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구트 꿈 백화점 (50만 부 기념 드림 에디션)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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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어른들을 위한 환상적인 동화

 

 

 모임에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기성작 합평으로 결정할 때 클라우딩 펀딩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들었다. 기존 출판사에서 외면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이 그 값어치를 인정하여 자금을 조금씩 투자한 책이란 이야기다. 확실히 그 값어치를 하는 책이었다. 현재 우리 한국 문학과는 전혀 다른 서사와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였다. 특히, 도입부의 환상적인 기획력은 이 책에 바로 빠져들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아주 먼 옛날 시간의 신에게는 세 제자가 있었다. 시간의 신은 이제 자신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세 제자에게 각자가 원하는 시간을 나누어 준다. 첫 제자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가져간다. 마음이 여린 두 번째 제자는 추억에 빠져 향수에 잠길 수 있는 과거를 가져간다. 그럼 대충 생각하기를, 보통 이쯤이면 마지막 제자가 아주 순간이지만 찰나의 현재를 가져갈 것이라 예상하기가 쉽다. 그래야 이야기가 매끄럽게 진행되고, 누구나 생각해도 미래,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설정이 이야기를 풀어가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제자의 선택은 생각지도 못하게 잠이었다. 인생에서 거의 버리는 시간과도 같은 잠을 왜 마지막 제자는 선택한 것일까?

 

