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여인 - 인터뷰 소설의 의의와 한계 ; 들뢰즈의 개념을 차용하여 해석하면서

 

 

  왼쪽 관자놀이 쪽이 지끈지끈거린다. 목구멍은 평소보다 약간 더 피운 담배 때문에 가래가 맺혀, 떠놓은 물을 자꾸 홀짝거리게 한다. , 사실 목구멍의 걸림은 내가 썩 그리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관자놀이의 고통은 내게 있어선 특별히 살아있다는 자각을 일으키기에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건 의식하지 못하는 고통이고,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있는 온갖 망상들이라 나는 믿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 옳다 그르다란 관념들, 가족에 대한 환상들, 국가와 역사란 담론들 등등. 하지만 의식하고 있는 고통은 생생하다. 그리고 생생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 자연스러움은 자유롭다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물론, 마지막 이 논리들은 다소 불안정하다. 생생하다는 말이 자연스럽다에서 자유라는 개념으로 이전하기엔 불명확한 설명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혹은 너무 많은 설명들이 불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으로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생생하지 못한 것들, 무의식적인 공포들 혹은 그 무엇들은, 모두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그 무언가를 억압한다는 그 이유로. 이렇게 부자연스러움과 자유롭지 못함은 등가를 이룬다.

 

  시작부터 장광설을 늘어놓은 듯싶다. 그것도 어떤 문학적 뉘앙스나 분위기를 담아내기보다는 무언가 철학적인 사설들에 가까운 썰들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나는 골머리 아픈 들뢰즈의 글들을 한 뭉탱이 읽었다. 왜냐하면 이문열의 리투아니아 여인에 대한 품평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주객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 글을 이런 철학적 사유의 범주 아래 구분하여 평한다는 자체가 소설의 평과는 다른, 분명 이질적인 작업임에는 틀림없는 까닭일 게다. 그것도 거의 마지막 부분, 혜련과의 이별에서의 문화적 노마드라는 그 단 한 마디 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기는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달리 이 글을 이해할 길이 없어서,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왜 굳이 이런 망작을 썼는지 이해할 방법이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글에 들뢰즈의 사상을 대입시킨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거의 마지막쯤 왔을 때 확연히 드러난 문화적 노마드란 어원 때문이었다. ‘문화적 노마드란 철학자인 질 들뢰즈와 정신분석자인 펠릭스 가타리가 공동작업을 한 책인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들뢰즈가 그의 대표저서 중 하나인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란 개념을 어느 정도 미리 잡아놓았다고 한다. 사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 두 책을 모두 다 제대로 읽지 못했다. ‘차이와 반복은 읽은 줄 알았는데, 자크 데리다의 다른 책과 혼동한 거 같고, ‘천 개의 고원은 예전에 불문 스터디를 할 때 어느 정도 읽기는 했는데, 중간에 모임 자체가 파토가 나면서, 자연스레 그 책 스터디도 중단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노마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굳이 예전에 읽었던 질 들뢰즈의 논문들을 엮은 책들을 다시 들쳐보았다. ,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해불능이기는 하다. 그만큼 책들이 어렵고, 번역이 난삽하다. 아니, 체계 자체를 부정하면서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책의 개념이 담아낸 이야기가 줄곧 리투아니아 여인의 맥락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줄기가 되는 인물은 딱 두 인물이다. 화자인 주인공과 혜련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중심추는 화자 자체보다 혜련 쪽에 더 가있다. 왜냐하면 화자는 혜련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 이유로 끊임없이 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거의 인터뷰와 가까운 형식으로, 혜련에게 화자는 끈질기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혜련의 근원을 추적해간다. 인종적으로 외가인 리투아니아의 피와 친가인 한국의 피의 혼혈종이란 특수성과 더불어 환경적으로 미국이란 시민권을 가진 다국적 인간에 대한 어떤 동경과 의구심 혹은 호기심이 그 어떤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질문을 해도 그녀에게서는 그가 원한 답을 원할 수가 없다. 리투아니아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대탈출을 시도한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그녀 자신과 별 상관없다는 투이다. 아무리 화자가 민족적 정서를 얽어매려 해도 그녀 속에는 한때 그 모든 이민자들의 포용처였던 미국적 정서만 있을 뿐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저 다민족적인 사회 속에서 누구나 가진 비극적 설화이거나 역사의 편린? 사실, 그의 할머니와 이모들의 이야기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산가족적 상봉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30년의 모진 세월을 돌아 돌아서 만난 모녀들의 불편한 이야기, 그 속엔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짠함도 설움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온전히 미국적인 정서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혼 뒤 미국으로 돌아가 마치 미국인처럼 살 것처럼 결심하다가도, 주인공인 화자를 만나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현듯 느끼고서는 다시 생기를 찾은 것처럼, 그녀는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늘 그녀에게 이질적인 생경함을 선물해준다. 그녀 자신이 먼저 그렇게 느끼기 앞서 타인들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다. 화자는 그것을 인종적 호기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서구사회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이해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그것이 아닌 하나의 민족주의라는 마술적 집단의식이 가진 배척정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랬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이제 생뚱맞게 인도를 가로질러 세계 곳곳으로 유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정서가 그런 유랑자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화자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유랑자인 그녀가 추구하는 바가 각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분절적이고, 또 동시에 서로가 서로와 맞닿아 있는 그런 바다와도 같은 세계, 굽이굽이 파도가 각자 다르게 치면서도 함께 존재하는 넓은 바다와도 같은, 우리의 작은 품으로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그런 세계로 그녀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화자는 그 세계와 그 정신에 대해 응원해준다. 그렇지만 글쎄, 그저 관망자일 뿐, 과연 그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을지, 화자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이다.

