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뜸하다가 갑자기 뭔가 쓰려고 흰 종이를 펼치면 가장 난감한 일이 할 말이 넘쳐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른다는거다. 생각해보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긴 적은 놀랍게도 거의 없다. 끄적임이 체화된 이에게 주절주절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서. 하지만 갑자기 펼친 여백이 당황스러운 와중에 시간까지 촉박하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안 쓰거나, 남기든 버리든 나만 아는 용량 안에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들을 저장하게 된다. 아마 알라딘 서재에 글쓰기가 잠정적으로 중단된 지난 몇 달 간 수십 권의 책이 그렇게 안드로메다로 갔을 걸. 언젠가 꺼내 쓸 날이 있겠지 하면서.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거나 드물다는 걸.

 

 그렇지만 내가 쓰면서 내가 뭘 쓰는지, 쓰려는지 모르는 글이 기승전결을 갖출 가능성이 있나. 물론 여기서야 기승전결 따위 아무도 신경 안쓴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신경쓰잖아. 나는 나에게 제일 먼저 잘 보이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기다리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는 표지의 부제를 읽으면 제목에서 내용이 파악된다. 책을 결코 많이 읽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게으른 편이고 종종 산만하기도 해서 독서는 늘 그럭저럭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읽어서 좋은 건 원래 타고난 직관보다 좀 더 많은 직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아, 그들은 어떤 특정 상황에 처해 자신들이 결코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집단 강제주입 혹은 자발적 타협으로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구나. 나치 시대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니." 반면, <인류>는 제목과 표지 만으로 나치 시대의 증언이란 걸 알 방법이 없다. 이 책이 고고학인 줄 알고 소개글을 읽다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후 겪은 로베르 앙텔므의 인문학적 에세이인 걸 알았다. 초기의 나치 시대 수용소 문학으로 유명, 강제수용소 증언문학으로 꼽힌다고 한다. 수용소 문학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프리모 레비의 작품으로만 알던 책 읽는 사람에게 더 추가해야 할 작품들이 나와 반갑다.

 

 

 <그들은...>은 초판이 1955년, 재판이 1966년에 나왔다. 저자 밀턴 마이어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어느 마을을 방문, 10명의 전직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 출신의 다양한 직업/지위/직책을 지닌 평범한 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대화를 나눈다. 개개인의 상황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인터뷰는 자신의 입장을 늘어놓는 방식이기에 순간순간 지루해지기도 한다. 일반의 수용소 상황과 괜찮은 문장을 읽기 원한다면 <인류>가 더 나을 것. 하지만 둘의 문학성이나 인문학적 차원에서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거짓말처럼 하나같이 자신은 명령의 체계를 떠나 자유로운 의사결정으로 가해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그래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는 식이다. 마치 새장 안의 새가 새장 안이 세상 전부라 믿는 것처럼. 게다가 그들의 침묵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 직접적 가해자와 간접적 가해자, 명령과 묵인, 방조. 이들 중 무엇이 더 나쁘다 말할 수 있는가. 가해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나 자발적으로 가담했든 비자발적으로 가담했든 가담했다는 사실엔 차이가 없는데 그건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는가.

 

 

 

 이 책들은 결국 <생존자>, <히틀러의 철학자들>, <어느 독일인 이야기>,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와도 만난다.

 

 

 

 

 

 

 

 

 

 

 

 

 

 

 

 

 원래 인간은 자기에게 닥친 불행이 제일 끔찍하다고 믿는다. 왜 유독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라고 믿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가장 비루한 방법인 듯 보이지만 때로 자신이 겪은 일보다 더 심한 일을 겪은 사람을 보며 스스로 위안하고 거짓말처럼 치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닥친 슬픔의 강도가 다르듯 불행과 아픔의 차이 역시 천차만별이다. 어느 수용소가 가장 심했고 끔찍했고 참담했다는 얘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져있지만 자기 삶 구할 길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가장 처참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위의 책들이 다루는 개별 수용소, 개별 삶, 개별 경험에 본격 차등이 있더라도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털어놓을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째서 저자와 출판사만 달라져 출간되는 매번 비슷한 나치 수용소에서의 엇비슷한 경험을 읽어야 하는가 물으면, 나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늘 같은 카테고리의 책들에 관심이 가고 매번 꼭 읽게되더라는 결과론적 의미밖에는 얘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약 70년 전에 벌어졌고, 그때나 지금이나 작게든 크게든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이런 세상에 내가 산다고. 사는 일이 힘들다는 자각조차 못하며 그럭저럭 산다고.

 

 

 

 <인류>도 다른 저작들과 다르지 않다. 써내려간 방식, 입장, 상황이 다르긴 해도 결국 나치 시대의 강제 수용소를 바라보거나 체험한 데서 시작된 증언이다. 1947년 출간되었고, 저자 로베르 앙텔므 역시 20대에 겪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순간을 없던 일로 하지 못해 세상에 내놓는다. <인류>가 끔찍한 시간을 대상으로 회고처럼 씌어진 글이라고 볼 때, 문장과 단어 사용이 굉장히 서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려는 용기만큼 가상한 일이 없다. 감각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상황이 더 좋을 수록 혹은 더 나쁠 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배고픔을 '배고프다'는 말 대신, 두려움을 '두렵다'는 말 대신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우린 나치의 오롯한 피해자들이 겪고 본 일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존엄과 자유의 박탈을 통해 밝히는 죽음에 대한 공포, 수치, 치욕은 결국 인간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인류라는 단어로 만난다. 그는 필요 이상의 인류 단일화를 문제 삼고, 등급화, 차별, 예속, 착취를 고발하려 했다. 인류의 다양한 모습을 들춰내는 한편, 이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인류라는 말도 보탠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제는 피해자였다가 오늘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상황들에 비추어 보면. 모르는 것, 몰라도 되는 것, 몰라야 하는 것조차 각각의 책임이 따른다. 하물며 본성을 기반으로 자유에 의해 가해를 선택한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오래 전에는 목숨을 담보로 가해를 강요 당하는 2차 가해자들을 덮어놓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만 여겼다.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방아쇠를 당기도록 훈련시키는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의 말을 따르는 소년병,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순사보다 더 같은 민족을 탄압한 일본 앞잡이, 살아남기 위해 나치당의 편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그에 동조하거나 또는 끔찍한 행위가 잘못됐다고 여기면서도 묵살하는 평범한 사람들. 자기가 저지른 만큼의 비난과 처벌을 받으면 될 일이다. 죄가 없거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가 행한 만큼의 벌을 받고 사죄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모든 수용소 문학은 있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고발이다. 

 

 

 *

 북플이 없었다면(이조차 꼬박꼬박 기록한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기록한 리스트와 코멘트(생각나는대로 엉망진창 두서없음)가 없었다면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은커녕 목록조차 기억하지 못했을거다. 엄마는 내가 가져다준 <궁극의 아이>를 읽고 계신데, 집에 책이 두 권이라 다시 읽으려다 예전에 '모두 기억하는' 엘리스를 몹시 부러워했던 게 떠올랐다. 기억과 경험이 결국 생의 힘이라고, 인간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차곡차곡 기억하며 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위 책들을 써놓고 좋았던 소설에 대해서 써야지 했는데 다시 머릿속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다. 자주 무슨 생각 하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데, 실은 별 생각없이 살고 있는지도. 생각이 많으면 삶이 복잡해지는 법이니 이게 더 낫다. 적어도 지금 나한테는. 그렇다고 생각 없이 살자는 얘기는 아닌데ㅡ 요즘은 그런 사람도 참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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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5-03-3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 보니까 좋아요. 조으다..<인류>는 저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인데 마침 글을 써주셨네요. 저는 이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권 읽으면서 느낀 건 생각보다 어떤 구별 같은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나치=나쁜놈 이라는 간단한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내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더군요. 아무튼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 구별이 아주 쉽지 않더라도 그것을 어떻게든 해야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 나빠, 라던가, 아니면 다 그럴 수 있었어, 라고 말하는 것은 동일하게 안좋은 결과, 그러니까 미래 언젠가에 있을 반복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 어떻게든 읽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읽는 수밖에는 없겠죠. 우리가 할 일은.

기승전결에 아무도 신경 안쓰지만, 내가 신경쓰잖아...에 깊이 공감합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기승전결 아주 좋은데요. 안드로메다로 간 것들 중에서 몇 개만 꺼내와봐요.

아이리시스 2015-03-31 13:30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났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로메다간 것들.. 실은 별로 없을지도 몰라요, 갈만하니까 간 걸지도.. 오래전에 숨겨둔 예전 글들, 제가 쓰고도 좋아했던 순서대로 몇 개 읽어봤는데요. 거의 [결]에 늘 문제가 있죠. 확 타올랐다가 화르르 꺼지고, 예고도 없이. 제가 블로그에서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아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경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냥 썼어요. 제가 쓰지만 글의 흐름과 속도는 문체가 결정짓는 것 같아요. 저는 도저히 그걸 멈추거나 재촉할 수가 없어요.

