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놀라지 않는다
새가 실수로 하늘의 푸른 살을 찢고 들어간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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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놀라지 않는다
모든 나무가 지구라는 둥근 과녁을 향해 날아든 신의 화살이었다 해도
우리가 과녁의 뚫린 구멍이라고 해도,
뽑힌 나무라 해도
나무는 자신의 절반을 땅 속에
묻고 있으므로,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밤을 견디는 것처럼*
<절반만 말해진 거짓>, 신용목
자유가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은 권태에 시달리고, 억압을 체험한 사람은 자유를 갈구한다. 우리는 대체로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가졌거나 가지고 싶은 것보다 우선하여 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의 처음은 가려진 절반을 찾기 위한 밤이었다. 어떤 걸 말하고 싶고 어떤 걸 말하기 싫은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하기 싫은지. 왜 좋아하는 건 싫어지고 싫은 건 좋아지지 않는지, 왜 내 소유가 분명한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결심은 허물어지는지, 자주 허무와 무기력에 시달리는지, 어째서 가끔 슬픈지, 어째서 종종 아픈지, 왜 만사가 아무것도 아닌 듯 여겨지는지.
새가 실수로 하늘의 살을 찢는 광경과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넣어 내 목을 조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안나 제거스의 『통과비자』에 들고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떠올렸다. 동시에 수많은 삶을 사는 듯 보이던 어떤 사람이 실은 단 한 명이었는지도. 다소 환각 같은 몽롱한 꿈 안에서 이 소설을 조용히 읽었다. 이 불명확하고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모래처럼 서걱이는 소설에는 실은 금지된 소망 즉, 경계를 넘어서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의 사연이 서려 있다. 실제로 넘고 싶은 건 국경(이곳)이지만 저곳이 이곳과 다르리라는 확신은 없고 단지 믿음 뿐이다. 비자를 얻고 통과하는 것의 의미는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천국과 지옥, 육신과 영혼, 사랑과 증오, 바다와 섬 만큼 먼 거리를 오가는 의미다. 하나를 지나치고 다른 것을 맞겠다는 의지,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얻겠다는 집념, 허락되지 않은 곳으로 기어이 가겠다는 눈물겨운 결심, 거절과 모욕을 기회로 삼겠다는 꿈. 선 하나를 넘으려 한숨, 눈물, 두려움, 외로움, 아픔, 불행은 물론, 죽음마저 감수해야 했으니 이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계를 떠나 저 세계로 가는 통과비자를 얻기 위해 현재를 북받치게 거머쥔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나치 시대 독일 망명문학은 토마스 만, 레마르크, 브로흐, 츠바이크, 안네 프랑크의 삶과 작품에서 엿보거나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온 걸로 치면 후발주자에 해당할 제거스의 작품은 굴복과 패배를 마다하지 않는 민중, 자유를 향한 절절한 갈망을 주제로 하는 노골적 반파시즘 경향을 보인다. 그것도 굉장히 밀도 높은 서정과 묘사, 아름다운 문체로. 저항을 말할 때 필사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 투사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괜찮다. 일제강점기의 1920년대 카프 문학가들은 막막한 시대를 자기연민과 연약한 감성으로 극복하려는 낭만주의 문학을 회피라며 비판했는데, 시대 상황 안에서 예술이나 예술가가 취하는 방식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에서는 취할 게 없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초월을 궁극으로 하고 질문을 구할 뿐 정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향과 기질, 신뢰와 극복의 문제로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오해하거나 매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거스는 회피도 직시도 아니라는 점에서 두 경향을 올바르게 융합시킬 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전체적으로 묘한 울림과 아름다움이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완성되고 세월의 무상과 시대의 전환을 체험하는 동시에, 뜻모를 아련함과 미련이 느껴지기도 한다. 첩보전과 연애전이 동시에 진행되지만 궁극적으로 회한에 닿는다. 어느 정도 『속죄』나 『체실비치에서』가 주는 소재나 감정과 닿아 있다. 1990년도에 출간됐으니 횟수로 25년이나 지난 작품을 이제 만나는 셈이고, 앞 두 작품이 2000년대에 나온 걸 감안하면 『이노센트』는 이 작품들을 쓰기 위한 전조전, 나아가 여러가지 시도였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매큐언의 긴 호흡과 우아하고 탄탄한 문장은 쭉 유지되어 왔고, 미스터리는 한층 치밀해졌으며, 심리전은 더 깊어지고 내면묘사는 더 탁월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애증과 회한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작가다. 사랑이 증오와, 순수와 타락이, 선과 악이, 삶과 죽음이 뒤엉키는 광경이 놀랍다.