 

  이 글에서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가정과 페미니즘이다. 화자는 책 중반에 자신의 결혼생활과 혜련의 이혼 과정에 대해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역시 어떤 의미로 들뢰즈와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프로이드가 만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하는 인물이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까닭으로 아버지와 원수라는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프로이드가 우리 인간 무의식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이끌어낸 중요한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을 지배하는 가부장인 아버지에 대한 배신을 늘 도모한다. 그 이유로 자신이 한 가정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가졌던 모든 것들에 대해 아들은 늘 적대시했던 만큼 동경해왔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가장 큰 재산은 어머니이다. 그 까닭으로 아들은 어머니의 다른 대리 표상으로 여자를 취한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 근저에 깔린 가정에 대한 욕구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에 국한해서 설명하는 프로이드를 비판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가정이란 소꿉놀이에 얽매여 있을 만큼 한정적이지 않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이란 울타리로 한정지음으로써 인간을 그 울타리 속에 억압해놓는다. 그 때문일까? 이 글의 화자 또한 가정은 이래야하지 않을까라는 자문을 늘 하고 있다. 어떤 동지와 함께 연극의 연장선처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이래야하고 부인은 이래야한다는 관념 하에 헤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반문한다. 너도 그 지긋지긋한 가정이란 울타리를 나에게 들이미느냐고? 나는 나 자체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없겠냐고? 그렇다면 그런 존재는 무엇이냐고 주인공은 묻는다. 이에 혜련이 보여준 답이 노마드이다.

 

  만약,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들, 가장 큰 욕구를 틀이나 체계와 같은 안정이라고 전제해보자. 아마, 가정도 이 틀과 체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 최소한의 틀들이 다 무너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까? 물론, 들뢰즈가 이 모든 체계의 전복과 기본 안전망 구축에 대한 부정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결코 한정적이지 않다는 측면에서 철학자로서 그는 한없이 욕망에 자유로운 인간의 기본적인 틀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로 체계에 대한 집착이 아닌, 체계와 체계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렇게 수 천 개의 욕망이란 이름의 고원 사이를 자유롭게 다니며 존재하는 유목민의 정신을 그의 철학 세계에 도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속에서 화자는 이러한 들뢰즈의 유목민 정신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부인과의 결별은 일종의 페미니즘과의 반동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왜 거기서 한 번 더 깊이 들어가 혜련을 통해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언급했음에도 혜련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도 무슨 상간의 추억이니 하는 돼먹지 않은 소리나 하면서. 왜냐하면 애초에 그 자신이 바뀔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까닭이다. 그 이유로 글속에서 혜련 또한 주인공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해도 또다시 가정이란 소꿉놀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 언급하고 있다. , 이 글은 애초부터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대화해보고자 한 시도인 것이다.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 글엔 그러한 시도로써의 의의와 가치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첫째는, 정말 글 자체의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소설이 관념적인 구도 하에 쓰였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이야기 자체에서 철학적 함의를 끌어내고, 그 함의를 변주하여 문학적 감수성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인터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애초에 내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본 이유도 무시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문열의 화법에 너무 익숙해져 식상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스토리가 빈약해서는 소설적 의의를 찾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애초에 형이상학적 견지 하에서 들뢰즈의 개념을 가져다 쓴 것이 다소 문제가 되었다고 본다. 들뢰즈 자체가 거의 모든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형이상학이 가져다 쓴 모든 권력적 용어들, 이데아, 우리말로 아주 변용해서 이상, 신이라는 관념, 국가, 가정 등등, 이 모든 체계들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 하에 이런 개념을 혜련에게 반대급부로 주면서 병치시킨 건 무언가 아귀가 맞아보이질 않는다. 물론, 이런 설정 자체와 시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런 시도는 좋다고 본다. 하지만 시도라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하는 것이 시도이다. 변하지 않을 두 관념을 그저 보여주기 위해 병치시키는 건 누구도 시도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 들뢰즈 자신도 천 개의 고원에서 노마드의 개념에 대해 인터뷰할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쓰기 어려웠던 부분이 음악에 관련된 부분이라고 했는데, 그 부분을 그냥 거의 그대로 차용했을 뿐, 어떤 문학적 변주의 시도 자체도 하지 않고 있다. 거기다 내 입장에서 또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들뢰즈가 가장 거부했던 민족주의적 특성으로 혜련을 거의 소설 초반부터 특정 지으면서 노마드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귀결시키는 점이다. 물론, 작가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혜련의 입을 통해 그 부분을 지적을 하고는 있지만, 애초부터 귀결이 너무 작위적으로 확정되어 있음엔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야기를 대충 정리해봐야겠다. 이 글을 앞에서 나는 감히 망작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거의 순수하게 내 입장에서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내 아쉬운 건 이문열이란 우리 문단의 거장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주저하는 건 아닌가하는 내 의구심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완전히 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글이라는 범주는, 아니 조금 좁게 소설이라는 장르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잘라내 왔기에 존속해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변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이 시대의 거장일지라도. 조금 더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주를 시도해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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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또 다시 출발점에 서서

 

 