문득, 저만 구별이 안 되는 게 아니구나.. 싶어 약간의 안도감을 느낍니다^^

yureka01 2015-05-2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처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가 어느날 전쟁소식을 듣고 총들고 나와 위협하던 이야기..동유럽 구 유고연방헤르체고비나의 이야기더군요..아마 유태인을 가두고 수용소로 보낸 말단 인물들도 비슷했을 겁니다. 이웃집의 아저씨가 남영동 분실의 고문기술자인것처럼...

아이리시스 2015-05-29 10:21   좋아요 0 | URL
네, 악의 평범성을 논하는 게 이제는 새로운 담론이 아니게 된지 오래고, 인간이 선악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점점 보잘것 없어지는 현상이 원래 그런지 그렇게 되어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크게 보면 살자고 하는 일들인데, 혼자 아니면 함께의 문제가 곧 나와 타인 즉, 인간의 차이인 것 같아요 :)
 

 

 

 

이제 놀라지 않는다

새가 실수로 하늘의 푸른 살을 찢고 들어간다 해도

.

.

이제 놀라지 않는다

모든 나무가 지구라는 둥근 과녁을 향해 날아든 신의 화살이었다 해도

우리가 과녁의 뚫린 구멍이라고 해도,

뽑힌 나무라 해도

 

나무는 자신의 절반을 땅 속에

묻고 있으므로,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밤을 견디는 것처럼*

 

<절반만 말해진 거짓>, 신용목

 

 

 

자유가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은 권태에 시달리고, 억압을 체험한 사람은 자유를 갈구한다. 우리는 대체로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가졌거나 가지고 싶은 것보다 우선하여 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의 처음은 가려진 절반을 찾기 위한 밤이었다. 어떤 걸 말하고 싶고 어떤 걸 말하기 싫은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하기 싫은지. 왜 좋아하는 건 싫어지고 싫은 건 좋아지지 않는지, 왜 내 소유가 분명한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결심은 허물어지는지, 자주 허무와 무기력에 시달리는지, 어째서 가끔 슬픈지, 어째서 종종 아픈지, 왜 만사가 아무것도 아닌 듯 여겨지는지.

 

 

 

새가 실수로 하늘의 살을 찢는 광경과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넣어 내 목을 조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안나 제거스의 『통과비자』에 들고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떠올렸다. 동시에 수많은 삶을 사는 듯 보이던 어떤 사람이 실은 단 한 명이었는지도. 다소 환각 같은 몽롱한 꿈 안에서 이 소설을 조용히 읽었다. 이 불명확하고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모래처럼 서걱이는 소설에는 실은 금지된 소망 즉, 경계를 넘어서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의 사연이 서려 있다. 실제로 넘고 싶은 건 국경(이곳)이지만 저곳이 이곳과 다르리라는 확신은 없고 단지 믿음 뿐이다. 비자를 얻고 통과하는 것의 의미는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천국과 지옥, 육신과 영혼, 사랑과 증오, 바다와 섬 만큼 먼 거리를 오가는 의미다. 하나를 지나치고 다른 것을 맞겠다는 의지,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얻겠다는 집념, 허락되지 않은 곳으로 기어이 가겠다는 눈물겨운 결심, 거절과 모욕을 기회로 삼겠다는 꿈. 선 하나를 넘으려 한숨, 눈물, 두려움, 외로움, 아픔, 불행은 물론, 죽음마저 감수해야 했으니 이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계를 떠나 저 세계로 가는 통과비자를 얻기 위해 현재를 북받치게 거머쥔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나치 시대 독일 망명문학은 토마스 만, 레마르크, 브로흐, 츠바이크, 안네 프랑크의 삶과 작품에서 엿보거나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온 걸로 치면 후발주자에 해당할 제거스의 작품은 굴복과 패배를 마다하지 않는 민중, 자유를 향한 절절한 갈망을 주제로 하는 노골적 반파시즘 경향을 보인다. 그것도 굉장히 밀도 높은 서정과 묘사, 아름다운 문체로. 저항을 말할 때 필사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 투사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괜찮다. 일제강점기의 1920년대 카프 문학가들은 막막한 시대를 자기연민과 연약한 감성으로 극복하려는 낭만주의 문학을 회피라며 비판했는데, 시대 상황 안에서 예술이나 예술가가 취하는 방식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에서는 취할 게 없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초월을 궁극으로 하고 질문을 구할 뿐 정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향과 기질, 신뢰와 극복의 문제로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오해하거나 매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거스는 회피도 직시도 아니라는 점에서 두 경향을 올바르게 융합시킬 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전체적으로 묘한 울림과 아름다움이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완성되고 세월의 무상과 시대의 전환을 체험하는 동시에, 뜻모를 아련함과 미련이 느껴지기도 한다. 첩보전과 연애전이 동시에 진행되지만 궁극적으로 회한에 닿는다. 어느 정도 『속죄』나 『체실비치에서』가 주는 소재나 감정과 닿아 있다. 1990년도에 출간됐으니 횟수로 25년이나 지난 작품을 이제 만나는 셈이고, 앞 두 작품이 2000년대에 나온 걸 감안하면 『이노센트』는 이 작품들을 쓰기 위한 전조전, 나아가 여러가지 시도였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매큐언의 긴 호흡과 우아하고 탄탄한 문장은 쭉 유지되어 왔고, 미스터리는 한층 치밀해졌으며, 심리전은 더 깊어지고 내면묘사는 더 탁월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애증과 회한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작가다. 사랑이 증오와, 순수와 타락이, 선과 악이, 삶과 죽음이 뒤엉키는 광경이 놀랍다. 

 

 

 

 

 

갑작스럽고 원통치 않은 이별이나 죽음이 있을 리가 없다. 영원한 이별이라는 명제 자체가 납득과 수긍이 안 되는 일임을, 여러 번, 더 많이 겪는다고 괜찮아지는 종류의 현상이 아닌 것을 모르지 않는다. 설령 우리가 헤어져야 할 때가 몇날 몇시 몇분 몇초인지 알고 있었대도 후회와 미련이 남은 자에게 제대로된 작별인사란 건 허상에 불과하다. 안녕,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괜찮아, 같은 말들을 몇 번 더 한다고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라지고 나면 왜 그딴 것들이 그렇게 아프고 서러워지는 걸까. 다시 생각해도 짧은 인생에 수긍 가능한 작별이란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사라진 것들과 제대로 작별하라는 소설이 있다. 솔직한 기분과 마음을 제때 전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일상을 통째 흔든다. 작품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시시했지만, 자신이 본 사실을 잊지 못해 평생 진실에 몸서리치며 살던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잊혀진다 생각할 뿐 아무것도 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훑고 지나간다. 벽장 안 검은 고양이는 시멘트로 묻어버리고 귀를 막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에드거 앨런 포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늘 과거와 미래에서 빌려온 인생을 사는 듯 아슬아슬한 현재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만 빛을 내는 진실이 더 늦기 전에 사라진 것들과 인사하라고 말한다.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잘 하는 사람을 볼 때 더욱 강해진다.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알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알 때 더 강해지지만 모를 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들을 만나게 됐나 보다. 잘 쓴 영화 이야기를 읽고 예술의 시대를 평정한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또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알기 위해.

 

『예술가의 지도』에는 이젠 익숙한 일곱 명의 여성 예술가의 삶이 담겨있다. 작품과 사랑, 만남과 헤어짐은 물론 일상과 죽음마저 허무는 해부는 동시대 수많은 예술가들과 함께 영화 그 자체로 그려진다. 멀고 깊고 오래된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또 복잡해서 다 잇기가 어려울 지경, 거트루드 스타인, 쉬잔 발라동, 이사도라 던컨, 루 살로메, 알마 말러, 조르주 상드, 베티나 폰 아르님의 일대기를 알면 19-20세기 유럽과 예술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감과 소통, 우정과 사랑, 미움과 질투, 증오와 애증이 곧 영감의 원천이고 예술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마법처럼 책이 덮인다.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시공간으로 예술여행을 떠났다 돌아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은 실린 서사적 평론들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미 읽은 글이 많지만 차분히 다시 읽는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영화라는 장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끄적이긴 하지만 영화 리뷰를 서사나 장치 외적인-이를테면 배우나 배경-것들로만 쓰는 게 무익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이상의 장치나 기법에 대해 분석하는 법을 모르니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문학(소설)을 대하는 자세와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면 더 많은 게 보이지 않을까 욕심이 생긴다.

