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뜸하다가 갑자기 뭔가 쓰려고 흰 종이를 펼치면 가장 난감한 일이 할 말이 넘쳐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른다는거다. 생각해보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긴 적은 놀랍게도 거의 없다. 끄적임이 체화된 이에게 주절주절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서. 하지만 갑자기 펼친 여백이 당황스러운 와중에 시간까지 촉박하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안 쓰거나, 남기든 버리든 나만 아는 용량 안에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들을 저장하게 된다. 아마 알라딘 서재에 글쓰기가 잠정적으로 중단된 지난 몇 달 간 수십 권의 책이 그렇게 안드로메다로 갔을 걸. 언젠가 꺼내 쓸 날이 있겠지 하면서.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거나 드물다는 걸.
그렇지만 내가 쓰면서 내가 뭘 쓰는지, 쓰려는지 모르는 글이 기승전결을 갖출 가능성이 있나. 물론 여기서야 기승전결 따위 아무도 신경 안쓴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신경쓰잖아. 나는 나에게 제일 먼저 잘 보이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기다리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는 표지의 부제를 읽으면 제목에서 내용이 파악된다. 책을 결코 많이 읽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게으른 편이고 종종 산만하기도 해서 독서는 늘 그럭저럭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읽어서 좋은 건 원래 타고난 직관보다 좀 더 많은 직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아, 그들은 어떤 특정 상황에 처해 자신들이 결코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집단 강제주입 혹은 자발적 타협으로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구나. 나치 시대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니." 반면, <인류>는 제목과 표지 만으로 나치 시대의 증언이란 걸 알 방법이 없다. 이 책이 고고학인 줄 알고 소개글을 읽다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후 겪은 로베르 앙텔므의 인문학적 에세이인 걸 알았다. 초기의 나치 시대 수용소 문학으로 유명, 강제수용소 증언문학으로 꼽힌다고 한다. 수용소 문학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프리모 레비의 작품으로만 알던 책 읽는 사람에게 더 추가해야 할 작품들이 나와 반갑다.
<그들은...>은 초판이 1955년, 재판이 1966년에 나왔다. 저자 밀턴 마이어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어느 마을을 방문, 10명의 전직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 출신의 다양한 직업/지위/직책을 지닌 평범한 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대화를 나눈다. 개개인의 상황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인터뷰는 자신의 입장을 늘어놓는 방식이기에 순간순간 지루해지기도 한다. 일반의 수용소 상황과 괜찮은 문장을 읽기 원한다면 <인류>가 더 나을 것. 하지만 둘의 문학성이나 인문학적 차원에서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거짓말처럼 하나같이 자신은 명령의 체계를 떠나 자유로운 의사결정으로 가해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그래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는 식이다. 마치 새장 안의 새가 새장 안이 세상 전부라 믿는 것처럼. 게다가 그들의 침묵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 직접적 가해자와 간접적 가해자, 명령과 묵인, 방조. 이들 중 무엇이 더 나쁘다 말할 수 있는가. 가해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나 자발적으로 가담했든 비자발적으로 가담했든 가담했다는 사실엔 차이가 없는데 그건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는가.
이 책들은 결국 <생존자>, <히틀러의 철학자들>, <어느 독일인 이야기>,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와도 만난다.
원래 인간은 자기에게 닥친 불행이 제일 끔찍하다고 믿는다. 왜 유독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라고 믿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가장 비루한 방법인 듯 보이지만 때로 자신이 겪은 일보다 더 심한 일을 겪은 사람을 보며 스스로 위안하고 거짓말처럼 치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닥친 슬픔의 강도가 다르듯 불행과 아픔의 차이 역시 천차만별이다. 어느 수용소가 가장 심했고 끔찍했고 참담했다는 얘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져있지만 자기 삶 구할 길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가장 처참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위의 책들이 다루는 개별 수용소, 개별 삶, 개별 경험에 본격 차등이 있더라도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털어놓을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째서 저자와 출판사만 달라져 출간되는 매번 비슷한 나치 수용소에서의 엇비슷한 경험을 읽어야 하는가 물으면, 나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늘 같은 카테고리의 책들에 관심이 가고 매번 꼭 읽게되더라는 결과론적 의미밖에는 얘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약 70년 전에 벌어졌고, 그때나 지금이나 작게든 크게든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이런 세상에 내가 산다고. 사는 일이 힘들다는 자각조차 못하며 그럭저럭 산다고.
<인류>도 다른 저작들과 다르지 않다. 써내려간 방식, 입장, 상황이 다르긴 해도 결국 나치 시대의 강제 수용소를 바라보거나 체험한 데서 시작된 증언이다. 1947년 출간되었고, 저자 로베르 앙텔므 역시 20대에 겪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순간을 없던 일로 하지 못해 세상에 내놓는다. <인류>가 끔찍한 시간을 대상으로 회고처럼 씌어진 글이라고 볼 때, 문장과 단어 사용이 굉장히 서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려는 용기만큼 가상한 일이 없다. 감각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상황이 더 좋을 수록 혹은 더 나쁠 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배고픔을 '배고프다'는 말 대신, 두려움을 '두렵다'는 말 대신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우린 나치의 오롯한 피해자들이 겪고 본 일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존엄과 자유의 박탈을 통해 밝히는 죽음에 대한 공포, 수치, 치욕은 결국 인간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인류라는 단어로 만난다. 그는 필요 이상의 인류 단일화를 문제 삼고, 등급화, 차별, 예속, 착취를 고발하려 했다. 인류의 다양한 모습을 들춰내는 한편, 이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인류라는 말도 보탠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제는 피해자였다가 오늘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상황들에 비추어 보면. 모르는 것, 몰라도 되는 것, 몰라야 하는 것조차 각각의 책임이 따른다. 하물며 본성을 기반으로 자유에 의해 가해를 선택한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오래 전에는 목숨을 담보로 가해를 강요 당하는 2차 가해자들을 덮어놓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만 여겼다.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방아쇠를 당기도록 훈련시키는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의 말을 따르는 소년병,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순사보다 더 같은 민족을 탄압한 일본 앞잡이, 살아남기 위해 나치당의 편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그에 동조하거나 또는 끔찍한 행위가 잘못됐다고 여기면서도 묵살하는 평범한 사람들. 자기가 저지른 만큼의 비난과 처벌을 받으면 될 일이다. 죄가 없거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가 행한 만큼의 벌을 받고 사죄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모든 수용소 문학은 있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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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이 없었다면(이조차 꼬박꼬박 기록한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기록한 리스트와 코멘트(생각나는대로 엉망진창 두서없음)가 없었다면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은커녕 목록조차 기억하지 못했을거다. 엄마는 내가 가져다준 <궁극의 아이>를 읽고 계신데, 집에 책이 두 권이라 다시 읽으려다 예전에 '모두 기억하는' 엘리스를 몹시 부러워했던 게 떠올랐다. 기억과 경험이 결국 생의 힘이라고, 인간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차곡차곡 기억하며 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위 책들을 써놓고 좋았던 소설에 대해서 써야지 했는데 다시 머릿속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다. 자주 무슨 생각 하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데, 실은 별 생각없이 살고 있는지도. 생각이 많으면 삶이 복잡해지는 법이니 이게 더 낫다. 적어도 지금 나한테는. 그렇다고 생각 없이 살자는 얘기는 아닌데ㅡ 요즘은 그런 사람도 참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