 미래를 선택했던 제자는 과거를 잊으면서,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미래에 갇혔는데, 미래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모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과거를 선택했던 제자는 과거의 추억에 빠져 그대로 침체되어 버렸다. 이에 스승은 잠을 선택한 제자에게 찾아가, 잠을 자는 시간에 사람들의 그림자들을 대신 깨어있도록 하고, 꿈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달라구트 꿈 백화점의 사장은 바로 이 셋째 제자의 후손이다. , 꿈을 지배하는 족속이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 때문인지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는 사람들을 위한 수천 가지 꿈을 판매한다. 키스를 부르는 꿈부터,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꿈, 동물들을 위한 꿈, 낮잠을 위한 꿈, 유통기한이 지난 흑백인 꿈까지, 모든 종족을 망라한 꿈을 판매하고 있다. 주인공 페니는 이 달라구트 꿈 백화점에 지원하여, 사장인 달러구트와 면접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페니가 의외로 현실적인 사람이란 점이다. 페니는 꿈이 현실을 지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높이 산 달러구트는 페니를 채용한다. 달라구트 꿈 백화점은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인기 상품, 한정판, 예약상품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2층은 평범한 일상을 다루는 꿈, 3층은 획기적이고 역동적인 꿈, 4층은 낮잠용 꿈과 동물들을 위한 꿈, 5층은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지나서 군데군데 천연색이 훼손되거나 바랜 흑백 컬러의 꿈들을 판매하고 있다. 각 층에 맞게 매니저들이 있고, 각 매니저의 캐릭터는 마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처럼 색깔이 뚜렷하다. 페니는 입사 첫날 각층별 매니저에게 인사를 하고 면접을 보지만, 자신에게 맞는 장소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 1층 로비의 웨더 아주머니와 달러구트 사장이 일손을 따로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어, 그날부터 바로 1층에서 일하게 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첫날부터 백화점은 대성황이다.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백화점에 모든 물건이 동이나, 임시휴일을 갖게 된다. 일찍 퇴근할 생각에 모든 층 직원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백화점 모든 입구에 영업 마감 프린트를 붙고, 모든 직원들은 퇴근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달러구트 사장의 예약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사실 지금부터 이야기가 재밌기는 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자신의 맘을 정확하게 모르는 여자부터, 예전의 악몽을 계속 되풀이해서 꾸는 사람의 이야기, 니콜라스 불리는 산타클로스의 꿈을 파는 이야기, 남의 인생을 대신 살게 하는 꿈에 관한 이야기와 마지막 죽은 이가 나오는 꿈에 관한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기분을 만든다. 재미, 설렘, 긴장, 감동까지 두루두루 갖춘, 정말 잘 기획된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점이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이 작품이 서두가 지난 줄거리 삼 분의 일쯤 지났을 때 이 모든 그림이 벌써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부터 이 책을 솔직히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였다. 물론, 끝까지 읽었고, 결론적으론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나는 중간도 읽기 전에 그런 마음이 들어버린 걸까? 이 책에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아니면, 나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이다. 누구나 빠져들 수 있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미에 있다. 그런데 반대로 이 책의 단점은 바로 그 재미이다. 일단, 어느 정도 줄거리가 예상된 상태에선 그 재미가 반감되게 된다. , 환상적인 배경과 서사가 차츰 그 힘을 잃어가면서, 윤곽이 드러나면, 흥미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독자는 이 책을 좋아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 꿈의 제작자 도제가 만든 죽은 이의 메시지 같은 꿈 이야기는 이 글의 감동을 주고, 여운까지 끌어내기에 충분하기에, 내 개인적으로도 권장할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시리즈로 나오는 제2권에 대해서 나는 다소 회의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이 책이 주는 재미와 감동은 인정하지만, 지금 내가 추구하는 문학의 지점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나는 지금 갈등하고 있는 중이다. 문학이 과연 폼만 가득 잡으면서 어려운 이야기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재미를 추구하면서 쉽게 소통해야 하는지, 혹은 이 둘을 모두 잡을 수 없는 건지. 물론, 마지막은 지나친 욕심이거나, 과한 허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허영과 과장으로 포장된 그 이상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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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그린기린그림 2021-09-02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평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몽원 2021-09-19 20: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사과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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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가족 시적인 글에 대한 현기증 혹은 울렁거림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이 책을 포함하여 세 번째로 보게 되었다. 처음, ‘밤의 기별에서 느꼈던, ‘이건 뭐지?’와 같은 궁금증과 같은 충격이, ‘달에 울다.’를 통해 시적인 글이 주는 울림과 떨림의 취기로 내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런데 세 번째 접한 물의 가족에서 나는 갑자기 이 취기에 사로잡힘을 넘어서, 무언가 된통 당한 기분을 느낀다. 뭐랄까, 너무 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너무 똑같은 반복적인 시적인 운율과 분위기에 물렸다고 표현해야 할까? 한 마디로, 시적 소설에 대한 내 화두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 소설 자체가 앞의 두 소설보다 떨어지는 소설은 아니다. 만약, 내가 마루야마 겐지 작품 중 이 작품을 먼저 접했다면 아마 밤의 기별에서 느꼈던, 똑같은 충격과 신선함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전과 다르게 이 취기에 흥이 오르지 않고,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 걸까?

 

 소설은 처음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죽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처음부터 1인칭 주인공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소설을 전개한단 말인가? 귀신이라도 되어 전개한다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은 혼이 되어 그 고장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 첫 만남은 여동생 야에코의 출산으로 나온 아이였다. 야에코,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동생, 그 때문에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동시에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제안했지만 야에코는 거절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혼자서 낳았다. 너무나 천진무구해서 그토록 걱정했지만, 야에코는 자신의 아이를 혼자 거뜬히 낳고 보살폈다. 조부와 함께 살면서, 이제는 아이를 위해 일도 하고, 누구보다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사람들과 소통을 닫고, 깊은 산속에서 말을 키우며 살아온 조부는 이제 야에코와 손주를 통해 살아갈 또 다른 이유를 갖게 된다. 다른 가족들은 이 일을 모르거나, 아니 알지만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쉬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떠나간 시간 동안 가족들 사이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야에코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바다와 강의 경계 사이 하구에 있는 이 쿠사바 마을에 우뚝 솟은 아귀산에서 흘러내리는 담수처럼 가족들은 야에코를 받아들이고, 야에코가 낳은 아이를 자신들의 가족으로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사실, 이 소설의 이야기를 하려면 아직도 바다에서 일만 하는 아버지, 모든 못난 형제를 대신해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형, 위험한 일을 일삼다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남동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 이전 소설도 그랬듯이, 이 소설의 중심은 야에코이고, 야에코의 아이를 모두가 받아들이고, 살아가게끔 해주는 이 마을의 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때문에, 이 소설 또한 이전 소설의 기법과 같이 풍경을 중심으로 반복과 변주, 그리고 서사를 깨는 시각적 묘사들로 가득하다. 모든 묘사는 이전과 같이 아름답고, 어떤 면에선 조금 불명확했던 밤의 기별’(나중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에서의 물의 역할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느낌도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글을 끝까지 읽는데, 이전과 다르게 어려움을 느끼고, 이전과 다른 취기에 더해진 숙취까지 얻게 된 걸까?