 

 

 

 

한밤중에 네 식구가 탄 차가 길을 잘못 타서 삼랑진 고개를 넘어가던 어릴 때를 가장 두려운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상은 아픔, 배신, 이별, 죽음 같은 순간들이 더 괴로웠으나 이 경험은 세상이 종말을 맞을 때처럼 생명체가 전멸하고 나만 살아남은 종류의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거리와 시간과 속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렸고 산 위에서 내려다본 땅은 너무나 까마득했으니까. 주유를 알리는 빨간불이 들어온 지 오래, 도움 줄 지나는 차가 앞뒤로 한 대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하고 불완전한 상황에서, 부옇게 서린 안개로 뒤덮인 희미한 산 위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다. 처음에는 만만했다. 심상찮은 소년과 소년을 둘러싼 시대와 사건과 공기와 추억담과 진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쓴 이야기라는 『소년이 온다』가 여느 소설들처럼 급히 왔다 떠나갈 썰물같을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억울하게 소중한 이들을 떠날 수밖에 없던 그들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돌 때 이게 내게 내려진 형벌이구나 싶었다. 산 위에서 귀신이나 괴물이 나타날까 두려웠던 그 순간, 아빠가 귀신이나 짐승보다 사람이 나타나는 게 더 무서울 거란 말이 위로가 되었던가. 여전히 무서웠으니 그 말이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소년이 오는 건 전혀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을 만큼 컸는데 소년은 내게 오는 길을 모른다. 소년이 내게 오지 않을 거란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작가는 자주 이야기가 왔기에 그 이야기를 받아쓰기만 하면 됐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강 작가에게는 계속 소년이 찾아오고 또 왔던 게 아닐까. 그녀에게는 오고 내게는 오지 않는 어떤 소년이 있다. 소년이 아는 진실을 우리는 모르고, 우리가 모르고 싶어하는 것을 소년이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밖에 없다. 어딘가에 소년을 닮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지만 내 비겁과 폭소와 무력과 무능이 들킬까봐 괴롭다. 그날 이후 소년은 가끔 나를 왔다 가고 나는 매일 소년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기 전과 후로 세상을 나눈다면 예로 들 수 있을 경험이다.

 

 

또다른 시를 읽는다. 여자의 오롯한 생이 몇 줄 안에 있다. 긴 세월, 광활한 시공간이 파노라마처럼 촤르르 펼쳐져 인생을 아는 그녀와 모르는 나 아니, 다 살아버린 그녀와 덜 살아낸 나 사이에 파티션을 쌓는다. 31일이 1일과는 전혀 다른 날인 것처럼, 매월 마지막 날이 되면 비로소 페이퍼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제와 다른 오늘을 예상할 수 없고 들키지 않고 금기를 깨버려도 괜찮을 비밀스런 파티션을.

 

몸의 절반이 봄으로 건너가지 못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왼쪽은 가로등을 꺼버린 골목길이다 모세혈관마저 캄캄하게 돌아 나오는 길을 잊었으므로 그곳엔 지금 처음 남자에게 안겼을 때의 체온과 첫 입술이 서성이고 있다 심장도 쿵쾅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누군가 왼쪽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끊어버렸으므로 그곳엔 녹지 않는 눈과 시어머니, 남편 딸들이 나란히 눕던 단칸방이 있다 선산으로 시댁으로 떠나보낸 상여와 가마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고 있다 그녀의 오른쪽은 예순세 번째 봄이지만 왼편은 먼저 간 남편에게 세를 내준 것 같다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다 아니 왼쪽이 먼저 가서 함께 누운 것 같다 절반은 잔설이고 절반은 새 잎인 연옥의 하루, 오른쪽 절반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왼쪽이어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우익이다 지난 번 다녀간 딸이 해준 눈썹 문신만 사철 푸르다 이제 아이라인도 그릴 필요 없어, 딸 덕분에 왼쪽 절반에도 자랑처럼 무성하게 돋아난 그런 풀이다

 

<환절기>, 권혁웅

 

 

궁금하다. 절반은 어디 있고 또 절반은 어디 있는지. 남은 절반이 거짓이라면 숨겨진 절반이 진실이 맞는지. 처음은 어디고 끝은 또 어딘지. 그리움과 후련함 뒤엔 뭐가 있는지. 나무와 여자와 사랑과 불안은 뒤에 무엇을 숨기는지. 세상은 궁금한 것 투성이고, 나는 이 불확실한 성을 손 잡고 통과할 것들이 필요하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소설이든 이야기든 그림이든 기쁨이든 감동이든 슬픔이든 간절함이든 미련이든 매혹이든. 예쁜 옷이든 돈이든 나무든 꽃이든 멍멍이든 순대국이든 바다든 하늘이든 별이든 빛이든 순수든 일탈이든 그 무엇도 아니라면 어쩌면 일상의 유니크함이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슬프고 무서운 일이 일어날까 두려운 지금은 새로 시작할 책이 제발트의 첫 소설이라는 것만이 커다란 위안이다. 몇 개 덧붙이자면 금요일이고, 차가 생겼고, 고속도로를 달려 휴게소 핫바와 어묵을 먹은 뒤 백사장에서 별과 야경을 보고 파도소리를 들을 예정이라는 것, 집에 돌아와 떡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매운 떡볶이와 맥주를 마실 예정인 것. 이불 속에 우리 둘 뿐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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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4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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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6 1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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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0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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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1 1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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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6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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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7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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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2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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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2 2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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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8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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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8 2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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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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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이상 고기를 먹어본 적이 손에 꼽힌다. 많아야 일주일에 두 번, 어릴 때 식탐이 있었다면 커서는 덜 먹어야 속이 편하다는 걸 알아도 남은 음식을 두고 보지 못해 최대한 먹었고 지금은 체하고 배탈나고 어지러운 것보단 살짝 포만감이 느껴지는 상태에서 멈추는 게 편하니까 의식적으로 덜 먹으려 한다. 치킨에 관한 책을 읽고 고기에 대한 취향으로 리뷰를 시작하는 건 이 책이 결국 이 시대 대한민국의 먹을거리에 대한 현황과 유행과 가치를 반영하며 그로인해 과거와 현재를 둘러보고 문화현상으로까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매끼 고기를 먹거나 냉동실에 항상 고기를 쟁여두는 집이 더 신기하다. 어쩌면 식성과 음식 문화는 단순히 매끼를 먹는 것 이상으로 복잡다단한 취향과 성향과 기호를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정반대 정치성향을 지닌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걸 상상해볼 때처럼 식성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 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이 같거나 말거나 그저 상대가 먹는 걸 먹어주는 무던함과 무난함으로 괜찮을. 

 

한국음식은 두 번의 큰 충격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어난 음식의 혼성이고, 또 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를 통해서 밀려든 밀가루와 설탕이었다. 그러나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충격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다. 미국산 대두는 한국 음식문화의 근간을 뒤집어놓았다. 본래 콩을 많이 먹던 민족이긴 하지만 우리는 장을 담가 먹거나 두부로 만들어 먹었다. 그 콩이 식용유로 바뀌면서 식생활은 혁명 수준으로 변화했다. 콩은 기름이었고 사료였다. 콩으로 닭을 키웠고, 그 닭을 콩기름으로 튀겨먹었으니 식용유가 곧 치킨이다. (p.251)

 

먹는 건 곧 본능이다. 먹는 걸 저지당하거나 신경쓰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정치 얘기를 공통화제에서 배제하는 걸로 괜찮다. 하지만 정치적 성향으로부터 촉발되는 사고의 방향과 취향과 생활습관, 가치관이 다른 것까지도 괜찮을까. 그럴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고 못 살던 사람과도 언젠가 헤어지는데 평생을 걸고 살다보면 정치성향 좀 안 맞고 생활습관 좀 다르고 사고의 방향이 약간 틀어진들 뭐가 대수일까. 어차피 나는 나고 너는 넌데. 하지만 오랫동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통할 수 있는 한계치, 육아의 문제나 양가에 대처하는 방식은 또 다를 것이다. 이해와 인내, 노력이 계속되다 보면 언젠가 습득, 나아가 습관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함께 살면서 다를 수는 있어도 이해나 공감 없이, 닮거나 융화될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불행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불행하겠지만 반드시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니 역시 괜찮다고 생각한다. 취향과 기호는 쉽게 받아들이거나 어렵게 변할 수 있는 반면 너무나 빠르게 회귀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으니. 함께 삼십 년을 산 사람들의 식습관은 서로 닮는 법이니 우리 식구들이 육식에 대한 식성이 남달리 강한 편은 아니라는 결론.

