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의 지혜 -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마음의 힘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진우기 옮김 / 김영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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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드넓고 고요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허공처럼 걸림 없고 지극히 고요한 그곳을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길을 헤맨다.

존재의 심연에 있는 나의 자아는 고요함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나 형상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나의 실체'이다.  -p.13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저자가 쓴 두 번째 책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가 산문적이고, 설명적이라면 이 책은 시적이다. 의심이 없고, 마음이 맑은 사람이야 시를 읽어도 전율하겠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고요함이 뭐야? 자아라고? 더 깊은 차원이라니? 라는 글자를 따라 다니는 의문에서 어떻게 하면 고요함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궁금해질 수도 있으리라. 이런 물음표들을 조금 적게 하려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먼저 읽기를 권한다. 생각과 의심이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뤄진 책이고, 구체적인 방법 역시 제시되어 있다. 사람마다 그 방법이 구체적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책을 읽고나면 이 책이 훨씬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 글의 나는 "물 위에 번지다가 사라지는 파문처럼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p.37)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제외한 과거와 미래, 생각과 염려는 내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들일 뿐이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저자가 말하는 고요와 나의 실체는 과거와 미래로 가득찬 생각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하는 순간, 사라진다.

작은 언니가 사라진 지 일년이 훨씬 지났지만 슬픔이 흥건했다. 그렇다고 우울한 건 아니었다. 그저 슬펐다. 허전하고 슬픈 것, 하루에 그저 잠깐 동안이지만 매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어느날, 몸살이 나서 누워 있었다. 혼자 아파 누워 있는데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는 것이 인식되었다. 어, 슬픔들은 다 어디로 갔지? 하고 고개를 들었다. 구름처럼 몰려다니던 슬픔들이 나를 비껴갔다. 구름처럼 몰려다니는...이 표현은 기형도의 어느 시에서 인용해서 생각들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했었다. 슬픔은 그렇지 않은 줄 알았다. 내 몸 어디에서 꼬물거리며 차올라오는 줄 알았다. 심장을 짜서 즙을 내듯 가슴이 아프다가 눈물이 쏟아지는 줄 알았다. 그것들이 이렇게 밖에서 몰려다니다니...그렇게 왜 슬픔이 오지 않나 쳐다 보고 있으니 슬픔이 내게서 가 버렸다. 이 책에 비슷한 구절이 있다.

나는 '권태로운 사람'이 나의 본모습이 아님을 알게 된다. 권태는 다만 나의 내부 에너지가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슬픈 사람은 내가 아니다. 두려운 사람은 내가 아니다. 권태.분노.슬픔.공포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지표이며, 늘 가고 오는 것이다. 가고 오는 것은 그 무엇도 내가 아니다. -p.29

자각만으로도 충분하다. 왜 이런 자각이 어려웠던 것일까? 악착같이 에고가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고의 특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만 에고는 문제를 일으킨다. 쟤는 나보다 키가 커, 그래서 속상해, 키를 키워야 겠어...키라는 문제를 일으킨다. 에고가 나타나서 쫑알거리지만 않으면 문제될 게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내가 몸이 약하다'를 에고는 '몸이 약한 나'로 바꿔 놓는다. 겉으로는 몸이 약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개선시키려고 하지만 실상은 몸이 약하다는 사실이 나의 일부이므로 이것을 놓칠 수 없게 한다. 이걸 놓치면 나를 잃게 되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에고는 이렇게 단정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딱딱하다. 선방에서조차 저 사람보다 방석에 더 오래 앉아 있어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고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고만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행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을 그대로 두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p.75