 

 먼저는, 계속 비슷한 캐릭터의 반복적인 사용이다. ‘달에 울다.’에서 나온 야에코와 물의 가족에서의 야에코는 이름뿐 아니라, 성격, 분위기 등이 너무나 다 비슷하다. ‘밤의 기별에서는 비록 야에코 같은 중심적인 여자 인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야에코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샘가의 소녀가 등장한다. , 모든 작품에서 아버지 혹은 조부가 전쟁과 관련한 인물로 나오는데, 성격이 거의 다 비슷하다. 이 캐릭터들의 중첩을 보는 내내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중엔 다소 지루했다.

 

 둘째는, 너무나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묘사에 관한 집착이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나 한정적인 공간에 대한 묘사라고 해야 할지, 묘사하는 대상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 자신의 불소통에 관한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작가는 전혀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려 하지를 않는다. 그곳이 물에 관련된 곳이든, 산에 관련된 곳이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 어딘가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같은 곳에 대한 같은 묘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시적인 소설에 대한 호불호이다. 일단 이 말 자체에 내 개인의 너무 과한 이상의 투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말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마루야마 겐지는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로 어느 경지의 시적 소설에 다다른 사실만큼은 나뿐 아닌, 많은 사람들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정말 좋아하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예술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어느 정도 폼을 잡는 사람 아닌 이상, 이 책을 쉬 손에 잡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와,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한다. 시적인 소설은 정말 가능할까? 마루야마 겐지가 보여준 시적 소설의 가능성에 대해 일단 나는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그 지역적 한계성과 폐쇄성, 그리고 독자와 거리를 둔 소통에 관한 혐오 의지는 그의 시적 글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떻게 매번 새로워지고, 매번 다른 글로 누군가의 감정을 훔칠 수 있겠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당연히 나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시적인 소설에 관한 이상은, 시는 매번 새롭게 달라져야 하며, 그런 까닭으로 매번 새롭게 읽히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읊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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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몽원 2021-09-19 2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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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그 시적인 여운에 취해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가슴속에 깊이 남는다. 진한 여운이 남아 지금 내가 사과꽃에 취한 건지, 빨갛게 물든 달에 취한 건지, 흐드러진 야에코의 젖무덤에 취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아직 정리되지 않고 취한 상태에서 품평을 하는 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무언가 주절거리고 싶은 이 기분은 분명, 이 취기 탓이라 여겨본다. 한동안 나는 글쓰기는 재미에 있다고 생각했다. 재밌지 않은 글이, 혹은 본인이 재밌게 쓰지 않는 글이, 무슨 글이겠냐는 간단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본질이 거기에 없음은 내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재밌어도, 무언가 멈추는 지점에 대해 최근 생각했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는 지점, 그렇게 떨림을 가쁜 호흡을 잠깐 고르고, 진한 흥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달에 울다.’를 보고서 허튼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나의 글쓰기는 시적인 무언가에 대한 추구였다. 시에 대한 집착이 무언가 서사로써 길게 이어져, 깊은 여운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관념이었다. 시로서 무언가 그것을 느껴보았지만, 소설에서 그걸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런 글쓰기가 무언가 목도하게 되었다. 사실, ‘달에 울다이전에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소설 밤의 기별을 읽었다. 거기서도 충격을 받았다. 이건 뭐지? 어떻게 이런 시적인 소설이 있지? 무언가 쉬 범접할 수 없는 그의 기법에 충격적인 여운이 컸다. 그리고 아쉬웠다. 만약 내가 일본어를 제대로 알았다면, 더 각별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시적인 기법을 소설 속에 녹여 놓은 것일까?