 

나는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으면 세 번 중 한 번은 어김없이 소화불량이나 체끼와 배탈에 시달린다. 고기의 경우 더 심하지만 체질적으로 먹는 일에 최적화된 거뜬한 사람으로 태어나질 않았다. 삼겹살(+소주), 스테이크(+와인), 치킨(+맥주), 족발보쌈, 찜닭, 백숙, 갈비찜 등등 일단 먹고 나면 고기 종류 가리지 않고 적어도 나흘 이상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포만감은 잠시, 입에 넣고 삼킬 때까지만 좋았던 어이없는 기억도 많다. 치킨 신드롬과 사육되는 닭과 대기업과 농가의 커넥션에 불만도 많기 때문에 다만 나라도 적게 먹자는 생각을 갖고는 있다. 왜 하필 치킨(피자나 족발은 어떤가)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자꾸 책을 미룬 데 비해 한큐에 읽혔고 메시지도 명확하게 읽었다. 치킨은 후라이드, 양념, 간장, 파닭, 오븐구이, 닭강정, 양파치킨, 불닭 등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1997년 이후 단 한 번도 외식 메뉴 1위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다고 한다. (육계)시장을 제외하고도 순수하게 치킨시장의 규모만 연간 3조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고 현재 한국 치킨점 수는 35000에서 5만여 곳으로 추정된다.

 

 

라면과 믹스커피 그리고 치킨이야말로 한국의 지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음식일 것이다. 그 음식이 닿아 있는 사회의 접촉면이 워낙 다양하고 그 자체로 근대의 음식 형성과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세 음식이 한국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원조경제에 힘입은 바 크다. 밀가루와 식용유의 조합 없이 불가능한 것이 치킨과 라면이고, 믹스커피 또한 다국적 기업의 값싼 커피 원료와 프리마가 없었다면 생성 불가능한 음식이다. 한국 사람들이 지난 30~40년 동안 줄창 먹어댄 덕분에 가장 민감해진 혓바닥은 저 세 음식에 특화되어 있다. (p.74)

 

이 책은 치킨 신드롬이 일어나기 시작한 2002년 월드컵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자영업 대표로 일컬어지는 치킨 프랜차이즈가 탄생했는지 밝힌다. 수없이 많은 치킨 브랜드의 양, 구성, 맛, 성분을 평가하는 블로거나 치믈리에(소믈리에를 비튼 말)를 조명하고, BBQ, 파파이스, 교촌, 굽네치킨 등 브랜드의 성공과 그림자를 들춰본다. 치킨의 양대산맥으로 한때 큰 시장을 형성했던 찜닭과 대구에 본사를 둔 호식이두마리치킨, 부산에 본점을 둔 무봤나촌닭처럼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 시작해 쑥쑥 성장하는 중인 브랜드의 명암, 성장, 개발의 뒷얘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결국 마케팅의 승패로 이어지기 쉬운 피터지는 치킨 브랜드 전쟁이지만 가장 어렵고 힘들 때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원칙 아래, 여전히 소스와 염지, 건강과 칼로리를 중점에 둔 메뉴개발을 지속적 성장의 키워드로 꼽는 재량도 보인다.

 

나아가 자녀의 대학진학, 취업전쟁으로 목돈이 필요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아버지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붙잡은 유일한 구세주-닭 튀기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어느 동네든 한 집 걸러 치킨을 팔고, 아무리 차별화 한다해도 소비자 입맛에는 비슷비슷하게 느껴질 뿐이다. 대기업의 독점과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는 자영업이 완전히 몰락하고 골목상권을 붕괴시키는 계기로 작용했고, 납세의무자와 담세자가 다른 세금처럼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게 일반적이 됐다. 적절하게 통제하고 효율적으로 수익을 내는 데 골몰한 거대자본이 기술전수와 마케팅이란 이름으로 창업주에게 전가시키는 수천의 명목금, 장사를 하면 할수록 병아리를 키우면 키울수록 손해라는 농가의 인터뷰를 듣고 있으면 이 모든 게 좁은 공간에서 정해진 궤도만 돌고 있는 쳇바퀴처럼 답답하다. 치킨이 잘 팔리는 한, 닭은 비정상적으로 사육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사료와 기타 환경에 대해 들이는 비용은 갑인 본사보다는 을인 개인에게 전가될 확율이 커지며, 파이가 작고 하찮아도 괜찮을 것들이 커질 때 발생하는 온갖 문제점들이 오래 순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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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9-3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어느 브랜드가 제일 맛있답니까...는 농담이구요. 아무래도 그런 얘기를 하는 책은 아닌 듯 하군요. 그래도 조금 놀랍기는 합니다. 치느님 앞에서 이렇게 쿨해질 수 있다니. 저는 뭐 일단 치느님이 앞에 있으면 이런 거 생각하지말고 일단 먹고보자는 생각이....

아무튼 치킨은 그래도 가장 만만한 외식음식이자, 서민음식인 것 같아요. 없는 사람들이 그나마 기름기 좀 섭취하고 싶을 때 제일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구요. 물론 이제 치킨 가격도 슬슬 올라, 점점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은 음식이 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요. 어쩌면 정부에서 뭔가 손을 쓸 수도..이 정부가 없는 사람들 주머니 털어가는 데에는 점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시다시피 아무튼 저도 기름기 좋아하는 초딩입맛이라 치킨도 끊기는 끊어야 하는데 끊을 수가 없어요. 특히 교X에 계시는 치느님은...아무튼 그래서 어디가 제일 맛있데요? 저도 교X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아이리시스 2014-10-01 10:03   좋아요 0 | URL
진짜 많이 먹긴 해요. 그냥 뭐 저는 동물애호가니까 생명있는 동물이 태어난 이상 잘 살면 좋겠는데 먹히기 위해 태어나니까 너무 슬퍼요. 그것뿐. 생각해보니까 고등학교때 마치면 거의 매일 파파이스 치킨을 사먹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잘 안됐나 봐요. 지점도 최소로 줄었고 커서는 거의 안 갔으니까. 치킨책 읽으며 치킨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때 생각이 많이 났어요. 야자할 시간에 몰려서 너무 놀러다녀서 공부는 못했지만 추억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히힝. 교복 입은 여고생의 패스트푸드점, 노래방, 카페, 담배연기 이런 거 떠올리니까 뭔가 좀 인생무상같아요. 그때 꿈꾸던 어른은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니었는데..

저도 집에 초딩입맛 동생 키우고 있어서 잘 알아요. 얘는 먹는 게 거의 초인수준. 그래서 제가 계속 느끼한 것만 먹고 사는 이탈리아, 웬만하면 유럽쪽으로 이민가라고(ㅋㅋ) 설득한지 오래됐어요. 제가 유럽에서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 먹고 싶다고 전화하면 부럽다고 놀리고 그랬는데. 얘는 매끼는 아니고 아마도 매일 고기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가족중 그런 사람 아무도 없는데.. 교X은 광고모델도 좋잖아요. 맛있어요. 우리 동네도 제일 자리 좋은 곳에 있는데. 아참, 어디가 맛있는지는 안 가르쳐줬어요. 닭 크기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 한 마리를 튀겨내기 위해 한 마리 반이 필요하다, 이런 건 나왔었는데..

암튼 많이 먹고 부자됩시다, 맥거핀님.
 

 

 

 

앙코르는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크메르제국의 수도였던 곳으로서, 현재의 캄보디아 북서부, 씨엠립 근교에 위치한 왕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도성을 의미하며, 왕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9세기 초부터 15세기 초까지의 제국, 그 시대의 유적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802년, 힌두교도 왕이었던 자야바르만 2세가 현재의 프놈쿨렌 언덕에 왕조를 창건하고 점차로 국내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유타야의 압박을 받아 메콩 강 유역으로 중심을 옮긴 15세기 전반까지를 캄보디아사에서는 앙코르시대라고 부른다. (p.578. 옮긴이의 글)

 

 

학부 때 미술사학을 복수전공으로 생각해볼 만큼 좋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랬듯 주로 서양, 그것도 중세, 르네상스 아니면 19-20세기 미술사에 아주 얕게 발 담그고 있을 뿐이면서 나는 학문을 할 수도 있을 거라 착각했다. 예를 들면, 다시 진로를 정한다 해도 국문과 지망을 도무지 고려할 수 없는 건 모두에게 어렵지만 특히나 진절머리나게 싫은 「국어학개론」 때문이고, 미술사학 역시 전공으로 하거나 그쪽으로 나가기에는 얄팍한 호기심만 갖고 있었기에 생각이 실천으로 옮겨가진 않았다.