에고...늘 고요 속에 있는 것은 아닌데도 붙잡고 있던 허깨비의 실체를 본 탓일까,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이 편안한 것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고요함 속에는 이렇게 기쁨이 넘실거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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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9-1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것보다는 때로는 듬성듬성 뛰어넘는 글들이 와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공백을 내 마음으로 내면적으로 넘는 과정을 만들어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언어적 인플레와 거품을 걷어내면
고요함과 이 순간 등등의 단어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모르는 그 마음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 고요함 그 자체가 된다는 말이 고요함의 표현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말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러하듯...
내적인 과정이 글을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두 껍데기일 뿐이겠지요..
말과 글의 인플레에 익숙해진 제가 이 책이 주는 생략에 조금 마음을 더 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혜덕화 2006-09-15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때로 온 세상이 고요함을 온 몸으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삼천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이거나, 혹은 장을 봐오는 저녁 시간 쯤에 거리의 소음과는 전현 상관없이 느껴지는 고요함. 그 틈에서 찰나적이지만 존재의 고요함을 느낍니다. <틈>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아주 짧은 순간들, 1초도 되지않는 그 고요가 사실은 몇년, 몇십년의 분주함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진리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벌써 1년이 되었군요. 아마 이 세상 어딘가에서 다른 몸 받아 유복하게 건강하게 살고 있겠죠?^^

이누아 2006-09-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혜덕화님, 그 틈이 제게는 늘 서늘했었는데 요즘은 평온하게 느껴져요.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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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x자가 들어간 걸 보면 추리소설인가? 무슨 종류의 소설인지 모르지만 내가 읽는 속도로 봐선 추리소설이다. 32편의 마이리뷰가 있다. 이달에 나온 책인데 인기가 좋은 책인가 보다. 리뷰를 안 쓰려다가 달팽이님이 어느 댓글에 적은 불협화음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한 여자가 있다. 전남편이 괴롭힌다. 전남편을 죽인다. 옆집 남자가 나타나 살인사건을 은폐해 준다. 옆집 남자(수학 선생)와 그 친구(물리 교수)의 두뇌싸움 같은 인상을 주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아마 그 장면들이 이 책의 재미이리라. 그러나 나는 한 여자와 옆집 남자 이야기만 하련다.  

옆집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라도, 공범이 되어서라도, 아니 그 이상이 되어서라도 그 여자를 보호하고 싶다. 그 여자도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것 같다. 기분이 좋다. 무언가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여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러나 그 여자는 생각한다. 저 남자는 나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를 도왔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싫어할 것이다.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나는 남자를 만나면 안 되는 건 아닌가? 그건 전남편에서 옆집 남자로, 사람만 달라졌지 구속은 똑같다. 고맙기는 하지만 옆집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이 사건으로 나를 구속할까 두렵다.

이런 옆집 남자의 마음과 모든 의도를 간파한 물리학자 친구는 왜 친구의 의도대로 모른 척 해주지 못했을까? 그 여자에게 옆집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마지막에 그를 찾아간 것은 옆집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너무 큰 빚이었기 때문이다. 애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 빚을 지고도 살아가려 했으나 딸이 먼저 무거워 쓰러지려고 해서 하는수없이 간 것이다.

한 인간의 사랑-그것이 어떤 류의 것이든-이 다른 인간에게 가 닿았을 때 허무하게 부서지는 걸 보는 것 같다. 그 여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남자가 과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관계는 바짝 조아서 소리가 지나치게 긴장되어 있는 악기 같다. 조금만 잘못 연주하면 줄이 탱-하고 끊어질 것만 같은.

이들이 어떻게 해야 좋은 화음을 내겠는가 하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불협화음이란 단어가 이 글을 읽힌 후 꽂혀서 그 두 사람을 클로즈업해 주었을 뿐이다. 쓰고나니 이 책의 리뷰로 어울리지 않는 글이다. 언제 어울리는 글만 썼던가. 오랜만에 읽는 추리소설이었다. 조금 재미있고, 조금 씁쓸하고, 조금 황당했다. 그리고 나는 옆집 남자가 어떻게 사건을 은폐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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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3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뻔한 트릭이었죠. 원래 짝사랑이 그런 거지 싶네요. 사실 전 물리학자가 불협화음이었어요 ㅡㅡ;;;

