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쓰고 싶은 것들을 꾹꾹 눌러담아도 시의적절하게 뱉어내게 되는 건 처음과 상관 없는 또다른 성질의 이야기인 것 같다. 아직도 막막한 그날의 부서짐을 이제와서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닿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손을 떨면서 가방을 챙기고 덜덜 떨리는 다리로 밤 열두시를 향해 가던 골목길을 달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로 향하던 지난 3월의 일 말이다. 잊었다. 잊혔다. 그러니 불가능하다. 서재를 5년 넘게 꾸려왔어도 100% 생각하는 바를 글로 치환시켜본 적이 없다. 이상하다. 글은 늘 머릿속과 다르다. 절반 아니면 그 이하도 표현하지 못한다. A를 말하고 싶고 당연한데도 늘 A'나 B, 어쩔 땐 전혀 상관 없는 C를 말하게 되기도 한다. 왜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제일 앞에 놓지 못하고,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고, 매순간 완곡어법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사는 속도와 들기(혹은 읽기)까지의 속도차가 매우 큰 책. 지나치게 아끼다 입지 못하고 걸어만 두는 옷. 소중할 수록 혼자만의 서랍에 넣고 뜸들이듯 묵히는 이유를 찾겠다고 결심한 건 실패할 걸 알면서도 시작하는 도전과 비슷했다. 적재적소 혹은 제때 소비 못하는 느림병에라도 걸린건지. 사랑한다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 아끼는 이유. 가장 좋았던 혹은 나빴던 장면, 순간, 느낌을 숨기는 이유. 어쩌면 알 것도 같다.
꼭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하는 말, 보고 싶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서운하다는 말 역시 빠를 때보단 늦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황홀했는데 어딘가에 꺼내길 놓친 것들 중엔.
하나만 골라보려 했는데 안된다. 전체 스토리가 거대한 산을 그리고, 만남 이전 각자의 삶과 만남 이후 운명적 사랑이 맞물려 끝까지 가야 비로소 한편의 성장과 사랑의 완성을 만나기 때문에 어떤 장면을 가져온들, 이 청춘 커플의 아기자기하고 눈물겨운 로맨스만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로맨스인듯 로맨스아닌 로맨스. 내가 궁극적으로 마침표를 찍은 건 성장.이란 단어지만 의외로 많은 재들이 별빛처럼 쏟아져내린다. 비로소 사랑, 이라거나 언제나 사랑, 혹은 사랑이 사람을 살게 한다, 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5UwBDhFf8k
https://www.youtube.com/watch?v=wR0Zq6WXpBY
손등에 떨어진 눈물을 기억하고 추억에 젖은 그녀가 서툴러서 이루지 못한 과거의 사랑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현재의 사랑을 교차시키며 아파했듯, 눈이 가려진 채 딱 한번 잡은 적 있는 손의 감촉과 느낌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챈 그녀. 사랑이 운명이라면, 서로를 알아본 순간 두사람의 우주는 감촉과 느낌과 믿음, 함께했던 시간과 함께하는 순간으로 뒤덮여버리는 게 아닐까. 그게 전부라면 세상의 모든 사랑, 불확실성을 부유하는 마음들이 더 가혹하고 가엾을 수밖에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lebCumfJU5Q
https://www.youtube.com/watch?v=_oZhPZ8RKrk
힐러가 좋아서 현실에 힐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독과 외로움으로 무장된, 세상 어디에도 저를 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소년 같은 남자. 어쨌거나 마땅한 공연을 찾고 있었고, 지창욱을 보겠다고 티켓팅을 했다. 공연 시기를 보면 타환일 때도 공연중이었는데 드라마를 하면서 공연을 한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다. 그런데 저 배우는 어느 순간 TV나 스크린이 아니라 공연장에서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본인이 공연의 매력에 푹 빠진 상태. 최근 인기로 돈독에 오른 상태가 아니라면 분명 가진 능력과 한계를 공연장에서 시험해나갈 것이다. 노래가 전부인 공연계를 어떻게 뚫을지는 모르겠으나. 매번 인기로 표를 팔고 싶을 리 없고, 표를 파는 게 목표라면 드라마를 하는 게 더 이득일테니.