 

이제 세계가 주목해야 할 곳은 아시아라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한다. 비단 유적지, 유물 등의 문명 뿐 아니라 베트남 전통 식당이 이탈리아 요리 식당으로 대체되는 일련의 서양화에 대항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길을 걷기에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보는 일도 속상하고 서글픈 일. 식민시대, 약탈의 피해, 억눌리고 저평가된 아시아 고고학사를 고미술(건축물은 이미 제법 주목받는 듯)사 중심으로 조사, 발굴하여 학술적으로 끄집어내어 대중화 시킬 필요가 있다(학계에서 이미 진행중인지도 모르고 꾸준히 진행해왔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전히 미술사는 서양사에 집중되어 있다). 정체되고 해체되어 여기저기 널린 아시아 고고학과 미술사를 유럽에 견주어 뒤지지 않는 특수하고 고유한 문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아시아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아무도 우리의 것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이득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앙코르 고고학 역사 속의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에 대해 쓴 책이라기보다는 식민주의 시대의 프랑스의 역사책이라는 『앙코르와트』는 쉬운 책이 아니다. 파리의 프랑스극동학원과 국립동양어학교, 파리와 리옹의 기메미술관, 마르세유와 파리의 고문서관 등 관계기관의 약력이 폭넓고, 인물 약력 역시 헷갈릴 정도로 방대하고, 또 이 책을 일본 미술사학자가 쓰면서 일본(다른 아시아국)과의 연관성까지 다소 고려하도록 만들어졌다. 역사의 배후를 짐작하고 이해하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이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작가가 프랑스의 시점에서 서술했을 뿐, 캄보디아의 입장에서 새로 쓸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데서 같은 대륙인으로서 서글픔이 느껴진다. 그런데, 일본이 오로지 피해자로서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 속에서 일본은 늘 가해자였는데.

 

 

 

하필 왜 캄보디아일까. 아프리카는 얻을 게 많은 대지인만큼 위험부담도 커서 복불복이라면 넓지만 부상 못한 국가가 수없이 많은 아시아는 좋은 의미에서든 그 반대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 크고 인구가 많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고 개발부상중인 국가가 많다. 천 년의 신화 앙코르와트 씨엠립에 가도 아무런 지식이 없어 내게는 별 감흥이 없을텐데도 오랫동안 앙코르 문명을 동경해왔다. 신비롭고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약간 슬프고 아픈 역사마저도.

 

얼마 전 가짜 삼을 진짜라고 속여 판 일당이 20억 가까이 챙겼다는 뉴스를 보며 피해자들은 대체 진짜 가짜를 구별할 수도 없으면서 그 비싼 걸 뭐하러 사먹었을까 생각했다.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효용만을 바라고 믿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서도. 이 생각이 약간은 잘못되고 위험하고 일반화의 오류를 비롯한 온갖 오류를 품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먹을거리, 화장품, 명품가방, 모피코트, 거기다 미술품, 고고학적 유물들까지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것들에도 대입추론 가능하다. 나 역시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그림이 가짜라한들 '진품'이란 강력한 신뢰 아래 감상할 뿐 구별할 능력도 이유도 목표도 없으니. 

 

 

 

대표적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박물관(미술관)들이 당시 식민국에서 훔치거나 불법 반출한 유물들로 가득찼다는 사실은 새 소식도, 신기한 일도 아니다. 대영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는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전용관이 마련되어 있고, 이는 식민지의 미개성과 서구의 근대성을 밤과 낮, 흑과 백으로 대치시키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비슷한 지배력을 가진 유럽국들에 전통적으로 문명교화의 사명을 부여한다. 고고학적 기술의 성공으로 거둔 다수 복원도와 복제품은 식민지국(인도,캄보디아 등)의 정체성을 현저히 훼손할 뿐더러 전통을 빼앗고 역사와 정신을 망각시킨다. 빼앗긴 국가로서는 다시 돌려받기도 어렵고 불가능한 상황에 속이 쓰린 패배감과 전통을 지키지 못한 부채감을 떠안게 된다. 

 

『앙코르와트』는 19세기 후반(1866) 프랑스 해군 대위로 복무 중이던 루이 들라포르트가 조사차 방문했다가 접한 앙코르 유적에 매료되어 오로지 유물 약탈을 목적으로 조사를 수행하고 결과를 반출한 사정으로 시작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시작이 끝무렵 결과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프랑스는 당시 지배국 유럽 중에서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알제리, 카메룬,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도미니카, 이집트, 모로코, 콩고 등을 비롯한 광대 식민제국을 건설했다. 캄보디아는 1863년에서 1953년까지 근 100년간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다. 어릴 때부터 데생을 그리는 등 예술적 호기심이 많던 들라포르트는 1880년, 캄보디아의 풍물, 문물, 유적의 소개와 고찰, 유물반출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한 기행문 겸 예술 전반에 걸친 역사서 <캄보디아 여행>을 펴낸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빈번했던 유럽 식민제국의 약탈은 우연한 기회로 시작됐지만 차츰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지금까지도 유럽 각국에 엄청난 부를 선사하고 있다. 1907년 돈황굴에서 발견된 무수한 경전을 프랑스로 가져간 폴 펠리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앙코르 왕조 모두를 포함하는,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크메르 제국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고미술품과 유적의 슬픈 진실을 추적하고, 웅장함과 화려함을 고루 갖추고 있는 낯선 앙코르 유적으로 기꺼이 인도하는 책이다. 수많은 삽화와 사진으로 크메르 유적과 유물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 비록 성격이 다르지만 아시아 대륙이라는 동질성으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다시 비판해보게 한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땅과 하늘, 현세와 상상 속, 기독교와 유대교, 유럽과 이슬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언덕 위 도시와 메시아 국가라는 이중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서의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루살렘의 기원, 역사, 지정학적 위치를 논증적으로 서술한다. 성서 이야기가 제법 많아서 어려움을 느꼈는데, 대체 성서에 얼만큼 통달해야 다윗과 골리앗, 노아의 방주, 카인과 아벨 이야기처럼 명확하고 재빠르게 성서의 부분 부분을 짚어낼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종종 성서와 관련된 인용을 만나면 늘 성서를 혼자 읽을 수 있을 듯한 자신감에 불타오르지만 막상 내것으로 만드는 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불가능한 일이던지. 툭 던져진 성서 속 인물의 일대기를 어슴푸레 연결하다보니 결국, 성서를 버리고 이 책을, 예루살렘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닿는다. 읽는 사람의 목적과 집중에 따라 얻고자 하는 게 달라지는 카멜레온 같은 책이다.

 

성서와 예수, 순례와 종교적 성지(복음), 폭력과 희생이라는 키워드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기원을 찾고 말할 수 있는 땅. 예루살렘의 기본적 텍스트는 당연히 성서일 수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지정학적, 지리학적, 문화적, 인류학적, 종교적으로 대치하는 지점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각종 문제들-종교 분쟁, 영토 분쟁, 난민, 테러, 유대인과 아랍인-을 읽어내야 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세 대륙, 세 문명, 세 종교의 열병과 광기가 왜 생겨났는지, 다들 왜 그 땅을 손에 넣지 못해 죽고 죽이는 뻔한 싸움을 지속하는지를 추적하다보면 결국 현재 종교적 폭력과 유혈 희생제의, 보복과 홀로코스트를 능가하는 무시무시한 상황과 만난다. 거기다 원유原油의 패권다툼까지 더해지면 이 땅의 피바람은 당분간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득 보는 자와 희생되는 자가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책을 고르고 어떤 진실 혹은 지식을 기대하며 읽는 중에 내가 범한 실수가 있다. 제임스 캐럴이 이 책을 쓴 건 2011년도, 물론 그때도 이스라엘의 국제적 정세와 사정은 물론 역사적 평가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지만 커다란 분쟁이 다시 발발한 지금 와 보니, Jerusalem, Jerusalem: The Ancient City that Ignited the Modern World라는 원제를 『예루살렘 광기』로 바꾼 건 현상황(이스라엘(선진국)과 팔레스타인(하마스)의 직접적 대치상황)에 적절하게 일치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책이 가진 의도를 비튼 걸로 보인다. 적어도 나는 '현재'를 위해 책을 골랐는데 과거를 훨씬 많이 본 느낌. 내용의 키워드 중 'The Ancient City'을 빼놓을 수 없고, 이 모든 현상을 '광기'라는 단어 안에 가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거대한 예루살렘의 물꼬를 트는 방향잡이 노릇을 탁월하게 해낸 책이란 생각을 하면서 제목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국은 물론 세계 전역의 지도와 욕망의 고리를 어떻게 얽히고 설키게 만들었는지 밝히며ㅡ비슷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많은 루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려준 책 중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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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9-0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는 곳이 앙코르와트거든요. TV에서도 앙코르와트 관련된 다큐 같은게 하면 항상 멍하니 보게되는데, 진짜 이상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곳 같습니다. 꼭 앙코르와트 아니더라도 동남아시아 쪽은 한 번 쭉 돌아보고 싶어요.

아무튼 이런 앙코르와트 같은 경우를 보아도 양놈(?)들이 알고보면 제일 나쁜 것 같습니다. 위에 쓰신 팔레스타인 문제 같은 경우도 보면 저도 관심이 있어서 관련된 책을 조금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가장 나쁘게 생각되는 것은 거기에 개입한 영국,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예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개입을 하고 있죠. 물로 테러같은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어떤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근데 이번에 미국 기자 사건 같은 것을 보아도 미국은 다시 개입할 것 같더군요.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듯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렇게 다를 바는 없구요.