 

 첫째는, 반복되는 풍경의 묘사이다. 사실, 풍경 묘사만큼 소설에서 애매하고, 마음에 와닿지 않는 문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마루야마 겐지는 같은 풍경에 대해 여러 번 묘사함으로써, 그 풍경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 이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속되는 병풍 속 노사에 대한 묘사, 사과꽃에 대한 묘사, 달에 대한 묘사, 그런데 기묘한 건 그 풍경의 묘사가 조금씩 다르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전이하는 것처럼, 풍경은 조금씩, 조금씩, 차츰차츰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변해간다. 그 풍경처럼 마을의 풍경도, 주인공의 심리도, 야에코도 변해간다. 비단, 이 소설에서뿐 아니라, ‘밤의 기별에서도 마루야마 겐지의 풍경 묘사는 비슷한 묘사를 택했다.

 

둘째로, 그가 각별한 점은 각 풍경을 묘사할 때마다 쓰는 암시와 상징에 있다. 소설의 병풍 속 노사는 자신의 할아버지이면서도, 아버지 같으면서도, 결국 주인공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저 산기슭에 숨겨진 주인공만 아는 사과밭은 주인공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 언젠가 그는 야에코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은 결코 다다를 수도 없고, 그렇기에 주인공 가슴 속에서만 깊이 간직된 이상향, 몽유도원도이다. 달은 계절과 함께 그 빛깔을 같이 품어내고 있다. 그래서 마치 사과꽃처럼 은은한 향을 품어내서, 야에코와의 관계와도 묘하게 연관을 가지면서, 결국엔 진다. 야에코처럼 혹은 주인공 자신처럼, 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인 촌장처럼.

 

 마지막으로, 그의 시적인 특별한 기법은 이 모든 것이 조금은 막연하다는 점이다. 어떤 것 하나 분명한 선이 없다. 마지막까지 그의 소설은 기승전결이 확실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시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그 시적인 암시나 상징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그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모든 불확실성이, 그리고 그 막연한 불안정함이 소설 전반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사람을 홀리게 하고, 취하게 하는 것일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사과꽃 향을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지만 사과꽃 향기에 취했고, 그 취한 달밤의 수많은 기억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느끼면서 떨리는 이 기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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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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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아버지의 신화화에 관해

 


