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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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인칭 단수 하루키적인 소설에 관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본 건 당연히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그 당시에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상당히 재밌게 봤다. 본 시기도 고등학교 때이거나, 대학생 초기였으니, 감수성도 풍부했을 터였다. 그리고서 본 작품이 단편 걸작선을 보고, ‘태엽 감는 새는 보다가 포기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일본 작가들과 비교해 조금 실망했다. 일단, ‘단편 걸작선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애 이야기거나, 혹은 음악 이야기 같은데, 내 머릿속에 이음새가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태엽 감는 새의 경우는 너무 지겨웠다. 솔직히, 읽다 포기했는지, 1권을 읽었는지조차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하튼 그 이후 그의 베스트셀러 작품인 해변의 카프카‘IQ84’는 보지 않았다. 그 전에 작품이 전부 재미가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생각보다 재밌었다.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첫째는, 한동안 칸트와 키르케고르의 약간은 지루한 자유와 불안에 관한 철학 개념들을 쭉 보다가, 오랜만에 본 문학적 감성이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둘째는, 이전과 달리 내가 조금 더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생기면서, 하루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이음새의 연결고리를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소설은 서두가 중요하다. 단편집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돌베개에란 작품이 처음부터 내 가슴을 후벼팠다. 특히 마지막 시구 벤다/베인다/돌베개//목덜미 갖다대니/보아라, 먼지가 되었다란 이 구절은 이 소설의 백미라 생각한다. 다소간의 감정의 빈한함으로 목마른 내게 충분히 아린 통증을 심어주었다. 세 번째 작품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란 작품이 이전까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 하루키식의 음악 소설이었다. 일단, 앞에서 말했듯이 예전에 나는 전혀 이런 음악적 기반이 없었다. 재즈도 잘 몰랐고, 더군다나 보사노바라니, 아마 무슨 헛소리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십대 중반부터 이런 류의 음악을 제법 들어온 나는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솔직히 재즈와 보사노바가 완전히 안 어울리는 장르는 아니다. Chet Baker 같은 경우, 보사노바의 가장 유명한 연주자인 Stan Gets와 협연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좋은 협연이라 말하기엔 좀 그랬다. 뭐랄까, 둘의 특징이 모두 사라져버린 느낌이랄까. 그런데 찰리 파커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찰리 파커의 특유의 경쾌한 트럼펫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닮은 보사노바의 음악을 완전히 묻어버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는 건, 작가의 좋은 권력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상상력이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설은 위드 더 비틀스였다. 아마 이 또한 개인적 사정 때문이라 생각한다. 글 속에 나온 여자 친구의 오빠와 비슷한 공포를 내가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 글이 촘촘히 잘 짜인 구성의 전개로 이루어진 글이라 말하긴 힘들다. 우연의 우연을 더해, 거기에 감성을 더해, 쓰인 글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무언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이 글이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B급 마이너의 정신으로 읽기에 좋은 글이었다. 나름 유쾌했다. ‘사육제는 다시금 내게 숙제를 안겨준 글이다. 물론, 글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 글에서 나온 교향곡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하지만 역시 내게 있어 교향곡의 벽은 너무 높아서, 못생긴 여자와 주인공의 수준 높은 대화를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사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나름 진중한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연애에 대한 지극한 이상이 표현되었다고 여기면서도,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게도 한다. 그렇지만 이 고개를 갸웃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이 글에 매력이라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일인칭 단수는 지독한 자기 성찰의 한 단면으로 쓰인 소설이라 여겨진다. 어떤 면에선 위드 더 비틀즈에서 나온 여자 친구의 오빠와 같은 공포가 작가 내면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전체적으로 이번 단편집을 통해 하루키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하루키 소설이 다른 일본 소설보다 잘 팔리는 이유가 있다는 점을 떠올렸다. 첫째는 덜 어둡다는 점이다. 정서적으로 극단적으로 어둡거나 혹은 변태적인, 대표적 일본 소설들과 달리 하루키의 소설은 어조가 담담하고, 나름의 유머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부담이 확실히 덜 하다. 둘째는, 나름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든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또한 나이가 들면서, 점차 무르익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나라 사람이 보기에 가장 정서적으로 안정된 일본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여러 면에서 괴리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 특유의 덤덤함과 유머 감각이 이런 부분을 잘 중화시켜서, 우리에게 조금은 더 친숙하게 읽힌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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