아이리시스 2014-09-05 01:20   좋아요 0 | URL
가까워서 가긴 쉬울듯한데, 그러고보면 꼭 거기 가고싶다기보다는 뭔가 아우라에 말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요, 중국일주도 하고 싶고(거기 진짜 사진 보니까 아무것도 없던데, 무려 북경도요..), 동남아는 더 말할것도 없으니, 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는 말하면 입만 아프죠. 이러다 아무데도 못 가보고 나이 들어 죽겠죠.. 나이 드니까 열정이 확실히 줄기도 하고..여기나 거기나 싶고.. 저희 아빠가 해외 처음 갔다 오셔서 그러셨는데.. 여행 엄청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전부 강대국들 싸움이죠. 성서,종교적 성지,신 찾고 해봐야 결국 석유 문제고, 핵 문제고, 땅따먹기고.. 그거 알려다 저 책 읽으면서 수명 줄어들 뻔 했네요-_-;;

우리나라는 중-러-미 전쟁나면 초토화될, 디딤돌이죠(무서웡).


참, 오늘.. 고마워요^-^

2014-09-12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13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2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3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문학만 읽는 사람 아니, 문학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지만 문학에 관한 한, 하나의 길을 만들고 싶다. 또한 내가 낸 길이 믿을 만한 문학사전이기를 바란다. 한편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책들만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렇기는 하지만. 문학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말로는 못할 한 마디였으면 싶다. 독서에 관한 한, 상대가 먼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배경지식의 결함은 진정한 관심과 경청의 마음가짐으로 극복가능) 결정적 단점이 있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까지도 충분히 괜찮았으니까. 마음과 의도는 왜곡되기 마련이고 나이를 먹어 좋은 점은 당연한 걸 두고 예전처럼 많이 오래 속끓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간혹 진짜 천재 얘기를 들었다. 커서 뭐가 될까 궁금했다. 흝어보고도 80% 이상을 완전히 복기하는 친구를 두고 누군가는 처음엔 이기려 했고 열등감을 가졌지만 본인이 너무 힘든 나머지 나중에는 그냥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 인정하고 말았는데 그 인정 과정이 참 힘들더라는 얘기. 천재 의대생인 엄마가 시인 아버지를 만나 진화론적으로 완벽히 결합된 자식을 창조하고 싶어했다는, 제 엄마를 소시오패스라고 아프게 말하는『신의 퀴즈』의 한진우 박사를 보면서 나는 한번쯤 고독한 천재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독서다. 한 분야의 천재적 기질을 발현할 수 없다면 최소한 수많은 시공간의 간접경험으로 내가 원하는 지식욕을 채워보자, 나는 이런 원대한 꿈도 품었을 거다, 아마.

 

 

1.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지만 전혀 다른 낯선 두 문명-아시아와 남미-을 연결하고, 고대 중국과 현대의 페루라는 2000년 터울의 시간을 교묘하게 잇는다. 진실은 현상황의 위기를 모면할 열쇠가 다른 문명의 과거에 있는 식이다. 외교부에서 일하는 아버지 덕에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랐다는 작가 이력으로 보면 여러가지 문화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창작된 것 같다. 차용했을 뿐인 공자, 노자, 손자 등 고대 중국 철학가들의 사상에 작가가 정말로 정통한지는 미지수지만 <손자병법>, <논어>, <도덕경>의 구절을 비밀을 푸는 열쇠로 배치하여 서구 문화에만 익숙한 우리를 불교, 도교, 카발라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보기 드문 소재랄 수 있는데 내용이나 구성은 인디아나 존스류의 모험담과 다르지 않다. 전생과 현생, 빛과 어둠, 선과 악, 입구와 출구,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 등 흔하지만 말로 하기 힘들었던 세계관-잉카 문명과 진나라 문명-을 자연스럽게 융합한다.

 

마추픽추가 눈앞에 있다. 칠레 시인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추픽추는 영혼의 평온함과 우주와의 영원한 결합으로 가는 여행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한없는 나약함을 느낀다. 남미에서 가장 경이로운 곳. 생명의 순환 한가운데이 있는 나비들의 안식처. 또 하나의 기적." (p.231)

 

진시황은 고대 중국의 다 빈치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린카이푸에게 죽어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다. 의심보다 믿음이 컸기에 과감히 맡긴 시도가 이토록 오랫동안 하나의 비밀을 품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자기 시신을 안치할 때 이룩한 모든 재산과 명예, 수천 명의 노역자와 장인, 왕녀들, 신하들을 산 채로 함께 묻어 무덤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명령하지만 린카이푸는 명령에 따르는 척 하면서 이 모든 사람들을 살릴 묘책과 방도를 강구한다. 언젠가 더 좋은 삶에 대한 꿈, 더 나은 세상이 오리라 선언한 린카이푸는 예언자였다. 그로부터 2000년 후, 현재 페루는 안보를 위협받는 위기 상태다. 대통령은 이를 비밀 리에 해결함으로써 국민을 보호하고 국가적 위신을 바로 세우며 주모자를 색출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 '열두 개의 바람을 다스리는 자'인 세인츠SAINTS 핵심요원 수호는 인종은 다르지만 마음만은 하나여야 할 할아버지 디에고와 함께 문제의 마추픽추로 향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수수께끼의 비밀이 뒤얽히며 수호와 오드리, 디에고, 로니의 활약이 펼쳐진다. 페루를 악의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한 누구아의 돌이 2000년 전 숨겨진 진시황릉에 있다. 열두 개의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돌을 가질 경우 날씨를 조종하는 절대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쌍의 단추가 있답니다. 좋은 단추, 나쁜 단추 이렇게 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좋은 단추를 나쁜 단추보다 더 자주 누르면 그들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결혼하기 전 1년 동안 이 점을 생각해보라고 하더군요." (p.389)

 

액션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영상이겠지만 주역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2000년의 간극과 진시황릉과 마추픽추의 조화는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게다가 좋아하는 소설인 <둔황>이나 <지상의 노래>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세월과 시공간의 간격이 넓고 깊지만 변할 것은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월(시간의 흐름) 속에 비밀을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어하는 자들이 수도없이 많지만(혹은 당시에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로 반드시 숨겨져야 하는 비밀도 있기 마련이지만) 세상이 변하고 다른 가치가 덮여 온통 새로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며 나무와 산과 하늘이 아는 한 완벽히 가려지는 비밀은 없다는 점에서.  

 

 

 

 

 

 

이 소설들은 밤새워 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도 의미도 충분하다.

 

 

 

2.

 

어떤 계절은 혼자만 발을 뺄 수 없게 하는 재주를 타고 난다. 먼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질 때까지 머물기도 싫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도시의 끝에서 안도감과 초조함을 동시에 느끼는 계절. 여름은 누구에게나 뜨겁고 특별한 기억이지만 유독 이 소녀들에게는 더했던 것 같다. 그 여름, 도시 개발에 밀려 점점 더 음침해지는 뉴욕의 변두리 공장지대 레드훅에서 분홍색 고무보트를 타고 기름기 섞인 바다로 나간 권태로운 두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판단을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믿는 신중함을 가진 가게 주인 파디도 좋고 소녀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떠다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변하지도 새로워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의 감수성을 지닌 진중한 소년 크리도 좋지만, 그 누구보다도, 꿈을 잃고 노래하는, 물가에서 온몸이 젖어 팔다리가 축 늘어진 채로 발견한 밸러리를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자기가 믿는 방향으로 들쳐안고 뛴 로맨티스트 예술가 조너선이 좋다. 모든 날씨를 음악으로 바꿔말하는 자연스러움, 말할 때 극적인 몸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거나 무대 뒤의 연인을 향해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낭만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조너선은 파디에게 그날에 어울리는 음악을 언급했다. 지난주에는 "거슈윈을 위한 오후네요. 대체로 맑고 살짝 상쾌하면서도 비가 올 것 같은"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제 밤에는 이렇게 물었다. "오늘 해 지는 거 보셨어요? 해거름을 그렇게 그리는 양반은 필립 글래스밖에 없죠." (p.61)

 