 박범신 작가의 작품은 은교’, ‘소소한 풍경이후로 이번에 읽은 소금까지 총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전에 은교소소한 풍경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감성과 몽환적 풍경에 감동을 받은 탓에 조금 기대를 했다. 다만, 제목이 약간 마음이 걸렸다. 무언가 진부하고 올드한 감성을 풍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철에서 1시간 동안 약 60페이지를 읽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시대가 갑자기 거꾸로 역행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300페이지 분량의 장편을 읽을 때, 서두가 너무 장황하면 읽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어떤 절실한 화두가 있어서 선택한 책이라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냥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손에 잡은 소설이 초반에 지루하다면, 누가 끝까지 읽겠는가? 그 때문에, 잠시 시간을 두고서, 독한 마음으로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중간부터는 나름대로 이야기 전체적인 내용이 들어오긴 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까?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네 소설  대부분은 아버지란 이름에 신화가 덧씌워 있다. 폭군, 책임, 고생, 억압 등등, 아버지란 이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단어를 연상시킨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쟁 이후 베트남전 참가, 군부 독재 시대, 중동 파견 사업 등으로 아버지의 이름들이 겹쳐진다.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오셨고, 그 덕으로 나는 대학을 마치고,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특별한 것은 내가 신학대를 가겠다는 이유로 가출을 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쓴 17장의 편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신도 베트남전에서 군종이었고, 제대 후 바로 결혼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3번이나 다녀온 아버지의 절절한 삶을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접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를 신화화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미묘한 심리가 그 저변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신화화는 아들이거나 딸 자신의 신화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 아버지의 신화화를 통해 아들인 나 또한 신화를 대물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니 그런 심리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다. 물론, 이런 심리가 나쁜 건 아니다. 자신을 삶을 긍정하는 데 있어서, 가족의 영향과 힘이 가장 중요한 자산인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고 내 개인적으로도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신화는 지속되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재해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신화를 대물림한, 그 커다란 윤회와 같은 고리를 지속해야만 하는 걸까?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확립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은 일단, 이러한 기본적인 물음 속에서 시작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예로 선명우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세 딸의 아버지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일생 한 마디 불평 없이 살아온 남자가 아주 우연한 사고로 인해 집을 가출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 췌장암 말기라는 전조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인간을 통해 잊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면, 이게 사실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사고 당시 주인공이 본 소금에 대한 인상이 바로 자기 아버지와의 연결 매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로 더 중요한 건 이를 통해 그가 전신마비가 된 김승민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선명우가 아닌, ‘김승민이 된 것일까? 첫째는, ‘천명우로서의 그의 삶은 너무 고달팠다. 세상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책임이란 미명에 묶여, 자신이 아닌, 아버지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김승민의 삶은 달랐다. 그것은 유랑의 삶이었고, 유랑엔 지금껏 그가 맛보지 못한 자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가족을 위해 오직 회사에서 생산성이란 이름 아래 묶여, 그 구조를 평생 못 벗어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단 한 번의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그 구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자신을 찾고, 동시에 전혀 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진짜 가족을 만들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설정이고,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원론적으로 그 이전의 가족에 대한 선명우의 책임이다. 그의 이탈로 인해 한 가족은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여기에 대해 선명우김승민이 됨으로써 책임 회피를 해버린다. 너무 극단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두 번째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선명우를 강조한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설정들이 너무 길고, 그 설정들이 전부 이제까지 우리 한국 소설에서 오르내린 이야기뿐이다. 게다가 얼마나 중언부언이 많은지, 읽다가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결국 이 소설도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나열함으로써, 아버지에 관한 신화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조금 더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아버지를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숨으로 달래며, 이 소설에 대한 평을 끝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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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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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네 가지 코드로 읽고, 비교해 보는

 

 