막공을 향해 가는 막판 지방공연 중이지만 창작 뮤지컬이라는 메리트가 있었고, 김광석이라는 훌륭한 뮤지션의 곡을 재편곡한 곡들을 한자리에서 다시 듣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아놔, 자리가 제법 괜찮았는데도 배우 얼굴이 안 보였던 것만 빼면 모든 게 좋았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근처 대학가에서 칼국수와 파전으로 점심을 먹었고, 고속도로에서 들른 휴게소에서 마신 에스프레소는 아메리카노보다 더 연했고, 전날 괜한 짜증으로 다퉜지만 결론적으로 J는 그다지 잘못한 게 없어서 화낸 나만 머쓱했고, 비가 내려서인지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으나 대구 시내는 더럽게 정체됐다. 남는 시간은 홈플러스 구경으로, 밀러와 하이네켄을 미지근한 상태로 도착한 공연장 주차장에서 마셨다. 그날 본 풍경은 신기했다. 어린 딸과 엄마가 있었고, 부모님을 졸라 가족이 총출동한 경우와 홀로 당당하게 온 경우가 있었다. 김광석은 김광석임에도 불구하고 7080 가수, 공연은 커플끼리 다정하게, 라고 생각한 고정관념을 제대로 깨부숴준 배우 지창욱의 인기는 놀.라.웠.다. 거기다 노래가 좋다, 공연이 좋다, 는 말을 아무리 빨리 해도 지금은 늦겠지. 다음 기회에.
2.
나는 내가 당신의 삶이라는 것도 알아요, 삶의 고통이고 기쁨이죠.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거기에 대해선 그들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3.
성(性) 문학 컬렉션을 지향하는 '밤의 문학'이라는 달콤한 카테고리 에서 출간된 예문의 <나나>와 <사포>. 앞으로 어떤 문학 작품이 포함될지 기대되는 '밤의 문학'을 출범시키는 출판사의 각오는 로맨틱했다. 밤이 없다면 쉼과 가림, 숨김과 비밀의 미학을 우리가 알 수 없을 지도 모르지. 책을 펼치면 만나는 사랑과 로맨틱에 대한 찬가.
사랑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사랑이다.
-옥타비오 파스
문학 작품에는 삶과 사회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성(性)을 다룬 문학 작품 또한 성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삶과 사회를 반영합니다. 어쩌면 삶, 그리고 사회란 끊임없이 타자와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시인은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인류가 살아있는 한 에로티시즘은 모든 예술의 가장 풍요로운 원천으로 존재할 것(장 콕토)"이라고 합니다.
밤은 낮과 다르지만 어둠만은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책들은 반대자들에 의해 '밤의 작품'이라 불렸지만 대낮처럼 밝은 지성의 힘을 오늘까지 발휘하고 있습니다. 음과 양은 대립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도와주어 만물을 생성, 창조한다는 오랜 지혜와 마찬가지로 밤과 낮, 남성과 여성은 다르지만 서로를 도와 생산하고 창조합니다. 또한 밤은 "또 하나의 세계(파스칼 키냐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ZWjIXpz3CY
그냥 나는, 아직도 미완성인 사랑을 완성해보려 애쓰지만 결코 완전한 모양으로 만들지는 못할 거란 걸, 사랑이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존재하는 한, 현재 아니면 과거라는 걸, 미래 역시 현재 안에 자리하는 조각일 뿐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살고 싶은대로 살아봐. 괜찮아. 어떤 모습이라도 내가 옆에 있어줄테니까." 라는 말을 평생 들으면서 혹은 믿으면서. 그래줄 사람을 기다리면서 혹은 꿈꾸면서. 저 남자 손바닥 안에서 여자는 절대 사라지지 않겠지. 만남은 이별을 낳기도 하겠지만 함께 한 세월이 손바닥이라면, 저 남자의 사랑은 분명 손바닥 넓이 이상일 것이다. 넓은 시간, 넓은 가슴, 넓은 추억을 가진 완은 그렇게 굳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결국 싱싱과 마주본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다 알 때까지 깊이 들여다볼 때까지 사랑할 때까지 기다린다. 사랑에는 때론 미련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여러가지 의미로.
사랑에 관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섭렵하면서, 그러길 바라면서. 달라지려 애쓰면서, 사람을 믿으면서.
나는 살겠지. 오랫동안. 변함없이.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