뉴욕의 공장 변두리가 어떤 분위기인지, 개발과 고립, 권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이 젊은 작가는 공감각적 묘사와 공포와 환상이 자아내는 이미지 형상화의 고수다. 미스터리 같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순수한 성장 드라마같다. 사라진 소녀들 중 한 명만 발견되고 소녀조차 떠있는 보트가 기울어지면서 친구 준이 이상한 그림자에 이끌려 물속으로 빨려들어갔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증언하지 못하는 와중에, 철없는 소녀들의 이상야릇한 마지막 모습이 조너선과 크리에게 포착됨으로써 모든 의심의 고리가 이들에게 쏠린다. 형사는 왜 밸러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를 묻지 않고 무조건 조너선과 크리를 의심할까. 진짜 둘중 범인이 있을까. 한 마을에 사는 소녀들을 안다는 이유로 은연중 용의선상에 올라 당하는 협조를 빙자한 수사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밤에 혼자 부두를 거닐고 있을 때면 크리는 어디 사차원 세계에라도 뚝 떨어졌으면 싶었다. 평생 한곳에 갇혀 살았다는 느낌, 이 좌절감을 달래줄 무언가가 걸렸으면 했다. 그런데 지금 저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두에 가만히 서서 그런 걸 바란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보트를 타고 강 위로 나가면 레드훅에서 해방감을 느낌과 동시에 레드훅 가까이에 머물러 있는 셈이었다. 저 두 소녀는 온 도시를, 온 해안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심지어 저 멀리 뉴저지의 항구들조차 저 애들 것이었다. 저 애들은 도시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 밤의 모험을 저 애들만 누리게 할 순 없었다. (p.106)

 

입바른 소리로 합리적인 척 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자기 삶에 충실하면서 타인의 삶을 따뜻하게 봐주는 일은 어려워서 대단한 일이다. 그냥 지나쳐도 됐을 일들, 어느 누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믿고 또 믿어주는 마음,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 이 엄청난 주인공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일은 생략하더라도, 막상 끝이 나니 개발과 소외의 경계에서 시름을 앓는 뉴욕 변두리 레드훅의 임대 아파트 단지와 동네 사람들의 작지만 반짝였던 여름날들이 간혹 떠오를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었던 그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너무 서투른 대신 너무 바르고 아름다웠던 온기를 우리는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내것을 예뻐하고 지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연인, 내 친구, 내 조카, 내 일, 내 집, 내 차.. 우리에게는 이토록 간절히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서 지키고 싶어도 지킬것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종종 잊는다. 타인의 외로움 속으로, 타인의 추억 속으로, 타인의 이기적인 동화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는 건 어떨까. 늦지 않게 이런 소설을 만났고 이제 곧 이 여름밤의 열기도 가실 테니까.

 

 

 

3.

 

 

미국에서 늘 좋은 반응을 얻었거나 얻고 있다고 소개되는 작가지만 이 작품은 한국계라는 정체성과 이방인이라는 낯선 땅에서의 고독을 모두 내려놓은 채 써내려간, 그간 출간된 작품과는 다르게 굉장히 메타포적이고 낯설다. 환상의 거미줄을 헤치고 작가가 던진 먹이를 받아들기 위해 몇 개의 난관을 거쳐야 하는 기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말지는 지금의 입장, 의지, 사고가 결정한다. 쉬이 잘 읽히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판이 자기가 키우던 수조의 물고기를 갑자기 전멸시킨다든지, 차터 지역으로 차출된 레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B-모어 지역을 떠난다든지 하는 대목에서는 99%의 확률로 문맥이 주는 이외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세계의 안과 바깥, 인내와 폭발, 수용과 도전의 대비는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지 억지스럽게 읽어낸 의미는 아니다.

 

미래의 미국 사회는 B-모어, 차터 그리고 자치주라는 기묘한 방식으로 각자 다른(우리는 계급으로 읽어내는) 세 개의 세계로 나뉘었다. 우리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각자가 판단해 보시길. 적어도 나는 내가 속할 만한 곳을 택한 상태에서 읽긴 했으나 세 세계의 장단점, 같은 점과 다른 점은 굳이 판단하지 않았다. 작가 역시 의도적으로 (무형의) 계급을 위시한 상태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구성한 것처럼 보였다. 판과 레그는 B-모어 지역 토박이로, 이 지역 사람들은 완전히 정체되어 변화와 도전을 저버린 삶을 산다. 여기서 만족이나 안정을 얻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기력에서 오는 권태, 두려움에서 오는 정체에 삶의 재미를 뺏겨버린 것처럼 보인다. 대다수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거나 과도하게 집착하는 법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차터 지역으로 차출된) 남자친구 레그를 찾아 나선 판의 결정은 고요한 물 위의 물수제비처럼 변하지 않던 B-모어 사람들을 조금씩 바꾸어나간다. 단지 사랑은 아니었다. 아기에게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해서도 아니었다. 시작은 어떤 끝을 바라보며 선택되지만 조금만 지나보면 우연이 운명을 이끌고, 운명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끝을 위해 시작했지만 어느새 끝과 시작은 각기 다른 지점에 서 있기도 한다. 판이 그랬고 B-모어 사람들이 그랬고 자치주에 살던 여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료 문제를 가장 크게 다루는 건 미국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계급 문제가 의료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때문일까. 의료 문제는 결국 돈, 계급, 생명 존중, 고독과도 연관되어 이 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을 예리하게 각인시킨다.

 

그녀가 길을 나선 것은 단지 레그를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레그가 어디로 갔는지, 또는 그가 심지어 살아 있는지에 관한 진짜 실마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그런 불확실성을 가지고 우리의 봉쇄 구역을 떠나려고 하겠는가? 레그가 자극제였던 것은 맞다. 그건 정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일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결코 하나의 사람이나 사건만으로 전체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아무리 소중하고 아무리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할 때마다 끊임없이 팽창한다. 종국에 가서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pp.95-96)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이창래 작가가 태양보다는 토양 같은 사람일 거라 추측한다. 가장 열악하고 뜨거운 순간에도 그는 꼿꼿하고 예리하게 몸을 낮춰 방어한다. 부르짖지도 숨지도 않고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간 읽은 세 편의 소설들 중에서도 나는 여전히 <생존자>를 제일 아낀다. 준, 헥터, 실비는 한 번 읽히고 잊혀질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 전쟁의 역사는 전쟁(의 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이전과 이후에 더 의미있는 무엇으로 변했다. 네 번째 작품으로 <가족>을 읽는다.

 

 

4.

 

 

태운 사람 모두를 죽인 여객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3개월의 갓난 아이를 추적해가는 슬프고 기이한 미스터리지만 책을 덮을 때 이것 말고 어떤 결말을 더 생각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말을 모른 상태에서는 충분히 재미있지만 막상 결말을 알면 이렇게 싱거울 수가 없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서정이 다분한 문장은 충분하지만 의도된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진실을 즐거운 반전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건이 기묘할수록 산 자들에 의해 조작, 은폐되는 일이 허다한 법.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들 사이에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들을 잘 포착한다. 할머니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손자의 사랑을 지켜주고, 탐정은 모두가 행복해길 바라지만 결국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소녀의 언니는 동생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 선택이란 걸 하지만 그건 어린 소녀의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소년은 모두가 욕심내는 소녀를 이렇게 지킨다.

 

릴리는 이야기를 지어서 말하길 좋아했다. 마르크는 아래 침대에 누워 릴리가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곤 했다. 가끔 릴리가 무서워할 때면 침대에 앉아 릴리가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주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릴리가 늦게까지 책을 읽으면 불빛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양에게 햇빛을 그만 비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p.409)  

 

 

 

5.

 

 

<세계 아닌 세계>과 <패자의 기억>은 혁명의 시대를 몸소 부딪쳐나가는 사람들의 긴 인생에 바치는 헌사다. 멕시코 작가 호르헤 볼피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 체르노빌 사고, 냉전체제 종식 등 20세기를 관통하는 러시아사를 배경으로 얽히고 얽힌 관계와 삶을 시간순으로 짚어가는 소설 <세계 아닌 세계>를 구성했고, 색다른 소설이 낯선 배경을 가리키고 있어 시간의 경과와 인물의 성장, 소설의 끝이 한 곳에서 만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프랑스 작가 미셸 라공도 <패자의 기억>에서 비슷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실제 기계공이면서 노동자였던 그는 2차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의 경험과 문학과 예술의 세계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넓힌 풍부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주인공 알프레드가 유럽의 20세기-가장 혼란한 시절-를 통과하면서 겪는 아나키스트들과의 추억담, 독서와 체험 사이의 괴리,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작가가 스스로 펴낸 20세기 회고록인 셈이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본 적 없는 자칭 '패자'의 굴곡진 삶을 펼치면 놀랍도록 가짜같은 진짜 역사가 흐르기 시작한다.    