이누아 2006-08-3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기 전에 물만두님의 리뷰를 찾아 읽었어요. 물리학자가 없었으면 글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등장인물 중 가장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면에서는 정말 물리학자가 불협화음인 셈이네요. 너무 뻔했다구요? 저처럼 추리소설을 20년만에 읽는 사람에겐 뻔할 뻔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라
제임스 멀홀랜드 지음, 강주헌 옮김 / 엔크리스토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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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목사님이 달러에는 "We trust God"라는 말이 적혀 있어서 세계적으로 힘 있는 화폐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의 10원 짜리에는 다보탑이 있어서 떨어뜨려도 줍지 않는 돈이 되었다고 하시는 말을 들었다. 목사님은 우리 나라 돈에도 저런 구절을 넣어야 한다고도 하셨다. 농담이시겠지, 그러나 방송될 줄 알고 있는 연설에서 하시기엔 좀...이라고 생각했다. 그 목사님은 내 몸이 좋지 않을 때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라 고 하신 분이셨다. 그 때문에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으므로 그 목사님의 말씀을 유심히 듣게 되었다. 듣다 보니 정말 그랬다.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기도하라고 하신다. 심지어 목사님의 머리가 자꾸 빠지는 듯해서 하나님께 머리 좀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도 기도하셨다고 한다. 친구가 아는 할머니는 손자 키가 180을 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신다고 하더니... 닮았다.

 

빚에 시달리는 가난한 여인이 우리 나라 초대형 교회에 질문을 했다. 제가 이 지경인데 십일조를 해야만 합니까? 빚만이라도 좀 청산되고나서 하면 안 될까요? 교회의 대답은 대충 이랬다. 환난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사는 것이 더 복되다, 어려운 가운데 십일조를 내서 성공한 사람의 책이 있다, 그 책 제목은 이러하니 읽어봐라, 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질문에 한 신부님이 하느님은 물질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성의껏 하시고 오히려 마음을 다해 주님과 교통하십시오, 하는 대답을 들은 적도 있다. 어떤 대답이 옳은 것인지 모르지만 주님과 교통하면서 스스로 응답받으라는 그 대답이 진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복에 복을 더해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비판하면서 예수가 직접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어떤 복을 말하는가? 기독교 방송을 보고 있으면 그 복이 무슨 복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믿음 좋은 사람의 끝은 물질적인 부와 세상의 명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기독교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왜 물질적으로 봤을 때 세상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큰 교회와 많은 축복을 손을 내밀어 바라게 되었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축복의 근거는 거의 모두 구약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전에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데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무척 다르게 느껴졌다. 구약의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더 많은 부와 자손들, 물리적인 땅, 전쟁에서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의 축복은 그저 내 기쁨이 넘쳐 너희에게 주거나 서로 사랑하라거나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네가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나를 따르라고까지 했다. 내 이해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야베스처럼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기도하라고 한다.

 

그런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결국 기도의 핵심은 나와 탐욕을 버리라는 것에 귀결된다. 에고는 기도할 때조차 내가 기도한다,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헌금한다, 내가, 내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니 더 내놓아라, 이런 기도는 귀먹은 기도다. 소리칠 뿐이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기도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은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0-21)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는 것이다.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에 가득찬 샘솟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먼저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뜻을 나눔으로 보고 있다. 평등으로 보고 있다. 탐욕을 버리고 나누어라,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용서하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수의 기도를 마쳤을 때 하는 아멘 이라는 말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누겠습니다, 용서하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말고요, 하는 다짐이라고 한다. 기도는 얼마나 간편한가, 방에 가만히 앉아 중얼거린다. 그러나 아멘 이라고 하는 순간 방문이 열린다. 나가서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 기도가 성취된다.