  아마 내가 젊은 날의 초상을 읽었을 때는 스무 살이거나 스물 한 살적인 거 같다. 중요한 것은 그때쯤 한창 치기어린 젊음의 열정으로 자신을 소비하던 나는 이 책의 주인공처럼 미친 듯이 책을 읽었고, 미친 듯이 방황을 갈구했으며, 미친 듯이 사랑을 탐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전공이 신학이니 만큼, 밑도 끝도 없이, 아니 위도 한도도 없이, 사변적 진실을 추구했기에 당시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꽤나 감동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책을 폭식하기 시작했는데, 그 폭식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소화불량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 때문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도 기억은 나는데, 무언가 흐릿한 인상만 계속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는, 내가 꽤나 이 책을 읽을 때 조소와 냉소의 시선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왜냐하면 당시 내 또래에 비해 이 경험 저 경험이 많고, 다소간의 허황된 지식을 자랑하던 나로선, 자신을 비슷하게 투영하여 보여주는 이 글이 꼴 같지 않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해 겨울의 장면에서 겨울 바다로 가는 여정과 화자가 느낀 감정은 내가 대학을 입학하기 전 혼자서 겨울에 동해 바다로 갔던 기억과 매우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이문열의 글처럼 그렇게 과장된 미사어구로 치장되어 있진 않았다. 물론, 당시 소설보다는 시에 대한 열정이 과해, 그 과정을 시로 짧게 압축한 나와 이문열의 차이긴 하겠지만, 뭐랄까, 이 전체적인 어투와 문체에 대한 거부반응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소설 내내 거하고 과하게 나열해놓는 이문열식 문체에 나는 꽤 거북스러움을 느꼈으리라 두 번째 이유를 추측해 본다. 그리고 셋째는 스스로 그렇게 과신한 경험과 지식의 짧음에 대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가장 이 소설에서 흐릿했던 기억이 하구인데, 당시 나는 거의 아파본 기억이 없으므로 그러한 감정과 기질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너는 몸이 튼튼해서 이해하지를 못해?’라는 말이었다. 그때 생각하면 사실 별스럽지 않은 말이었지만, 이제 완연히 병이 들고, 평생 이와 같은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이제야 그 말에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적 우울함이란 정신적 예민함이 주는 고통과 절망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까닭이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치열한 논쟁과 문학회에 대한 일들은 사실 당시 내가 겪었던 일들은 아니었다. 그 일들은 차후에 겪었던 일들로, 어찌됐든 스물 살 적 나이에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이 그 때를 기억하여 쓴 글에 대해 온전히 체감한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하지만 이제는 내 나이가 소설을 쓴 이의 그 당시 나이를 넘었고, 경험 또한 더해져 많은 공감과 함께,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지나 간다. 왜 이문열일까? 왜 한국문학을 시작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이어야 했고, 나 또한 왜 그러했을까? 그리고 왜 지금 다시 무언가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어서 나는 다시 이문열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위의 질문에는 약간의 어불성설이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는 이 글을 별로 읽고 싶지 않았고, 때문에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분명 병과의 일별을 꿈꾸며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 서있는 것은 맞지만, 이 지점에서 사실 나는 이문열을 애초에 떠올리진 않았다. 그런데 우연과 우연이 더해져 이문열이 나의 시작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그의 치기어린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존재 같다. 아니면 나라는 인간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늘 무언가 구실을 찾고, 이유를 찾아, 정당화시키려는 기질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든 말도 안 되는 두 가지를 끌어들여서 접점을 찾으려고도 하고, 때문에 우연을 필연이라 우기기도 한다. 그 까닭에 지금부터 어떻게든 필연으로 가고자 발버둥을 쳐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왜 이문열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한국 문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논외로 치더라도, 내 개인이 왜 이문열로 한국 문학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지금 잠깐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는, 그 사변적인 문체의 동질성에서 찾아야 할 거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솔직하게 근본을 파고들면, 주제에 대한 동질의식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거 같다. 일단, 한국 문학에서 내가 아는 한 이문열보다 더 치열하게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관념적 주제에 대해 문제제기 해온 작가는 없다. ‘사람의 아들을 필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황제를 위하여’, ‘금시조’, 그리고 최근에 호모 엑세쿠탄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적 사상이 어찌됐든 혹은 관념이 옳든 그르든,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혹은 가장 타당한 보편성에 대해 그는 소설을 통해 줄곧 고민해왔다. 그 때문인지 늘 외국 소설의 거대담론에 익숙해있던 내게 이문열은 처음부터 친숙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 이유로 자기 거울에 대한 일종의 혐오의식 또한 존재해왔다. 게다가 처음에 언급한 그 사변적인 어투와 문체, 비록 나이가 들면서 정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과장법은 정말 보다보면 어지러울 지경이다. 특히, 지금 읽은 이 젊은 날의 초상엔 얼마나 망()이 많은지, 소망이나 희망이면 그만인 것을, 섬망, 미망, 열망, 갈망 등등, 끝도 없는 망()들 때문에 나 또한 새벽에 불현듯 깨 나의 망()과 또 다른 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칭찬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한자어의 난립으로 소설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질책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그럼에도 이문열은 이 두 가지 칭찬과 질시에 가까운 질책을 양립하여 넘어선 작가인 것은 분명한 거 같다. 비록 그가 한국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제시했다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나와 같이 사변적인 인간에겐, 그리고 서구 학문의 찌끄러기에 길들여진 인간에겐, 어차피 거대담론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런 소설이 아니라면 무언가 허전함을 느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내게 있어 결국 한국 소설의 출발점은 역시 이문열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왜 젊은 날의 초상이어야 하는가이다. 사실, 여기는 많은 어패가 있어서 어떤 장황설을 늘어놓든 변명에 불과할 것이란 진실을 먼저 전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 출발점은 애초에 사람의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연히 찾아온 젊은 날의 초상에 대해 나는 또 다른 시작점이란 지점으로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내가 아직 내 이야기에 대해 정말 정직하게 풀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물론, 지금까지 나는 열 개가 넘는 소설을 썼고, 거의 다 내 이야기를 했다. 정말로 순전히 내 이야기를. 그렇지만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고 썼느냐하고 누군가 되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라고 밖에 말할 방도가 없지 않을까? 사실, ‘젊은 날의 초상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의 다른 글보다 훨씬 덜 정제되어 있고, 때문에 과장과 치장으로 한껏 들떠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그의 젊은 날에 대한 아린 향수이며, 그 아린 향수는 당시의 퇴폐적 낭만주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그의 미망에 들뜨거나, 섬망으로 휘몰아친 낭만주의라고 해두는 게 더 좋을 듯싶다. 그럼에도 그가 꼭 쓸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부끄러운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기반이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을 이루는 그 출발점이었던 이유에 있지 않을까? 그 이유로 나의 출발점 또한 젊은 날의 초상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보려고 한다. 나 또한 모든 망()이 술이 되어, 낭만이 되고, 낭만이 자학이 되어, 밑도 끝도 없는 방황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부터,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니까, 그것이 내 진실이니까. 비록 그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하나의 아린 향수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거기서부터가 내 출발점이니까, 내 부인할 수 없는 거울이니까. 또 다시 시작해보련다. 문학에 대한 긴 여정을, 그와 함께 시작될 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연민과 끝 모를 허상에 대한 갈망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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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 붓다의 도에 다다른 살인자의 도