갑작스럽고 원통치 않은 이별이나 죽음이 있을 리가 없다. 영원한 이별이라는 명제 자체가 납득과 수긍이 안 되는 일임을, 여러 번, 더 많이 겪는다고 괜찮아지는 종류의 현상이 아닌 것을 모르지 않는다. 설령 우리가 헤어져야 할 때가 몇날 몇시 몇분 몇초인지 알고 있었대도 후회와 미련이 남은 자에게 제대로된 작별인사란 건 허상에 불과하다. 안녕,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괜찮아, 같은 말들을 몇 번 더 한다고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라지고 나면 왜 그딴 것들이 그렇게 아프고 서러워지는 걸까. 다시 생각해도 짧은 인생에 수긍 가능한 작별이란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사라진 것들과 제대로 작별하라는 소설이 있다. 솔직한 기분과 마음을 제때 전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일상을 통째 흔든다. 작품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시시했지만, 자신이 본 사실을 잊지 못해 평생 진실에 몸서리치며 살던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잊혀진다 생각할 뿐 아무것도 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훑고 지나간다. 벽장 안 검은 고양이는 시멘트로 묻어버리고 귀를 막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에드거 앨런 포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늘 과거와 미래에서 빌려온 인생을 사는 듯 아슬아슬한 현재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만 빛을 내는 진실이 더 늦기 전에 사라진 것들과 인사하라고 말한다.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잘 하는 사람을 볼 때 더욱 강해진다.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알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알 때 더 강해지지만 모를 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들을 만나게 됐나 보다. 잘 쓴 영화 이야기를 읽고 예술의 시대를 평정한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또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알기 위해.
『예술가의 지도』에는 이젠 익숙한 일곱 명의 여성 예술가의 삶이 담겨있다. 작품과 사랑, 만남과 헤어짐은 물론 일상과 죽음마저 허무는 해부는 동시대 수많은 예술가들과 함께 영화 그 자체로 그려진다. 멀고 깊고 오래된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또 복잡해서 다 잇기가 어려울 지경, 거트루드 스타인, 쉬잔 발라동, 이사도라 던컨, 루 살로메, 알마 말러, 조르주 상드, 베티나 폰 아르님의 일대기를 알면 19-20세기 유럽과 예술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감과 소통, 우정과 사랑, 미움과 질투, 증오와 애증이 곧 영감의 원천이고 예술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마법처럼 책이 덮인다.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시공간으로 예술여행을 떠났다 돌아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은 실린 서사적 평론들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미 읽은 글이 많지만 차분히 다시 읽는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영화라는 장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끄적이긴 하지만 영화 리뷰를 서사나 장치 외적인-이를테면 배우나 배경-것들로만 쓰는 게 무익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이상의 장치나 기법에 대해 분석하는 법을 모르니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문학(소설)을 대하는 자세와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면 더 많은 게 보이지 않을까 욕심이 생긴다.