 

더 갖고 싶다, 더 좋은 평판을 얻고 싶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 건강해지고 싶다...이런 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하고 있는 것들이다. 아플 때, 굶주릴 때 그냥 나온다. 그런데 아프지도 않고 굶주리지 않아도 자꾸만 하는 기도들..오히려 찰싹 달라붙은 이런 것들을 좀 떼놓고 싶지 않은가. 마음대로 안 되어서 그렇지. 마음대로 안 되니 기도하고 수행하는 게 아닐까. 암벽등반을 한 적이 있다. 바위 틈의 홈을 보면 저기에 발을 넣으면 안전할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깊숙이 넣으면 이상하게 온 몸이 그 틈 속으로 들어가서 곤란한 지경을 맞게 된다. 암벽과 몸은 밀착되면 안 된다. 손과 발만 닿으면 된다. 험난한 세상, 탐욕 없이 어찌 살겠나 싶지만 그 욕심에 밀착하면 밀착할수록 어쩔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온몸을 암벽에 착 달라붙게 해봐야 한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절벽에 매달려만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되듯. 암벽등반은 위험하다. 그래서 익힌다. 몸에 익힌다. 마음에 익혀야 할 것이 무엇인지 탐욕을 향한 기도를 통해 본다.  

감명 깊게 읽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고, 여기에 대해 이렇게 할 말이 많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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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8-3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종교의 기도가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외부의 신이나 복에 의지하는 것은 그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오직 기도 뿐이어야 하고...
밥먹을 때는 오직 먹을 뿐이어야 하고...
시련에 대해서는 오직 그 시련이 나에게 어떻게 와서 가는지를 지켜보아야 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했는가?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으로 온통 자신을 비워냈을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가 나를 우주의 지휘자와 연결해줄 것이겠지요..

이누아 2006-08-3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우주의 지휘자와 연결되는 날, 그 지휘를 따라 연주나 노래를 하시겠지요. 잊지 말고 제게도 노래를 불러 주세요. 히,

글샘 2007-01-27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는 기도할 때조차 내가 기도한다,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헌금한다, 내가, 내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니 더 내놓아라, 이런 기도는 귀먹은 기도다. 소리칠 뿐이다.
기복은 수행은 안 될 거란 생각을 합니다. 귀먹은 기도가 아닌, 혜안을 가진 기도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해야겠지요. 성경이든, 금강경이든 뗏목을 부여안고...
잘 읽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노혜숙 외 옮김 / 양문 / 2002년 12월
구판절판


당신은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단어 사이의 공백, 문장 사이의 무언의 틈새를 의식하십시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내면은 점차 고요해질 것입니다. 내면이 고요하지 않으면 침묵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밖에는 침묵이 흐르고 안에는 고요함이 자리잡으면 당신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212쪽

당신은 자신이 고통에 애착을 갖고 있으며 지금껏 그래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고통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256쪽

당신이 혼자 있을 때 편안하지 못하다면, 그러한 불안을 감싸줄 수 있는 어떤 관계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 속에서 불안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며, 이제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할 것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가 편안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264쪽

기쁨이란 아무런 원인 없이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쁨은 내적 평화의 정수로써, 신의 평화라고 불려왔습니다. 기쁨이야말로 당신 본연의 상태이며, 당신이 애써 수고하거나 고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281쪽

평화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상태가 아닌 다른 상태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291쪽

반응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나는 이 모든 유치한 무의식을 초월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말로만 "좋아요, 당신이 옳아요"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저항의 자리에 에고의 우월감을 대신 앉힌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갑작스럽게 매우 밝고 선명하고 깊은 평화를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내맡김의 상태에 있다는 명백한 신호입니다.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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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8-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의 '고요함의 지혜'도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랫만에 이누아님의 댓글을 접하니 이 밤 마음이 환해집니다.
_()_

이누아 2006-08-2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님에게 졸라서 추천받은 "예수님처럼 기도해라"가 책상에 놓여 있습니다. 보물을 손에 넣은 것처럼 뿌듯해서 책을 쓰다듬어 봅니다. 이제 막 책을 펼쳤습니다. "고요함의 지혜"도 만날 친구 명단에 올려야 겠어요. 고맙습니다.