 

 

  이제까지 김영하에 대해서 제법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늘 그의 도발 방식에 대해선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첫 작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소설이 내 뇌리 속에 너무 각인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때문에 그동안 그의 작품을 품평한 글들을 찾아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없고, 거의 그의 단편들에 관한 글들뿐이었다. 게다가 더 의뭉스러운 이놈의 기억이란 게 늘 그렇듯이, ‘옥수수와 나빼고는, 내 자신이 쓴 품평을 읽는데도 무슨 글이었는지 생각이 1도 나질 않았다. 그저 지금 이 글의 내 첫 문장과 비슷하게 그의 섹시한 매력은 인정하지만 도발하는 방식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런 소리만 있고, 무언가 품평에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랄까? 이런 경우는 대게 두 가지 중 하나다. 첫 번째는, 내가 정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정말 그 글이 알맹이도 없기 때문에 빙빙 돌리다보니, 그렇게 된 경우이다. 물론, 그 글을 아직 소화하기에 내 자신이 덜 여물었던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동안의 나의 김영하에 대한 단상은 분명히 이런 키워드였다. ‘섹스어필’, ‘도발’, 그렇지만 무언가 알맹이가 없는?’ 그런데 이번에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고서, 이제까지의 김영하에 대한 나의 고정된 이미지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제 완연하게 섹스어필하고, 도발적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 분야에 무언가 하나의 일가를 이룬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오늘의 이 느낌으로 김영하의 글을 당분간 파기로 결정했기에, 조금은 섣부른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이 글 하나로만으론 충분히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먼저, 글에 대해 전체적으로 말하기 전, 이 글에 대해 한 가지 내가 가지고 있는 전제적 몰입도가 존재했음을 밝히고 싶다. 그것은 내 개인이 알츠하이머는 아니지만 뇌 쪽에 문제가 있어서, 이제까지 몇 번 기억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를 당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영화로 처음 이 글에 대해 소문을 들었을 때 흥미를 느꼈었고, 이에 누군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굳이 서점으로 해서, 미리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와 이 책을 골라 읽었다. 그리고 그 첫 장부터 나는 이 글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런 개인적인 이유들과 함께 또 다른 이유들로.

 

  첫째, 나는 이 소설이 구성하는 문장방식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의 구성방식이라고 말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내러티브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파괴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예 처음부터 이 소설은 그냥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시적인 문장들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사유적 문장들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둘 다 온당한 표현은 아니란 생각은 든다. 그렇지만 그 중간적 공간 속에서 문장들은 점층적으로 쌓여서 하나의 소설의 내러티브를 구성해나간다. 너무 길고 지루하지 않게, 물론 다소간의 반복이 존재하긴 하지만, 소설의 소재가 알츠하이머인 만큼 충분히 이 부분은 고려해볼만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 또한 점층적 구성 속에서 심지어 나중엔 수미상관적인 기법으로 온전한 하나의 원을 이룬다. 물론, 지금 이 소리들이 다소간의 허공의 붕 뜬소리처럼 들릴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중에 조금 더 보충한다면, 지금의 이 이야기가 다소간의 타당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 글은 사실은 간단하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가 26년 동안 살인을 하지 않게 되었다가, 다시 살인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중간에 교묘한 이중 삼중 장치들이 마련되어져 있다. 존재하지 않았던 딸에 관한 이야기,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박주태라는 남자의 이야기, 주인공은 그 박주태를 최근 그 지역의 연쇄살인 사건의 주모자라 여기고서 기를 쓰고 그와 딸을 떼어놓으려 한다. 그리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안형사와 동네 개새끼 이야기 등등, 어쩌면 주인공이 알츠하이머 환자이고, 게다가 살인자이기에 추정할 수 있는 이런 매우 당연하고 뻔한 장치들이 존재한다. 아니, 그렇지만 실은 존재했던 딸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26년 전 자신이 지워버리려고 했던 기억 속에 존재했던 딸에 관한 살인 이야기, 그는 그때 그녀의 엄마를 죽이고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전복된 차와 함께 그의 뇌는 문제를 일으켰고, 어쩌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렇게 멈춰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 아래 26년 동안 멈춰있던 뇌가, 살인에 대한 본능이, 그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글속에선 그가 죽인 그의 딸이 그의 실제 딸이 아니라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요양보호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 지역의 연쇄 살인범으로 단언한 박주태는 실은 자신을 의심하던 경찰이었다. 게다가 그가 안형사였다고 밝힌다. 하지만 주인공은 분명히 안형사와 박주태를 다른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떻게 자신이 자신의 딸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결국 그 지역 연쇄 살인범은 그 자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책을 몇 번 더 읽으면 지금의 이 구성이 날실과 씨실처럼 잘 엮인 그런 구성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가 죽이고자 한 인물들은 이런 주위의 배경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붙잡고 외우던 반야심경 속엔 이런 말이 있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물질은 결국 배경일 뿐이다.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살인을 하는데 그는 본능만 존재했다.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그의 살인의 대상은 그야말로 무차별적이었다. 거기엔 결코 선악의 구별도 그 원인도 없었다. 그러하기에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실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었다. 결국, 그의 살인은 공으로 가기 위한, 그 자신을 향한 도리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억 속에 달라붙은 딸과 갖가지 형상들마저 지워내고서 온전히 공으로 가고자 하는, 살인자로서의 장인 정신! 아니, 살인도심!