 다 읽고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문장도 유려하고, 무언가 여성풍, 그리고 젊은 층을 대변한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델마와 루이스가 생각났다. 물론, 너무 올드하고, 매체 자체도 소설이 아닌 영화이지만, 왜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그런데 중요한 건, 너무 오래전에 보아서, 기억이 희미했다.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다시 보고서, 조금 숙고한 뒤, 이제야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일단은,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을 네 가지 코드로 분석해서 살펴보려 한다. 여성 코드, 동성애 코드, 일탈 코드,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 관한 코드이다. 먼저, 여성 코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누가 봐도 여성의 전유물인 냄새가 풀풀 난다. 문장 하나하나 표현하는 방식이라든가, 주인공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라든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 여성 코드를 표현하는 방식이 기존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여성 코드는 남성이라는 주적 하에 이루어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만 보아도 마찬가지로, 강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남성은 주적도, 그렇다고 동반자도 아닌, 그저 하나의 도구처럼 설정되었다. 그것도 그나마 아람이 조금 이용하는 도구이거나, 삶은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 이 소설에서 다른 부분에서는 그 역할 자체가 너무 미비하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자연스럽게 이 소설은 동성애 코드로 성 코드의 전환을 이행한다. 물론, ‘델마와 루이스에서도 미비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동성애 코드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두 여자는 짧은 입맞춤을 하고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를 훌쩍 넘어, 어느덧 2020년대를 넘어서는 지금 동성애 코드는 더욱 적나라해지고, 더더욱 진일보 하였다. 끈적끈적한 여름밤 소영은 벗은 몸으로 주인공 강이에게 똑같이 벗을 것을 강요한다. 그렇게 더운 여름을 견디기 위해 훌훌 모든 실오라기를 털어버리고서 까무룩 잠이 들면 그만인 것을 깨어나 보니, 소영이 어느새 주인공 강이의 가슴을 핥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름 둘은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밤이면 서로를 만지며 탐닉해 들어간다. 그런데 이 표현엔 한 가지 어패가 있다. 서로라는 말이 다소 버석거리는 감이 있다. 무언가 탐닉하는 이는 소영이라는 건 확실한데, 주인공 강이의 경우는 조금 두려워하는 느낌이다. 아니, 뭐랄까, 소영을 동경하면서도 무서워한다고 할까? ‘델마의 루이스에서 보여준 평등의식이거나 우정에 가까웠던 동성애 코드는 이렇게 무언가 계급 차이를 보여주는 동성애 코드로 다소 복잡하게 변모했다. 이 때문에 두 세대의 일탈도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는 거의 전적으로 남자에 대한 복수로 일탈이 구성되어 있다. 처음 여행을 출발할 때부터 델마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한마디도 없이 나온 것부터 시작해서, 루이스가 총을 들어 델마를 강간하는 남자를 죽이는 장면, 그리고 거의 종반쯤 계속 마주치는 화물차 운전자의 성적 희롱과 폭언을 참지 못하고, 두 여자가 총을 들어 화물차를 폭발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왜 남성을 향해 총을 들 수밖에 없는지 전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동성애 코드에서 계급 차이를 보여준 이 소설은 그 둘의 대립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누군가는 그 계급을 유지해야 하고, 누군가는 전복해야 한다. 주인공 강이 눈에 어른거리는 하얀 몸의 예쁜 소영은 언제나 자신을 학대할 뿐, 단 한 번도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빈부의 차이까지 둘은 양극에 위치에 있다. 만약, 어떤 시발점만 주어지지 않았다면, 착하다 못해 약간 멍청하고 무딘 주인공 강이는 그냥 이 모든 상황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읍내동 사는 주제에라는 말에 강이의 방아쇠는 당겨진 것일까? 모두 잘 사는 동네인 전민동에 사는 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혼자만 읍내동에 살았기 때문에, 줄곧 자신도 모르게 콤플렉스로 무의식에 박혀있던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동경했던 소영에 대한 공포의 근원을 그 말을 발단으로 찾게 된 것일까? 동성애 코드와 엇물려 공포심을 동반한 동경이라는, 경외라는 그 감정이 순식간에 증오와 원망이 되어버린 것일까? 소영을 칼로 찌르고 감옥으로 가는 것이 왜 최선의 삶을 위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이의 일탈은 이렇게 전적으로 소영이라는 대상 하나에 집착하고 있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 사실, 마지막 장면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젊은 세대를 보여주는 코드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 코드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내 뇌리를 때리기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이유로, ‘델마와 루이스가 문득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델마와 루이스가 보여준 일탈은 주적인 남자인 나조차도 전율을 느끼면서, 짜릿함을 느꼈으니까. 동시에, 그 일탈의 코드가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로 충분히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여운도 넉넉했다. 그런데 이 최선의 삶이 보여준 청춘 군상들의 일탈 코드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나로선 당최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이 절망이 청춘이라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기에도, 주인공의 집착 대상은 너무 협소하다. 물론, 여기에 이미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쌓인 계층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화두로 받아들이기에 이 소설이 그만큼 충분한 여운과 감동을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소설이 꼭 어떤 화두를 던져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그저 상황 묘사를 잘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이 씁쓸함은 무엇일까? 정말 내가 라떼는하는 꼰대로 변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이 소설로서 그 자부심을 잃어가기 때문일까? 여러 생각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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