혜덕화 2006-08-3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처님께서 목이 마르다고 하셔서 아난이 시냇가에 물을 떠오려고 갔다. 하지만 방금 마차가 지나가서 흙탕물이었다. 아난은 그냥 돌아와서 물이 너무 더러워 먹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가보라고 하셨다. 아난은 "제가 물을 좀 맑게 해서 떠오려고 손으로 찌꺼기와 흙을 가라앉히려 하는데도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시 가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라고 했지만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다시 가서 그 물을 떠오라고 하셨다. 아난이 다시 가 보니 시간이 지나서인지 물이 다시 맑아져서 물을 떠 왔다.

가끔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렇게 흙탕물처럼 그냥 두면 저절로 맑아지고 가라앉을 일을 가지고 물을 맑게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오히려 물을 더 흐려놓는 일을. 꼭 큰 일, 사회적인 이슈를 가진 일이 아닐지라도 일상 생활에서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물을 맑히려고 손을 넣어 휘 젓는 아난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쁨도 그렇겠지요. 어느 한 상태에 집착하거나 휘둘리지 않으면, 그 속에 기쁨과 고요함은 항상 있는 것을, 우리는 아난처럼 성급한 조바심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휘저어 놓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_()_


이누아 2006-08-3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습니다. 새겨 들을께요. 고맙습니다, 혜덕화님.

낯선바람 2006-11-1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쁨이야말로 우리 본연의 상태'라는 제목이 끌려서 읽어봤습니다. 덕분에 좋은 말 보고 갑니다^^ 아! 기쁘다 ㅎㅎ

이누아 2006-11-1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노혜숙 외 옮김 / 양문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라. 그러나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과거와 미래, 심지어 현재라고 믿는 시간의 개입마저 배제한다면 찰나 혹은 순간,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은 덜 굴곡된다.

에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더니 오빠가 이 책을 권해준다. 아마존 베스트셀레 5위, 많은 사람들이 읽었구나. 그러나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간간이 읽기를 멈추라는 표시가 나온다. 생각하지 말라면서 멈추란다. 멈춰서 생각하지 말고, 몸 안으로, 내면의 몸으로 들어가란다. 그렇게 멈추어진 순간들로 책은 더디더디 읽힌다. 더디 읽힌 탓일까. 과거를 생각하지 말라지만 이 책을 읽다 문득 호흡하는 사이, 죽음과 고통, 후회와 염려, 병과 자책...이런 날들의 어리석음이 비에 씻기듯 씻긴다. 저항도 없이 읽혀진다.  

누군들 깨달음에 관한 책을 쓰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이 책의 내용은 내 삶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는다. 질문들은 내 질문들이다. 내 질문에 오는 대답들은 온통 참선 이야기로 변화된다. 그래도 걸림이 없다. 아, 이것이었구나 하는 탄성이 매번 튀어나온다. 에고에 관한 책이다. 에고의 특성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다고, 순간에 살면 에고도 사라진다고. 어떻게 하면 순간에 머무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일종의 명상법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저 일상이다. 일상을 벗어난 그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는가. 과거와 미래에 가 사는 낡은 습관을 순간에 현존하는 습관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과거의 고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미래의 염려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앓고 있는 병..특별한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 순간을 살아라. 평화롭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순간을 삶으로써 얻는 것, 그것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삶이며, 평화롭게 사는 삶이다.

우리는 지금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나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느낄 때, 당신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평화롭게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슬프고 눈물이 나겠지만 저항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그 슬픔 아래서 깊은 평화와 고요, 그리고 신성한 현존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발산이고 내면의 평화이며 대립이 없는 선입니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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