 

.......

 

  사실, 마지막 반야심경의 구절을 처음과 똑같이 되돌려놓아 글을 완성한 것을 보고, 나는 일종의 당혹감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 이 인간이 정말 제대로 하나 건졌구나. 이제 더 이상 장난으로 도발하지 않고, 일심을 다해, 도를 논하기까지 하는 구나. 때문에 그 다음 문장을 보고선, 작가의 의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덧대기를 해놓은 것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으로 끝을 맺어버리면 이 글이 너무 철학서적 같을 테니까. 마치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예수의 언어를 모방함으로써 전면 부인한 것과 같이, 붓다의 언어를 통해 붓다를 부인하는 모양새가 될 테니까. 물론, 여기서의 살인이 어떤 비유를 말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 종교나 철학의 오의를 통해 하나의 글을 종결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러할 경우 대부분 종교와 철학이 문학을 집어삼키기 쉬운 까닭이다. 하지만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하나의 소설로 붓다의 근본불교의 중요한 경서를 가지고 놀았다. 아니, 가지고 날았다. 어쩌면 그저 장치적 기법으로 하나의 농담처럼 사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농담일지라도 뼈를 단단히 붙여 누군가의 폐부를 찌를 만한 힘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 이런 글 한 번 써본다면 시원하지 않을까? 그 저의가 어떻든 간에.

 

 

p.s

 

  글을 다 읽고 여운이 심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영화는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분명 좋은 영화이기는 한데, 영상으로 텍스트를 담아낼 순 없는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영화가 이 글의 본질적인 살인의 도보다는 나름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려 했던 이유 때문일까? 이유가 어찌됐든 책을 본 사람이라면,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힘들리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저 글에 대한 여운을 되새김질 한다면 모를까, 아니 사실 그마저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영화가 나쁜 영화가 아니었음은 이야기해야겠다. 그냥 이 p.s 쯤이라 생각하면 좋을 거 같다. 불필요하지만 가끔 더 읊조리거나 덧대고 싶은 그런 인간의 심리, 뭐 대충 그렇지 않을까? 이 소설의 김영하의 마지막 단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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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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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

 

 

  5개월 만에 켠 넷북은 먼저 오랫동안 V3가 업데이트 되지를 않아 피시의 보안상태가 위험함을 가르쳐준다. 물론, 이 메시지가 매우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멘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의례적임에 못지않게 자못 관료적이기까지 한 나는 굳이 V3를 업데이트 하고 정밀검사와 최적화까지 진행한다. 그와 동시에 5개월 만에 문학이라고 일컫는 문자들을 읽어 내려간다. 늘 그렇듯이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혹은 문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온갖 상념들과 함께.

 

  이 소설의 모든 초점이 마지막에 맞추어진 까닭인지 몰라도, 처음에 사실 나는 다소간의 혼란 가운데 글을 읽어야만 했다. 주인공이 사형을 받은 까닭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굳이 무인도에, 그것도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진 무인도로 도망친다는 설정이 너무 작위적인 것 같았다. 게다가 서두의 보르헤스가 말한 모험 소설? 물론, 나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어릴 때 읽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단지 주인공이 무인도에 있다는 이유 빼고 이게 무슨 모험 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한 무리들의 등장,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긴 건 주인공이 어떤 노이로제인지 몰라도 그 무리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그동안 자신의 생활 거주지였던 고지대의 박물관과 예배당을 포기하고, 거의 늪지라고 말할 수 있는 저지대로 도망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조수간만의 차이로 밀물 때면 물에 젖은 채로 일어나고, 저지대의 늪지에서 식물 뿌리들로 연명하는 등, 웃지 못 할 해프닝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다 그는 그녀를 발견한다. 포스틴, 집시처럼 관능적인 몸매로 색색의 스카프를 두르고서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여자. 개인적으로 나는 여기서 주인공이 그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처음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어떤 여인의 묘사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들 속에서 그가 기댈 수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 게다가 관능적이고 늘 석양을 바라보는 분위기 있는 이성이라면 그 어떤 남자가 쉬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덫을 놓아둔다. 모렐, 포스틴과 모렐의 관계는 이 소설 속에서 명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모렐이 포스틴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단지 그 이유로 주인공이 극심한 질투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점점 이성을 상실해간다. 대담하게 포스틴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꽃으로 작은 화단을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스틴은 그를 향해 아무런 대꾸도 없고, 주인공의 화단에 대해서도 그 어떤 시선도 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포스틴에 대한 끝없는 갈애 때문에 결국 몰래 잠입한 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렐과 포스틴의 친구들조차 그에게 그 어떤 시선을 주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간, 여기서 나는 프랑스 소설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 현상에 대해 자신이 낮 동안 섭취한 이상한 뿌리로 인한 환각이 아닐지 의심한다. 아니, 심지어 모든 것이 꿈이거나 거짓이 아닐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 모렐의 연설을 통해 환각의 정체는 드러난다. 환각은 자신이 아닌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 환각엔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촉각과 후각, 한 발자국 나아가서 공감각의 이미지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허상들은 주기적으로 늘 반복되어 나타난다. 순간이 영원으로 남겨진다는 염원을 품고서.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통해 소설가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조금 더 주목해보고 싶다.