 

알프레드의 말은 진심이었다. 바스킨의 그림에서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 플로라, 꿈속에서 본 플로라를 제외하면 알프레드는 플로라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머릿속 방황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욕망에 따른 동요까지도? 그는 플로라를, 바스킨이 그린 나체의 플로라를 갖고 싶었다. 알프레드는 그녀가 자신의 여자였을 때 원했던 것 이상으로 강렬하게 플로라를 탐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플로라를 향한 이런 열정이 난폭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플로라를 멀리했던 것이다. (p.435)

 

레닌, 트로츠키, 크롯포킨, 고리키, 블룸, 마흐노, 소렐, 페기, 말로 등 이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알프레드 곁을 스쳐지나거나 더없이 오래 머무른다. 그랬다고 해도 여전히 한때다. 한때 우리 곁을 지키던 사람들, 한때 우리 곁을 스치던 바람, 한때 우리와 같은 생각과 웃음과 희망들. 가장 복잡하고 혼란했던 시절 자의반 타의반 이별한 연인을 아쉬워하지 않을 도리는 없지만, 삶이란 어느 경계를 지나면 가능했었던 동화와 꿈이 실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리는, 어떤 기약도 확신도 없는 무엇 아니던가. 갖가지 모양의 삶이 허공을 떠돌고 그것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이기거나 실패했다고 말해질 수 없다. 

 

영원한 영원은 결코 없다. 아직 너의 삶에 간섭할 수 있다는 작은 진실 하나만이 그저 고마웠을 뿐. 비현실같은 비명과 신음과 폭탄 사이, 은은한 사랑을 찾아나서는 길에서 주어진 물결 따라 파도를 타는 것외에 다른 경로는 도통 허락되지 않는 여정이었다. 여기서 더 크면 우린 어떤 어른이 될까, 마음 깊은 곳에 이상한 질문을 품는다.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는 분명 있지만 겪지 않고는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 경계. 중간. 희미.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 사라졌건만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온 알프레드는 더이상 예전의 알프레드가 아니며, 다시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때 깨달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아 서로의 현재와 과거를 반추하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이 독서의 결과, 사랑스러운 레지스탕스가 나오는 <유럽의 교육>을 떠올리며 평소 궁금했던「10월혁명」과「스페인 내전」을 가르쳐줄 책으로 터를 옮겨갔다.

 

 

 

6.

 

그리고 몇 편의 소설은 기대와 달랐다. 그게 꼭 나쁜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누구나 설정, 소재, 캐릭터, 구성, 결말 중 하나라도 자신을 휘어잡아주기 바라며 책을 펼치지만 거기 미치지 못할 때 그 작품은 아주 빠르게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난 너에게 장미정원을 약속하지 않았어>와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은 바쁘고 강압적이고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이 세계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내가->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삶에 지친 현대 여성 밀라가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에 시달리며 자발적으로 찾은 정신과 상담에서 우울증을 진단받게 되어 입원한다면, <난 너에게->에서는 열여섯 살 소녀 데버러가 마음 속 또다른 세계인 '어두운 왕국'에 의해 광기로 타락해가는 정신분열증으로 부모님에 의해 병원을 찾게 된다. 부모님마저 이해하는 엄마와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는 와중에 데버러는 점점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밀라와 데버러는 병원에서의 상담치료, 비슷한 환자들과의 관계로 자신감을 안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헤이즐을 떠올렸는데 암 환우 모임에서 만나 서로의 아픔과 마음을 나누며 공감한다는 얘기에도 별로 공감하지 못했던 건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건 아픈 사람'이라는 뻔한 방식을 거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불안, 허무가 눈에 보이는 고통, 어려움, 혼란에 비해 다소 작게 느껴진다. 힐링 소설의 범주에 내멋대로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함께도 행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가든 스펠스>와 <집으로 가는 먼 길>을 나란히 놓는다.

 

 

7.

 

천둥꽃은 실제인물인 주인공 엘렌 제가도(Helene Jegado, 1803-1852)를 지칭한다. 그녀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 엄마가 어릴적부터 그녀를 천둥꽃이라 불렀지만 왜 그렇게 불렸는지 다 읽고나서도 잘 모르겠다. 한눈을 많이 팔며 읽어서 사연이 나왔는데 놓친 걸 수도 있다. 천둥꽃은 귀하디 귀하게 길러졌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유로 몰락한 귀족 가문의 가사도우미가 된다. 미스터리로 치면 '왜'가 빠졌기 때문에 장르로도 드라마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지만 브르타뉴 지방색과 1800년대 시대상이 오싹하고 광기어린 여인을 형상화하는 데 무리가 없다. 컬트 문화, 미신, 신비주의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벨라도나 열매와 비소의 독으로 가는 곳마다 그녀의 요리를 먹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이유와 동기를 밝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떨어진다. 그녀는 결국 재판장에 서지만 콜레라 창궐과 겹치는 바람에 희생자 수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꼈거나 재현하고자 한 부분이 사건 전체가 아니라 중세와 맞닿아있는 브르타뉴 특유의 민중성 묘사에 있었던 것 같다.

 

 

8.

 

2013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북한을 소재로 주목을 끌지만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되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이례적으로 낯선 스토리다. 한국문학이 북한을 소재로 쓴 작품에서 이념적 갈등이 없던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보는 북한과 서구가 보는 북한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고아원 원장의 아들이자 주인공인 준도의 직업을 특수훈련을 받은 일본인 납치담당으로 설정했는데 부조화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의 고위 간부에게 엄마를 뺏긴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애증, 엄마를 향한 깊은 그리움, 인민배우 선문과의 사랑. 일상을 놓고 보면 보통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루트 때문일 수도, 한반도에 사는 당사자로서 자동 형성된 이념을 뒤엎기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작가는 북한을 오로지 인권의 사각지대로 설정한 상태에서 특수하고 부조리한 면을 최우선으로 둔다. 준도를 정부 당국의 억압에 직간접적으로 항거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물로 설정한다고 밝혔지만 이데올로기 최전선 북한의 상황이 훨씬 뜨겁고 처참하다는 걸 아는 나와 우리에게는 싱거운 요리일 수 있다. 북한 인민이 그저 평범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9.

 

 

 

 

 

 

 

 

괴테, 실러, 토마스 만, 찰스 디킨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자주 마시기도 했지만 작품에서 언급한 경우도 있다.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프랑스 귀족이 초콜릿을 마시는 장면을 약간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퇴폐적인 면모를 그렸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남태평양에서 직접 카카오를 경작하면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것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힘든 노동인지 썼다. 시대가 변해 초콜릿 대신 차와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지금도 초콜릿 생산과 조리 방식은 열대 우림에서 유럽으로 카카오의 명성이 뻗어나가던 16-19세기처럼 대중 깊숙한 곳에서 변신을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다.

 

그중에 아동노동은 가장 나쁜 경우에 속한다. 비슷한 나쁜 일들은 도처에서 같은 방식으로 발생한다. 바나나, 커피, 초콜릿, 카카오. 뭐 하나 다를 게 없다. 특정 지역, 특정 기후에 재배되는 돈되는 작물에 대한 착취가 카카오를 강타한다. 카카오의 핑크빛, 핏빛 역사를 되짚으며 나아가는 달콤하면서도 잔혹하고, 매혹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책이다. 카카오의 과거와 현재, 생태와 재배법까지 모든 것을 다룬다. 유리잔에 찰랑이는 맑은 핏빛 와인의 향과 혼자만 아껴마시고 싶은 맛. 온갖 비밀을 품은 이 작고 붉은 빛 나는 갈색 열매는 가히 열대 우림의 승자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협정 182조는 최악의 아동노동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여기서 아동이란 18세 이하 모든 사회 구성원을 말한다. '최악의 아동노동'이라는 표현은 노예제, 인신매매와 같은 노예제와 유사한 행태, 학교에서의 노예 노동과 강제 노동 및 의무 노동 같은 농노 노동, 무장 투쟁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을 포함해, 아동 매춘 제공 및 알선, 포르노나 유산 포르노 제작, 마약 거래에 이용하거나 불법 행위에 아이들을 연루시키는 행위, 아동의 건강과 안정, 도덕에 해가 되는 노동을 말한다.

 

2000년 서아프리카 카카오 농장에서의 아동 노예를 다룬 내용이 언론에 나왔다. 독일, 영국, 미국의 중앙지에 기사가 실렸고, 주요 방송국은 끔찍한 영상의 르포를 방영했다. 아동 납치와 강제 노동에 대한 세계적인 비난이 일었고, 국제노동기구는 서아프리카의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가나, 나이지리아에 대한 대규모 조사를 단행했다. 조사 대상은 최악의 아동노동 행태들이었다. 강제 노동과 벌채용 칼을 사용하는 위험한 노동, 과도하게 무거운 카카오 자루 운반, 독성 살충제 살포 등이다. (<신들의 양식, 인간의 욕망-카카오> p.83)

 

자, 책을 읽었고 페이퍼도 마감했으니 어떤 의미(-적어도 독서)에서는 이 계절을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까. 책으로 완벽해진 계절 따윈 살면서 단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오래 전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 독서는, 결국 찾지 못할 완벽한 책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고, 삶은, 결코 없을 완벽한 생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며,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믿는 완벽한 짝을 갈구하는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완벽한 계절이나 완벽히 아름다운 날들 같은 것들을 나는 믿지는 않지만 여기 아닌 세상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편이 살만한 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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