한밤중에 네 식구가 탄 차가 길을 잘못 타서 삼랑진 고개를 넘어가던 어릴 때를 가장 두려운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상은 아픔, 배신, 이별, 죽음 같은 순간들이 더 괴로웠으나 이 경험은 세상이 종말을 맞을 때처럼 생명체가 전멸하고 나만 살아남은 종류의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거리와 시간과 속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렸고 산 위에서 내려다본 땅은 너무나 까마득했으니까. 주유를 알리는 빨간불이 들어온 지 오래, 도움 줄 지나는 차가 앞뒤로 한 대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하고 불완전한 상황에서, 부옇게 서린 안개로 뒤덮인 희미한 산 위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다. 처음에는 만만했다. 심상찮은 소년과 소년을 둘러싼 시대와 사건과 공기와 추억담과 진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쓴 이야기라는 『소년이 온다』가 여느 소설들처럼 급히 왔다 떠나갈 썰물같을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억울하게 소중한 이들을 떠날 수밖에 없던 그들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돌 때 이게 내게 내려진 형벌이구나 싶었다. 산 위에서 귀신이나 괴물이 나타날까 두려웠던 그 순간, 아빠가 귀신이나 짐승보다 사람이 나타나는 게 더 무서울 거란 말이 위로가 되었던가. 여전히 무서웠으니 그 말이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소년이 오는 건 전혀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을 만큼 컸는데 소년은 내게 오는 길을 모른다. 소년이 내게 오지 않을 거란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작가는 자주 이야기가 왔기에 그 이야기를 받아쓰기만 하면 됐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강 작가에게는 계속 소년이 찾아오고 또 왔던 게 아닐까. 그녀에게는 오고 내게는 오지 않는 어떤 소년이 있다. 소년이 아는 진실을 우리는 모르고, 우리가 모르고 싶어하는 것을 소년이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밖에 없다. 어딘가에 소년을 닮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지만 내 비겁과 폭소와 무력과 무능이 들킬까봐 괴롭다. 그날 이후 소년은 가끔 나를 왔다 가고 나는 매일 소년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기 전과 후로 세상을 나눈다면 예로 들 수 있을 경험이다.
또다른 시를 읽는다. 여자의 오롯한 생이 몇 줄 안에 있다. 긴 세월, 광활한 시공간이 파노라마처럼 촤르르 펼쳐져 인생을 아는 그녀와 모르는 나 아니, 다 살아버린 그녀와 덜 살아낸 나 사이에 파티션을 쌓는다. 31일이 1일과는 전혀 다른 날인 것처럼, 매월 마지막 날이 되면 비로소 페이퍼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제와 다른 오늘을 예상할 수 없고 들키지 않고 금기를 깨버려도 괜찮을 비밀스런 파티션을.
몸의 절반이 봄으로 건너가지 못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왼쪽은 가로등을 꺼버린 골목길이다 모세혈관마저 캄캄하게 돌아 나오는 길을 잊었으므로 그곳엔 지금 처음 남자에게 안겼을 때의 체온과 첫 입술이 서성이고 있다 심장도 쿵쾅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누군가 왼쪽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끊어버렸으므로 그곳엔 녹지 않는 눈과 시어머니, 남편 딸들이 나란히 눕던 단칸방이 있다 선산으로 시댁으로 떠나보낸 상여와 가마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고 있다 그녀의 오른쪽은 예순세 번째 봄이지만 왼편은 먼저 간 남편에게 세를 내준 것 같다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다 아니 왼쪽이 먼저 가서 함께 누운 것 같다 절반은 잔설이고 절반은 새 잎인 연옥의 하루, 오른쪽 절반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왼쪽이어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우익이다 지난 번 다녀간 딸이 해준 눈썹 문신만 사철 푸르다 이제 아이라인도 그릴 필요 없어, 딸 덕분에 왼쪽 절반에도 자랑처럼 무성하게 돋아난 그런 풀이다
<환절기>, 권혁웅
궁금하다. 절반은 어디 있고 또 절반은 어디 있는지. 남은 절반이 거짓이라면 숨겨진 절반이 진실이 맞는지. 처음은 어디고 끝은 또 어딘지. 그리움과 후련함 뒤엔 뭐가 있는지. 나무와 여자와 사랑과 불안은 뒤에 무엇을 숨기는지. 세상은 궁금한 것 투성이고, 나는 이 불확실한 성을 손 잡고 통과할 것들이 필요하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소설이든 이야기든 그림이든 기쁨이든 감동이든 슬픔이든 간절함이든 미련이든 매혹이든. 예쁜 옷이든 돈이든 나무든 꽃이든 멍멍이든 순대국이든 바다든 하늘이든 별이든 빛이든 순수든 일탈이든 그 무엇도 아니라면 어쩌면 일상의 유니크함이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슬프고 무서운 일이 일어날까 두려운 지금은 새로 시작할 책이 제발트의 첫 소설이라는 것만이 커다란 위안이다. 몇 개 덧붙이자면 금요일이고, 차가 생겼고, 고속도로를 달려 휴게소 핫바와 어묵을 먹은 뒤 백사장에서 별과 야경을 보고 파도소리를 들을 예정이라는 것, 집에 돌아와 떡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매운 떡볶이와 맥주를 마실 예정인 것. 이불 속에 우리 둘 뿐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