 

  첫째, 이 소설 서두에도 나오지만 이 소설의 배경인 무인도는 매우 위험한 곳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서두에 교묘하게 주인공에게 이 섬을 소개해준 이탈리아 상인을 통해 이 섬을 조사했던 증기선 선원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렸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와 눈의 각막이 죽어버렸다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 주인공의 죽음의 형상에 대한 복선을 미리 깔아놓은 셈이다. 물론, 이 글속에서 주인공은 그런 이야기들을 모렐이 자신의 영원한 예술품인 자신과 자신 친구들의 이미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소문을 냈을 거라고 추측한다. 동시에 그렇게 형상화된 모렐과 그의 친구들이 모두 자신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거라는 직감을 갖는다. 그러면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포스틴을 사랑하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절감한다. 그러함에도 그는 포스틴과 자신의 영원한 형상을 남기기 위해 모렐의 발명품을 통해 자신을 이미지화하여 포스틴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를 그 섬에 남겨두었다.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실체화하여 영원히 반복되는 거짓 형상으로 자신을 남겨둔 것이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쉽게 예술의 영원성이니 혹은 인간의 순간이 멈추지 않고 영원으로 지속되기를 원하는 본능이니 하는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 말고 달리 이 소설의 설정들과 주인공의 행위들을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언어들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보여준 것은 그 차원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절심함의 차원에 있었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된다.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고, 녹음을 해서 우리의 이미지를 이 세상에 남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촉각과 후각, 한 단계 더 나아가 공감각까지 가세한 영원한 형상이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 소설의 설정처럼 실상 그것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러하기에 여기엔 대가가 필요하고, 그 대가는 소설 속에서 처참한 죽음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렐도 그랬고, 주인공도 그랬고, 모렐이 만든 거짓 소문이겠지만 어쨌든 모든 이 섬을 조사했던 증기선 선원들조차도 자신들이 영원 속에 남겨지기를 선택했다. 만약 내 자신이라면 어떠할까? 과연 나는 순간의 영원한 지속성을 위해 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것이 소위 말하는 예술이며 문학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너무 거창한 이야기들은 경계하는 편이니까. 그렇지만 그 절실함만큼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본다.

 

