이

들어갈 바늘귀에 걸린 가는 실의 힘겨운 허물벗기와 당신의 구멍

난 신발밑창 숨겨진 단단한 굳은살에 갇혀버린 아직 여물지 못한

당신의 속살에 기대었던 내 한 숨을, 그래도 고도만을 기다리겠노라

고 마법의 주문을 걸듯 읊조리는 당신, 아, 그러나 당신은 아직도 모

르십니다. 고도를 기다리기 전 당신의 해진 옷자락 사이 드러난 하이

얀 살들이 모진 날씨에 모든 촉각을 잃어버려 당신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당신은 느낄 수도 없음을, 아, 당신, 당신은 단추를 잠그고

신발 끈을 동여매는 법부터 배웠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겠노라고 파리한 목마름으로 떨리는 당신의 메

마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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