  둘째로, 내가 주목한 부분은 포스틴의 존재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 부분은 거의 여담에 가깝거나 편지의 추신과도 유사한 부분이다. 말 그대로 포스틴은 포스틴으로 남겨두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저자는 다소 포스틴에게 의미를 부여한 장면이 있다.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은 포스틴에게 베네수엘라라는 거창한 국가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이 다소간의 정치적 상황과 엇물렸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1940년대 베네수엘라 정치적 상황에 대해. 하지만 인터넷에 나온 내용은 거의 없었다. 사실, 베네수엘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미스 유니버스를 많이 배출한 나라, 카라카스의 고원, 정치적으로는 차베스 정도? 내 개인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1940년대도 잘 모르는 내가 베네수엘라 1940년대를 알아보려고 하니, 당연히 단편적인 지식밖엔 얻을 수가 없었다. 이 소설 속에 아마 발렌틴 고메스라고 인용된 비센테 고메스30년간의 독재, 그리고 그 독재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저장된 많은 석유들이 외국 자본으로 유출되었다는 사실, 뭐 이 정도? 하지만 이 정도로 왜 주인공이 포스틴에 거창한 베네수엘라라는 명칭을 달았는지는 다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베네수엘라일지라도 그 국가가 연주되면 뜨거워졌던 그의 가슴처럼 무언가 함의적인 이중성을 포스틴에게 부여하고, 이를 통해 조금 더 포스틴의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여겨본다. 마치 우리의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진짜 나무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포스틴에게 나름의 시적 형상화 작업과 함께 정치적 함의가 들어갔을 것이라 예상해본다. 하지만 이미 이십대부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았던 나로선 포스틴의 추상성 쪽이 조금 더 낭만적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동시에 다른 구체성으로 포스틴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방향은 없었을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 한 마디로 좋은 소설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방향은 다소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구상의 소설을 현재 계획하고 있는 나로선 좋은 공부도 되었다. 동시에 그동안 백 년의 고독픽션들등을 통해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라틴 문학의 환상적 리얼리즘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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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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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카프카와는 다른 묘한 에로티시즘의 향기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사기 위해 처음으로 직장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 들렸다. 보통 온라인상에서 편하게 구매를 했는데, 왠지 오랜만에 서점에서 직접 오래된 책 냄새를 맡고 싶다는 기분이 든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처럼 깔끔하게 잘 정돈된 서점에서 예전 헌 책방에서 느꼈던 그럼 정겨움을 느껴볼 수 없으리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사이에 비치된 ‘모래의 여자’를 찾는 과정에서 그간에 봐왔던, 그렇지만 다소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정겨운 이름들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마르케스, 베케트, 이문열, 밀란 쿤데라, 카프카 등등,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복잡한 심경으로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들과 함께 나열했던 어느 시인들의 이름처럼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이 이름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한지 어언 6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6년 동안은 확실히 지난 십 몇 년의 내 문학에 대한 관심과 관점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글쓰기 모임이 등단이라는 특정한 목적과 수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까닭에? 그렇다고 하기엔, 그동안 내가 이 모임에서 등단 목적으로 글을 제출해본 것은 신춘문예에 고작 두세 번 정도이다. 나머지 숱한 등단을 위한 글쓰기 대회에도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는 ‘엽서시’라는 특정한 문학공모 정보 제공 사이트를 알고 있음에도, 근 1년 동안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이 글쓰기 모임을 참여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에 겨우 꼽을 정도로 방문해봤을 정도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공모전에 글을 내본 적도, 아니 어느 공모전이 어떤 형식의 글을 원하는지조차 거의 알지를 못한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모임에서 원하는 등단용 작품에 대해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세계문학전집에서 내 시선도 한국문학전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나브로 젖어들었다. 그런데 지난 번 모임에서 선택한 ‘몰락하는 자’와 이번에 선택된 ‘모래의 여자’를 통해 그간에 잊혔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뭐랄까? 달콤하면서 독한 관념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탐미의식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면, 강한 자의식과 그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으키는 집요한 집착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모래의 여자’ 몇 장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문장의 집요함이었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와 우리네 문장의 서술형식이 같은 까닭인지, 문장에서의 집요함과 어떤 집착이 끈적하게 달라붙어왔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묘했던 것은 문장이 끈덕지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고, 간결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하지 못할 내용상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글속 주인공의 벌레에 대한 집착, 그것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모래 속에 사는 벌레에 대한 집착, 좀길앞잡이. 그리고 그와 함께 딸려서 전해지는 모래에 대한 집착. 그런데 왜 하필 모래와 좀길앞잡이일까? 주인공은 여기서 갑자기 유체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모든 과학시간이면, 특히나 물리 시간이면 더욱 생경하여 잠을 자거나 공상의 나래로 멍을 때리던 나로선,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가공할만한 정보력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함을 한층 빛내주는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이용해보았다. 그런데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함께, 유체역학이 기체와 액체에 관련된 운동에너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나왔다. 즉, 한 마디로, 유체역학이란 것은 기체가 액체로 변해도 원래의 성질을 유지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이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연구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고체인 모래에 대해 유체역학을 들먹인 것일까? 물론, 글속에서 주인공은 모래가 지닌 특수성에 대해 나름의 논지를 펼치기는 한다. 먼저, 모래가 다른 흙과 암석과 달리 일정한 크기인 1/8mm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 크기가 다른 암석 파편의 입자와 달리 바람이라는 유체에 의해 가장 멀리 이동될 수 있는 크기의 입자라는 정의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이 모래의 유동성에 의해 많은 찬란한 문명들이 매몰되어갔음을 글 중간에 살짝 언급한다. 즉, 이제까지 모래는 모든 사물들이 사라져도 바람과 함께 그 입자가 지닌 특유의 고유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해왔다는 측면에서 주인공은 모래를 유체역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반부에 이 글은 다소 난해한 모래와 좀앞길잡이에 대한 이야기로 거의 전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서 갑자기 주인공이 이 좀앞길잡이를 찾아들어온 사구에 정착해 있는 어느 마을에 갇히게 되면서 글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어 간다. 사실, 원래 직업이 학교 선생인 주인공은 이 사구에 살고 있는 ‘좀앞길잡이’ 중에 다소 변이종을 찾기 위해 며칠 간의 휴가를 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의 한 집에 묵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그 집에 감금되게 된다. 그것도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처음에는 주인공은 이 모든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유를 알고 나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유라는 것이 고작 모래 속에 파묻혀 지은 집인 이유로 날마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까닭이다. 즉, 여자 혼자서는 그 집에서 날마다 해야 하는 중노동과 가사를 전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니, 앞으로 불어닥칠 바람이 세찬 날의 위험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렇게 살기 힘든 구조의 집이라면 그냥 나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이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진 도심이나 마을로 가서 살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여자와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의 그 어떤 항변에도 묵묵부답일 따름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해본다. 처음엔 꾀병으로 아픈 척을 해서 자신이 얼마나 노동력으로써 무가치한지를 입증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마을 사람들은 애초에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남자를 그대로 방치해둘 뿐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남자는 작정을 변경하여, 마을에 적응하고 있는 척하다 마을 사람들이 여자의 집에 생필품 물자를 공급해주는 날에 여자를 인질로 해서 자신을 그 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을 사람들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오히려 물 배급을 중단함으로써 결국,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남자는 결국 마을 사람들과의 어떤 교섭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절망감으로 인해, 아니 사실은 오랫동안 해묵은 여자와의 섹스를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삶의 방식과 마을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남자 그 자신도 그 생활방식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그 마을을 탈출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해와 수긍이라는 측면에서일 뿐이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 박탈에 대한 부당함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번에는 다소 오랜 시간을 걸쳐 탈출 계획을 세운다. 마치 남자 자신이 마을에 다 적응한 것처럼 시간도 들이고, 여자와 관계도 가지면서, 마을의 구조에 대해 넌지시 여자에게 물어 물어서, 머릿속에 마을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고서,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남자가 끊임없이 도주한 길은 어찌된 일인지 마을로 다시 회귀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주가 들켜, 반대 길로 남자는 열심히 달아나본다. 하지만 남자는 모래 늪에 빠지게 되고, 결국엔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생활은 다시 지속된다. 매일 똑같이 바람에 실려 날려 오는 모래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구슬을 꿰매는 일을 하면서 언젠가 라디오를 집에 들일 날을 꿈꾸면서....... 하지만 그래도 남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집 앞 한 귀퉁이에 모래 덫을 만들어, 까마귀가 잡힐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는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왜냐하면 잡힌 까마귀에 자신이 편지를 달아, 그 까마귀가 멀리 날아가 어느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의 이야기가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귀의 생활권이 인간의 생활권과 밀접하기에 그 편지가 십중팔구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쯤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제 그 마을에 온지 반 년쯤 된 것 같다. 그동안 여자는 임신을 했고, 자신이 ‘희망’이라 명명한 모래 덫에는 잡히라는 까마귀는 잡히지 않고, 어이된 일인지 물이 솟아올랐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모래의 모관 현상 때문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남자는 자신의 ‘희망’의 지표를 까마귀에서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로 바꾸게 된다. 왜냐하면 잘만하면 그 유수현상의 연구를 통해 얻은 물로 마을 사람들에게 협박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남자의 목표는 탈출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협박으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어차피 그 모래의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물로 세상에 이야기해봤자 누가 자신을 알아주겠는가? 그 사실을 알아주고 들어줄 청중은 이제 마을 사람들 밖에 없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이제야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글을 처음 읽을 때는 문장의 묘한 집요함에 끌렸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그러니까 주인공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강금되면서부터 문득,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떠올랐다. ‘마의 산’의 주인공의 원래 계획과 달리 어느 요양소에 방문하게 되었다가 그 자신이 폐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7년 동안 강금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폐병이 어쩌면 그 자신에게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요양소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끊임없는 관념과 독설들이 왠지 모르게 이 글의 시작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이 대다수 관념으로 점철되어 있던 글이었기에 이 글 ‘모래의 여자’에서 등장하는 사구의 마을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이 글은 그런 관념들보다는 사구의 마을 중에서도 특히 과부인 여자의 집에 갇히게 되는 매우 불합리하지만 특정한 현상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카프카 식의 글쓰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카프카의 ‘굴’에서의 강금처럼, 이 글 속의 주인공은 모래의 마을과 여자에 강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스스로의 강금이었던 카프카의 ‘굴’과는 전혀 상이한 구조이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강금과 풍유의 구조들이 사뭇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다 읽고서, 일부러 미뤄두었던 작가 연보를 보니, 이 야베 코보라는 사람이 일본의 카프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토마스 만과도 그리고 카프카와도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감춰진 에로티시즘의 향기가 났다고 말하면 좋을까? 사실, 카프카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달리, 한 마디로 그 이전의 서양 작가들과 달리, 근원적인 관념과 그 관념에 대한 끝없는 나열들의 형식인 글쓰기가 아닌, 근원적인 불안과 생에 대한 허무이거나 허위의식을 풍유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를 했다. 그렇지만 역시 서양 작가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관념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근원적인 불안이거나 허무의식조차 관념의 역작용이거나 파생일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하지만 이 야베 코보의 경우 역시 성진국인 일본 작가인 까닭일까? 처음부터 등장하는 좀앞길잡이서부터 모래, 그리고 모래의 여자와 마을, 모두 에로티시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니, 거의 대놓고 전면에 드러내놓았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하기에 글속에서도 그는 모래의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좀앞길잡이의 유혹 행위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왜 하필 제목이 모래의 여자란 말인가? 글속 주인공이 계속 벗어날 수 없는 모래의 마을 그 자체를 여자가 대변하고 있기에, 제목을 그렇게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처음부터 글속 주인공은 다소 생경한 좀앞길잡이의 변종을 찾아 사구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소 특이한 변종인 여자를 찾아 사구의 마을로 들어섰던 것 아닐까? 그러한 이유로 이 모래의 여자에 야베 코베는 자신의 성적인 판타지와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불어 넣었으리라 예상해본다. 정신적 강간이라는 새로운 병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이 아닌 자연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원초적 여자의 이미지로써.......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혹은 내 개인은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성적인, 그리고 나름 완벽한 이미지의 여인을 판타지로 그려놓았다면, 왜 주인공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악한단 말인가? 그것도 마지막쯤엔 거의 덧없는 혹은 허무와 같은 이름의 ‘희망’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글속 주인공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끝끝내 마을 사람들과 상이한 자아일 것임을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마디로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두 가지 양면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이율배반의 첫 이유가 되는 모래의 여자이다. 모래의 여자는 말 그대로 모래라는 늪이다. 사실, 남자가 가진 여자의 성적 판타지이거나, 고유한 이미지는 그동안 물이거나 바람의 속성과 관련되어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이 글에서 여자를 모래로 표현했고, 모래가 가진 유체역학적 이미지,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줄곧 사용해온 물과 바람의 이미지를 동시에 모래에 투영시켰다. 거기에 덧붙여, 모래의 속성이 지닌 잔인함과 공포를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다. 즉, 우리 남성들이 투영시킨 여성의 판타지에 스스로 갇혀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여성이라는 희망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거나 혹은 이 주인공 남자가 이 판타지를 벗어나 어디 갈 데가 있단 말인가? 사실, 글속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남자의 어떤 탈출도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모든 길들은 모래의 여자에게로 되돌아오는 길 뿐이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주인공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여자를 임신시키게 되고, 유수현상과 관련하여 덧없는 ‘희망놀이’에 빠져있을 뿐이다. 즉, 끝내 이 모래의 여자라는 희망에 사로잡혀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임신이라는 짧은 언급을 통해, 주인공 자신은 전혀 희망이라 명명하지 않았지만, 여자에 대한 희망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계속 전개되어져 감을 은근히 말하고도 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혼자만의 ‘희망놀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어반복일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의 근본적인 속성이 지닌 허상과 덧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 허상이 존재해야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이 글은 여자에 대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희망에 관한 글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정리해보려 한다. 오랜만에 본 세계문학전집의 이 책을 통해 잠깐 관념의 세계에 빠져본 기분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이 처음부터 관념보다는 에로티시즘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글을 해석하는 내 자신이 너무 관념적이기에, 결국엔 관념적으로 빠졌던 것 같다. 그래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허무하지만,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관념에 빠지는 것 그 자체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의 남자가 하는 그 덧없는 희망놀이처럼 허무한 관념놀이도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잠깐 혼잣말을 중얼거려보며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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